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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실라가 투옥되다
행 16:16-25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16-25 /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가에 있는 기도처로 가다가 우리는 악령에 사로잡힌 나이 어린 여종 하나를 만났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고 있었다. 17) 그런데 그 여자가 따라오면서 `하나님의 종이신 이분들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을 길을 알려 주러 오셨다!' 하고 큰소리로 외쳐 댔다. 18) 그 여자가 매일같이 이렇게 따라다니며 소리 지르자 바울은 더 참지 못하고 그 여자에게 붙어 있는 악령에게 호통을 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령한다. 이 여자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그 순간에 악령이 나가 버렸다. 19) 이제 돈벌이 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그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에 있는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하였다. 20-21) 그들이 소리쳤다. `이 유대놈들이 우리의 도시를 망치고 있소. 이자들은 로마 법률에 위반되는 것들만 가르친단 말이오.' 22) 갑자기 몰려든 군중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들과 합세하여 바울과 실라에게 욕설을 퍼붓자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채찍으로 매질을 하라고 부하에게 명령하였다. 23) 사정없이 내리치는 채찍에 등이 벗겨지고 피가 흘러 내렸다. 치안관은 두 사람을 감옥에 처넣으면서 만약 그들을 놓쳐 버리는 날에는 목숨이 붙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간수에게 을러 댔다. 간수는 24) 바울과 실라를 제일 안쪽에 있는 깊숙한 감방에 집어넣고 발을 차꼬로 채워 놓았다. 25) 한밤중에 다른 죄수들이 듣고 있는 가운데 바울과 실라가 주께 기도와 찬송을 드리고 있을 때였다.
바울과 일행은 기도하는 곳을 가다가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납니다.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었으나 원치 않는 핍박을 당하고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자유케 하다(16-18) 바울 일행은 기도하는 곳을 찾아갑니다. 그곳으로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점으로 사람들의 운이나 앞날을 예언해 주고 주인에게 물질적인 이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 일행을 쫓아다니면서 그들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며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귀신은 바울 일행이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알면서도 믿지 않는 삶, 앎과 믿음이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앎은 진실된 앎이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 일행을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바울은 심히 괴로워 그 귀신에게 그 여종에게서 나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귀신은 대항하지 못하고 즉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여종은 귀신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다(19-25) 이런 사실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귀신 들린 여종을 둔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이익이 끊어졌습니다. 주인은 바울 일행을 붙잡아 장터로 끌고 갔습니다. 바울 일행을 고소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이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말함으로 민족적/인종적인 반감을 갖게 합니다. 대략 1년 전에 황제 글라우디오가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을 축출하라는 칙령을 내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매우 나빴을 것이고 그들은 지금 이런 약점을 이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사람’과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들은 유대인들에 비해 민족적으로 뛰어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21). 빌립보 성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에 대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매로 치라’는 판결을 내리고 형벌을 가합니다. 그리고 옥에 갇힙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 가운데 이런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고, 유대인들에게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 11:24-25).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털을 깎는 자 앞에 서 있는 어린 양처럼 자신을 위해 한마디 변론도 하지 않았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적용: 바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 부분에 대하여 나누어 봅시다.
평생 힘겨운 가난 속에서 고생하며 노력해온 한 청년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방문판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물건을 팔기 위해 한 노인의 집을 방문한 청년은 그 집 거실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고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썰물로 바닥이 드러난 쓸쓸한 해변에 초라한 나룻배 한 척이 쓰러질 듯 놓여있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은 어딘지 우울한 기분마저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 아래와 같이 짧은 글귀가 있었습니다. '반드시 밀물 때는 온다. 바로 그날, 나는 바다로 나갈 것이다.' 그 청년은 반드시 밀물이 온다는 글을 자신의 생활신조로 삼아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어떤 고난에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희망을 성취하며 살아온 청년은 바로 미국의 유명한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였습니다.
< 설 교 >
고난의 밤에 이렇게 하라
행 16:16-34 / 김양인 목사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린 한 여종을 고쳐 주었는데, 이로 인해 그 여종의 주인들에 의해 고소를 당했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도는 관청에 붙잡혀 가서 많은 매를 맞고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러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일로 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주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이튿날 두 사도는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인생에서 고난의 밤을 만났을 때 성도들이 행할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평생을 평안하게 살기 원하지만, 인생사가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노라면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많이 만납니다. 왜 인생에 고난이 다가오는 것일까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담의 타락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결과 죽음과 저주와 질병과 가난이 생겨났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낙원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욥기 5장 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같으니라” 하신 대로,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은 다 같은 것이 아니며 원인에 따라서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각 사람은 자기의 범죄로 인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 가운데는 개략적인 이유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법과 질서를 어겨서 교도소에 갇힌다거나 술이나 마약에 빠지거나 무절제한 생활을 해서 폐인이 되어 고생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서 징벌을 받기도 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고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한 것이 여기 해당합니다. 다윗은 신실한 신앙인이었으나 밧세바의 일로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생각으로,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짓되,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고난을 받을 때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 있거든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기도에 언급한 대로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지만(왕상 8:46), 중요한 것은, 범죄했을 때 곧바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여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2. 애매히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누구나 소시 적에 학교에서 단체로 벌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학급 비품을 망가졌는데 범인이 자수하지 않을 때, 선생님은 같은 반 아이들 모두에게 벌을 줍니다. 그럴 경우에 대다수의 아이들은 잘못도 없이 벌을 받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가 애매히 고난을 받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 우리는 IMF위기로 온 국민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IMF위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대다수의 국민이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 역시 애매히 고난당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권고하기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벧전 2:19)고 하였습니다. 애매하게 받는 고난일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써 참고 견디면 은혜로운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조국 유다의 멸망과 관련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고난 받아야 할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던 왕과 귀족들과 신하들과 백성들이었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던 예레미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고난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예레미야였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그를 미워하여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원망 불평하지 않고 이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애 3:26-28) 그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애매히 고난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원망, 불평하지 말고 마음을 낮추고 조용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3. 선을 행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여종을 사로잡은 귀신을 쫓아내서 온전하게 만들어준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종의 주인들에 의해 관청에 고발당하여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 받는 성도님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는 교회를 섬기는 일 때문에 고난을 자초하는 성도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거든 바울과 실라처럼 기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기를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으면 주님과 함께 영광도 받게 될 것을 믿고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1. 숙명론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시련을 만나게 되면 팔자소관으로 여깁니다. 전생의 업보를 받는다고도 말합니다. 또는 운수가 나빠서 그렇다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체념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은 운명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공중을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라고 하였고, 잠언 16장 9절에 이르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일은 우연이거나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원망,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나 고난이 중첩되면 원망, 불평하기 쉽습니다. 자기에게 어려움을 안겨준 사람들이나 부조리한 사회를 원망합니다.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고난이 닥치는 것이 무엇이냐고 불평을 토로합니다. 심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망, 불평을 한다고 고난을 없앨 수 없으며,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시편 37편 8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바로를 굴복시키시고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으나 그들은 도무지 감사할 줄 모르고 사사건건 원망,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홍해 가에 당도하였을 때 애굽의 마병들이 추격해 오자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기를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광야 길을 가던 중에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먹을 것이 만나밖에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드디어 가나안 접경지대에 와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에 파송하였습니다. 40일 후에 그들이 돌아와서 모세와 백성 앞에서 보고회를 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믿음으로 “우리가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하자”고 희망찬 보고를 하였으나 열 정탐꾼은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백성들을 낙심케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회중이 소리 높여 울부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고 하는가 하면, 급기야는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사사건건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진노하셔서 출애굽 1세대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의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2세대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붙잡혀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나 조금도 원망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이방인들 앞에서 두 사도가 하나님의 일군인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 보이셨으며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고난의 시기에 두 사도처럼 기도와 찬송 생활에 힘씀으로 위대한 승리를 경험해야 하겠습니다.
3. 자포자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경제적인 위기에 내몰려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희망을 상실하고 자포자기한 사람들입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났을 때 그는 너무나 낙심한 나머지 분별력을 상실해서 그만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습니다. 가죽 부대의 물이 다 떨어지니 어린 이스마엘이 목이 말라 죽어갑니다. 하갈은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멀찍이 떨어져 마주 대하여 앉아서 방성대곡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사자가 한 일은 먼저 하갈에게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의 눈을 밝혀주시니 가까운 곳에서 샘물이 솟구치는 것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의 밤에 우리는 소망을 붙잡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인들은 물질적 번영에 도취되어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몰두해 왔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백성들의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번영할수록 신중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져야지, 내일에 대한 꿈을 상실한 사람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 하는 것처럼 절제 없이 살면 안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많은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힌 암담한 형편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았으며, 밤중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이처럼 두 사도가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을 때 놀라운 기적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이제, 고난의 때에 힘써서 해야 할 일이 무언인지 알아봅시다.
1.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고난의 시기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때입니다. 평안할 때에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믿음이 큰지 작은지 잘 알 수 없지만, 고난을 당하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 영광스런 이름을 얻기까지는 불같은 시험을 통해서 믿음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그는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삭은 보통 아들이 아니고 그의 대를 이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할 유일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니 이처럼 어려운 시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시는 곳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산에 이르러 하인들을 남겨두고 이삭과 단 둘이서 산위로 올라가서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고 독자 이삭을 결박하여 그 위에 놓고 칼을 빼서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일생일대의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불러 그의 행동을 중지시키시고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아무리 크고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지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로부터 확인받는 그 순간부터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했을 때 사람들에게 하소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호소해야 합니다. 시편 146편 3절, 4절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기도했습니다. 많은 매를 맞았으니 온 몸이 아프고 쓰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참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고난의 시기는 우리가 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는 절호의 기회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평안한 때에도 기도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고난의 때에 더 많이 기도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고난의 때에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크고 작은 문제가 산적해 있으므로 평상시보다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구세군의 창시자인 월리암 부스 대장은 말하기를 “당신은 기도할 때 거기에 생사가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은 여호와의 사자와 더불어 밤을 새워 생사를 건 씨름을 한 결과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을 얻었으며, 홍해 가에서 모세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자손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앗수르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서 눈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대군을 치셔서 18만 5천명이 몰사함으로 유다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허공을 울리는 메아리가 아니고, 독백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과 필요를 아뢰고 도우심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기도 시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복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당면한 고난을 해결받기 위해서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바울과 실라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3. 찬송해야 합니다.
고난의 밤에 성도들은 기도와 더불어 찬송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칠흑 같은 감옥에서 신음하는 대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감옥의 모든 죄수가 다 듣도록 큰소리로 찬송하였습니다. 찬송은 곡조 붙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십니다. 고난 중에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나 그 때문에 누구보다도 많이 기도하고 찬송한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42편 5절에서 다윗은 그의 찬송 생활에 대하여 이와 같이 노래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마음이 낙심되고 불안에 떨게 될 때, 다윗은 하나님을 앙망하고 오히려 찬송함으로 그 상황을 변케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눌려서 기도가 나오지 않거든 먼저 찬송을 부르십시오. 찬송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셔서 기도하기에 합당한 마음 상태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한편, 찬송은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여호사밧이 남왕국 유다를 다스릴 때, 모압 자손이 마온 사람과 함께 유다를 침공하였는데, 유다는 적을 물리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신앙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이 행할 바를 지시하셨습니다.
이튿날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조직해서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성가대가 찬송을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적군이 서로 맹렬히 싸워서 다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성도님들과 맞선 고난이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두려워 마시고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위대한 구원을 체험케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실라가 고난의 밤에 기도하고 찬송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놀라운 구원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굳게 닫혔던 옥문이 다 열리고 발을 묶은 차꼬가 다 끌러졌습니다. 졸던 간수가 지진에 놀라 깨어나 보니 옥문이 다 열려져 있는지라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검을 빼어 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바울이 크게 외치기를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하였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밤에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간수를 사랑하셔서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두 사도에게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번 일로 인해서 이제 겨우 시작되었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큰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만났을 때 여러분은 어떠한 태도와 반응을 나타내십니까? 어리석은 자들과 같이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하고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성도님들을 부자유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것들을 풀어 주시고, 에워싸고 있는 모든 문제의 감옥 문을 활짝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님들을 통해서 불신 가족들과 이웃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신 성도님들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믿음의 기도와 찬송으로 고난의 밤을 기적과 축복의 밤으로 변화시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귀신들린 자의 전도
사도행전 16:16-18 / 이필재 목사
오늘 말씀은 바울 선생의 전도 여행 가운데 이상한 일을 하나 만났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대목이 짧게 16~18절에 나타나있는 것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울 선생은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왔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 빌립보에서 뜻밖에 예비된 사람 하나를 잘 만남으로 유럽 전도의 관문이 순조롭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만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남으로 유럽 전도가 잘 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생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루디아는 재력이 넉넉한 사업가입니다. 그 당시에 그 지역에서 제일 값비싼 생활필수품이 옷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화적으로 그 지역에 염색 공장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색깔을 낼 수 있는 천이 인기가 많아 잘 팔리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것의 총판 같은 것을 루디아가 따냈나 봅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으로 봐서 남편이 없고 혼자 사는 여자이었고 종업원들을 데리고 아주 열심히 사업을 잘하는 사업가로 성공한 그런 사람을 만났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겁니다. 순례 전도자들은 제일 힘든 일이 ‘오늘은 어디에 가서 잠을 자야 하나?’ 호텔에 가서 잠자면서 순회 전도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전도대를 파송할 때는 “가서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집에 들어가서 자라. 만약 영접하지 아니하면 발의 먼지까지 떨어버리고 나와라. 영접하는 자를 찾아라!” 그렇게 일종의 자비량 전도 방법을 가르쳤잖아요? 이것을 ‘Tent makin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Tent making을 했지 않습니까? 텐트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벌어 전도를 했는데 유럽 전도에서는 안 벌어도 되었습니다. 왜? 루디아가 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루디아네 집에서 잠을 자고 먹을 것도 거기서 해결했습니다. 하나님이 괜찮은 사업가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셨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이 예비된 사람이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일에 봉사할 수 있게 인도하시는데 이때는 루디아가 장사를 해 돈을 많이 벌게 해 바울 일행을 만나게 하시고 그의 선교 활동비를 다 대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자가 마음을 열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마 바울 일생의 전도 여행 가운데 이때가 제일 좋았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면 부잣집에서 자게 되니 얼마나 정성스럽게 또 잘해주었겠습니까? 정말 아주 좋은 때를 만나 먹을 걱정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유럽에서 잘 전해졌습니다. 루디아의 적극적인 협조로 그의 집을 교회 처소로 사용하고 오랜만에 바울은 편안한 선교자리에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의 개척을 훌륭하게 잘 성취할 수가 있었고 이것이 유럽 전도에 관문이 되었습니다. 혼자 사는 여자가 돈을 그렇게 많이 모았다는 것은 사업도 잘 했겠지만 낭비를 안 했다는 증거입니다. 열심히 규모 있게, 절제 있게 사업을 잘 했습니다. 벌어들인 돈을 낭비하지 아니하고 잘 모았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여니까 그렇게 절약하고 절제 있게 모은 돈도 선교를 위해 잘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럽 전도가 잘 되도록 하나님이 그런 연결을 주셨고 바울 일행은 처음으로 두들겨 맞지 않고 루디아 집에서 풍성한 생활 서비스를 받으면서 아주 신이 났는데 오늘 말씀에서의 사건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여기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였더라”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 문제 발단이 있습니다. 또 다른 여자 하나가 바울 일행을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오지 말라고 해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사람이 있을 때는 너무 신경이 쓰입니다. 조용히 따라오면 좋겠는데 소리 지르면서 따라오니 더 죽을 맛입니다. 먼저 이 여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사실상 매우 불쌍한 여자입니다.
본문에 이 여자에 대한 소개는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귀신 들린 여자입니다.
귀신 들렸다는 말은 일단 정상적 인간 생활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성경에 귀신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목회 경험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간증 거리도 많습니다. 귀신 들린 처녀와 나는 밤새도록 전쟁을 하는데, 나중에는 태권도도 안 배운 여자가 일어나서 발 돌려차기로 나를 차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그랬다가는 또 와서 살랑거리면서 십자가를 가지고 와서 나한테 주면서 하나씩 나눠 갖고 영원히 변치 말자고 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머리채, 멱살을 꽉 잡고서 “너는 나한테 죽었어! 오늘 저녁에 예수의 이름으로 나한테 굴복해야 돼!” 그런데 그 처녀가 나중에 깨끗해 졌거든요? 그랬을 때 내가 이야기를 했습니다.“과거가 기억나느냐?” “다 기억해요. 내가 목사님 발로 찬 것도 기억나고 목사님이 나를 때린 것도 기억나고 말씀하신 것, 얼굴 표정 다 기억나요.” “그러면 그때 왜 그렇게 말 안 듣고 나를 때렸느냐?” 물어봤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엇인가 자기를 붙자고 명령하는 인격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거역하려고 하면 자기는 정신적, 육체적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너무 편안하고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어 어떤 인격체가 시키는 대로 “너 일어나서 발로 저 이 목사를 차라!” 그러면 일어나서 차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한 겁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악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악한 영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나중에는 아주 깨끗하게 나아서 그 처녀는 목사 사모가 되었습니다. 지금 목회를 잘 합니다. 그 후에 몇 번 만나서 지금 어떠냐고 물어보면 “너무 너무 기쁩니다. 그때 있었던 일은 다 기억납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여자는 지금 그렇게 끌려 다니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고 불리는 유다에게 사탄의 인격체가 들어가 버리니까 그때부터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안 하려면 못 견디는 겁니다. 사울 왕은 귀신 도깨비 같은 짓을 날마다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울에게 무슨 신이 들렸다고 했습니까? “악신이 들린지라.” 이런 일이 성경에 나옵니다.
자기의 본뜻이 아닌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여자는 너무 불쌍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몇 가지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힘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강합니다. 그 귀신 들린 처녀와 제가 기도원에 갔었는데 그것을 고친다고 기도를 하면서 집사님, 권사님들이 다섯 명씩 어깨, 머리를 누르고 막 통성으로 기도를 해주는데, 이 처녀가 한번 “으악!”하고 힘을 쓰면 다섯 명이 와다닥 나가떨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처녀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기도 더하고 와!” 힘이 강해서 누구도 정상적으로는 못 당합니다. 그 다음에 지저분한 것을 좋아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온갖 지저분한 것을 귀신같이 만들고 보따리도 더럽게 싸놓습니다. 더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성경에도 “더러운 귀신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떠듭니다. 말을 계속합니다. 뭔 말이 많은지 말을 계속합니다. 잠시도 쉬질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밤을 좋아합니다. 밤에 잠도 자지 않습니다. 이런 특징이 나타나는 게 귀신 들린 사람입니다. 처녀가 이 모양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정신적 자유의 상실자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하고 지저분합니까?
그런데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바울이 맘에 들었는지 계속 따라온단 말입니다. 조용히 있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지르며 따라옵니다. 이 여자는 종이라고 그랬습니다. 종이라는 자체는 자유가 없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의 생을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주인의 생을 내가 대신 살아주는 존재가 종입니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됩니다. 만약 말을 안 들으면 때립니다. 필요하면 팔아먹어도 괜찮습니다. 종의 문화 시대에는 종이란 주인의 재산 일부일 뿐입니다. 언제라도 버림을 당할지 모르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노예, 종입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애굽 출신의 몸종 하갈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심부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없으니까 자기의 종을 남편에게 주어 아기를 낳으면 자기 아들이 된다는 옛날의 씨받이 문화와 같은 그런 일을 하갈이 했습니다. 사라가 남편에게 “하갈을 데리고 자서 아기를 낳아라! 그러면 그 아이가 내 아이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씨를 준다고 하신 말씀의 성취이다! 나는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진 것을 당신이 알지 않느냐?”라고 제안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아들을 낳았는데 이때 하갈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따져보니까 최소한 83세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일 텐데 아무리 종이라도 인격이 있고 꿈이 있는 처녀가 83세 노인의 부인 역할을 하겠습니까? 자살을 해서 죽으면 죽었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했습니다. 왜 했습니까? 종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죽을지도 모르고 매 맞으니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한 겁니다. 내 마음의 소원은 0.1퍼센트도 없이 꿈 많은 소녀가 83세의 노인에게 시집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겠습니까? 종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들어가 잠을 잔겁니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는 자유가 없는 신분입니다. 제가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면 이 할아버지는 83세에 아들을 낳고 그 다음에 17년 있다가 100세에 또 아들을 낳습니다. “이야! 이 어른은 정말 얼마나 정력이 좋으신 분이면….” 정말 상상도 못합니다. 지금 이 귀신 들린 여자는 남의 집 종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서는 말을 안 들으면 죽여도 괜찮은 그런 불쌍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주인의 뜻에 모든 자기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는 그런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점쟁이를 하는 여자라고 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어떻게 점쟁이 노릇을 하는가? 귀신 들렸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겁니다. 귀신들이 무엇을 잘 알아 맞출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멀리서도 예수를 알아보고 정확히 알아 맞추잖아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얼마나 정확한 말을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잠잠 하라!” 아니, 좋은 말을 하는데, 사실대로 말하는데,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는 말을 하는데 바로 그와 똑같은 상황이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주인은 이런 불쌍한 여자를 이용해서 지금 돈을 많이 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가 점을 얼마나 잘 치는지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일행을 보고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바라!” 틀린 말을 했습니까, 바른 말을 했습니까? 그것도 모르면 우리는 더 귀신 들린 겁니다. 정확한 말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누구입니까?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바라!”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정확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계속 따라오면서 계속 똑같이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게 바울 일행에게 어떻게 생각하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길을 걸어가도 그 여자가 따라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종을 너희에게 전하는 바라!” 가만있어도 전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다. 돈도 안주고 노력도 안하고 열심히 전도를 대신해 주고 있는 여자가 계속해서 따라오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만약 저나 전도 폭발하신 여러분이 전도를 하러 갔는데 이런 여자가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여보시오! 이 사람을 보시오. 이 사람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서 여기 오셨으니 이분의 말을 잘 들으시오.” 그러면 예비 전도가 되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바울 선생은 이 일 때문에 심히 괴로워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그랬는데도 “잠잠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도 절대 틀린 말은 안하고 절대 필요하고 좋은 말을 계속 하고 있는데 왜 괴로워하시며 잠잠 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이게 오늘 말씀의 포인트입니다.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난 그냥 가기만 하면 되고 귀신의 입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잘 될 것 같지만 그것 때문에 전도의 길은 막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잠잠 하라! 네 입을 통해서 내가 받을 영광이 없어!” 바울도 “큰일 났다! 옳은 말을 하지만 이거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 수가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시골에서 개척 교회를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 보니까 소문난 깡패들이 몇 명 있었는데 제가 월요일에 가서 수요일 밤 첫 설교를 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녀석들이 유행가들을 부르면서 교회로 오면서 “네가 여기서 며칠이나 견디나 보자!” 그러면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창문을 열고 들어다보면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러면서 다섯 명이 창문 양쪽에 붙어서 들여다보니까 “안으로 들어와 앉으세요. 밖에 서있지 말고 어떻게 된 건지 알려면 들어오세요.” 그래서 모두 들어왔습니다. “내가 말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고 내 말이 끝난 다음에 그 다음에도 모르겠으면 그 다음에 또 가르쳐 줄 테니까 가만히 계세요.” 그러니까 분위기에 가만히 있게 되었는데 결국 그 친구들이 잘 따라주었습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중 깡패 두목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 동네 사람들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깡패는 날마다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고를 치면서도 말을 선하게 합니다. “여보시오! 예수 믿으시오. 교회 나오시오. 안나오기만 해봐라!” 영광이 되겠습니까? 나올 사람도 안나옵니다. 또, 여기 어떤 사람이 술이 취해 있었습니다. 주정뱅이가 길바닥에 쓰러져서 막 토하는데 실눈을 뜨고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여보시오! 예수를 믿으시오!” 절대로 틀린 말은 안 했고 좋은 말만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아, 교회는 저런 못된 깡패나 술주정뱅이가 가는 곳이구나!”라는 생각 밖에 안 할 것입니다.
지금 귀신들린 여자가 계속해서 바울 일행을 따라오면서 옳은 말을 합니다. 듣는 사람들은 “아, 예수 믿는 것은 귀신 들리는 거로구나. 저런 귀신 들린 여자나 가는 곳이 교회로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절대로 복음 전파의 해가 되지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말의 권위는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옳은 말을 하는데도 “잠잠 하라! 그 속에서 나와라!”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의 입을 통해 소개를 받는다는 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괴로움인가? 그래서 심히 괴로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을 때 매우 굶주리셨습니다. 주린 자의 복음은 밥,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 예수님은 당장 먹을 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큰 위로입니다. “방법이 있잖아! 돌로 떡을 만들어 빨리 먹어! 배고프지?”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배고파 죽겠는데 먹을 방법을 가르쳐줬는데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옳은 말을 했는데도 마귀의 소리였기 때문에 “사탄아, 물러가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오늘 말씀의 복음입니다. 결국 바울은 그 여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 해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괴롭히고 있는 어떤 인격체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제 이 여자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에게 주어졌던 점치는 능력이 없어졌습니다. 귀신의 힘에 의해 바라던 능력은 없어져야 합니다.
종류는 달라도 세상의 귀신들린 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놓지 않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어떤 능력을 놓치기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자녀는 끝이 나고 마는 겁니다. 귀신이 나갈 때 끼치는 손해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 속에 있던 귀신은 예수님에게 “우리를 돼지에게 보내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허락하시니까, 사람은 온전해 졌는데 돼지들은 바다에 들어가 2,000마리가 몰살하니 양돈업자는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사람이 귀신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해야 될 터인데, 그 귀신 때문에 난 경제적 손해를 보자 예수님이 그 동네에서 떠나기를 간구 했습니다. “나가시오! 당신들 왜 이렇게 우리 동네에 와서 경제적 손해를 끼칩니까?” 손해로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세상 사람들은 돈 귀신이 들려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놓치려 합니다. 명예 귀신이 들린 사람은 명예 손해 날까봐 그것 하나 붙잡기 위해서 귀신의 짓을 놓지 않고 그냥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삶을 산다는 것을 바울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까?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진행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귀신 도깨비를 나의 삶의 주변에서 버리는 것, 과거에는 내가 그것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분토와 같이 버리더라.” 똥 버리는 것과 똑같이 확 내버리는 겁니다. 내가 세상 출세에 사로잡혀 그것이 제일인 줄 알았는데 내 생명과 나의 행복을 지켜주는 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하나만을 붙잡고 살았는데 이제는 분토 같이 여깁니다.
대학생들을 데리고 수양회를 한 적이 있는데 “이번 수양회는 영적이다.” 그래서 감수성도 예민하겠다, 부모들이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시계도 다 풀어놓고 시계도 보지 말라고 하고 4박 5일 수양회를 가졌는데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몇 사람에게 변화가 왔습니다. 그 중에 아주 사치하고 낭비벽이 심해서 부모에게 고생이 되고 자기 자신에게 고생이 되었던 여학생이 나를 찾아와 막 울면서 자기는 쇼핑에 귀신이 들려서 백화점에 가면 안 사고는 못 견디고 종류대로 모두 사고 싶은 게 자기도 그것이 병적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좋은데 어떡하느냐고, 운동화가 새로 나왔다면 그것을 사고 싶어 공부도 안 되고 곧바로 달려가던 그런 사치스러운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와서 하는 고백이 지금 내 맘에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겁니다. “너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를 주셨다. 그렇게 마음을 먹기가 쉽지가 않다. 성령님께서 이번 집회는 너에게 특별히, 너 때문에 특별히 이 수양회를 한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변화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 부모들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이 ‘내가 그때 한번 은혜를 받고 삶의 가치관이 이렇게 변했는데, 세상이 달라 보이고 백화점의 명품만 보면 견딜 수 없던 내 마음이 들의 백합화 한 송이만도 못하고 보이는 이 내 마음! 이렇게 사람이 변하나?’ 종류는 다르지만 우리를 붙잡고 있는 귀신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끌려가는 겁니다. 가끔 가다가 대한민국에서 보면 기독교 신자인 대통령 출마자들이 불교인들 앞에서는 불교 신자 행세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니, 대통령이 안 되면 안됐지! 저게 뭐하는 거야? 어휴, 실망스러워!’ 청와대 한 구석에 불상이 있다고 옛날 기독교 신문에 가끔 나고 야단을 치는데, 그것을 기독교인 대통령이 있을 때 치웠더니 국가에 재난이 많이 와서 도로 갖다 놓으라고 해서 도로 갖다 놨다는데 그게 정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불상이 있어도 십자가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그 돌멩이 하나 때문에 정신사가 왔다 갔다 하면 그 정부는 못 믿습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어떤 귀신! 예수는 우리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자유인이 되는 기쁨! “예수 결박 푸셨도다” 한번 불러봅시다. “♬ 예수 결박 푸셨도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예수 결박 예수 결박 푸셨도다 나의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해 ♬”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귀신이 붙잡고 있던 불쌍한 한 여인을 바울 목사님의 명령으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이 문화권 안에서 우리는 어떤 귀신에게 사로 잡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심히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붙잡고 있는 믿음에 반역된 모든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의 인격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정선 목사
사람들은 동일한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한 마음과 한 뜻을 품자는 말을 합니다. 특히 하나의 집단이나 공동체에서는 한 마음을 품는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집단이 분열되거나 붕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다’(행 2:46)고 했습니다. 또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행 4:32)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였지만 한 마음을 품었을 때 그들은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서로 의견과 이해가 충돌하게 될 때, 고린도교회와 같은 괴로운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물론 사람들은 획일적으로 동일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개성이 있고, 또 다양성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풍요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서로 용납할 수 있는 차이가 있고,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 번째 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거기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중에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이 귀신들린 여종은 귀신의 힘으로 점을 치는 점쟁이였습니다. 참 귀신도 가지가지입니다.
귀신이라면 바울의 복음 전하는 사역에 적대적으로 반응했어야 할 텐데 언뜻 보기에 바울을 돕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이상하지요? 점을 보러 갔는데 점쟁이가 ‘당신은 예수 믿어야 살 수 있다’고 해서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경우를 귀신들이 복음사역에 협조적인 현상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귀신들 역시 하나님과 그 하시는 일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단편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못하고 있을 때도 귀신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고백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일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누가복음 4장 41절에도 사람에게 들린 귀신들이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울 역시 귀신들린 여종의 행위가 자기를 돕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괴로워했습니다. 귀신은 무슨 짓을 해도 우리에게 도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존재 자체가 악하고 악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 것은 귀신 들린 여종입니다. 사람에게 그런 악한 귀신이 들어와 산다는 것처럼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현상을 시각화해서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낸 것을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영적 존재가 사람에게 들어와서 그 사람을 지배하거나 또는 괴력을 발휘하는 이야기들이 영화의 소재로 많이 쓰이지 않습니까? 어쨌든 귀신이 인간에게 들어와 그의 육신과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것은 그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홍길동이 슬퍼하고 괴로워했던 이유는 호부호형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게 하는 제도적 억압이 그를 좌절하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영혼과 육체를 송두리째 점령당하고 악한 귀신이 조종하는 대로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도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귀신들린 사람들을 많이 고치셨습니다. 즉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귀신의 권세와 압제로부터 그 사람을 해방시켜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귀신들린 여종이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바울이 왜 처음부터 바로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결과가 견디기 어려운 일을 초래하리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바울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그 귀신을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감으로 해서 그 여종은 귀신의 지배와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으로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귀신이 점령하고 지배하는 데서 귀신을 쫓아내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그 사람 개인에게는 악한 어둠의 영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는 일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을 얻게 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인 마귀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회복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은총입니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돼서 몹시 화가 났습니다. 이 여종의 주인들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돈벌이를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귀신의 힘으로 점을 치고 돈을 잘 벌었는데, 귀신이 나가니까 여종이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사업이 망한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점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사업이었는가 하면, 주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어요.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가지고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고소를 해서 바울과 실라가 죽도록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한 인간이 귀신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 여종이 귀신이 들리든 영혼이 병에 걸리든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그 여종이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벌게 해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가치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치는 오로지 돈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다가 풀려났는데 그것을 기뻐하고 축하하기는커녕 돈줄이 끊겼다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이 이렇게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 하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자본주의라는 단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을 이천 년 전의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참 놀랍습니다. 돈 앞에서 추해지고 악해지는 인간의 실체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근대 시민사회가 뿌리를 내린 후 양심의 자유, 또는 사상의 자유가 널리 용인됩니다. 우리나라 헌법도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제19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법률적 양심의 자유는 각자의 종교적 신앙이나 세계관, 또는 도덕적 관념이나 윤리적 판단을 의미한다고 해석됩니다. 말하자면 각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단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처벌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종이 귀신에게서 해방되는 것보다 그 여종이 귀신들린 상태로 나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믿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도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실정법을 위반하는 범죄는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매우 악한 생각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범죄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종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기뻐해야 할 일반은총적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인들도 그것이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자기들의 가치관에 의해 기뻐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가치관이 옳지 못하다는 것, 혹은 사회적으로 용납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여종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냈다는 죄목으로 그들을 고소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고소할 범죄가 아니라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상을 베풀어야 할 선행입니다. 그래서 전혀 엉뚱한 구실로 그들을 고소합니다. 이것은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행동 양식입니다. 제가 실소를 금하지 못하는 일 중의 하나는 반정부 시위 하는 사람들을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아가는 일입니다. 법 집행을 떳떳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지요.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인데 내가 함께 기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돈이 논을 샀는데 내 배가 아픈 것처럼 말입니다. 다 슬퍼하고 있는데 나 혼자서 속으로 웃고 있다면, 내가 아주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결과는 결국 내가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용납될 수 없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 이런 모습이 조금이라도 발견된다면, 정말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희생해서 한 마음과 한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조금씩만 덜 이기적이 된다면, 조금씩만 내 주장을 덜 내세운다면,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다 기뻐하는데 혼자서 분노하는 사람이나 그런 일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주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늘 지켜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붙잡혀 사는 삶
헹 16:16-34 / 김영대 목사
어떤 사람이 주차공간을 찾지 못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차 금지 구역에 차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쪽지 한 장을 와이퍼에 꽃아 두었습니다. "이 주변을 15분 동안 돌았지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할 수 없이 이곳에 세웁니다. 지금 차를 세우지 않으면 제가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끝에 성경 한 구절을 적어 놓았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런데, 잠시 후에 돌아와 보니 쪽지를 꽃아 두었던 와이퍼에는 주차위반 스티커가 발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답장 메모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 구역을 15년 동안 돌고 있는 순찰자입니다. 제가 만약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으면 이번엔 제가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성경구절이 한 구절 남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서로 다른 입장과 가치관들이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이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내 삶과 내 인생의 모습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가히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의 발자국마다 유혹의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 순간 어떤 길을 선택하여 살아갈 지를 결단해야만 합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바로 이 선택과 결단을 내리는데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그 사람의 '가치관' 혹은 '인생관'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화가이며 조각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에게는 '베르톨도 지오바니'(Bertoldo di Giovanni)라고 하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베르톨도는 열 네 살인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 너 위대한 조각가가 되고 싶으냐?" "네!" "그럼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가진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 그래, 미켈란젤로야!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네 재능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분명히 결정해야만 한다." 스승은 이렇게 말하고 그를 술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술집 안팎은 화려한 나상(裸像) 조각들로 장식 되 있었습니다. 스승은 다시 그를 데리고 동네의 성당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미켈란젤로는 밝은 미소로 웃고 있는 '천사상'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야! 두 조각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예! 똑같이 아름다운 조각이지만 하나는 사람들의 쾌락을 위하여 쓰임 받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예배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래, 잘 봤다. 그럼 너는 너의 재주와 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기를 원하느냐?" "예!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그래! 일생 동안 너의 재주와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거라." "예! 그렇게 살겠습니다." 과연 미켈란젤로는 영감 있는 화가,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자신의 예술적 재능으로 드러내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기술, 시간과 물질을 어디에,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 정하고 산다면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인생의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세상 것들에 붙잡혀 살던 사람이 하나님에게 붙잡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에 붙잡혀 살던 사람이 예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신앙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엇인가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붙잡았던, 혹은 붙잡혔던 것은 하나같이 잘못된 것들이었습니다. 먼저 잘못된 가치관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십시다.
첫째, 귀신의 영에 붙잡혀 사는 한 가련한 여자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자의 신분은 종입니다. 남의 집에 매여 사는 노예, 종의 신분만으로도 불쌍하고 가련한데 이 여자는 귀신에게 붙잡혀 점을 치는 귀신의 종이 되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의 인생인 것입니다. 이 사람이 보는 세계는 귀신의 세계입니다. 귀신의 말을 듣고, 귀신이 주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땅에도 귀신의 관점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문공부가 파악하고 있는 공식적인 무속인 만해도 3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속인들이 많은 것은 또한 찾는 이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들에게 의존하고 사는 사람들은 귀신에게 묶여서 이사도 함부로 못합니다. 집에 못 하나 박는 것도 맘대로 못합니다. 장 담그는 날도 결혼 날짜도 편안히 못 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두운 영의 세계에 묶여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발소엘 갔다가 순서를 기다리느라 이발소에 비치된 잡지들을 뒤적이다 보니, 작년 말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이전에 발행 된 잡지인데 대선 후보들의 운세를 점쳐 대통령 당선 여부에 대한 것을 점쳐놓은 내용이 있기에 한 번 죽 훑어보았습니다. 이미 선거가 지난 뒤라,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사실을 알고 그 내용들을 살펴보니 참 황당하고 허무맹랑한 말들뿐이었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점쳐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전체 득표수에서 0.3%인지 0.5%인지를 받은 이한동 후보를 가장 당선 가능성이 많은 운세를 타고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희망사항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몰라도, 정말 귀신의 영을 가지고 그렇게 점을 쳤다면 얼마나 허무 맹랑한 것입니까?
행여 여러분 가운데도 점이나, 관상, 사주팔자, 귀신의 영에 인생이 묶여 사는 분이 계십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헛된 영, 거짓된 영에 묶여있던 모든 것들을 풀어 제키시고, 예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물질에 붙잡힌 사람, 돈에 붙잡혀 살아가는 종의 주인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비참한 한 인생, 귀신에 붙들려 사는 여인, 미친 여종을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돈에만 눈이 어두운 그 여종의 주인은 그를 통해 벌어들이던 복채가 끊어졌다고 노발대발하며 바울과 그 일행을 고소합니다. 주인에게 있어서 그 여종은 한 인격체가 아니라, 돈 버는 기계요, 상품에 불과했습니다.
아마 돈에 미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주인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예! 그렇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가치를 돈과 물질에만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가치와 존재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인생이 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만을 염려하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가운데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심으로 떡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부정하신 것은 떡 자체가 아니라 '떡으로만 살려고 하는 자세' '떡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생관'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손해가 되는가 만을 주판질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그것이 의로운 일인가? 아니면, 불의한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정말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길 소원합니다. "먼저 떡부터 만들어 먹으라. 급박한 상황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우선 네 배부터 채우라"는 사탄의 시험에 대하여, 예수님처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와 진실을 기준 삼아 살 것이니라."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우리 교회를 이루어 가는 중심 되는 성도들이 그와 같은 사람들로 변화되어 이전에는 먼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후에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으로 변화하여 교회를 섬긴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그런 성도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편견과 전통에 붙잡혀 살아가는 로마의 상관이 나옵니다.
그는 여종의 주인들에게 끌려 온 바울이 "유대인이며, 또한 로마 사람이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는 고소인들의 말만 듣고 시비곡절을 가릴 것도 없이, 바로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고 옥에 가두어 버린 편견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 "받지도 행치도 못할 풍속" 이런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매이게 되면 가장 냉정하고 공정해야 할 재판관까지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엄한 책망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통 집착증'에 걸려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좋은 전통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한 좋은 전통은 잘 지켜가야 합니다. 그러나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전통이 진리와 복음을 대신합니다. 전통이 말씀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옛날에 우리 자랄 때는 이렇게 했다. 우리 군대생활 할 때는 이랬다. 입만 벌리면 늘 과거에 근거하여 이야기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정관념, 전통에 매이다 보면 창조적 진보가 아니라 분열과 다툼만 있게 됩니다. 어떤 교회에서 바닥에 카펫을 깔게 되었는데 빨간색으로 깔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니다. 녹색으로 까는 게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위원회를 만들어서 토의를 하는데 빨간색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색이며, 성령의 색깔도 빨간 색이므로 카펫 색깔은 당연히 빨간색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한편 사람들은 녹색은 희망의 색깔이요, 새로운 미래의 색깔이요, 성장의 색깔이다. 또한 눈이 가장 피곤하지 않은 색깔이다. 그러므로 카펫 색깔은 녹색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그룹의 주장은 결국 싸움으로 커졌고 끝내는 두 교회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빨간색으로 깔아야 된다는 사람들은 나가서 빨간 십자가에 빨간 카펫을 깐 교회를 세웠고, 녹색으로 깔아야 된다는 사람들은 녹색 카펫을 깔고 교회 이름도 늘푸른 교회라 지었습니다.
무엇이 본질적인 것입니까? 카펫색깔이 빨간색이면 어떻고 파란색이면 어떻습니까? 그저 아무것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코피 터지게 싸우는 일이 우리 속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만두 장사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속 터진다'는 말입니다. 전통에만 매여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속 터지는 사람입니다. 편견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 정말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개방적이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긍정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의무감과 책임에 붙잡혀 사는 간수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진솔하게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들은 무엇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를 붙잡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나의 가치관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이 최고입니다. 이와 똑같이 명예에 매인 사람, 지식과 편견에 매인 사람, 죄의 종이 된 사람, 나쁜 습관에 빠져있는 사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것에, 세상 것에 붙들려 사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연예인 이주일 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담배 피우지 마세요. 담배 피우지 마세요"하니까 전국적으로 담배 매상고가 뚝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불과 넉 달 후에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담배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한 때는 세상의 것들에 매여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 붙잡힌 사람이 된 후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빌3:7-8)
바울에게 예수 중심의 가치관이 세워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에 1천만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4천만 모든 백성이 다 교회에 출석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 속에 성경적인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으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교회와 성도들에게 요청되는 성령의 음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꿈마을엘림교회에 성도들이 점점 많아지고, 아무리 시설을 아름답게 하고, 편리하게 갖춘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성도들이 성경적인 가치관, 복음적인 가치관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 교회는 그저 껍데기만의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결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을 가장 귀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라.' 아멘! 이것을 위하여 우리 교회가 전 교회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신앙부흥운동이 바로 '일사천리 신앙부흥운동'인 것입니다. 아직까지 결단하지 못하셨습니까? 중간에 포기하셨습니까? 지금 바로 새롭게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기회입니다.
비행기는 이륙하려고 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가장 많은 연료가 소모된다고 합니다. 가장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때란 말입니다.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침체의 늪을 헤매던 사람이 이륙하기 위해서는 전에 없는 뜨거운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무기력한 성도로 전락한 사람이 능력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전에 없는 말씀에 사로잡히는 새로운 계기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불길을 잃어버리고 냉냉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커다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뜨겁게 기도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일단 이륙하여 구름위로 올라가면 상상할 수도 없는 평안함과 환함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묶고 있는 악한 사단의 세력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서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만들고 썩은 가치관 속에 계속 머물게 하고, 나태와 안일에 깊이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박차고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감옥에서도 사도 바울 일행은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헛된 가치관을 집어던지고 성경적인 가치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참된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해서 전에 없는 뜨거운 기도를 해야될 것이며, 전에 없는 뜨거운 찬송이 요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를 묶고 있던 헛된 가치관들, 썩어 없어질 것들, 허황된 것들, 나를 묶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결박을 푸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성령의 불로 다 태워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는 기대대로 성령에 붙들린 사람, 비전에 붙들려 사는 사람,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 주의 은혜에 감동되어 살아가는 사람, 사명에 붙들려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크게 기뻐하라
김 조 목사
공중권세 잡은 사람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기에 고통과 불안과 공포가 위협하는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주안에 평안을 누리며 날마다 기뻐하고 찬양하는 삶이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었기에 그렇게 기뻐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겠는데도 그렇지 못하여 기쁨보다는 슬픔을 안고 만족보다는 불만을 가지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제 동방에 박사들이 예수님 탄생 소식을 예견하고 경배하러 오다가 문득 나타난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다고(마 2:10)했는데 그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하신 말씀을 중심하여 “크게 기뻐하라” 제목하고 은혜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 일행일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는 중 귀신 들려 점을 보아주고 돈을 벌어 주인을 이롭게 하는 여종의 귀신을 좇아내어 준 것이 16-18절이요, 19-34절에 돈버는 것이 끊어진 업주들이 바울과 실라를 성을 요란하게 한다고 하여 고발하니 죄도 묻지 않고 옷을 벗기고 매로 쳐서 깊은 감옥에 가두었으나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옥문이 열리고 발에 착고가 떨어졌고 간수가 놀라 자결하려 할 때에 구원의 소식을 전하여 간수의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되어 크게 기뻐했던 것이요, 35-40절에 석방하려 했으나 로마시민인 우리에게 불법으로 죄를 정한 것을 말하고 사과 받고 당당하게 출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음으로 크게 기뻐한 것이 어떤 기쁨인가를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참으로 자유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16-18절)
귀신이 들려 점을 보고 주인을 이롭게 하던 여종을 괴롭히던 사단을 좇아내어 여종에게 자유를 주웠고 바울 사도를 괴롭게 하던(18) 귀신을 좇아내었으니 이 엄청난 권세를 받음으로 참으로 자유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귀신을 좇는 권세와 능력은 예수님이 메시야직 수행하실 때 행함으로 사단의 권세를 정복하고 하나남의 나라를 세우며 사단에 잡힌 자를 구하였고 이 권세를 12사도와 70인 전도대에게 부여하셨습니다.(마 10:1, 16:17, 눅9:1, 10:17) 이 권세야 말로 예수께서 메시야 되심과 만왕의 왕이심을 증거 한 것이요 이 권세와 능력을 바울사도에게 주셨으니 크게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하셨으니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루어졌고 또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할 것”(막16:17)이라 하셨으니 믿는 우리에게도 주셨으니 사단의 역사인 질병과 고통, 가난, 염려, 두려움, 게으름, 이기주의적 욕심,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무법한 우상숭배, 실망과 좌절을 다 몰아내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참된 자유함을 누리도록 더욱 기도하시어 성령의 역사로 크게 기뻐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고난 중에도 하늘나라 소망으로 크게 기뻐했습니다.(19-25절)
귀신들린 자 고쳐 주었으면 칭찬과 감사할 일인데도 자기의 유익(돈)이 없어지니 엉뚱한 것으로 고발했고 죄로 묻지 아니하고 고문하고 채벌하였으니 억울하였고 “매로 치라”한 것은 태장으로(고후11:5)죽는 지경에도 이르는 매였습니다. 24절에 “깊은 옥에”가둔 것은 그 때 당시는 죄의 경중에 따라 감옥도 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니 중죄인 취급을 하였고 “든든히 지키라”명하였으니 중죄인이요 발에 착고 채워 벽에 고정시켰고 발을 벌려 매우 고통스러운 자세였으니 매 맞고 수치를 당하였고 고통이 극에 달했으나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늘에 소망으로 찬송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롬5:3)는 것입니다. 환란 중에 즐거워함은 하나님이 기적 베푸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 그 좋은 가문, 학벌, 권세를 배설물처럼 여긴 것(빌3:8)은 확실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떠준 것도 결단코 그 상을 잊지 않겠다(마10:41)는 주님이십니다. “현재 당한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극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하셨으니 이 소망으로 가득 차 주를 위한 일에 최선 다함으로 크게 기뻐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구원 받게 됨을 크게 기뻐했습니다.(30-40절)
귀신 내어 좇는 초자연적인 역사로 깊은 옥에 가두었던 간수들이 깊은 옥문이 열려지고 발에 착고가 떨어졌음에도 도망하지 아니한 사도 앞에 “어떻게 해야 구원 얻겠느냐”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었음으로 크게 기뻐했으니 이는 구원 받게 됨을 기뻐한 것입니다. 사도 통해 주의 말씀 듣고 지극정성으로 모시었고 온 집이 세례 받았으니 절망적인 자살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서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된 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순간의 문제 해결도 기쁜데 하나님이 주신 구원 역사 이루게 되었으니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성도여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멸망 받았던 우리(엡2:1)를 살려 주였다는 것으로 과거의 모든 죄와 허물 용서하시고 지금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요 14:16, 26, 15:26)영원한 불 심판(히9:26)에서 건져 천국시민 되게 하시어 하나님과 영원토록 살게 하심이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하여 주셨으니 이 감사와 감격이 어떠합니까? 구원의 은혜 입은 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늘 감사하여 크게 기뻐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귀신을 좇아내고 참 자유함을 주시는 권세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고 하늘나라의 산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하셨으며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 받을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받은 성도님들 이 엄청난 역사에 크게 기뻐하는 역사 이루셔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를 주시려고 하늘 보좌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조물주가 피조물이 되어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로 오신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아니했습니다. 크게 기뻐하며 맞이해야 할 것이요, 하나님을 믿었음으로 크게 기뻐했던 간수집의 기쁨이 성도님들 삶 속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