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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1일(화)
* 시작 기도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주님...
성전은 이제 건물이 아니라 나의 몸인 줄 믿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시므로 성령의 전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몸으로 주를 부정하는 짓을 얼마나 많이 행했는지요.
이 죄인을 주의 공의로 심판하여 주소서.
지금이라도 지옥에 처넣으신다 한들 이 죄인은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일조차 그저 달게 받을 뿐입니다.
하오나 하나님께서는 이 종을 그렇게 진멸하지 않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그것의 근거는 오직 창세전 언약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언약을 맺으시면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어 주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그 은혜로 인하여 오늘 이렇게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갖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9월의 첫날, 베트남은 독립기념일로 3일간 연휴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옛 사람은 주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의 의가 아닌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주님 때문에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119:1-16
제목 :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5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2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13 주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15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16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 나의 묵상
본 시 시편 119편은 독특한 구조를 가진 시이다.
총 176절의 규모를 가진 시로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장(章)중에서 가장 긴 절수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176절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는 8절씩 총 22연으로 만들어졌으며 1연부터 마지막 22연까지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르고 있다.
참고로 히브리어 알파벳은 총 22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연의 첫 글자는 그 알파벳에 해당하는 글자로 시작한다.
이러한 형식의 시를 답관체(acrostic)라고 하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머리를 밟아가는 체’라는 의미이다.
또한 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총 176절의 시 중에서 4개의 절(84, 90, 122, 132절)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절에서 말씀을 지칭하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법, 법도, 계명, 말씀, 규례, 증거(교훈), 등이 그것이다.
물론 시 전체가 하나의 내용을 이루는 이야기체는 아니다.
하지만 각 절마다 사용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보면 모든 복과 행실 그리고 고난과 여러 가지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어 알파벳 처음 두 글자인 알렢과 베이트로 시작하는 두 개의 연을 다룬다.
첫 번째 연에서 처음 사용되는 단어는 알렢으로 시작하는 ‘아쉬레’(복이 있음이여)이다.
두 번째 연에서 처음 사용되는 단어는 두 번째 알파벳인 베이트로 시작하는 ‘빰메’(무엇으로)이다.
제1연인 1-8절까지는 인생의 복의 기준이 되는 여호와의 법으로서의 말씀을 다루며, 제2연인 9-16절까지는 행실의 기준이 되는 여호와의 말씀을 다루고 있다.
시인은 1-3절까지 여호와의 법이 인생의 복의 기준이 됨을 선포하고, 4-7절까지는 복의 기준이 되는 주의 법을 지키려는 소망과 사모함을 절절한 심경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8절에서는 그 복의 기준이 되는 주의 법을 지킬 것에 대한 결단과 함께 끝까지 지켜주실 것에 대한 간구를 한다.
9절은 주의 말씀이 청년의 행실의 기준이 되는 것에 대한 선포와 함께 10-14절은 행실의 기준이 되는 말씀을 지키려는 소망과 간절히 사모하는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5-16절은 행실의 기준이 되는 주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순종을 결단한다.
(1-2)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복은 곧 여호와의 법을 행하고 그의 증거를 지키며 여호와를 구하는 것이다.
이 복은 결코 어떤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되 주를 구하며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이렇게 살되 거기에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부요해지고 높은 자리에 앉으며 반드시 누군가가 알아줄 것이라는 말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과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에 계시다가 갈릴리로 가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시려고 한다.
당시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땅이며 사마리아인들을 개 취급하였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였을 때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데려다가 앗수르의 고산 하볼 같은 지역에 흩어버렸고 또한 앗수르 사람들을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지역에 데려다 놓았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통혼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순수한 피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남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한 사람 곧 개와 같은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개념을 뛰어넘어 일부러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시려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먼저 야곱의 우물가에 오셔서 거기에 앉아 수가성 여인을 기다리신다.
마침 여인이 오자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신다.
그러자 여인이 하는 말이 당신은 유대인인 것 같은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한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선물과 당신에게 물을 좀 달라하는 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당신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가 ‘생수’를 당신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께 당신이 야곱보다 크냐고 묻는다.
그 이유는 자기가 마시는 이 야곱의 우물은 야곱부터 시작해서 무려 2,000년이 지난 그 당시에도 수가성 여인이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성분과 수량이 엄청난 그런 우물을 우리에게 준 야곱보다 당신이 더 크냐고 묻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자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께 자기에게 그 물을 달라고 하면서 더 이상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에 물을 길러 오는 수고도 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신다.
갑자기 그 여자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 아닌가?
여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남편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하신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미 그녀의 모든 삶을 알고 계신다.
그녀가 전에도 남편 다섯이 있었으며 지금도 한 남편과 살고 있음을 아신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남편이나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므로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참되다고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과 진리라는 두 차원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도 한 남편이 있다는 것은 그 여인에게 있어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the fact)이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in the Truth)는 남편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 있는 남편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없어질 만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진리 안에서 참된 남편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이제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랑이요 남편이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이와 같이 사실에 속한 현상들은 언젠가 사라지고 없어질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주기 원하시는 것은 없어지거나 사라지고 말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 영원에 속한 것은 다름 아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다.
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나를 알았다면 그것을 구했을 것이며 또한 내가 너에게 생수를 줄 것(요 4:10)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야곱의 우물과 남편은 같은 의미를 가지는 다른 이름이다.
여인이 퍼마시는 야곱의 우물은 수량이나 성분이 좋지만 그 역시 마시고 나면 잠시는 해갈되지만 금세 다시 목마르고 만다.
남편 역시 좀전에 설명한 것처럼 지금은 내 남편이요 나의 소유인 것 같지만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데리고 살다가 싫증이 나면 다른 남편으로 바꾸고 잠깐은 만족하지만 또 싫증이 나면 바꾸는 것이 만물 안에서의 남편임을 천명하고 계신다.
물론 이는 이 땅에 살면서 결혼하여 사는 그 남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징적인 것으로 남편이란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그 무엇(something)이다.
야곱의 우물과 남편은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남편이나 야곱의 우물도 언젠가는 다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차원에서 이는 만물 안에 속하는 한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런 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아주 비근한 예로 우리 아들은 다섯 살 때 롯데마트에 가면 로봇을 파는 코너에 가서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사 달라고 떼를 쓰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다.
하여 그런 로봇을 몇 개나 사줬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지금 성인이 되었다.
이 아들이 지금도 그 로봇을 사달라고 떼를 쓰고 울고불고 하는가?
아들은 이제 그런 로봇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우물과 남편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다.
이 땅에서는 당장 가지면 만족하는 것 같지만 그 만족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것은 이처럼 금세 사라지고 없어지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곧 영생에 있다는 말이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러자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내가 가만 보니 당신은 선지자네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주욱 이야기를 한다.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한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예배란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다.
예배는 그 장소를 넘어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인데 그 예배할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하신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는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그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는 수가성 여인이 말한 것처럼 그리심산이든 예루살렘이든 예배당이라는 예배의 장소가 필요하다.
이 예배당에서 정해진 시간에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는 한 주간의 삶을 정리하는 예배로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4:23절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이 예배는 멋진 세션이나 여러 가지 예배의 요소들을 가진 그런 예배가 아니라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지금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이는 날마다 순간마다 드리는 예배로서 영과 진리 곧 성령과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이며 이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날마다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는 예배를 말한다.
이렇게 날마다 말씀과 성령으로 주님을 만나는 예배를 통해서 주일에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 예배의 성공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있어서 참된 복은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이며 그 삶이 바로 영생의 삶인 것이다.
나는 이런 영생의 삶을 알지 못하였다.
그것은 사실과 진리 안에서 한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무언가 얻었다 싶으면 다시 무너져 내리곤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그로 인하여 낙심과 절망이 연속되었으며 무엇을 새로 한다는 것이 겁이 나고 힘이 들었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닫고 난 뒤에는 만물 안과 만물 위 곧 사실과 진리라는 이 두 차원의 세계를 분별하게 되었다.
하여 목사요 선교사로서 사람들에게 만물 안에 속한 한시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속한 영생의 진리를 가르치고자 애쓰고 있다.
내가 지금도 이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것도 오직 복음을 전하고자 함이다.
썩어지고 사라지고 없어질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 이 땅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두 발은 이 땅을 딛고 살아가지만 여기서도 얼마든지 영원한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기에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도록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 나라가 오늘도 내 안에 그리고 복음을 아는 모든 이들에게 편만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사실(the fact)과 진리(in the Truth)를 알지 못하고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며 살았던 몽매한 자가 여기 있습니다.
진리이신 우리 주님과 영원한 그 나라를 알지 못하였기에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듣는 대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나는 정말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제 복음을 알고 전하는 자로서 말씀이 곧 참된 복이요 모든 복의 근원임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오늘 말씀처럼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이 영생이며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빙하호의 범람으로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당한 네팔을 불쌍히 여기사 유가족들과 이재민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네팔인들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사람들도 많이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환경으로 인하여 마음마저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저들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주의 복음을 듣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