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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묵상글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 철부지의 기도. 등 )
* 김찬선 신부님 : 아직 / 05:3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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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철부지의 기도>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주님
저는
열렸으니
제게
오소서
주님
저는
모르오니
저를
깨우치소서
주님
저는
해맑으니
제게
스미소서
주님
저는
새하야니
저를
물들이소서
주님
저는
없사오니
제가
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제가
당신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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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03 05:24
- 그분은 놓치고 그자만 보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오늘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그리고 메시아와 함께 도래할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얘기합니다.
메시아는 정의로 심판하는 분이시기에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닙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보는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아라고 얘기하며,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가 그런 분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고,
철부지 어린아이들만 알아본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성찰을 해야 합니다.
이 대림절에 나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인가?
다시 말해서 메시아를 보고 싶어서 애타는 사람인가?
막상 메시아가 오시면 알아보는 눈은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군부 독재 시대인 이삼십 대 때 저는
메시아가 다스리는 그런 정의로운 나라가 오기를 정말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의로운 나라가 오기를 그저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되고,
그 나라가 오도록 내가 뭔가 해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때 그러해야 했고 지금도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메시아는 빠지고 내가 그 대신 있으며,
메시아 대신 내가 심판하려 하는 잘못을 그때도 지금도 범하곤 하고,
사랑은 없고 분노만 있으며 기도가 빠진 심판의 행위만 하곤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메시아를 보는 눈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 대해 분노만 하고 그를 위해 기도는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분을 놓치고 그자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파괴만 하고 건설은 하지 못할 것이고,
건설하지 못하기에 황폐함만 남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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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 ‘Alter Christus’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그냥 세속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모범을 따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돈, 돈’ 하는 것이 예수님 시선일까요? 내게 잘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골탕 먹이려는 것이 예수님 시선일까요? 기도는 전혀 하지 않고 세상일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은 어떨까요?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해서 갈등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시선을 다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향해 측은하게 바라보시던 모습, 자기 적대자를 향해서도 저주보다 사랑으로 감싸안으려고 했던 모습,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의 시선을 나의 시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습으로는 세상 안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긴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상 안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살 때,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감사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세상 안에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인정 속에서 자기를 돋보이려고만 노력합니다. 이들은 자기의 지혜와 슬기로움을 뽐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뜻인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시선을 볼 수가 없었고, 주님을 알지 못해서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철부지들 같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즉, 세상의 관점으로 철부지 같은 사람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귀영화보다 주님 사랑을 더 강조했고 실천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이 험한 세상을 살 수 있겠어?’라면서 철부지 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철부지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안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기쁘게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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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과거의 탓, 남의 탓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 인생은 호전한다(웨인 다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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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시기”을 시작하면서 <복음>는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기쁨과 감사를 지녀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는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비록 그 뜻을 헤아려 알아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뜻의 선하심’에 의탁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전부를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하는 이라야 알아듣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당신의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선하신 그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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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됩니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입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눈과 귀가 소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이미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철부지들은 계산하지 않고 따지지 않으며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셈이 빠른 사람들은 누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 합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입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잔머리를 굴리며 셈을 할 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제자들도 자리다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 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제발 주님께 집중합시다.
요즘 세상의 현실을 보십시오.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데 여전히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들이 제발 백성을 위한다는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철부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성령의 도움을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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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도종환은 ‘접시꽃 당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저는 본당에 있을 때 도종환 시인을 초청해서 ‘대림 특강’을 부탁했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담쟁이, 접시꽃 당신, 흔들리며 피는 꽃’과 같이 그의 시를 통해서 신앙을 전하였습니다. 담쟁이는 느리지만 꾸준히 자라며,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목표를 이뤄냅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큰 시련과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는 끈기와 희망을 상징합니다. 접시꽃 당신은 암 투병 중인 아내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시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며 도종환 시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나는 인간의 의지를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복권이 당첨되는 기쁨처럼 드러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의 구원과 상관없는 개인의 구원만을 드러내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복권이 당첨되는 것도 아니었고, 개인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칼로 가슴을 찔리듯 한 아픔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아름다운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날이 오면 사막에 샘이 넘쳐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어린아이가 사자와 늑대를 몰고 다닐 거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중풍 병자가 걷고, 눈먼 이는 눈을 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될 거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은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는 새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피는 접시꽃이 없듯이, 타는 듯한 목마름을 견디지 않고 담을 올라가는 담쟁이가 없듯이 그날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은 주님의 영,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날은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 속에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희생 속에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 속에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안회는 가난하였지만 언제나 깨달음의 경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그런 안회를 두고서 ‘가난하지만, 도를 즐길 줄 안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재물이 많아도,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능력이 출중하여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욕심 때문에 더 많이 채우려고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안빈낙도, 하느님의 나라, 희망의 나라’를 찾은 시인이 있습니다. 오늘은 박노해 시인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랑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제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길을 찾는 지혜를 주셨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주셨습니다. 외로울 때면 친구가 되어 주셨고, 기쁨을 함께 나눌 이웃을 주셨습니다. 생각하니 정말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저에게 희망이 되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 길이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우주에서 지구는 먼지보다 작습니다.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서 사람은 또 먼지보다 작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려고 하듯이 나도 이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소서.’ 이사야 예언자도 바로 그 사람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시고,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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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고 말입니다. 예언자들과 임금들이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한 것을 지금 너희는 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본 것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신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들은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물음이 들었습니다.
혹시 제자들이 본 것과 들은 것이 주님뿐만이 아니라면…?
오늘 복음 말씀의 첫 줄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이 본 것이 성령과 함께 있는 주님의 모습이라면? 제자들이 들은 것이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주님의 말씀이라면?
제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 역시 주님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따라나서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을 통해 병이 나았을 뿐이고 기적의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성령과 하느님, 그리고 그 함께 있음에 관한 기쁨을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얻어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기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저 성령과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있으셨기에 기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는 제자들과 우리들도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은 주님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 우리가 갈구하는 무엇인가를 얻으려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향해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기쁨에 가득차셨던 주님의 기쁨이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 안에도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다들 그러니 오히려.
다들 괴롭다 한다.
다들 외롭고 슬프다 한다.
드러내지 않고 아닌 척 살아갈 뿐이다.
쓰러져 울기보다 밝은 척 살아가는게
더 나은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들추지 말자.
그러니 너무 찌르지 말자.
오히려 나와 같기에 격려하고.
오히려 나와 같기에 공감하고.
오히려 나와 같기에 평화를 빌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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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관상의 행복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복음 환호송)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관상의 행복을 누리는데 좋은 도움이 됩니다.
“마음이 흔들렸다면 한 걸음 물러서 자신을 바라보라. 그것만으로도 어지러움이 잦아질 것이다.”<다산>
“손괘의 상풀이에서 말했다. ‘산 아래에 못이 있는 것은 덜어냄이니 군자는 이를 통해 화를 누르고 욕심을 막는다.”<주역>
새삼 적절한 때 ‘물러남’과 ‘덜어냄’이 참 좋은 분별의 지혜이자 관상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11장 1절부터 10절까지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에 대한 이사야의 꿈과 희망, 비전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과 영감을 줍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이런 평화의 왕국을 꿈꾸는 우리들이요, 오늘 이 말씀을 12월25일 성탄대축일 밤미사중 독서의 기도중 독서자는 노래합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통해 평화의 왕국이 바야흐로 시작됐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은, 그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은 바로 탄생하실 메시아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가톨릭교회는 여기 여섯에다 자비의 영을 성령의 일곱가지 은사라 칭하곤 합니다. 성령칠은으로 충만한 메시아 예수님이요 이어지는 고백도 고무적입니다.
“그는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이어 평화의 꿈이 완전히 실현된 유토피아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무수한 혁명의 예언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참 놀랍고 아름다운 예언같은 시詩입니다. 세상 어디서 이렇게 깊고 아름다운 글을 볼 수 있을런지요!
“늑대가 새끼 양과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넘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한 것이기 때문이다.”(이사11.6-9)
그대로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꿈꿨던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받으실 때 세상 들짐승들과 누리던 평화로운 공존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성령의 인도하에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광야 세상의 들짐승들과 함께 평화를 누렸던 예수님이야 말로 영원한 평화의 모델입니다. 여기에 가장 근접한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1,13)
바로 이런 지상 천국의 평화의 실현을 꿈꾸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하느님의 산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여기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마침내 실현되기 시작한 하느님의 평화의 꿈입니다.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며 희구한 이사야 예언자요 그를 닮은 예수님인지요! 어제 나눴던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라는 감동적인 말씀도 떠오릅니다.
오늘 복음은 선교 파견되었던 일흔 두제자의 성공적 귀환후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격에 벅차 고백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관상의 행복을, 그 절정의 행복을 보여주는 주님의 감사찬미기도요 공관복음에서 유일합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늘 일치되어 관상적 행복을 사셨던 삼위일체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철부지 제자들을 통해 대우(大愚)가 대지(大智)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이런 관상의 행복을 체험한 열정과 열망의 주님의 제자가 주님의 사도와 선교사로 파견되니 그대로 감사의 응답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예수회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입니다. 인도와 일본에 최초로 가톨릭을 전한 인도와 일본의 사도, 동양의 사도로 불리며, 성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선교사로 손꼽히는 성인입니다. 그가 개종시킨 신자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 함께 예수회의 창립일원이 되었고, 인도 선교 활동차 1541년 4월7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1542년 5월6일 인도 고아에 도착하여 1548년까지 인도반도 연안, 세일론섬, 말라카, 물루카제도에까지 정력적으로 포교 여행에 오르니 그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불가사의입니다. 이어 성인은 인도를 떠나 폭풍우를 뚫고 1549년 일본 선교활동에 오릅니다.
그는 유럽에서 입는 사제복 대신 일본 승려들이 입는 납의와 가사를 입었는데, 이는 같은 예수회 선교사인 마태오 리치가 명나라에서 사제복대신 유학자의 도포를 입고 유교 교리에 맞추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명해가며 전도하려한 일종의 현지화 전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그의 기술을 통해 일본의 실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단히 예의가 바른 사람들인데, 잘 사는 것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남자는 14세가 되면 항상 칼을 차고 다닙니다. 사무라이는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무기를 항상 갖고 다니며,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선비와 붓의 나라인 평화의 조선과 사무라이와 칼의 나라인 전쟁을 즐기는 일본과의 대비가 너무 극명합니다. 일본은 영원히 경계해야할 이웃이자 적국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니 유구한 역사중 양국의 관계가 이를 증명합니다.
지칠줄 모르는 선교 열정을 지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1년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해 출발했지만 진입하지 못하고 광동항 앞의 상천도(上川島) 외딴 섬의 한 천막에서 1552년 12월20일밤 열병으로 쓰러진후 객사하니 향년 46세입니다.
불꽃같은 생애로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 온힘을 다해 노력한 불굴의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622년 시성되며,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평화의 꿈을 실현을 위해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주님 평화의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72,7ㄴㄷ).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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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1-22)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다
주님께서는 성령의 은총으로 그들을 성별하시고 사도의 위엄을 입혀 파견하셨습니다. 또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능력도주셨지요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돌아온 그들이 보고를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거니와,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많은 사람을 도운 일과 무엇보다도 당신의 영광을 경험으로 깨달은 것을 아시고 크게 기삐하셨습니다. 주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받기 바라시므로, 그릇된 길로 가던 자들이 돌아서고 어둠에 있던 자들이 깨어나고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 없던 자들이 당신의 영광을 알게 된 것을 몹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하나 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밝고 투명하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무를 보는 것이다. 눈이 멀어서 대상을 볼 수 없을 때, 무를 보거나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엑카르트는 설교 12에서 부정의 길을 전개하면서 하느님을 일컬어 “이름 없는 무” 라고 불렀다. 무를 볼 수 없는 자는 이름 없는 무, 곧 하느님을 볼 수 없다. 대상은 우리의 눈을 가려 아무개가 아닌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느님만이 이름 없는 무인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의 영혼도 이름이 없다. “하느님의 성전인 사람의 의식도 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지성은 존재의 반대쪽이며 비존재의 형태를 띤다 "왜냐하면 지성은 존재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지성은 대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보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보편들은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성의 산물은 ”비존재”다. 엑카르트는 철학적 노작 <파리 문집>에서 다움과 같이 말한다. “지성에 속한 것들은 자체로는 비존재다." 지성이 존재에게 단단히 묶여 있다면 그런 지성은 존재를 숙고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은 무다”라고 엑카르트는 잘라 말한다. 카푸토는 “지성이야말로 존재를 알 수 있는, 더없이 개방된 능력이다”라고 논평한다. 지성은 순수한 잠재력이다. 지성이 아무개를 알 수 있는 것은 지성이 아무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그것이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답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넘치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가 그랬듯이, 엑카르트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잠재력이 들어 있다고 잘라 말했을 것이다. 우리 안에 무가 들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289)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올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저는 마리아께서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씀하셨을 때의 마음을 지니고 싶나이다. 이제 당신 사랑 속에서 성부와 당신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나이다. 하느님의 뜻에 저항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온전히 당신께 협력하고 싶습니다. 오, 예수님! 저는 당신이 주시는 은총의 시간을 온 마음 다해 감사하게 받이들이며 기꺼이 따를 것을 약속합니다. 당신이 제 인생 계획을 갖고 계심을 믿습니다.
0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며 당신의 계획 속에 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계심을 믿나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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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 [fisherpeter] 241203. 00:47 ㅣNo.178128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양대 산맥으로 구성돼 있는 듯합니다. 정의로운 판단과 판결은 어떻게 해서 나오는가 하는 주제로 함축시켜서 묵상하다 보면 새로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생활묵상 글 하나를 올리게 됐습니다. 그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다시 한 번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자 합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을 듣고 싶어합니다. 인지상정입니다.
오늘 복음을 큰 틀에서 보면 지혜와 슬기가 충만한 자와 철부지를 대비시키고 또 보는 눈과 듣는 귀를 대비시켜 전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흥미롭습니다. 왜 당신께서는 성부 하느님께서 철부지 같은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시고, 지혜롭고 슬기를 가진 자들에게는 감추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슬기로운 자들에게 무엇을 드러내 가르치셔도 가르치셔야 하는 게 보통의 상식으로 이해를 했을 때 수긍이 가는 대목이라 그렇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될 때는 역발상을 하면 해답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과 복음은 누가 더 잘 이해를 하고 다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그냥 통상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신앙과 복음을 말합니다. 지식이나 학문적인 면에서는 아무래도 좀 더 지적인 사람이 더 잘 이해를 하고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과 믿음은 머리로 이해를 잘 한다고 해서만이 신앙이 훌륭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지요? 저는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는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좀 안다고 하는 자만이라든지 이런 교만이 자칫 신앙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식이나 지혜가 필요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혜가 지식이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려고 할 때 겸손한 자세로 잘 받아들인다면 그처럼 금상첨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있으면 이건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사람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군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이걸 뭔가 과시하려고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아니면 실제 의식을 하면서 남에게 가르쳐준다고 하는 형식을 취하려고 하는 교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다는 게 실제 숨기려고 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드러낸다고 해도 그걸 잘 받아들이고 하면 문제가 없을 텐데 오히려 조금 전에와 같은 그런 교만이 있게 되면 그 교만이란 것 때문에 진실된 복음의 가치를 자칫 잘못 볼 경우가 있고 그게 잘못 전달될 수가 있어서 어쩌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숨겨질 수가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한 가지 역으로 말해 왜 철부지에게 드러내실까 하는 점을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철부지에게 드러내면 공염불에 불과할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철부지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
흰색 도화지처럼 그 도화지에 뭔가 그리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준주성범에도 있습니다.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이와 같은 사람이 더 잘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때가 안 묻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좀 안다고 했을 때 마치 그 조금 아는 알량한 지식으로 남보다 좀 더 잘 안다고 해서 마치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오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신앙과 복음은 순수해야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순진하다는 말은 원래는 좋은 뜻이지만 이게 시대가 변화면서 좋은 뜻으로만 사용되는 게 아니고 부정적인 뜻으로 약간 변질된 면도 있습니다. 약간 멍청한 면이 있다는 것처럼 그런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보면 설령 요즘 세상에 그런 면이 있다고 해도 신앙과 복음은 그런 사람이 어쩌면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확신이 강합니다.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을 이해해야 할지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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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그리스도의 향기로 땅 끝까지 복음을 /
박윤식 [big-llight] 2024-12-02 ㅣNo.178126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오늘날의 에스파냐 북부의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아홉이 되던 1525년에 몰락한 가문을 살리기 위해 프랑스 파리(Paris)로 갔는데, 우연히 예수회의 설립자인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나이가 많은 성 이냐시오는 하비에르가 사제가 되기를 바랐지만, 몰락한 가문을 세우기 위해 세속적 출세를 열망하던 그를 설득할 수 없었지만, 후에 성 하비에르도 생각을 바꾸어 예수회의 설립회원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들은 정결과 청빈 서원을 하고 새로운 수도회인 예수회를 설립하였었다. 그리하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인도로 파견되었다. 그는 인도에서 병자와 죄수들을 찾아보는 일과 어린이의 신앙교육 및 그곳에 있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비도덕성을 바로잡는 일에 착수했다. 그 후 그는 인도의 북부는 물론 남부 여러 곳을 사목하여 수천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1551년에는 일본까지 왕래하며 왕성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후 그는 ‘인도와 그 너머의 나라들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일본에 이어 중국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을 향하던 중 샹추안 섬에 도착했지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3일, 중국 본토가 보이는 그 섬에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거기 묻혔다가 포르투갈을 거쳐, 인도 고아의 봄 예수 성당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흔히 그는 바오로 사도 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성인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그가 개종시킨 교우 수만 해도 1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1619년에 의해 시복되었고, 바로 이어서 1622년에 의해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셨다. 그리고 되살아난 당신을 본 많은 이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면서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많은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한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그 후 제자들은 떠나가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할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것은 당신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다. 사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며, 선교를 하지 않을 경우 참으로 불행할 것이라고 고백한 바가 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하도록 이끌어주기 위함일 게다.
따라서 우리 모두도 선교의 수호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본받아 땅 끝까지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한다. 아프리카 오지 톤즈에서 순박한 이들에게 쫄리 신부로 영원히 기억되는 될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님의 선교 활동이 그 좋은 본보기다. 이렇게 각자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묻어난다면 그게 선교에서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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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주일 학교 첫영성체 교리를 하다 보면 예비 신자 어른 교리 반과 사뭇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성호경과 기도 손 하는 법, 기도문을 가르쳐 주면서 외워야 한다고 하면, 아이들은 다음 날부터 기도 손을 하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합니다.
서로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걸 어떻게 다 외운대요? 부담돼서 세례 못 받겠네요.”라는 말부터 꺼냅니다.
첫영성체가 끝나면 아이들은 복사단이나 전례 봉사를 하고 싶어 하고, 대부분 제단에서 봉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세례 받고 난 뒤 봉사를 권유하면 바빠서 못한다고 하거나 오히려 냉담을 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교리와 기도문과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는데, 아이들과 어른들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에서 “철부지”(루카 10,21)로 옮긴 그리스 말은 ‘매우 어린 아이’나 ‘유아’를 뜻합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부모의 말을 계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우리도 철부지처럼 단순하게 하느님을 따르면 어떨까요?
세상살이에서 얻는 지혜와 슬기가 하느님께 가는 발걸음을 멈추게 할 때마다,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먼저 선택할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하루의 일과에서 기도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될 때, 감추어 있던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에게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10,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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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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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사람들을 구분하십니다.
한쪽에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철부지들.
복음의 마지막에서 이 구분은 한 번 더 나타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을
제자들과 구분하십니다.
오늘의 주제는 드러내 보여주심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에게는 보여주시고
누구에게는 감추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가운데 부분을 보면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은
선택 받은 이들에게만 가능한 것처럼 나타납니다.
물론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
누구만 선택받고 누구는 제외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가오시고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은
그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이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어떤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근거 없는 상상이 아니라
성경에 바탕을 둔 생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가 말하는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 모습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 앞에 나타난 메시아는
약한 아기의 모습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자신들의 생각과 달랐기에
그런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의 안타까움은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모습도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지혜는 성경의 일부분만 가지고 말하는
불완전한 지혜입니다.
자신들이 잘 모를 수 있다는 것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에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행복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느님을 만나려는 의지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만나려는 노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남은 나 혼자 찾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즉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노력
드러내 보여주시는 하느님과
찾으려는 인간이 함께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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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 23)
기다림 끝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행복을 보고
행복을 만나는
행복한
대림시기입니다.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행복이
시작되었습니다.
행복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먼저
살아가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참된 행복이
되십니다.
행복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드디어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때를
바라보고
만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미처 알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사람이 되시는
예수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더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선하신 삶의
방향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잊어버린
사랑과 행복을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시고
드려주십니다.
행복을 되찾는
철부지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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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성탄 전까지는 보통 저희 피정 센터가 살짝 비수기여서 조금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림 시기가 시작되다 보니, 특강 성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태안에서 남도 이쪽으로, 서울로, 서울에서 반대쪽 남도 쪽으로...
폐차장으로 갈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저를 아직도 불러주시니 크게 감사하며 다니고 있지만, 몸이 옛날같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이도 다녔으니 이제 하산이나 은거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갈등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복음 선포자로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셨던 바오로 사도, 주치의로부터 몸 상태가 더 이상 기워입을 수 없는 낡은 코트 같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도
죽기살기로 뛰어다니셨던 돈보스코를 생각하면,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도 큰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은퇴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도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당신이 만나고 체험한 그 좋으신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교통편이라고는 목선밖에 없던
그 옛날 인도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근처 몰루카 제도, 필리핀 근처 모로타이, 그리고 일본까지 건너오셨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먼 거리를 여행하셨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동행한 페르난데스 수사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일본 선교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 눈보라, 예측할 수 없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아무리 극심해도 하비에르 신부님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이동할 때면 해적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산길을 걷다가 거친 눈보라와 살을 에는 칼바람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발은 퉁퉁 부어올랐고, 더 이상 걷지 못해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만나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그리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일분일초도 아끼지 않고 복음 선포에 매진했습니다.
인도에서 일본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은총을 선물로 주고 난 그는 그것도 모자라 또 다른 미지의 땅인 중국으로 건너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중국 코앞 산첸섬에서 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과도한 복음 선포로 인한 열병이요 과로사였습니다.
“만일 제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저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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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제자들의 전도사업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과 업적들을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하였다. 자신의 교만과 오만에 빠져 주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분을 배척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7) 하신다.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스승님은 제자들을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철부지들이란 어린이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따르며 실천하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그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얕은 지식으로 신앙을 논하며, 거부하며,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믿음에 관해 이야기도 못 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태양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등불을 가지고 그냥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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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듣는 마음을 어떻게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또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셔서 펼치시려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명확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철부지들을 가려내셔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철부지들을 선택하셔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모님의 유럽 발현지 중 가장 큰 두 군데는 루르드와 파티마입니다.
어른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어린이들입니다.
루르드에서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녀의 나이는 14살이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에게 무조건 순종할 수 있는 아이를 택하셨습니다.
더러운 물을 마시고 손으로 구덩이를 파서 샘물이 나오게 할 아이입니다.
어른들은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어른이에요!”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자신의 뜻이 있습니다.
파티마는 어떻습니까? 루치아 10살, 프란치스코 9살, 히야친타 7살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지 못하는 어른들의 박해를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수만 명이 하늘의 기적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어른들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잃을 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오랜 전쟁을 바꾼 잔 다르크도 있습니다.
그녀가 성 미카엘에게 사명을 받은 것은 13세,
전쟁에 나간 것은 16세였습니다.
어린이들은 순종합니다.
잃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종교 심리학자 스펜서(Spencer) 박사가 1,000명을 대상으로 몇 살에 하느님을 깊이
체험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548명이 20세 이전에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337명이 20세에서 30세 사이에, 96명이 30대에, 그리고 40대에 종교체험을 한 이는 불과 15명, 50대에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4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왜 어릴수록 주님을 만나기가 쉬울까요? 주님을 만나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애가 되는 것은 분명 철부지로 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무엇일까요?
바로 재산과 쾌락, 권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추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추구하면 뭐가 안 좋을까요? 본인이 ‘어른’이라고 믿게 됩니다.
어른은 자신이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조언이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의 조언에 귀를 막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갖은 좋지 못한 감정들입니다.
후회하고 걱정하고 우울하고 공허합니다.
한 마디로 어린이 때의 기쁨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지는 것과 먹는 것과 강해지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가난을 주장하다가 가족을 다 굶겨 죽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임을 고백하면 됩니다.
이 균형을 지켜야 합니다.
이카루스 신화는 특히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할 때 교만과 오만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이야기입니다.
이카루스는 크레타섬에 미궁을 만든 뛰어난 장인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의 아들입니다. 미노스 왕의 총애를 잃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는 미궁에 갇히게 됩니다.
탈출에 대한 절박함 속에서 다이달로스는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두 세트의 날개를 만들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이카루스에게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날라는 명확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습기로 인해 날개가 손상되고,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열에 밀랍이 녹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바다 위로 날아오르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카루스는 비행의 자유와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한때 순수하고 순종적이었던 그의 마음은 교만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기쁨과 탁 트인 하늘의 아름다움은 그를 천하무적처럼 느끼게 했고, 마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오만이 커진 그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늘에 닿아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태양에 더 가까이 다가가자 열이 그의 날개를 묶고 있는 밀랍을 부드럽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깃털은 하나씩 떨어져 나갔고, 이카루스는 자신의 자존심이 가져온 결과를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의 날개는 부서졌고 그는 바다로 뛰어들어 지금은 그의 이름을 딴 이카리아 해에 익사했습니다.
여기에서 날개는 바로 우리를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돈과 쾌락과 명예입니다.
없어도 죽고 통제하지 못해도 죽습니다. 이것을 준 분께 순종할 수 있을 정도만 가지고 이용하여
중용을 지켜야 합니다.
버리지도 말고 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철부지의 모습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것을 잘 통제할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십일조’였습니다.
십분의 일을 바치며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스스로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십분의 구를 가지면서도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신 사랑의 규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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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1-24)”
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고, ‘철부지들’은 소외계층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인간 세상에서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고 구원받는 것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고,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그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 것을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기득권층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고 자기를 낮추면...
‘철부지들’을 넓은 뜻으로 ‘영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즉 죄인들도 포함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곧 ‘나의(우리의)’ 감사기도입니다.
“보잘것없는 죄인일 뿐인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구원의 길로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대림 시기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죄인일 뿐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시는 것에 감사드리는 시기이고, ‘나를’ 구원하려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더 잘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인간들이 자랑하는 학식, 학위, 명예, 재산, 지위 같은 것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내세우면서 잘난체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자신을 낮춘다는 말은, 높은 사람인데도 낮은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진심으로, 진실하게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그곳에서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룰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특별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3)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인간들을 심판하거나 구원하는 일에 관한 권한을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뜻입니다(요한 5,22).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에 연결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특정 인물들만 따로 선택하셔서
그들만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알다.’는 ‘아버지와 일치를 이룬다.’,
즉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23절-24절의 말씀은, 메시아를 기다리기만 했다가 고성소에서 구원받은 구약시대 사람들과는 다르게, 메시아를 직접 만나고,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직접 받게 된 신약시대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당신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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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21-24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봐야 할 것도 많고 들어야 할 것도 많습니다. 오죽하면 ‘정보의 홍수’ 속에 산다고 말할 정도이지요. 그래서 그럴까요?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는 분주하게 챙기면서도 정작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는 인색합니다. 주(酒)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술집을 찾고 사람들과 어울려 유흥을 즐기는 것은 좋아하지만, 주(主)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성전을 찾아 기도하고 미사 드리는 시간은 아깝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에는 주님에 대해 알고 싶은, 그분과 참된 일치를 이루고 싶은 영적 갈망을 지니고 있지요. 참으로 모순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모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귀를 쫑긋 세워 그분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귀가 밝아도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 해당하겠지요. 그들이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깊은 사랑의 신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하느님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착각이 교만이 되고 고집이 되어 나중에는 하느님의 참모습에 대해, 그분께서 마음에 지니고 계신 참뜻에 대해 알려주어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겁니다. 자기가 단편적으로 아는 하느님의 모습이 그분의 ‘전부’라고 오해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어른들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고 무시하는 어린 아이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들은 편견이나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고 순수하게, 하느님을 자기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그분의 ‘전부’가 아님을 솔직히 인정하며, 자기 앎이 지닌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이 하느님과 그분 뜻에 대해 증언하는 이야기들을 귀기울여 듣고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그분 뜻에 대해 누구보다 넓고 깊게 이해하여 그분 섭리와 신비를 알아보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뽑으신 제자들이 바로 그런 ‘철부지’들입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주님께 대한 믿음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던 ‘대책 없음’ 덕분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은 ‘어리숙함’ 덕분에, 삶에서 참으로 중요하고 귀한 것들을 알아보고, 구원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주님 말씀을 알아듣게 되었으니 그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진짜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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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의 영에 대한 말씀을 전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이사 11,1-2)
메시아 시대에 예언이 성취되는 것은 정의와 신의를 세우고 서로 대결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강자가 약자를 죽이지만 그 때에는 강자와 약자가 없는 평화가
가득한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늑대와 새끼 양, 표범과 새끼 염소, 송아지와 새끼 사자, 암소와 곰,
아기와 독사, 살무사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는 시대를 설명합니다.
이어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날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10절)
루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신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철부지라고 낮추시면서도 또한 그들을 신뢰하며 사랑하시는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23-24절)
구약의 어떤 왕도, 그리고 내 놓으라고 하는 성경학자도 결국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지만 제자들은 매일 주님과 함께 보고
생활하고 있으니 사실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요란법석을 좋아합니다. 또 그 안에서 자기를 돋보이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요.
자신을 철부지처럼 내려 놓으면 바로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세상은 그 진실을
알지 못해서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보다 오히려 호렙산의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낮은 데로 물이 흐르고 강물이 흐르는 이치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물은 낮기 때문에 산과 계곡을 돌아 흐릅니다. 낮을 수록 더 많은 물이 흐르고
끝내는 끝없는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데에 분쟁이 있고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깨트리고
분노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루터기는 끝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사이
그루터기에서 햇순을 나게 하시고 그 위에 당신의 영이 머루르게 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주님의 제자들은 무식하고 막되어 먹은 사람들인
철부지인 것입니다.
제자들의 겸손 위에 주님의 사랑이 머물고 그들 위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오늘 하루, 낮음을 사랑하고 미천한 것을 살피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대림시기를 보내며 고요 속에서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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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철부지로 살아가는 행복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인 메시아 위에 주님의 영, 곧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이 머물게 될 메시아 시대를 노래합니다(11,1-2). 그 시대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왔고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유다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잘 모르거나 알면서도 잘 지키지 않는 무식한 철부지들인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신 하느님께 기쁨 가운데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루카 10,2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신뢰와 존경을 드러내시고,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 고백하며 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니다(10,21).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주도권을 인정할 때 순수하고 참된 감사가 우러나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0,21) 하시며 당신이 행하신 모든 업적을 하느님께 돌려드립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0,22).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알아보지 않고서는 행복을 누릴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들에 비추어 삶을 성찰해봅니다. 지식정보 시대인 오늘날처럼 수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유익하고 필요한 것처럼 보여도 탐욕과 타락을 부채질 하는 정보도 많고, 왜곡되거나 그릇되고 거짓된 정보들도 넘칩니다. 이런 지식들이 진정 하느님을 보는 눈을 열어주고 사랑의 지혜를 깨우쳐주지 못합니다. 영적 지혜도 자기만족과 이득을 얻는데 악용되기도 합니다.
마치 환자가 인터넷에서 본 의학상식과 정보를 가지고 의사에게 따지듯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두뇌 게임’을 하거나, 하느님의 힘이 아닌 세상 지식에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찬찬히 되짚어보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더 열심히 추구해야 하는 건 하느님을 아는 지혜임을 상기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려면 참으로 그런 세상의 지식들을 내려놓는 무장해제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3,19) 하느님 앞의 철부지란 성 프란치스코처럼 복음 말씀을 해석 없이 단순하게 받아들여 철저히 사는 그런 순수함을 지닌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 사람은 자신이나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살기에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리는 메시아의 시대를 '지금, 여기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철부지들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자신이 행하거나 이루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도구삼아 이루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행하시므로, 어떤 순간에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길 줄 아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한 철부지일 것입니다.
머리속을 채우는 지식과 경험의 껍데기 속에 갇힌다면 번민과 걱정 근심, 그리고 욕망의 회오리에 휩싸이고 말 것입니다. 세상 지식 뿐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교만은 더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10,23)라는 예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복한 철부지가 되어 주님을 기다리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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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밝고 경쾌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퍼집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 10,21).
이 말씀에 머무르는데 예수님의 기쁨이 전해지는지 입꼬리가 올라가며 마음에 흥이 일어납니다. 문맥으로 보면, 파견하셨던 일흔두 제자가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기뻐하며 성과를 아뢰자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깨닫는데 있어서 아직 많이 미숙하고 부족한 제자들입니다. 오죽하면 "철부지"(루카 10,21)라 표현하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만큼 주님께 철저히 의탁하는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가 철부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기쁨에 차 성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일치를 이루는 이때는 신적 희열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드러난 신비적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채 그분의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영웅적 메시아가 아닌, 근본마저 모호한 떠돌이 가난뱅이 설교가에게서 하느님의 현존을 관상하는 은총을 받았으니까요.
제1독서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노래합니다. 이사이의 아들 다윗이 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끌었듯이, 새로운 다윗이라 할 수 있는 메시아를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이사11,1)의 이미지로 연결짓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아 위에는 "지혜, 슬기, 경륜, 용맹, 지식, 경외"라는 주님의 영이 머무릅니다(이사 11,2 참조). 그리고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이사 11,3)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 안의 예수님처럼 말이죠.
그가 이룰 정의와 공정, 신의와 평화의 세상은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따사롭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대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영혼에 온기가 돌고 마음이 활짝 펴질 정도지요. 누구도 누구를 해치거나 긴장시키지 않습니다. 억압도 폭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천적이라 일컫는 존재들이 함께 뛰놀고 장난치고 뒹굴며 창조의 본성인 사랑을 회복합니다. 그날에는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11,9).
주님을 알면 평화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툼, 경쟁, 폭력, 억압에 무능해집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체험하고 사랑하며 그분을 닮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주님을 아는 이는 별볼일없는 존재로 뒤쳐질 수도 있겠네요. 세상은 "철부지"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으니까요.
메시아가 오시어 구원된 세상은 결국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성공 논리가 아닌 십자가 논리가 주도하는 나라,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가느라 앞다투어 사랑하고 희생하는 나라, 그래서 약육강식의 위계가 자취를 감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초라한 마굿간, 구유 안에 누운 한 아기에게서 봅니다. 저 높고 화려하고 견고한 성 안에서가 아니라 가난과 약함의 현장 한가운데서 발견합니다. 이렇듯 가장 연약한 모습에서 메시아를 알아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한"(루카 10,24)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의 존재 속 가장 약한 부분에 오십니다. 우리 공동체 안의 가장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버림받은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철부지들이 가슴 쭉 펴고 활짝 웃으며 당당히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때가 메시아의 시대이고 구원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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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여호와의 길로 걷는 지혜로운 삶
<2024.12.3> 아침을 여는 묵상 (호 14장 1~9절)
❝여호와의 길로 걷는 지혜로운 삶❞
❚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지혜로운 자를 기쁘게 여기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 지혜로운 자의 삶의 길은 어떻게 얻습니까?
➲ 믿음의 성공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에 있습니다(1~3절).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의함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은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신실하신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형식적인 제사가 아닌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며, 앗수르와 같은 이방의 손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우상을 섬기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만이 그들이 살길임을 하나님은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1~3절).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는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서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분명한 뜻이 담긴 의지와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진정한 의미에서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작은 잘못 때문에 망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함에도 다른 것들을 의지하려 하고, 가장 귀한 말씀을 팽개치고서 세상의 이득만 소중하게 여긴다면 신앙인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단과 행동이 수반되는 전인격적인 변화가 있는 회개야말로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훅’하고 내 안에 들어와 나로 하여금 죄악에 사로잡히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날마다 내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고, 바른 믿음의 길을 걷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있습니다(4~7절).
하나님은 끝끝내 하나님의 품을 떠나 버렸던 그들의 죄악과 불신의 병을 치료해 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4절). 이슬처럼 그들 위에 내리시므로 당신의 백성들을 소성시키시고, 아름답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생명의 원천이 되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름답고 향기 나는 삶으로 인도해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풍성한 곡식과 아름다운 꽃이 피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유명해 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7절).
하나님 안에 거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 되고, 삶의 풍성한 열매를 얻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유익과 풍성함은 한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만 은혜를 구합니다. 은혜가 임할 때, 모든 두려움과 공포, 불안, 초조, 좌절감등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면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받아 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사랑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답게 꽃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은혜를 더욱 견고하게 하여 받은 은혜를 다른 자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기쁨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지혜의 출발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에 있습니다(8~9절).
백성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열매를 주는 ‘푸른 잣나무가’가 되실 것이요, 그리하여 당신의 신실한 백성들을 돌보시기로 약속시면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8절).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마음에 새겨두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길은 올바르기 때문에 의인은 그 길을 따라 살지만,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질 것(9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생명의 열매를 언제나 맺게 해 주시겠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우리의 신앙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하나님만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삶의 자리에서 나타내도록 말씀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두 길만이 존재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주님은 나로 하여금 의인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선택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습니다. 내 의지, 내 뜻을 앞세우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눈 앞에 펼쳐진 길이 거칠고 험하게 보여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길이 가장 복된 길임을 다시금 결단해 봅니다.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가장 귀한 말씀을 팽개치고서 세상의 이득만 소중하게 여기는 불순종의 삶을 버리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인생의 진정한 성공과 복과 풍요를 얻도록 말씀으로 돌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호 14: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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