롯데 자이언츠의 우승 기억이 점점 가물가물해진다.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정상에 올랐던 것이 지난 92년이니 올해로 꼭 11년이 지났다. 95, 99년 두차례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우승과는 비교할 수 없다.
최근 MBC ESPN 전파를 타고 옛 경기들이 야구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롯데의 두차례 우승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최동원 유두열(84년)과 염종석(92년)으로 기억되는 우승 주역외에 빛나는 조연을 다시 한번 조명해본다.
▲1984년=우승주역은 두말할 필요없이 당대 최고의 투수 최동원이었다. 최동원은 전기리그에서 9승을 따낸 데 이어 후기리그에서 주로 구원투수로 등판, 총 50게임중 무려 31게임에 마운드에 올라 18승5세이브(6패)를 따냈다.
최동원은 롯데가 후기에서 거둔 29승 중 23승(79%)을 홀로 지켜내며 팀을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켰다. 한국시리즈에서도 혼자 4승을 따내 두말할 필요없는 롯데 우승의 일등 주역이었다.
그러나 야구는 단체경기. 최동원이 외로운 투구를 벌이는동안 임호균, 안창완 등 동료투수들도 최동원의 어깨를 덜었고 막강 타선과 탄탄한 수비도 팀 승리를 거들었다. 84년 롯데 팀 타율은 0.257로 6개 구단 중 2위, 홈런 71개로 3위, 도루 108개로 2위에 오르는 등 현재와 달리 대포군단격이었다.
중심타선에 포진한 홍문종은 정규리그 마지막 삼성전에서 무려 9연속 고의사구라는 집중적인 견제속에 0.339로 시즌을 마감, 이만수(0.340)에 1리 차이로 타격왕을 내주는 불운을 겪었지만 122개로 최다안타 1위에 오르는 방망이 솜씨를 뽐냈다.
또 김용철은 0.327로 타격 3위에 올랐고 21개의 홈런으로 팀 타선을 이끌었고 그해 올스타전 MVP 김용희도 중심타선에 포진했다. 또 비운의 거포 박용성도 해결사 노릇을 했다. 여기에 포수 심재원 한문연, 내야수 정영기 박영태 이광길, 외야수 김재성 조성옥 김한조 등 쟁쟁한 선수들이 그물망을 짰다.
롯데는 최동원이 사상 첫 한국시리즈 첫 완봉승을 기록한 1차전에서 2회 박용성이 삼성 선발 김시진에게 시리즈 운명을 가르는 좌월 투런 홈런을 뽑아내 승기를 잡았다. 김시진은 이 한방을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2차전을 내줬던 롯데는 3차전에서 9회말 정영기의 끝내기 안타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83년 MBC에서 이적한 정영기는 유격수 수비쪽에서 인정받았지만 찬스에 강한 타자로도 정평이 났다. 정영기는 2-2로 팽팽하던 9회말 박용성의 몸에 맞는 볼과 심재원의 보내기 번트로 만든 1사 2루에서 권영호에게 굿바이 좌전안타를 터뜨렸다.
4, 5차전에서 패해 2승3패로 벼랑끝에 몰렸던 롯데는 6차전에서 임호균, 최동원의 특급 계투작전으로 6-1로 승리,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당대 최고의 제구력을 뽐내던 임호균은 4안타1실점으로 삼성의 우승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고 타선에서는 0-1로 뒤지던 4회말 홍문종, 김용철, 김용희 클린업트리오가 연속 3안타를 터뜨리며 3-1로 전세를 뒤집어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롯데가 우승한 이날 국내 한 신문의 스포츠면에는 당시 상무의 윤학길이 84년 실업야구에서 투수 4관왕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92년 우승의 단초는 84년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992년=염종석으로 기억되는 92년은 사실상 롯데가 최강의 전력을 구축한 해였다.
부산고를 졸업하고 혜성같이 등장한 ‘꺽다리’ 염종석(192㎝)의 빛나는 투구가 돋보였다. 염종석은 선동열에 버금가는 칼날같은 슬라이더를 앞세워 정규리그에서 17승9패6세이브를 올렸고 방어율 2.33으로 타이틀을 거머쥐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당시 롯데는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차례로 치르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때 염종석이 홀로 3승을 거둬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켰다.
염종석의 이름에 가려있지만 당시 롯데 타선은 전형적인 소총부대 그 자체였다. 0.335로 타격 2위에 오른 박정태를 시작으로 김민호(0.322·4위), 김응국(0.319·6위), 이종운(0.314·8위), 전준호(13위·0.3004)까지 무려 5명의 3할 타자를 배출, 당시 역대 2위에 해당하는 0.288의 팀타율과 130개의 팀 도루를 기록했다. 대포 대신 기관총포로 상대 마운드를 초토화시켰고 33개의 도루로 3위에 오른 전준호 등 빠른 발로 끊임없이 상대 투수와 수비진을 뒤흔들었다. 마운드에는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이 선발 28경기중 절반인 14경기를 완투하며 17승으로 에이스의 자리를 지켰고 ‘슈퍼 베이비’ 박동희가 7승(4패)으로 거들었다.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를 염종석, 박동희를 앞세워 2승으로 가볍게 통과한 롯데는 해태와의 플레이오프도 치열한 접전끝에 3승2패로 힘겹게 한국시리즈 티켓을 따냈다.
빙그레와의 한국시리즈 원정 1차전은 전형적인 소총부대의 승리. 선발 박동희는 8회까지 매회 삼진을 잡는 위력적인 투구로 8안타 4실점으로 버텼고 타선은 안타수 7-1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집중타로 8-6의 승리를 챙겼다.
2차전은 연습생 출신 신인 윤형배의 신들린 듯한 투구로 롯데가 2연승을 달렸다. 이길 게임은 확실히 잡고 지는 경기는 포기하는 당시 강병철 감독의 스타일대로 윤형배는 빙그레 선발 정민철에 맞선 ‘버리는 카드’였다. 그러나 윤형배는 8과1/3이닝동안 산발 6안타 무실점으로 호투, 롯데 우승의 길을 닦았다. 윤형배는 다음해 14승으로 다승 3위까지 올랐지만 이후 급격화게 쇠퇴했다.
홈에서 열린 3차전은 2패를 안은 송진우의 이를 악문 투구로 빙그레 5-4 승리. 롯데 윤학길은 10안타를 내주며 완투패했다.
시리즈 승부의 분수령이었던 4차전에서 고졸 신인인 염종석과 정민철이 맞대결을 펼쳤다. 롯데 염종석은 5와2/3이닝동안 7안타 3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고 정민철은 2이닝 5안타 3실점으로 패전 투수의 멍에를 썼다. 프로 9년생 노장 조성옥(32)은 정규리그 벤치신세를 분풀이 하듯 5타수5안타 2루타 2개의 맹타를 휘둘러 한국시리즈 한경기 최다안타와 전타석 안타의 기록을 세웠다. 롯데 6-5 승.
잠실로 옮겨 치른 5차전은 박동희의 날. 박동희는 4-1로 앞선 4회 2사 1, 2루에서 선발 윤형배를 구원 등판, 5와1/3이닝동안 3안타로 1점만 내주고 롯데 승리를 지켜 한국시리즈 2승째(1세이브)를 올려 MVP의 영광을 안았다. 박동희는 92년의 영광을 살리지 못하고 가능성만 남겨둔 채 지난해 삼성에서 쓸쓸하게 유니폼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