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6-8.19-28)
He said: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desert,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as Isaiah the prophet
said.”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 주님께서 선택하신 그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내린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할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가르친다(제2독서). 요한 복음의 머리말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요한은 빛을 증언하여 모든 이가 믿게 하고자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사람이다.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에 ‘주님의 길을 곧게 내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밝힌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 책상머리에는
이런 글쪽지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최
요한 신부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2012년 2월 20일-3월 31일.” 처음으로 주임
신부로 발령받고 잠깐 피정하러 들어간 수도원에서 고해성사를 받을 때 고해 신부님께 받은 것입니다. 신부님은 보속과 훈계와 함께 직접 이 글을
써서 주셨는데,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이 성구를 한 달 동안의 양식으로 삼기를 바라시는 배려였습니다. 저는 한 달이 아니라 언제나 기억하며 그렇게
살려고 이 작은 글쪽지를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자주 잊고 사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눈에 띌 때마다 새삼스레 감동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어쩌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바오로 사도의 훈계이지만 살아갈수록 보석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합니다. 한 신학자가 대림
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의 자세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조언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큰 ‘도약’과 작지만 꾸준한 ‘발걸음’이 모두
필요하다고 합니다. 깨달음과 회개가 도약이라면,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 안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작은 행동들이 발걸음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발걸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기뻐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는 사람의 일상은 빛이신 주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증언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낮춰 주님을
드높인 요한 - 이기양 신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며 한없이 자신을 낮춘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러한 요한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대림 제3주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이렇게 놀라운 사람과 만납니다. 요한은 끝없이 자신을 낮추며 예수님을 높이는 겸손한 피조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요한의 이 몇 마디
말을 통해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가 인간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순명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도 훨씬 더 명성이 높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한참 전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회개할 것을 가르쳤는데 그의 말과 행동에 어찌나 힘이 있었던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세례를 받으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군중의 열광에 도취되거나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면 몰려들수록 그는 메시아를 높이고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한없이 자신을 낮추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합니다. 백성들은 환호하며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러자 놀란
어린 나귀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요. 더구나 지나야할 길마다 사람들이 옷을 벗어 깔아놓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의 겉옷을 밟고 지나던 어린 나귀는
백성들의 열광을 받자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야~, 내가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네, 내가 이렇게 높은 존재였었나?" 나귀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우쭐대며 앞발을 들고 "히히잉" 소리로 환대에 응답합니다. 안타깝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자기를
향한 것으로 착각한 어린 당나귀의 뻐기며 으스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이런 어리석은
당나귀만도 못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를 들어올리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며 사는 어리석은 나귀만도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을
지내는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정말 좋은 성당은 건물이나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만이 아니라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앞 다퉈 생겨나는 곳입니다. 복음적 삶은 끊임없이 주님을 높이고 서로를 낮추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삶을 지켜보면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지요. 구름처럼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서 우리는 요한이 증언한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늠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단체나 가정에서 신자 공동체 모두가 드러나야 할 분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실천할 때 예수님이 주님인 복음적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신도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외치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성직자도 평신도도 아닌
하느님만이 주인이시지요!
집이나 회사,
교회 공동체에서 개인적인 내 모습을 드러내기 바빴다면 빨리 그쳐야 합니다. 앞에서는 좋은 척하지만 분명 뒷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그것이 분열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참 좋은 모습을 오늘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습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때 주님께서
드러나고 그 공동체가 복음적 공동체가 된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박재식
신부
지난 여름 본당
할머니 10여 명과 함께 감자를 수확했습니다. 한참 밭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소주를 한잔 했습니다. 약간 취기가 오르자 할머니들이
마음속에 담아 놓았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셨습니다.
한 할머니가
질문했습니다. “신부님요! 우리 같은 할매들한테 가장 무서운 것이 뭔지 아시오?” 고민하며 시간을 지체하다가 “죽는 것”이라 답을 하자, 그
할머니는 “아니라요, 아들들과 함께 병원에 갔다가 바로 요양원에 입원하는 거라요”라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날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배고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유의 박탈,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그리고 ‘외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잠시 독일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할 때 방문했던 장애인 시설이 생각납니다. 다운증후군을 앓던 10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와 함께 시설에 와서 공부하고 한두 시간 정도 자동차 유리를 닦았습니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잘못된 시설로 생각하고 시설장 수녀님께
“왜 장애아에게 노동을 시키느냐?”고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아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지금부터 열심히 배우면 성인이 됐을 때 직업을 통해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고 자신의 완성을 향해 살아갈 수 있다. 사회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담당 교수 집에
초대받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50세가 넘은 교수 부부는 척추 장애가 있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 아기를 입양해 키우고 있었습니다. 입양 계기를
묻자 “우리 부부는 멋진 아이들이 있고, 훌륭한 부모님과 좋은 나라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복을 나누고 사는 것이
하느님과 모두에게 감사드리는 삶이고 우리의 기쁨이며, 행복”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일시적인 감정으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 주기보다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외된 이들과 한가족 한 형제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사회복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골 어르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잊히고, 신체적 자유가 제한된 곳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 가정집과 요양 시설로 환자 영성체를
다닙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사시는 가정집은 좀 지저분하고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볼 수 있고,
사람 향기가 납니다. 시설에 계신 어르신들은 정말 깔끔하고 잘 정리된 곳에서 생활하시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없고 초점 잃은 눈동자를 갖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생명다움’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서양 역사를 보면
최초의 종합병원은 정신 장애자와 알코올 중독자 등 농경 사회에서 필요 없는 사람들을 모아 두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산업 사회에 접어들며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치유에 목적을 두고 환자의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곳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게 됐습니다. 일부분은 수용 시설이 돼 사회로부터
환자를 격리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사회복지 시설들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복지 시설인 음성 꽃동네, 멕시코의 시골 여자아이들 4000여 명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있는 거대한 시설 ‘소녀의 집’, 2000여 명의 고아나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서 돌보는 페루의 ‘거룩한 가족 어린이 공동체’에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너무나 많은 가난한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일상에서 많은 장애인과 함께 어울리고 공부하고 놀며 친구로 지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거리에서 장애인을 만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은 누구를 위한 교통수단이지요? 우리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손은 있는데 잡아줄 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유다인들에게 공적으로 자신의 신원과 임무를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성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때마다 낭독하면서 사제의
참된 임무와 하느님 자녀의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받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빛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자유롭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따스함과 평화를 주십니다. 이것이 자선이 아닐까요?
본당에서 열린 시골
음악회가 끝났습니다. 오늘은 모든 일을 내려놓고, 할머니들께 배추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서 맛있게 먹고 함께 수다를 떨며 성탄을 준비할까
합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서는 요한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있었고,
요한이
그들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증언하였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또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것이
오늘의 복음이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활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 대해 먼저 언급합니다.
마르코복음서와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루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그 사실 조차 적당히 얼버무리고 맙니다.
네
복음서가 하나같이 긍정하는 점은 요한은 예수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에
대한 복음서들의 그런 진술들은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이기에,
그
사실은 알립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는 부담스러웠다는 것을 엿보게 합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당시,
요한의
제자들도 그들의 스승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세례를 받은 예수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기 위해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비록 세례는 베풀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인물이라고도 말합니다.
복음서의
그런 언급들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가게 하겠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극찬하여 말씀하신 사실을 보면,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찍이 가담하였던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다른 세례 운동가들은 죄에서 정화되기 위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약속을 받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세례 운동에 공감하고,
가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를 보면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10;
루가
3,9)고
말하면서 엄하게 심판하실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가
17,21).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 함께 계심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고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가
11,9.13).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심판하실 무서운 분이 아니라,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는 부모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5-36).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그 생명의 아버지로 살아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면서도,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에게로 가도록 인도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을
벌주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요한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섭게
심판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요한을 넘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자비하신
하느님,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숨결,
곧
성령을 베푸셔서 우리도 자비로운 당신의 질서 안에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우리 주변에 당신의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살아서 당신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청해도,
찾아도,
두드려도
하느님은 반응하시지 않더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자녀가
어리고 미숙할 때,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줍니다.
그러나
성장한 자녀는 자기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합니다.
부모는
성장한 자녀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말합니다.
사람은
“부모를
떠나 자기 배우자와 하나가 된다.”(2,24).
인간은
부모를 떠나서 비로소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떠나지만,
부모의
뜻을 받들어 삽니다.
자녀는
자기 일은 자기가 하지만,
부모와
마음으로 함께 있습니다.
부모의
가치관을 따라 살면서 부모의 뜻이 자기를 통해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하느님의 영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청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회개는 그런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달라는
사람에게 주며,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두 자비로운 하느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그분의 성숙한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
-조성문
신부-
주님을 증거하는 이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대로, 주님이신 예수님보다 앞서서, 주님의 길을 닦아놓았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나타나 죄의 용서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으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난 주일의 복음 말씀인 마르코 복음은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세례를 우리에게
이미 들려주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인 오늘은 요한 복음사가를 통해 세례자 요한의 이러한 행적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데, 곧
세례자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온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입니다. 많은 이들, 특히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의
정체에 대해 알고 싶어 했습니다.‘도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메시아였는가?’그들의 이러한 관심사에 요한은 이렇게 답합니다.“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 23)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오늘 복음
말씀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세례자 요한은 소리였지만 주님은 태초부터 말씀이셨습니다. 요한은 지나가는 소리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시는 영원한 말씀이셨습니다.”(대림 제3주일 독서기도) 오늘 복음인 요한 복음의 시작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빛을 증언하러 온 이였으며,
이는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며 단지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빛이시며,‘세상에 오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 9)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러 온
것처럼, 우리 또한 그분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생활은“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 16∼18)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라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자선 주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림에 있어서 자선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과제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준비하며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삶 속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박철현신부-
요즘에는 많은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삶을 살아갑니다.
그에 비하여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빛을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어느 삶이 더
올바르다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일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분수를 제대로 알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일 역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의 삶이
빛나는 이유는 겸손한 마음으로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수행해 가는 불굴의
의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부터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정하고, 가난한 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자선은
어쩌면 세례자 요한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처럼 자선
역시 스스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실천해야만
합니다.
둘째, 세례자
요한이 겸손한 마음으로
살았던 것처럼 자선 역시 스스로 겸손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셋째, 세례자
요한이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던 것처럼 자선 역시 스스로
낮추어 행하지 않으면 아 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넷째, 세례자
요한이 불굴의 의지를
가졌던 것처럼 자선 역시 불굴의 의지를 지니지
않으면 단순히 일회성행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과 자선은 닮아 있습니다. 대림 3주,
주님을 열렬히 기다려온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선을 행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만큼 아기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기쁨은 커질 것 이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 만큼 은총 역시커지는 삶을
살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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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