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콜롬보 해변의 사진> <아주 허접한 "시작" 비디오: 상영시간 50초> 스리랑카 여행기 1 "콜롬보"
스리랑카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블랑카입니다. 며칠 전에 회식했어요. 고기 먹으러 갔어요. 저 너무 좋아서 고기 먹으려고 했더니 사장님 "흠 흠"합니다. 또 저 고기 먹으려고 하면 사장님 "흠 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사장님 고기 먹으려고 할 때 "흠 흠"했더니 사장님 불판을 던졌어요.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
스리랑카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오래 전에 KBS에서 방영되었던 위의 개그다. 그리고 스리랑카가 적도 근처에 위치해 있으니, 아주 더울 것이라는 것,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들었다. 또한 타밀족과의 마찰로 스리랑카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마음이 선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설령 선하지 않다고 해도 막무가내식으로 행동하는 인도인들보다는 대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또한 "아리 아리, 스리 스리, 아라리요"라는 한국 노래와, "스리 랑카"의 "스리"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았고, 혹시나 전생에 그들과 우리가 인연으로 맺어진 같은 동포가 아닌가 하는 중뿔난 생각까지도 한 적이 있다. |
2014년 1월 15일 새벽별을 보면서 인도의 첸나이 호텔을 떠났으나 비행기의 수속이 뭐가 그리 복잡한지 7:00 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비행기는 첸나이 공항을 이륙했다. 비행기 창밖을 보니 날은 이미 밝아서 푸른 하늘과 구름이 인디안 에어라인 항공기 아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솜털 구름이 참으로 편하게 느껴졌고, 할 수만 있다면 비행기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뛰어 나가 솜털 위에 누워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잠을 청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
8:00시경에 콜롬보 공항에 도착하니 공항에는 세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가이드, 한 사람은 버스 운전수,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짐꾼이었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샤즐리"라는 이름의 가이드는 능숙한, 그렇지만 조금은 이상한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우리의 질문에 껄껄 웃으면서 능숙하게 대답을 하였다. 한쪽 팔이 좀 불편한 짐꾼만이 짐을 나르느라 고생을 할 뿐, 다른 두 사람은 거의 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 사람들은 충실히 각자의 임무에 임하는 듯, 운전수는 운전만, 가이드는 잡담만, 짐꾼은 짐만 날랐다. |
9:00시에 공항을 출발한 우리의 전용버스는 비교적 한산한 시골길을 따라서 콜롬보 시내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 기억에 있는 한, 거의 한 시간 버스가 달리는 동안 길 양쪽으로 끊임없이 가게나 민가가 있었다. 넓은 땅덩어리를 놔두고 왜 하필이면 소음과 먼지를 무릅쓰고 길거리에 집을 짓고 복닥거리면서 사는지 인간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에 접어들자 역시 수도이어서 그런지 다른 나라의 수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크고 웅장한 건물이 눈에 보였다. 왼쪽으로 큰 건물이 도열하고 있는 반면 오른쪽으로는 건물, 잔디밭, 그리고 파란 바다가 듬성듬성 보였다. 차도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탄 자동차로 혼잡했으나, 인도(人道)나 간간히 보이는 골목은, 그저 한산하기만 했다. |
<우리가 묵은 호텔>
우리가 도착한 곳은 Supun Residency라는 곳으로 아파트 단지에서 몇 채의 아파트를 빌려서 호텔로 사용하는 듯 했다. 50평 아파트 정도 되는 아파트 세채를 빌려서 6명, 6명, 2명이 각각의 방으로 들어갔다. 실내로 들어가니 넓은 침실이 세 개가 있었고, 거실과 부엌 그리고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었다. 거리에 접해 있는 창밖으로는 콜롬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으며, 반대 쪽으로는 낮은 건물이 바닷가를 따라서 장난감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멀리 바다가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여기가 흡사 이란의 카스피해와 인접한 찰루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3년 이란의 찰루스에서 비를 맞아가며 장을 보아다가 끓이고 볶고 지져서 허리띠를 풀러 놓고 먹었던 생각이 꿈틀거리며 올라왔던 것이다. |
우리는 각각의 방마다 스스로 메뉴를 결정하고 스스로 요리해 먹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오랜만에 돼지고기 삼겹살을 먹자고 하였고, 만약 삼겹살이 없으면 돼지고기 찌개라도 먹자고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잠시 후 돼지 고기를 사러 나갔던 복만씨는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하면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스리랑카에서는 보름날은 돼지 고기를 팔지 않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이 하필이면 15일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돈이 없어서 그렇지, 돈이 있는데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나? 회교국가도 아닌 스리랑카에서 돼지고기도 못 먹어 본다면 그것은 불굴의 한국인이 아닌 것여." 누군가가 사자처럼 하늘에 대고 포효하는 매서운 한 마디에, 마음을 굳게 먹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우리 방 전원 여섯명이 고래잡이 아닌 돼지고기 사냥을 나갔다. |
<호텔의 식당> <호텔 옥상에 있는 수영장>
일단 지나가는 뚝뚝이 운전사를 잡고 사실 이야기를 하니, 좀 멀기는 하나 그곳에 가면 분명히 돼지고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차에 나눠어 타고 비오는 콜롬보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콜롬보 시내 양쪽으로 낮은 건물이 이어져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몰려가고 비가 뿌렸다 멈추었다를 반복했다. 신기하게도 희미하게 저 멀리 무지개가 순간적으로 보였다 사라지기도 했다. |
<호텔에서 바라 본 콜롬보 시내: 비가 온 후 해가 저물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좀 큰 수퍼마켓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다른 곳에서는 안 팔아도 거기에서는 돼지고기를 판다고 해서 온 것이다. 뚝뚝이 운전사는 자신있다는 태도로 어깨를 좌우로 흔들면서 조금 거만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그는 "죄송하지만 살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 겸연쩍은 모습으로 머리를 득득 긁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서 다시 들어가서 스리랑카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고, 한국인이 먹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사정사정 하였다. 그래도 정육점 아저씨는 자신의 본분에 투철하여, "팔 수 없다"는 말만을 하였다. 밖으로 나왔다가 한참을 기다린 후, 우리는 또 다시 들어갔다. 복만씨를 비롯한 몇 사람의 설득과, 비겁할 정도의 아첨, 때로는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의 위협적인 언사 덕분일까? 잠시 후 정육점 아저씨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정유점 아저씨는 종이로 돌돌 말고, 그 위에 비닐로 소중하게 감싼 5만원어치의 돼지 고기를 스리슬적 우리의 손에 넘겨 주었다. 감사하다는 우리의 말에 어깨를 한번 들썩하고 고개를 한번 갸우뚱 하더니, 그는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안으로 사라졌다. 아,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눈물이 나올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친구와 친구의 애인 그리고 나 셋이 모여 술을 먹다가,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에 그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 도망치듯, 그런 스릴감을 느끼면서, 민첩하고도 긴박하게 비오는 콜롬보 거리로 뛰쳐나왔다. 또다시 뚝뚝이를 타고 오면서, 이것은 정녕 형사 콜롬보가 콜롬보 핸드백에 돼지고기를 넣고 콜롬보 길거리를 달리는 것보다 더 짜릿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
<1월 16일 새벽 콜롬보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날밤 오랜만에 노릇노릇 하게 구워진 돼지고기가, 배추쌈위에 올려져 마늘과 양파와 함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썰물처럼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맥주와 함께 목을 지나고 식도를 지나 위를 통과하고 허파를 지나 콩팥 이자까지 관통하여 온몸을 꿰뚫고 훑고 지나갔다. 아, 그러나 어쩌랴. 아쉽게도 그때까지도 나는 몸에 난 상처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비극 또는 참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그날 밤 늦게까지 , 나는 H형으로부터 사진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인가가 중요하다. 화면 속에 이것 저것 사정없이 넣을 것이 아니라 무엇을 빼서 단순화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초보자는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어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고 하지만, 고수들은 화면을 단순화시켜 핵심을 찔러 보여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머리를 전봇대에 부딪힌 듯 정신이 아찔했다. 내가 지금까지 찍은 사진은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사진었지, 뺄려는 생각을 게을리 한 사진이었다. 말은 많되 핵심이 없는 글이 있고, 말은 적지만 말 속에 뼈가 들어가 있는 말도 있다. H형의 이 한 마디의 말은 내가 앞으로 사진을 찍을 때, 꼭 명심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H형의 사진학 강의는 이어졌다. 사진 속에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냥 사진 한 짱을 삐죽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인도의 어떤 골목에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이 칼을 갈고 있었어요. 칼을 갈고 있는 그 사람을 한참 바라보니 그가 일을 하는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어요. 나는 그에게 담배 한 개피 권하고 우리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서로 웃었어요. 두꺼운 돋보기를 코에까지 내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깊은 인간애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어요." 예컨대 이런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싣는다면 그 사진이 살아 움직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뒤척거리며 많은 생각을 했다. 소중한 진리를 얻은 듯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
<1월 16일 찍은 사진: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를 생각했지만, 생각대로 사진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콜롬보 시내> <콜롬보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1월은 콜롬보의 날씨로 친다면 일년 중 가장 시원한 때였다. 하지만 너무 더워서 구경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시원한 나무 밑이나 호텔의 커피 숍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쥬스를 마시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 같았다. 아예 몇 발자국 걸음 옮겨 놓는 것이 귀찮게만 여겨졌다. 사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멋있는 곳을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금강산이 아니라 금강산 할아버지를 찾아가더라도, 코빼기도 보기 싫은 사람과 가면 뭐가 그리 좋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좋은 곳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간들, 더워 죽거나 얼어 죽을 만큼 혹독한 계절에 간다면 뭐가 그리 즐거울 것인가? 곰곰히 생각해봐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행을 할 때 먼저 고려할 사항은 좋은 계절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돈 버리고, 수고하고서도 구경다운 구경 못하고 생고생만 하다 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너무 더워 잠시 들렀던 콜롬보의 어떤 호텔> <콜롬보 시내> <<<<여기를 클릭하세요>>>>. <비디오: "스리랑카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블랑카입니다." 상영시간 1분 40초> *본 비디오는 한 달이 지난 뒤 삭제할 예정입니다. "다음"에서 저작권 문제로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연락이 와서.....삭제하고 링크를 겁니다. (2014년 3월 23일 작성) |
첫댓글 스리랑카 면적이 우리나라 70 퍼센트 정도로
그리 크지 않네요
감칠맛나고 생동감있는 알바트로스님만의
여행기 잘 읽고 갑니다
예, 한국의 경상도 전라도 합친 크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랫만에 마른 땅에 흙 먼지를 일으키며 단비가 내립니다. 아름다운 사진과 꾸밈없는 글을 읽는 즐거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시원하다는 맥주보다 백배 상쾌합니다.
요즈음 술좀 하시나요?
@알바트로스(곽영을) 나 한테는 고맙다고 안하나요?
반갑습니다.
재미있는 여행기를 감상할수있다니, 기대가큽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잘읽고 갑니다
예, 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곽선생님 글을 읽습니다. 표현이 생동감있고 현지에 있는듯한 착각에 빠지게합니다. 좋은 여행기에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이군요. 감사합니다.
최곱니다!!
계속 인솔중이라 컴으로 볼 시간이 없고 폰으로 봅니다ㅎㅎ
스리랑카도 많이 덥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