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브레인
날렵하면서도 매끄럽고 둥근 소리를 지닌 호른의 현신
1957년 8월 25일, 역사상 최고의 호른 명인으로 불리는 호르니스트 데니스 브레인
이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청중들의 열광적인 갈채 때문에
그는 거듭 앙코르곡을 연주하러 무대에 올라야 했다.
반주자 윌프리드 패리는 무대를 향하는 브레인의 등을 향해 "곡목을 청중에 얘기해
주지 그래"라고 말했다. 브레인은 "마지막 곡을 반복 없이 연주한 뒤 끝낸다네"라고
대꾸했다. 반복부를 싹둑 잘라낸 앙코르곡을 연주하자 청중들은 '이제 끝낸다'라는
듯한 독주자의 재치 있는 암시를 깨닫고 한차례 큰 박수를 보낸 뒤 미련없이 일어
섰다.
훗날 패리는 "이제 반복은 없고 끝내겠다니, 얼마나 두려운 예언인지 그때는 생각
지 못했다"라고 회상했다. 이 짧은 앙코르곡은 그의 마지막 독주가 됐다.
"그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예술성과 테크닉 양면에서 가장 뛰어난 호른 연주자였다.
유전에 의한 재능은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는 선대를 뛰어넘는 명인이
었다. 그는 첼로연주자와 같이 느긋한 커브를 그리는 레가토를 연주할 수 있었고,
스타카토에 의한 패시지도 능숙했다. 빠른 선율에서도 생생했으며, 그 음색은 훌륭
하게 집약되어 힘의 낭비가 없었다. 그의 입술은 마치 피아니스트의 손가락과 같이
민감한 터치를 가지고 있었다.
호른 연주자란, 비르투오소나 솔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나타내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오케스트라에서 그가 전체의 일원인 것을 망각한다면 전체의 밸런스가 사라지고 만
다. 브레인은 어떤 경우에도 오케스트라라고 하는 조직의 평형감을 무너뜨리지 않
았다. 그는 소리의 배합에 대해 천성적인 귀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케스트라 음색의
조화라는 면에서 그는 천재였다."(1957. 9. 2. 영국 '가디언'지)
천부적인 소리, 힘의 낭비가 없는 음색
데니스 브레인은 1921년 5월 17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브리 브레인은
BBC 교향악단 호른 수석주자였고 어머니 마리언은 가수였다. 삼촌 알프레드 브레
인 2세도, 할아버지 알프레드 브레인 1세도 역시 직업 호르니스트였다. 어린 데니스
가 호른을 집어들게 될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형인 레너드의 경우에는
화학을 전공했지만 뒷날 결국 관악의 매혹을 버리지 못하고 오보이스트가 되고 말
았던 것이다.
어린 데니스는 아기 때부터 아버지가 부는 호른 소리에 흥미를 보였고 놀랍게도 세
살짜리의 보드라운 입으로 간단한 스케일을 연주하는 데까지 성공했다는 일화가 남
아 있다. 용비어천가 같은 신화일지는 모르겠다. 아기의 부는 힘으로 호른의 관을
통해 어쨌건 어떤 소리를 끌어낸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믿기 힘든 일이
다. 어쨌거나 어린 데니스가 호른을 만지도록 허용된 것은 토요일 아침마다 몇 분
에 불과했다. "이와 입술이 제 모양을 갖추려면 열 살은 돼야 한다. 그 전에 호른을
시작하면 오히려 나쁜 연주습관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도 호른 디스코그라피에 이
름을 올려놓고 있는 아버지 오브리의 지론이었다.
데니스의 첫 음악수업은 따라서 피아노로 시작돼 오르간으로 옮겨갔다. 1936년 그
는 아버지가 교사로 있던 왕립음대 소속 세인트 폴 학교를 졸업한다. 아버지의 계
산대로라면 본격적으로 호른을 훈련한 지 5년만의 일이다. 공개 연주경연에서 1등
을 차지했으니 '특혜'의 혐의는 면제해도 좋을 것이다. 이미 그는 재학시절 당시로
선 누구도 엄두내지 못했던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과 파가니니의 '무궁
동'을 호른으로 연주해내 아버지를 비롯한 교사진과 동료 학생들을 경악의 도가니
로 몰아넣은 바도 있었다.
건반악기 수업도 계속 받았지만 1938년 부슈 실내악단과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을 연주함으로써 그는 호르니스트로 공식 데뷔했다. '브레인가의 막내'가 가진
데뷔공연은 제법 열기에 넘친 반응을 몰고왔다. 데일리 텔레그라프 지는 "이 유명
한 가족은 새 세대의 대표자를 그들의 전통에 편입시켰다. 아들(데니스)은 부드러움
과 확고함에 있어서 가족의 이름을 잇는 데 손색이 없음을 입증했다"고 평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브레인은 '왕립 공군 관악대'에서 제1호른주자를 지냈다.
맵시 있는 청색 유니폼을 입은 이 미남 음악가는 영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협주곡을
연주했고, 대중들의 뇌리에 확고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과 유럽
의 친선을 도모하는 연주회 프로그램의 초청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이
번에는 미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당대 1류의 호르니스트로서 초청건을 일일이 쫓아다니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모두 응하는 대신 그는 비교적 조용한 정주처를 찾았다. 로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의 수석주자를, 이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를 겸직하게 된 것이다. 얼
마 뒤 로열 필하모닉 자리는 그만두게 되었다. 실내악과 솔로 무대에서의 초청이
끊이지 않는 바쁜 일정 때문이었다.
LP시대의 개막으로 의욕적인 레코딩 작업에도 착수했다. 모차르트와 슈트라우스의
협주곡을 시작으로 수많은 녹음을 펼쳤지만 독주자로서 음반에 담아낸 소리들만이
그의 명인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카라얀 시대의 필하모니아가 남긴 수많은
음반들에 그의 날렵하면서도 매끄럽고 둥근 소리가 그지없이 달콤하게 녹아들었다.
때로 덧없는 구름처럼 음의 풍경에 배경을 넣어주고, 때로 총주(Tutti)에 육중한 음
향적 중심이 되어주고, 때로 개성 강한 성격배우 역할을 하는 호른이 오케스트라에
서 갖는 지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요컨대 필하모니아는 브레
인을 동반하고 있음으로서 행복한 악단이었다. 필하모니아의 첫 미국투어에서 평론
가들은 유독 호른이 내는 '거룩한'(Celestial) 음향을 칭송했다. 1952년 토스카니니가
런던에서 브람스 교향곡 전곡연주를 마치자 전 평단이 일어났다. 유명한 3번 교향
곡 3악장, 으뜸주제가 호른 솔로로 재현되는 부분에서의 품격 높은 연주를 칭송하
기 위해서였다.
필수 레퍼토리가 된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
필하모니아가 협연하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언제나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인상깊은 호른의 네 음표로 시작되는 1악장 도입부를 브레인의 연주로 들
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희귀 레퍼토리'였던 모차르트의 호
른 협주곡집이 바로 이 브레인 때문에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에 필적하는 인
기를 누리게 되리라는 것은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가 악단에 공헌한 바는 호른뿐만이 아니었다. 오르간을 복수전공으로 공부했던
그는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오르간에 다가앉았다. 카라얀이 필하모니아 재직시절
엔젤 레이블로 발매한 오페라 간주곡집 음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트랙
에 그의 따뜻하고도 선명한 오르간 연주가 수놓아져 있다.
당대의 일류 작곡가들도 그를 위해 펜을 들었다. 힌데미트는 브레인의 연주로 자신
의 호른 협주곡 초연이 끝나자 독주자 악보를 집어들고 뒤늦은 헌사를 써넣었다.
'그 누구도 그를 능가할 수 없는 초연자에게, 감사해 마지않는 작곡자로부터'.
그의 어떤 면이 그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선율 악기' 정도로만 이
해됐던 호른 분야에서 스타십을 만들어냈을까. 학생시절 '왕벌의 비행' 일화가 보여
주듯 그는 일단 기교의 흔들림이 없다는, 다른 연주자보다 훨씬 앞선 지점에서 출
발했다. 그 결과 그는 전 세대의 호르니스트들이 몰두하지 못했던 '음색'을 한층 발
전시킬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둥글지만 퍼지지 않는 또렷한 윤곽의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인상주
의 관현악이 요구하는 뜬구름 같은 희미한 음색도, 바그너나 브루크너가 요구하는
사냥나팔 스타일의 강건한 외침도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었다. 배리 터크웰에서
앨런 시빌, 헤르만 바우만에 이르는 그의 후배 호르니스트들이 크건 작건 그가 발
전시킨 연주상의 특질들을 상속했을 것도 당연한 일이다.
1991년 브레인의 70세(살아 있었다면) 생일을 맞아 관악 전문지인 '호른 콜'에는 호
르니스트 존 드레슬러가 기고한 브레인에 대한 촌평들이 실렸다. 요약하자면 다음
과 같다. "브레인보다 음악적 분절을 감각적이고 멜랑콜리하게 연주할 수 있는 사
람은 없었다. 그는 호른 연주를 근본적이고 올바르게 연주할 수 있는 '호른의 현신'
이었으며, 악기를 가리지 않고 멋지게 연주했다. 그의 호흡법과 분절법, 그 밖의 모
든 음악적 천재는 그를 필적할 사람이 없게 만들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것은 연
주하기 간단한 것처럼 들렸으나, 실제 그렇게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
다…."
1957년은 전성기의 정점이었다. 지휘에 한창 재미와 자신을 붙인 그는 그해 자신이
지휘하는 실내악단을 창단하기 위해 단원 교섭에 나선 참이었다. '호른의 외교관'이
라고 불렸던 그의 붙임성 좋은 성격이 이런 큰 프로젝트를 추진하도록 한 것일지도
몰랐다. 악단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닐 때면 언제든지, 그는 휴식의 시간을 그 도시
의 일류 금관주자들을 찾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데 할애했다.
이 해는 목관 5중주단을 창단,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한 바로 그
해이기도 했다. 오보에를 형 레너드가 맡은 이 5중주단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마지막 독주회가 열린 1주일 뒤 8월의 마지막 날, 그는 따뜻한 분위기에서 5중주
공연을 마친 뒤 손수 차를 몰고 런던으로 향했다. 오픈카(컨버터블) 애호가인 그에
게 여름밤의 훈훈한 공기는 사뭇 달콤했을 것이다. 런던을 30여 킬로미터 남긴 지
점에서 그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표지판을 보지 못했다. 차는 길가의 가로수에
처박혔고 속도의 관성은 그를 전혀 다른 세계로 튕겨보냈다. 신문들이 경악에 차서
그의 부재를 받아들인 것은 이틀이 지나서였다.
"그 비극적인 사건은 한 예술가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버렸거니와 그는 악기가 요구
하는 뛰어난 기교와 위대한 음악혼, 음악에 대한 모든 범위에서의 생생하고도 지적
인 호기심, 연주에 대한 섬세한 기질, 매력적인 인격까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었습니
다"라고 작곡가 브리튼은 추모했다.
글: 유윤종 (월간 조이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