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낳은 장선우 감독의 시편 11(1)
금강경 한줄이 하늘가에 걸리고‥‥
장선우 감독이 시를 썼다. 지난 3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마지막 장면을 찍으려고 타이의 푸켓섬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서 벗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뭉쳤던 응어리들이 새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고공에 올라가서 오는 정신착란 같기도 하고. 뭔가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이 치밀었다. 답답함, 그리움, 더러움 이런 걸 쏟아내고 싶어진 것인지…." 비행기를 내려 낙원 같은 푸켓섬에서,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한두달가량 계속 썼다. 그렇게 모인 게 70편 정도.
다음 영화의 제목을 <이별에 대하여>라고 정해놓았던 때문인지, 이별에 관한 시가 많다고 장 감독은 전했다. 70편 중 영화와 관련된 시 11편을 장 감독이 직접 추렸다. "이런 게 시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중엔 낯간지러운 것도 있고. 시집? 반응이 멀뚱멀뚱하면 포기하고. 같이 놀자고 하는 거니까."
맨앞의 <경마장 가는 길>은 이 영화 마지막에 정신없이 소설을 써내려가는 주인공 R처럼, 갑자기 시를 쓰게 된 자신의 심기를 털어놓는 일종의 서시이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나오는 '포다섬'은 타이의 촬영장 가는 뱃길에 스쳐지나갔던 섬이다. 편집자
장선우 / 영화감독
경마장 가는 길
나는 그 끝 장면이 좋았다 나는 지금 그 끝 장면이 되었다 쓰고 쓰고 또 쓰고…. '경마장 가는 길. R이 돌아왔다….' ---
화엄경
꿈에… 여자의 시체를 가루지고 다녔어요 한명은 옛 애인 같았는데 한명은 조금 아는 여자 같았어요 그 여자는 하반신이 잘려나가 지고 다니기가 더 힘들었어요
영안실 사람들 다니는 문으로 못 다녔어요 화장터에 갔는데요 문을 함부로 다닌다고 야단맞았어요 다시 나오라고… 옆으로 나오라고… 밑으로 나오라고…
울면서 시체를 업고 다녔어요 그런데도 그것은 비몽사몽 중에도 밤새 뻣뻣했어요 이 질긴 애욕! 애욕은 보살의 씨앗이라고 그랬나요 화엄경에서? 하지만 선재는요 이련을 여인숙 방에 홀로 남겨두고 막걸리 한잔에 취해 산으로 올라가잖아요 별 보려구요 그 순진 또는 대분심 그녀는 떠나고 없었어요.
나쁜 영화
검열에 왕창 짤려 개봉하던 날 나쁜 아이들은 대한극장 앞에 뒤늦게 모였다 극장 안에 들어가기조차 싫어하던 나를 위로한답시고 재경이가 말했다
'감독님 우리 본드 불고 강물에 팍 빠져 뒤질까요?' 미친놈… 그는 정말 한강 고수부지에서 본드 불다 강물에 빠져죽었다 재경이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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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제작자 신철이는 지옥 갈지 몰라요
거짓말해서 근데요 복받을지도 몰라요 <거짓말> 만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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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 999
메텔… 청춘의 시간 속으로 여행하는 여자 그녀를 찾아서 은하철도 999를 타세요
지구를 버려두고 명왕성 지나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떠나보세요
청춘의 시간 은하철도999를 타는 일뿐 더이상 뭐 할 일이 있겠어요 기계인간의 도시는 무너지고 기적은 우는데 메텔… 그녀는 지구로 돌아가는 기차를 끝내 타지 않았어요 안드로메다 플랫폼에 그녀를 남겨둔 채 은하철도999는 그렇게 떠나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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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공주-진흙소(泥牛)
아 안 되겠어요 바다 속에 진흙소가 어떻게 달을 먹어요 아 안 되겠어요 버드나무 가지 입에 물고 천길 낭떠러지에 매달린 천년의 고독 길을 물어 그이가 입을 열어 대답하면 그이는 떨어져 죽고요 길을 묻지 않으면 감로수 길어오길 기다리는 내 부모가 죽는데요
길을 물어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아 안 되겠어요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오늘 하루도 난 산 게 아니에요 진흙소 거기 어디 있나요? ………달 뜨는 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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