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순 씨는 하숙생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더 이상의 패배는 없다."
"치욕의 99년은 가라!"
"우리는 오직 이날을 기다려 왔나니...나 김탁순의 이름으로 그들을 응징하라."
"저... 누님, 그거 '쉬리'에서 인민군 장교가 써먹었던 대사인데요."
오색칠 씨의 말에 모두들 쿡쿡 거리며 웃음을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있었다.
"시끄러워! 밥값 제대로 못하기는 자네도 마찬가지야."
"아무튼 고 코치와 미스터 공을 주축으로 다음 시합 때까지 맹훈련을 해주길 바래."
"우리 백군도 제법 하는 것 같던데...?"
김탁순 씨의 말에 백행두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감히 제가 끼어 들만한 판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냐, 아직 젊으니까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고수의 길을 갈 수가 있지."
"맞습니다. 아까 두 분 이서 치는 것 보니까 저희들 보다 한 수 위 같던데요."
"쿠쿠쿠~ 아직 내 운이 다하질 않았다는 증거야."
"이런 복 덩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제 발로 걸어들어 오다니... 쿠쿠쿠~"
공구탁 씨와 백행두를 바라보는 김탁순 씨의 눈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이 도착하고 사람들은 다시 식당으로 모였다.
푸짐한 요리와 술이 사람들을 이내 흥겹게 해주었다.
술잔이 오고가며 서로에 대해 보다 많은 것들을 알게 해 주었다.
언제부터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마주하고 있는 하숙집과는 정기적으로 탁구시합을 해오고 있으며 두 하숙집에서 배출한 비 선수출신 고수만도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특이한 것은 하숙집을 직접 운영하는 당사자들 또한 대단한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공식경기는 서로 피하고 있다고 했다.
더구나 앞에 있는 하숙집 주인영감님은 놀랍게도 전 국가대표 출신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탁구와 깊은 인연이 있는 당사자들은 하숙생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제 잔 한잔 받으시죠."
공구탁 씨를 긴장케 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백천사 였다.
"아~ 네...^^;; 고맙습니다.^^"
"굉장한 고수 시던데요."
"깜짝 놀랬어요."
"하하...부끄럽습니다."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
"하하~남들이 흔히 말하는 백숩니다. ㅡ ㅡ;;"
"그렇다고 그냥 무위도식하는 것은 아니고 뜻이 있어서 공부중입니다."
"어떤...? ^^;"
"사법고시를 준비중이죠."
"안 되는 줄 알면서 미련스럽게...^^;;;"
"어머! 그 어렵다는...고시를...^^;;"
"쿠쿠쿠~ 조금이라도 가능성은 있는 겁니까?"
마주 앉아있던 차정비 씨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한 마디로 낙타가 바늘통과하기죠."
"분명한 것은 시험 때마다 합격자가 배출된다는 것이죠."
"그럼 그 합격자가 공형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차정비 씨의 말은 다분히 승산 없는 싸움에 시간낭비나 하는 한심한 사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희망사항이었죠. 지금까지는...ㅡ ㅡ++"
"그럼 하루라도 빨리 때려치우고 우리 공장에 와서 자동차 정비라도 배우쇼.^^"
"모름지기 남자라면 자기 입 하나는 해결할 능력이 있어야 사회적 대접을 받는 거라오."
"나야 이 계통에서는 다 알아주는 실력이지만 그러기까지는 남 못잖은 노력이 있었지요."
"하하~말씀은 고마우신데...해오던 일이고 또 끝장을 보아야 할 일이라서...^^;;;"
"이런...^^;; 거 판검사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물론 머리도 좋아야겠지만 타고 나는 겁니다."
공구탁 씨는 속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자신을 마치 무위도식하는 날 건달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스 백을 힐끔거리며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차정비 씨로 인해 분위기가 가라앉자 백행두가 못 참겠다는 듯 끼어 들었다.
"우리 사부님을 아직 잘 모르는군요."
"지난봄에 있은 사시 1차 시험에 합격하시고 이제 2차 시험을 준비중입니다."
백행두의 말에 하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공구탁 씨에게 꽂혔다.
"헛...^^;; 그럼 우리가 지금 장래 검사님하고...?!"
"어머! 그렇군요. 어쩐지 처음부터 예사로운 분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미스 백의 얼굴에 어색함이 걷히고 웃음이 활짝 피어올랐다.
"허허~ 행두야, 쓸데없는 소릴...^^;;"
공구탁 씨는 겉으로는 백행두를 나무랐지만 내심 통쾌해했다.
"아직 2차 시험이 남았으니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2차에서만 두 번씩이나 떨어져본 제 경험에 의하면 역시 쉬운 일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차정비 씨는 난처한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어이구 ^^;; ...이거 몰라 뵙고 까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 검사님! ^^;;;"
마치 죽을죄라도 지었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리는 차정비 씨의 모습은 커다란 체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하~이러시면 제가 오히려...^^;;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아까 탁구 칠 때 알아보았지만 대단하구료."
"어쩌면 이 하숙집 생기고 최대의 경사를 보게될지 모르겠군요."
오로지 씨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구탁 씨와 백행두는 탁구 치는 하숙생들과의 첫 상견례를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제각기 다른 일들을 가지고 있지만 탁구로 맺어진 인연인 것이다.
밤이 늦어 방으로 돌아온 공구탁 씨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백행두의 코고는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티 하나 없이 곱기만 하던 백천사의 해맑은 미소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오직 사법고시와 탁구에만 매달려 왔던 자신에게 아직도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놀랄만한 사실이었다.
백천사의 미소 뒤로 잊고 살았었던... 아니 잊으려고 무진 애를 썼었던 혜영의 슬픈 얼굴이
스쳐 지나고 있었다.
<바보...! 바보 같으니...- -;;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는데...- -;;>
망령처럼 되살아난 묵은 감정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공구탁 씨는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이젠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는 사랑 같은 유치한 감정에 빠지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ㅡ ㅡ;; >
열린 창 틈으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이젠 지난 것들에 붙들려 허우적거릴 나인 지났잖아! - -++>
공구탁 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책상 앞에 앉더니 손때로 반질거리는 책을 한 권 꺼냈다.
책에서 보이지 않게 표지 사이에 끼워 두었었던 혜영의 사진을 꺼냈다.
<이젠 정말 네게 자유를 줄 테야.>
<내게서 벗어나 어디든지 마음껏 날아가렴...^^;;>
<안녕! 혜영... 안녕! 내 사랑...^^;;;>
사진은 공구탁 씨의 떨리는 손안에서 잘게 찢어지고 있었다.
공구탁 씨는 책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서늘한 바깥공기가 온몸을 휘감아 왔다.
공구탁 씨의 손에 의해 던져진 사진 조각들은 춤추듯 허공을 맴돌았다.
사랑했던 첫사랑의 여인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공구탁 씨의 의식은 숙연했다.
아니 처절했다.
먼동이 터 오도록 책상 앞에 엎드린 공구탁 씨의 흐느낌은 그칠 줄 몰랐다
공구탁 씨의 새로운 하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탁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하는 백 간호사가 있어서 쉽게 정 붙일만한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아침이면 하숙집 사람들은 어김없이 자신들의 일터로 향했다.
하숙집에 남겨지는 사람은 언제나 김탁순 씨와 공구탁 씨 뿐이었다.
"소화도 시킬 겸 한 게임 해야지!"
김탁순 씨는 책과의 씨름으로 무료해하는 공구탁 씨에게 넌지시 바람을 잡는다.
"좋습니다. 한 수 지도해주십쇼."
탁구라면 거절할 공구탁 씨가 아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초고수인지라 오히려 공구탁 씨는 김탁순 씨의 제의를 내심 반기는 입장이다.
"훔... 다 좋은데 결정적으로 배짱이 없군!"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사용해보지도 못하면 무용지물이야."
김탁순 씨는 함께 탁구를 칠 때마다 한, 두 가지씩 공구탁 씨의 결점을 지적해 주었다.
"그 좋은 공격을 언제 쓰려고 아끼는 거야?"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그대로 해보라고... ㅡ ㅡ++"
"생각을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반 토막 탁구를 면할 방법이 없어."
김탁순 씨는 오늘도 여지없이 공구탁 씨의 소극적인 플레이를 꼬집어 나무란다.
"알고는 있지만 상대가 워낙 강자일 때는...^^;;;"
"이런...ㅡ ㅡ++ 제길... 그렇다고 무조건 두들겨 맞고만 있을텐가? ^^;;;"
"두 세대 맞으면 한 대라도 때릴 줄 알아야 덜 맞는다는 것도 알아야지. ㅡ ㅡ;;"
"처음 한 두 번 빚 맞는다고 그걸 두려워해서는 손님에게 안방 내주고 사랑방 쓰는 것과 다를 게 없지.^^;;"
김탁순 씨의 지적은 언제나 예리했다.
기술적인 면에서의 지적도 그랬지만 게임 전반에 걸친 주도권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방법이나 한편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자신의 의도대로 게임을 풀어 가는 방법 등에 대해서 말할 때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기술과 이론을 모두 완벽하게 갖춘 프로였다.
"저...뭐하나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뭔데...? ^^++"
"앞집을 꼭 이겨야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
"이런... 화상 같으니...! ㅡ ㅡ++"
"그런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이유 같은 것 없어. 어떤 종류의 승부이건 간에 지고서 기분 좋을 리 없잖아. ㅡ ㅡ;;"
김탁순 씨는 공구탁 씨가 느끼고 있는 뭔가에 대한 답변을 회피했다.
그냥 탁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친선게임이라고 보기에는 정도가 지나친 부분들이 많았다.
두 집 모두 전용 연습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정기전을 하는 사이라기엔 주인들의
서로를 대하는 미묘한 태도가 두 사람 사이의 뭔가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일부러 알려고 애쓰진 마라. ㅡ ㅡ;;;"
"때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ㅡ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