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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쓴 토론글에 대한 2차 답변입니다. 사실 잘 모르는 분야였기 때문에 전체의 일부긴 하지만 자료를 수집하고 나름대로 습득하여 판단하는데 시간이 걸렸으며,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1차 답변에 대해 토론대상자가 답변을 하지 않아 쓸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개선과 공부하면서 느낀 점들을 자료로 남기기 위해 글을 남깁니다.
어쨌든 글은 계기가 된 댓글들에 대한 답변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이어집니다.
안녕. 지난번에 이어서 답글을 쓸게. 그때 쓴 것처럼 사림(은 조금이지만)과 연계하여 농업에 대해 써볼까 해.
위의 댓글을 본바, 나는 조선초기의 발전과 그 안에 내포되는 농업의 발전에 있어
‘훈구파가 역할을 했다’라는 식의 느낌을 받았어. 중흥기인 영정조시대의 식량과 초기를 비교했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나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일단 건축기술과 토목기술의 경우 1차 답글에서 이미 반박글을 썼으니까 이 부분에 집중할게.
너는 조선 초기에 훈구파가 집권을 하였기에 선초의 농지 개발과 발전 역시 훈구파가 이뤄냈다고 보는 듯 해.
근데 실상을 알게 되면 그 내용은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어.
사림의 기반이 되는 재지사족들은 중소지주로 여말의 혼란한 시대상을 거치면서 불교->유교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불교의 기반을 인수함과 동시에, 선진농법 수입으로 외곽지대에 대한 개발을 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갖춰나가게 되지.
이에 따라 고려후기까지 미개발로 남겨진 지역들이 지방에 기반을 둔 사족들에 의해 새로이 개발되고 발전이 된 거야.
더군다나 중소지주로써 유교를 받아들인 그들의 성향이 오지개발과 함께 정착이 이뤄짐으로써, 이전 댓글에서 나타났던 여말의 대도시들이 상대적으로 분화되게 되는 기능을 하게 됨도 같이 인식을 할 수 있지.
인구분산에 있어선 당시의 중소지주라 하더라도 사족들이 가진 노비수가 보통 수백구(口)까지 된다고 하니, 이들에 의한 지역개발과 도시인구의 분산은 쉽게 파악 할 수 있을 거야.
이러한 사림세력 활동이 바로 수리시설의 건설로 이어져.
수리시설은 댐처럼 인공적으로 물을 모아서 안정적으로 농업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야.
이러한 수리시설로는 제언, 천방(보)등이 있어. 물이 농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삼국시대 이래부터 계속적으로 수리와 건설이 이뤄졌고. 따라서 벽골제와 같은 대표적 수리시설들이 삼국시대이래로 지속적으로 건설과 수리가 이뤄졌으며, 이를 기반으로 수전(水田) 즉, 논이 생기게 되고 가화(嘉禾)라는 수전에 맞는 신품종까지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고려시대엔 제언(堤堰)이 지속적으로 건설되지만 몽골과의 전쟁 이후로 오랜 항쟁으로 인해 지배층과 백성들이 연해, 도서로 이동하는 바람에 여말로 갈수록 내륙보단 이들 지역에서의 개간과 발전이 이뤄지게 되고. 대표적 예로 강화도는 그 당시에 5천결 정도의 농지를 가지게 되었는데, 조선 후기 고종 대에 5천6백결 정도라고 하니깐 당시의 도서지역 개발 수준을 예측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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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47권, 13년(1482 임인 / 명 성화(成化) 18년) 10월 16일(신사) 3번째기사
제도의 관찰사에게 제언·천방의 축조와 안민에 대하여 하서하다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제언(堤堰)과 천방(川防)12859) 은 농사짓는 데 있어서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인데도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태만하여 뜻을 두지 않으니, 매우 적당하지 못하다. 경(卿)들은 이런 뜻을 잘 알아서 그 둑이 터지고 무너진 곳에는 수축(修築)하고, 새로 축조(築造)할만한 곳에는 백성들의 정원(情願)12860) 을 들어서 시기에 맞추어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또 금년 겨울철은 따뜻한 일기(日氣)가 봄과 같으므로 시령(時令)12861) 에 어긋남이 있으니, 어찌 천재(天災)를 초래(招來)함이 없었겠는가? 내가 염려하는 것은 수령(守令)들이 내 뜻을 본받지 않고서 혹은 자기의 좋아함과 미워함으로써 형벌을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사송(詞訟)을 오래 지체(遲滯)시켜 백성의 원한이 있도록 하기도 했을 것이니, 곧 마땅히 관원을 보내어 자세히 살피게 하여 만약 법에 어긋난 사실이 있다면 다만 죄가 수령(守令)에게 미칠 뿐만 아니라 경(卿)도 또한 그 책망에 변명(辯明)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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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조선시대에 들어섰네. 조선 역시 수리시설을 중시하지만, 중심은 조금씩 바뀌게 돼. 노동력의 투입에 비해 효과가 적은 제언보다 천방의 축조를 장려하면서 천방축조를 중심으로 수리시설의 건설이 이뤄지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중심에 사림이 위치하게 돼. 아무래도 이런 경향은 자연스런 물길을 막는다고 하는 천방이 존재할 위치인 오지지역들이 그 세력들에 의해 개발되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도 있고.
아무튼 세종실록에 기록된 제언의 숫자는
경기도 3 충청도 14 경상도 20 전라도 5 황해도 2로 총 44개소
가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많은 수의 고려시대의 수리시설이 파괴됐든 정상상태로든 존재했으리라 보더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림세력이 지방의 수리시설에 관여하여 제언과 천방의 건설에 일조했음은 부정 할 수 없어. 그 자료는 다음의 표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성주지역 이문건가의 수전농업’이라는 논문에 나온 자료야.
이문건은 사화로 인해 유배된 뒤에 각 외곽지역의 농지개발에 힘썼으며, 당시의 천방건설에 일조하기도 했어.
논문에서 나온 성주지역의 수리시설은
15세기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6개소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15개소
1677년 경산지에 27개소와 사라진 3개소
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어.
수리시설의 증가세를 중요 포인트로 본 이유는 간단해. 바로 수전의 우수성 때문이지. 수전의 경우 같은 크기의 한전 즉 밭에 비해 2배의 수입을 내는 구조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각 왕조는 이처럼 수리시설에 목을 매고 새로운 농지의 개간뿐만 아니라 한전을 수전으로의 전환을 꾀했어. 동시에 안정적인 수전의 역할을 하는 수리안전답의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었지.
이를 성공적으로 일궈낸 왕조는 적어도 내가 가진 자료에 한해서는 조선왕조라 보는 것이 옳다고 봐. 선초 사림들의 지속적인 건설은 물론, 표에 나오는 삼남지방의 제언축조에 보이듯이 증가세가 뚜렷이 나타나기 때문에 말야. 몇몇 부분에서는 의견이 갈리는 논문들이 이앙법과 수전에 관해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경우도 있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이앙법의 시행은 차치하고라도, 수
전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나는 위의 자료를 근거로
조선 초, 중기에 이뤄진 농업의 기반들이 사림세력들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왜란 이후 전체 결수의 감소
농업에 집중하여 조선 초기의 사림이 한 역할에 관한 부분은 비교적 명확한 그림이 나타나지만, 농토의 감소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접근이 어려운 부분이었고 새로운 판단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었어.
출처 - 조선시대 각 도별 인구 및 전답과 조세부담액 분석 ‘오기수’
위의 표는 통계학 쪽 논문에서 발췌한 자료로,
임난 전까지의 구분을 살펴보면 세종실록지리지의 1432년의 도별 결수가 엄청나게 증가한 것을 알 수 있지?
특히 평안도나 함경도의 경우 몇 년 안되는 사이에 3천결과 6천결 안팎에서 13만결과 무려 30만결의 증가가 이뤄진 것 말야.
1의 출처 탁지지나 2의 출처 증보문헌비고, 3의 출처 세종실록지리지라는 자료사이의 엄청난 간극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또한 농토 복구 문제에 있어선 몇몇 지역에선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충청도나 경상도, 황해도의 경우엔 이전수준과 거의 비슷한 결수를 보이고 있음도 인지해야 될 것 같아.
하지만 이런 의문점들이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의 농토의 감소는 지속적으로 이뤄진 것도 사실이라고 해.
역설적으로 수리시설이 증가하면서 수전은 지속적으로 조금씩 늘어나면서도 한전은 그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진 거지.
그렇다면 왜임난 이후에 여러 복구노력에도 불구하고 농토가 지속적으로 감소했을까?
나는 시대적 요인에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했고, 소빙기에 집중해서 생각을 해보았어.
마침 좋은 자료가 있어 참고하였는데, 무료논문이니 한번씩 봐도 좋을 것 같다.
이글에 따르면
17세기는 경제적 후퇴와 지속적 인구감소, 기근, 질병과 같은 재난이 유럽과 동아시아를 통틀어 발생했다고 해.
이 동시다발적인 위기의 시대를 통틀어 소빙기라하고 나타나는 원인에 관한 것은 논문에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어 있어.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뒤의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이 소빙기라 불리는 재난의 시대를 겪게 된 거지.
이에 따라 경신대기근이 발생하면서 100만명 가까이 죽어나가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지.
임난이라는 전쟁 직후의 기근과 인구감소 뒤에 다시금 이어지는 전지구적 재해와 다시금 이어지는 대기근을 통한 조선전체인구의 약 20%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전체경작지의 감소를 단순히 조선의 무능만으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 더군다나 기후사에 관한 논문에는 소빙기로 인해 농업기반의 조선사회가 거의 마비되었지만, 조선의 대응 덕분에 그 시기를 잘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하고 말야.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과 같이 종교문제로써 풀려고 했다고 하고, 명,청의 경우엔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이라든지, 실록의 기록에 대한 충실성이 이미 무너져 내렸기에, 중립적이고 충실한 기록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더라고.
표 6의 급재면세결수란 그해에 발생한 재해로 인해 면세를 해주는 결을 이고, 제반면세결수는 애초에 세금을 면제해주는 결인데, 유래진잡탈전은 그전에 한번이상 경작을 했지만, 황폐화되어 기록된 토지로, 세부로 복사전(覆沙田)-[ 모래가 덮어버림], 천반포락전(川反浦落田)-[하천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 밭이 떨어져나감], 황폐전이 있어.
재해가 발생하는 정조18년이나 순조14년의 경우 급재면세결수가 늘어나는 것도 표를 통해 알 수 있을 거야. 이 자료들을 통한 결과는 네 스스로 판단해줬으면 좋겠다.
이상, 너에 글에 대한 반박을 마쳤다. 물론 완벽하게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너무 내용이 길어질 수도 있어 자른 부분도 있으니까, 이런 부분도 같이 생각은 해줬으면 좋겠어. 수전에 이어지는 이앙법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로우면서도 어렵기도 했고, 같이 싣기엔 양도 많았거든.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지금의 글도 뭔가 엉성한데, 그만큼의 글을 또 싣는다면 더욱 충실함이 사라질 것 같아서 말야. 어쨌든 첫 댓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를 자극하는 댓글로 인해 처음엔 짜증내지 화가 나기도 했다만, 결과적으로 전역 이후에 나름대로 내가 자료를 찾아보면서 궁금했던 부분을 스스로 찾아보게 만들어준 점은 고맙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조선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그렇다고 무슨 잘났다는 식으로 보라는 소리도 당연히 아니야.
개인적으로 나는 역사에서의 로맨티스트를 싫어해. 단순히 사서 한쪽에 실린 내용이나 유물이나 유적의 부분만을 가지고 그게 다인양 판타지를 꿈꾸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적인 진실은 아니라는게 중요하지.
따라서 하나의 유적 혹은 유물을 가지고 판단함에 있어 최대한의 가치중립성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요즈음의 사람들을 보면 은근히 여말 아래로는 고대시대 강성함이라는 판타지를 통해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인 면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조선시대 이후는 일제강점기와 연계 되선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봐. 따라서 내가 쓴 글의 경우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부분들을 써놓은 것이기도 하고 말야. 이런 내 생각을 너뿐만 아니라 이글을 읽는 사람들이 잘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p.s 암튼 결과적으로 글은 너무 길어서 사람들이 별로 안 읽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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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맞아. 그거였음. 갑자기 생각나네 ㅎㅎ 여담이지만 에이지2를 좋아했거든. 칭기스칸 미션깨던거 생각나네ㅎㅎㅎ
그 마르코폴로가 수행해서 일칸국 가잔에게 시집간 쿠케치있지? 그거 고려로 시집온 공주들보다 훨~씬 아래 서열임. 물론 일칸국에서는 가잔의 대복진이였지만.. 일칸국 대복진이면 말이 일칸국 대복진이지 페르시아 황후고, 전 몽고제국 여자들 중에 서열 2위인데, 이런 자리를 겨우 요 정도를 보냈음. 고려로 시집온 공주로 치면 비황족인 정순숙의공주급이라고 보면 됨... 보르지기트 씨족[원 황족] 도 아냐. 바야우트인가.. 정확하겐 모르겠는데 변두리임. 물론 외손녀 등으로 얽혀는 있지만.. 암튼 어쩌면 [원보다도 빨리 망한] 일칸국보다 고려가 더 중요했는지 몰라. 원에겐...ㅇㅇ
다른데다 써놨긴 한데 다시금 달자면 ㅋ. 줄타기를 잘한것 + 다른 나라들과 달리 오랜기간 항쟁한 점을 높게 사서 높은 서열로 왕족을 안주시킨 뒤, 공물이나 여러가지를 통해 다시는 이전처럼 저항하지 못하도록 속박하면서 싹을 자른 느낌이라 생각되. 나는 ㅎㅎ
하긴 어느 정도 당근을 줘야, 그리고 타성에 젖게 해야 저항의 싹을 자를 수 있을 테니. ㅇㅇ
유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선덕여왕의 남편 말야, 누구라고 생각해? 나는 유사의 '음갈문왕' 은 '진안갈문왕 국반' 즉 선덕여왕의 작은삼촌이였다고 보거든? 즉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의붓딸 자격으로 즉위했다.. 이거임. ㅇㅇ 이것에 대해서 사학과쪽에서 언급되는 내용이 있음?
말했다시피, 나는 한국사강독외에 수업으로 들은 내용이 없다니깐 ㅎㅎ. 강독시간에 위지동이전이랑 다른거 하나 해석 하는거 말고, 없어서 모르겠넹. 더군다나 우리학교 사학과는 문헌사위주가 아니라 고고학이 좀 발달되 있어서 ㅎㅎ.
어디임?ㅎㅎ
말해주기 창피함 ㅋㅋ 미안. 서울에 있는 중하위권임 ㅎㅎ 혹여 눈팅할지 모를 애들이 있을지 몰라 두렵기도 하고 ㅋㅋ
그래서 아까 말햇다시피 난 문헌사쪽보단 미술사나 이런거 대학교때 공부하고 그랫거든 ㅋ 그렇다고 그쪽이 막 우월하고 이런게 아니고 전반적으로 경험하려고 노력
하면서 걍 입문수준이야 죄다 ㅋ 고딩땐 경시대회 준비하느라 임난때 무기발달하는거 조금 공부햇엇고, 서원건축이런거 좀 공부하고 대충 잡학이지 머 ㅋㅋ
ㅎㅎ 겸손하네 사실 나도 아는 거 하나도 없이 떠든 건데.. 암튼 오늘 너무 재밌었음..담에 또 얘기해 나 내일 병원 가야되서 2시엔 자야해 ㅜㅜ 한번 쭉 읽어보고 먼저 갈게~ 미안
ㄴㄴ 나도 덕분에 좋은 공부 한듯. 안그래도 나도 2시에 자려고 했는데 잘됬네. 오늘도 원래는 일끝나고 와서 잠깐 글확인하고 바로 자려고 했는디..
이야기하다 재밋어서 다시 또 2시네 -- 암튼 즐거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