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38
8월3일[연중 제1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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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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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4cwxfuVV6c
[예수회 양승환 크리산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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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통치권자였습니다. 두 지방을 합해봐야 경기도 정도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왕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굳이 칭하자면 영주, 분봉왕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아첨하며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안티파스, 둘의 관계는 참으로 묘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두렵게 여기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때로 세례자 요한이 곤경에 처할 때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건네는 날카로운 직언에 힘겨워했지만,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헤로데 안티파스는 원치도 않았던 기가 막힌 일-세례자 요한의 참수-을 저지르고 말았을까요?
모든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한 목숨 부지하려고 잔머리를 너무 굴렸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갖은 꼼수와 권모술수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가당착에 빠져 결국 패가망신하게 된 것입니다.
동쪽에 위치한 나바태아 사람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보기 시작하자 힘이 딸렸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들의 왕 아레타 4세와 협상을 체결합니다.
작은 강아지가 큰 개를 만나면 배를 발랑 뒤집어 항복을 표시하듯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레타4세 왕 앞에 깨갱하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왕의 딸과 마음에도 없는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만족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로데 안티파스는 이복동생 헤로데 필립보스를 찾아가 그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합니다. 갖은 감언이설로 꼬셨겠지요. 허영심이 가득했던 헤로디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인륜을 저버리고 결혼을 승낙합니다.
이를 알게 된 아레타 4세 왕의 딸은 스스로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지요. 헤로디아는 헤로데 필리포스와의 사이에서 난 딸 살로메를 데리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품에 안깁니다.
당대 비리와 악행을 자행하던 고위층 지도자들의 천적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를 그냥 둘리 만무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공공연하게 천륜을 거스르는 두 사람의 악행을 고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개인적으로 헤로데를 찾아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거듭된 고발에 헤로데 안티파스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부끄럼 없이 패륜의 길을 걷던 헤로디아는 복수심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위협도 해봤습니다. 설득도 해봤습니다.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전도차 애논을 떠나 갈릴래아로 건너온 세례자 요한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사해 동쪽 에브론 건너편에 위치한 마케론데 성안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계략에 의해 서기 28년경 참수 당함으로서 짧은 예언자로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선 악이 선을 제압한 것 같아 큰 서글픔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악 앞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더 큰 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당당함, 흔들리지 않는 신앙 앞에 큰 감동도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어두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고민 끝에 찾아냈다는 나라의 중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한숨만 터져 나옵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애처로운 어린 양들을 까마득한 절벽 앞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이웃이 쓰러지든 말든 내 앞길만 헤쳐 나가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이건 정말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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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UcBZKyoJ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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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행복이라는 마약>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될까요? 그 비밀은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에 취해야 삶의 의욕도 생깁니다.
한 사향노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오는 사향의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사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더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깨진 자신의 몸 안에서 사향의 향기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쫓는 행복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위 사향노루처럼 그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고픔을 더는 채울 길이 없게 되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삶이 행복이라는 미끼로 자신을 연명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마약을 팔 때 우선 몇 번은 거저 줍니다. 그리고 그 맛에 길들었을 때 비싼 값에 마약을 판매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중독됩니다. 우리는 그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이 행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법원은 최근 데보라 짐머만이라는 여성에게 ‘태아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자녀 양육권을 박탈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짐머만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한 파티에 참석해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만취한 상태에서 산욕을 느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신생아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무려 0.2%에 육박했습니다. 산모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해 신생아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습니다.
법원은 함량 미달의 모정에 대해 ‘양육권 박탈’을 선언하고 ‘살인미수죄’를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의 무책임이 한 어린이에게 ‘저능아’라는 비극적인 이름을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행복에 중독된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행복은 죽어갑니다. 사랑에서 오는 행복도 하나의 미끼입니다.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올해 백 세가 되시고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옹은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절제’라고 대답했습니다. 육체의 만족을 절제하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행복과 육체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에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행복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으로 육체가 죽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지, 육체의 행복을 찾아 사랑으로 오는 행복의 목을 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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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억울(抑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시기와 질투로 누명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강한 사람에게 아무 말 못 하고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울한 상황은 주로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성서에서도 억울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인에게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아벨은 억울할 겁니다. 아합왕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나봇도 억울할 겁니다. 왕에게 충성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우리야도 억울할 겁니다. 우리 시대에도 억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던 박종철 열사도 억울할 겁니다.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야 했던 사람도 억울할 겁니다. 외압에 굴하지 않고 수사자료를 경찰에 넘겼지만, 항명죄로 1년이 넘게 재판을 받아야 하는 수사단장도 억울할 겁니다. 살로메의 춤판에 희생되어서 죽어야 했던 세례자 요한도 억울할 겁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알아주시는 분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던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억울함은 해소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억울함은 영원한 생명으로 되살아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부자는 평생 떵떵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어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부자의 집 문간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공정과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신화, 종교, 철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 영적인 세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세상은 특정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고,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수치화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자리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는 환경의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아직은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준 사판의 아들 아하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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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1-12: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요한 세례자가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했다. 그래서 요한 세례자는 율법에 따라 이방인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로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강직한 사람이었다.
헤로데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했을 뿐이다.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우선,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륜을,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임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도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나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과 봉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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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헤로데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말을 듣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는 요한이 누구인지 온전히 알지는 못하였지만 요한이 지닌 능력을 인정하기는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은 요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데 다만 군중이 그를 예언자로 여기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아보았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요한을 죽이는 사람은 결국 헤로데입니다. 핑계를 대어도 소용없습니다. 헤로디아 때문에, 살로메 때문에 죽였다고 말하고 싶었을까요? 헤로디아의 딸에게 약속하고 맹세한 것도 헤로데이고, 요한의 목을 베라고 끝내 명령을 내린 것도 헤로데입니다. 그는 진리를 알고 있었으나 자기 손으로 진리를 죽입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갈라졌습니다. 갈라진 마음에서 80퍼센트 정도 진리를 따르고 하느님을 따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순간에 진리를 저버릴 수 있습니다. 그가 양보할 수 없는 나머지 20퍼센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려놓을 수 없는 무엇이 남아 있을 때 그 진리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목숨을 사람들의 손에 맡깁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보다, 자기 목숨보다 중요하였고 80퍼센트가 아닌 100퍼센트를 그 말씀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따름은 ‘전부’를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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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헛일’은 없습니다.>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마태 14,1-12)
1) 여기서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라는 말은, 헤로데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여론만 두려워했다는 뜻인데, 그가 백성의 여론을 두려워한 것은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헤로데를 반대해서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킨다면, 로마 황제는 헤로데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 황제가 임명한 영주였고, 황제의 눈에서 벗어나면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실제로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그렇다면 헤로데가 진짜로 두려워한 것은 로마 황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민심은 천심이다.’ 라는 말을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당시의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생각했고, 헤로데를 싫어하긴 했지만,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백성들도 하느님보다는 헤로데의 권력을 더 무서워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는 백성의 여론에 특별한 움직임이 없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그래서 ‘민신은 천심이다.’라는 말은, 당시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2) 헤로데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여론만 두려워한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8-31)
헤로데는 세속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의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였고, 인간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을, 또 자기 자신의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입니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씀을,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 적용하면, 헤로데나 로마 황제들 같은 어리석은 독재자들은 하느님의 심판대에서는 ‘참새’보다 더 하찮은 존재이고,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나 로마 황제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라는 말씀도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 적용하면, 하느님께서는 헤로데나 로마 황제들의 온갖 악행을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요한이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겪은 고난들을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2,6-11)
3)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 대해서, “그의 활동은 성공일까, 실패일까?”(“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일을 시키신 것은 성공한 것일까, 실패한 것일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예언자일까? 아니면 임무 수행에 실패한 예언자일까?”>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실패로, 또 그에게 일을 시키신 하느님의 뜻도 실패로 보일 것이고, 세례자 요한은 임무 수행에 실패한 예언자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예언자이고, 그의 활동은 성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람들을 모두 회개시키라는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회개를 선포하라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회개 선포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은 것은, 그 사람들 자신들 탓이지 세례자 요한 탓이 아닙니다.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을 요한의 활동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헛일’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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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예언’이라는 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말하는 예언(豫言)과 신탁을 받은 사람이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과 그 내용을 가리키는 예언(預言)으로 구분하여 쓰입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후자의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보면 때로는 미래의 일도 언급하기 때문에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전자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고 그분 뜻에서 멀어질 때,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진리를 선포해야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은 유다의 대신들과 모든 성읍 주민들의 무서운 변덕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도 그가 성전과 예루살렘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마땅히 처형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율법을 어기고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헤로데를 비난한 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사면도 가능한 임금의 생일날에 오히려 참수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비록 오늘 독서와 복음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들을 감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사명에 충실하였던 예언자들의 신실에 비추어 우리의 말과 행위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망설임 없이 행합시다.
화답송의 시편 저자처럼 예언자로서 겪게 될 고통 속에서도 기도합시다.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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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허망하고 충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마태 11,11 참조)이라고 하신 이의 죽음에서 어떠한 영웅적인 모습이 보이지도, 하느님의 극적인 개입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저 ‘힘 있는 자들’이 벌인 잔치의 ‘눈요깃감’에 지나지 않는 허무한 죽음으로 지상에서 요한의 삶은 끝이 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의 죽음에서 불사불멸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세상 권력과의 거창한 투쟁 끝에 장렬한 죽음을 맞기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그러나 수많은 순교자와 예언자,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서조차 우리가 찾는 특별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정의와 평화, 진실을 부르짖는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목숨은 오히려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의 구원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어쩌면 가장 없애 버리고 싶은 목숨, 가장 하찮게 여기는 목숨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그에 따르는 비통함이 아닙니다. 악이 하느님의 사람을 죽이지만, 악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의 나라도 결코 끝낼 수 없다는 희망을 선포하는 데에 있습니다. 악에 의해서 결코 끝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체험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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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고, 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은 정결함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방종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오고, 그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으며,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또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릅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하고,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는 반면에,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결국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며,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마침내는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이 한 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태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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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제 뼈 속에 새겨진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혀는 멈추어도 결코 멈추지 않는,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혀가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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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14,1)
요즘 상당히 많은 사람이 결정 장애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신중하게 심사숙고하고, 시간을 갖고 고심하다 보면 더 좋은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과거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면 오히려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 는 표현처럼 자신의 선택-결정-실행의 결과로 빚은 실패와 상처받은 경험이 다른 선택을 앞두고 무의식적인 두려움에 휩싸이게 합니다.
헤로데는 본디 세례자 요한의 “그 여자, 제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14, 4) 하고 말하는 충고가 부담스럽고 거북스럽기는 하였지만,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보호해 주고자 했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그 점에 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6,19-20) 그런데 생일을 맞아 손님들 앞에서 조카이자 의붓딸 살로메의 뇌쇄적인 춤을 보고 난 뒤, 격앙된 헤로데는 “무엇이든지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습니다.”(14,7) 술기운에 객기를 부리고 허세를 부린 꼴이지요. 그는 요한의 목을 살로메가 요구하리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과 같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붓딸 살로메의 요구에는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요한에 대한 깊은 앙심과 복수심의 표출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한 여인, 헤로디아의 앙심이 그런 부당하고 황당한 요구를 자기 딸을 통해 헤로데에게 요구하게 한 것입니다. 의붓딸의 요구를 듣는 순간 헤로데는 괴롭고 황당했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14,9) 자신이 이미 한 약속을 실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초대받은 손님들 역시 살로메가 지나치게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베게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시선이었겠지만, 헤로데는 왕인 자신의 체신과 체면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는 곧 헤로데는 하느님의 시선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더 중요했고, 하느님의 인정보다 스스로가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지키는데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찮은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지키기 위해 그는 끝내 요한의 목을 살로메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헤로디아가 아무리 앙심에 따른 몰상식한 요구를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결정한 헤로데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잘못된 맹세와 결정으로 허망하게 개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난 뒤 헤로데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잘못된 결정을 한 일로 후회하고 두려움을 갖고 살았는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보고를 받고 예수님을 되살아난 세례자 요한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14,2 참조) 의붓딸에게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만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위신과 체면 차림을 위해 거룩한 요한의 목을 베게 한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던 후회스런 사건을 회상하면서 두려움과 불안한 날들을 보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묵상하면서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가 불행한 길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그 근저에는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술기운이나 감정에 휩싸여서 내뱉는 헛된 맹세 때문입니다. 불행을 자초하지 않기 위해서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서도 아니 되고, 취중이나 감정에 휩싸여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앙심에서든 위신이나 체면에서든 자신의 그릇된 선택과 결정은 단지 자신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갑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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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유치원생이 쓴 시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좋다.
바둑이는 나와 놀아주니까 좋다.
냉장고는 먹을 것이 많이 있으니까 좋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끝났을까요? 이 마지막 문장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문장은 ‘우리집에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나쁜 직장생활로 집에 밤늦게 들어오고 그래서 아빠 만날 시간이 아이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이 유치원생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또 주님께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의미도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 없는 착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생활이 칭송받을 만한 때에도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죄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타인의 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넣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잘못을 고쳐 줄 마음으로 그 잘못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비판하려고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릴 줄 모르고 타인의 잘못을 곧잘 나무랍니다.”
이러한 겸손을 갖추고 있어야 의미 있는 존재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보다는 나를 드러내고 또 세상에 나를 높이는 데에만 온 힘을 쏟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헤로데 영주 역시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데만 온 힘을 쏟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기 의미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대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넘겨줍니다. 그 결과는 스스로에게도 비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합니다. 두 발 뻗고 잠잘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 자기 존재 의미를 깎아버리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의미는 주님의 일을 했을 때 환하게 드러납니다. 즉, 사랑의 삶을 살았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세상 안에서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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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개한 죄인이 아름답다>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족과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같은 방법으로 속임수로 돈을 챙겼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 잔치에 흥을 돋우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대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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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죽는 이와 사는 이>
마태오 14,1-12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죽는 이와 사는 이>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마태 14,2)
살림으로써
깨끗하게
죽는 이
죽어도
살아있습니다
죽임으로써
너절하게
사는 이
살아도
죽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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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물인생, 인생휴가, 인생과제>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歸家 여정-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천상병 시인하면 생각나는 시가 귀천일 것입니다. 오늘 묵상과 더불어 떠오른 시, 귀천의 마지막 연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저는 소풍을 휴가로 바꿔 읽어봅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휴가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과연 인생휴가 끝나고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때, 이 세상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이들 몇이나 될런지요. 영성체송 시편이 고맙게고 아름다운 인생휴가 비법을 알려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바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수도원에 들어와 휴가를 접은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오고 가는 수도형제들의 휴가 모습을 보면 참 금방입니다. 길게 생각됐던 휴가지만 귀원 날짜가 되면 어김없이 수도원, 주님의 집에 돌아옵니다. 꼭 우리가 세상에 인생휴가중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수도원 휴가가 끝나면 주님의 집에 돌아오듯 인생휴가 끝나는 죽음의 날 아버지의 집에 귀가해야 할 것이나 그 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에 잠시 인생휴가 중인데 새삼 무슨 휴가?’ 저에게는 실감나는 말마디입니다. 사실 인생휴가중이란 생각을 갖고 하루하루 절실하게 살려 애씁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서서히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날짜도 얼마 안 남았다는 자각으로 살아갑니다.
인생휴가중 잠시 나그네로 머물뿐 우리가 영원히 머물 본향은 천상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래서 인생휴가중에 있는 삶의 여정을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의 여정’이라 칭합니다. 죽음의 귀가 날짜는 아무도 모르지만 누구나 예외없이 인생휴가 끝나면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참 늘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의 자각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느냐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런 확인이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환상이나 거품이 빠진 본질적 깊이의 선물 인생을 살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인생휴가 멋지게 끝내고 귀가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주신 선물인생, 저만 챙기다가 하루하루 생각없이 되는대로 낭비하며 고생하며 허무하게 살다가 귀가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망하겠는지요. 죽음의 귀가날짜에 후회없이 떠나는 자, 몇이나 될런지요? 시편 90편이 다음 대목의 고백과 기도가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믿는 이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간절한 고백과 기도의 시편입니다. 이 시편 서두 첫절은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입니다. 주 하느님만이 우리가 영원히 머물 본향의 안식처요, 선물인생을 살아가는 인생휴가중의 지상에서의 삶이 참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가 인간의 숙명입니다.
하느님 주신 선물인생, 파견인생에 반드시 주어지는 우리 고유의 인생과제요 인생사명입니다. 과연 우리 고유의 인생과제요 인생사명은 무엇입니까? 저는 하루하루 인생과제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밀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써야 하는 강론이나 일기이듯 인생과제도 그러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참으로 살았던, 참으로 인생과제, 인생사명을 다했던 분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고유의 인생과제가, 인생사명이 무엇인지 알 때, 비로소 목숨을 걸고 투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목숨걸고 사는 사람이, 성인이, 참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이분들에게 절대 가치는 생명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느님이였습니다. 그래서 진리와 정의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류의 빛같은 예언자들이, 성인들이, 순교자들이 없는 세상이라면 세상은 캄캄한 암흑일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의 악의 무리들 가운데 찬연히 빛을 발하는 세례자 요한 순교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패배인 듯 하지만 그를 잇는 예수님이요, 또 그 뒤를 잇는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에 전전긍긍 불안해 하는 헤로데의 모습에서 악의 정체가, 허약함이 폭로됩니다. 요한의 순교후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알리니 예수님 또한 분명히 자신의 죽음도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에 의기소침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용기백배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더욱 남은 인생과제, 인생사명을, 하늘 나라 복음 선포라는 인생사명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예언자와 대칭을 이루는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존재가 진리와 정의의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말그대로 목숨을 내놓고 죄많은 백성들에게 용감히 회개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의로운 이들이 있어 존속하는 세상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이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육성을 듣는 듯 당당합니다. 이를 두둔하여 호의적으로 반응한 ‘대신들과 온백성’이 예레미야에 대해 적대적인 ‘사제들과 예언자들’을 압도함으로 예레미야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다산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길은 정해지면 바꿀수 없지만 걸음은 내가 정할 수 있다.”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귀가의 여정길을 바꿀수 없지만 걸음은 내가 정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인생휴가중 우리 각자의 인생과제를 잘 깨달아 하루하루 잘 실천하며 자발적 기쁨으로 선물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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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의 사명과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파견받은 자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파견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도성이 잘살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파견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하느님 뜻대로 잘살았다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파견하셨겠습니까?
잘살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러니 파견된 예언자는 잘못 살고 있다고 쓴소리해야 하며,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이 도성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듣고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힘없는 사람은 억지로 참지만 힘이 있는 사람은 그리고 집단은 가만히 있지 않고 심지어 죽여 버리지요.
오늘 복음의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바로 그런 자들이지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자이고, 요한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면 그래도 그랬을까? 나라면 어떨까?
하느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여 니네베 임금과 백성들처럼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언자를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니 내게 쓴소리한 사람을 예언자라고 믿고 싶겠습니까? 성질이 나쁜 놈이요 배배 꼬인 놈이라고 매도하거나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내게 쓴소리하는 사람을 특히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이 파견한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예언자로 받아들일 겁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이 사람을 내게 보내셨는데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을 내가 교만 때문에 몰라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제가 이번 행진하면서 그리고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앞두고 저의 죄를 성찰하면서 제일 크게 반성한 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사랑을 더더욱 강하게 믿지만 하느님 사랑을 너무 내 식으로 믿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도 다 오냐오냐하실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역시 제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것인데 오늘 저는 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저의 믿음을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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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마태14,10)
<쓴소리!>
오늘 복음(마태14,1-12)은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14,4)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헤로데가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차지한 불의를 지적합니다. 그렇게 정의를 외치다가 헤로데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불의 앞에서 외치는 정의의 소리는 달콤한 소리가 아닌 '쓴소리'입니다. 헤로데는 이 쓴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배신하며 불의의 길,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유다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쓴소리'를 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쓴소리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결국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멸망합니다. 그리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쓴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날마다 들려오는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쓴소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151항에서 주님의 말씀이, 이 쓴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지만, 신자들도 귀담아 들어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섬찍한 권고입니다. 하지만 이 섬찍함, 이 쓴소리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사랑의 권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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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 김형진 로무얄도 신부님]
-첫 토요일 신심 미사-
<신자들을 가족같이! 신자들 가정에 평화>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토요일을 성모님의 날로 지내왔습니다. 첫 토요일 신심미사가 봉헌되게 되는 구체적인 사건은 파티마 메시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1925년 12월 10일 성모님께서 루치아 수녀님에게 나는 연이어지는 다섯 번의 첫 토요일을 지내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순간에 영혼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은총으로 도울 것을 약속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미사 안에서 우리는 5개월간 계속해서 첫 토요일에 고해성사를 하고 성체를 영하고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15분간 묵주기도 15가지 신비를 나와 같이 묵상하며 내게 보속할 지향을 가진 이들은 누구든 내가 도와주겠다는 성모님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전 세계 교회가 첫째 주 토요일에 성모 신심 미사를 봉헌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를 대신해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에 박힌 가시를 빼드리기 위해섭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께서 약속하신, 우리에게 닥쳐올 죽음의 순간, 그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첫 토요일 성모 신심 미사에 참여한 이들은 원죄 없는 성심을 거슬러 저지른 죄에 대한 보상으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5개월간 연속 첫 토요일 신심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지속적인 기도생활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첫 토요일에 모든 묵주기도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초대받습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를 우리 마음과 정신에 그려 나가다 보면 한 구절. 한 구절 복음 말씀이 마음에 와 닿게 되고 거기에 머무르게 됩니다.
복음은 성모님께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음을 알려줍니다. 이 말씀 안에서 성모님께서 그 당시에 경험하신 모든 일을 받아들이시는 마음 가짐을 묵상합니다.
절대로 상황을 알려고 애쓰거나 지배하려고 애쓰지 않고 성모님께서는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는 여성 그분 백성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서 움직이심을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담아 보호하는 여성이십니다. 그 가운데에서 깊이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심장 박동을 듣는 것을 배웠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 그것은 성모님의 삶을 통해서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심장 박동을 발견하도록 성모님을 가르쳐 줍니다.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말이 별로 없는 여성으로 나타납니다. 대단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시지만 그분 아드님의 삶과 사명을 지키는 주의 깊은 눈빛으로 바라 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일의 어머니로 나타납니다.
오늘 하루를 조용한 묵주기도로 시작해봅시다. 그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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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마태 14, 10)
향기로운
분꽃이
피어납니다.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생명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
소중합니다.
그 누구도
같은 사람에게
해를 끼칠
권리는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사람이 있고
우리를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헤로데 같은
교만과
착각입니다.
욕망을
비우지 못한다면
그 욕망이
그 사람을
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생명에 대한
염원도 사라집니다.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공통의 염원을
갖게 됩니다.
모든 생명을 위한
복음을 만나게
됩니다.
좋은 마음을
내면
좋은 일들이
많아집니다.
욕심으로
가득찬
우리의 본능이
능동적인
복음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위한 기쁨이길
기도드립니다.
욕심은 양심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들을
기억합니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좋은 나눔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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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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