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역 대합실에서 여고생들이 한데 모여
재잘거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마치 따뜻한 햇살 같은 느낌을 준다
저 연인은 무슨 靈感에 사로잡혀 장영실 과학동산을 바라보며 맨발로 걷고 있을까
하늘나라에 먼저 간 아내와 추억이 담긴 산이 허물어지고 아파트가 세워지는 꼬라지를
보니 이 놈의 회사 폭망했어면 하는 마음이다.
편백나무 숲 길 앞 원형우물(?)
동래의 유래
부산의 여러 지역에서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만, 오늘날의 동래지역에서는 현재까지 당시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신석기 문화인들은 청동기문화를 수용하여 점차 그 분포지역을 넓혀 나갔으며, 동래지역의 청동기 유적과 유물은 온천동의 금강공원․사직동․수민동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로 보아 동래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래 낙민동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쇠를 제련하는 야철터는, 동래지방이 선사시대 철생산 중심지로서 이곳에서 제련된 철은 멀리 낙랑․대방에까지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동래의 명칭은『삼국사기』권34, 지리지에 의하면,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주) "영현"이라는 용어는 고대 한국의 행정 구역을 나타내는 용어로, 특별히 한 지역 내에서 정부의 행정과 관리가 이루어지는 곳을 의미한다.
한편,『삼국지』위지 동이전 변진전에는 삼한시대 24개의 국명 중에 ‘독로국(瀆盧國)’이 있는데, 이를 동래라는 설도 있다. 동래의 옛 명칭은 거칠산국․장산국․내산국 등으로 달리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래는 ‘독로’라는 음에서 독로→동네→동래로 음전되어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할 때 중국식 한자음으로 고침에 따라 동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고려사』권57, 지리 2 울주조에는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서는 “현종 9(1018)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었고, 고려후기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경상도도순문사 박위에 의해 동래읍성이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동래는 태조6년(1397)에
군사상의 요충지로서 이곳에 진을 설치하게 되자, 진의 장수인 병마사가 동래현의 행정관인 판현사를 겸임하였다.
세종 5년(1423)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발전하였다. 즉 충렬사란 사당에 학교기능을 가진
기관으로 개편하였다.
그후 명종 2년(1547)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선조 25년(1592)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99년에는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효종 6년(1655)에는 경상좌병영 관할하의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동래진을 단독진으로설치하였다.
한편, 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부산부가 설치되고,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이전 동래부의 일부와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으로 편제되었다.
1936년에는 서면과 암남리, 1942년에는 동래읍의 전부와 사하면 등의 지역이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15일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고, 1957년 1월부터 구제의 실시로 동래구로 편제되었다.
1980년에는 일부 지역이 해운대구로 분구되어 나갔고,
1988년에는 금정구가 분구되었고, 그리고 1995년 3월에는 연산동과 거제동이 연제구로 분구되었다.
현재의 관할 동은 수안동․낙민동․복천동․칠산동․명륜동․온천동․사직동․안락동․명장동 등이 있다.
복천동(福泉洞)의 유래는『동래부지(1740)』성곽조에 의하면, 동래읍성 안에는 우물이 6개가 된다고 하였고, 각면각리원근정도 (各面各里遠近程道)조에는 읍내면에 옥미정동(玉未井洞)·대정동(大井洞) ·야정동
(野井洞) 등의 우물과 관련된 이름이 있다.
이로 보아 복천동을 동래성안의 우물에 비유하는 뜻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우물은 양반댁에서나 볼 수
있으므로 우물이 있다는 것은 복이 넘치는 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뜻에서 옥샘(玉井)은 물의 맛이 좋기로 소문난 우물이었으므로 복천동은 이러한 것에서 붙여져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특히 복천동은 복천동 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고분은 삼국시대 때 이 지역 수장급의 무덤으로 그 문화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예부터 생활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법정동인 복천동과 칠산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병합하여 행정동인 복산동으로 개칭하여 모든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담뱃대마을, 도화동마을, 광성리
가 있었다.
칠산동
칠산동(漆山洞)은 삼국시대 동래지역에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존재하여 있었는데,
이를 신라가 병합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이라 하였다가 통일신라 이후 경덕왕 때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東萊郡)으로 바뀌었다. 거칠산은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침 뫼" 즉 황령산(荒嶺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되어진다.
삼한시대 소국의 치소(治所)가 동래지역으로 옮겨질 때 주산(主山)의 이름을 칠산(漆山)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과 오늘날의 동래읍성이 있는 뒷산을 칠산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복천동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삼한시대의 가야문화가 발생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칠산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복천동과 합하여 하나의 행정동인 복산동(福山洞)으로 개칭하여 모든 행정업무를 담당
하고 있다
동래 조선후기
동래는 대륙의 관문이고,대일외교
에 중요한 지역으로 다른 부에 비해 관청의 규모도 크고
정 3품 당상관 문관이 목민관으로 부임되었다
동래부 관할구역은 지금의 기장군
과 강서를 제외한 전역이었다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동래성을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동,서,남 북 사대문과 인생문,
야문을 갖춰 훨씬 큰 규모로 다시 쌓았다
예전의 군사시설과 지역통치 목적에서 백성들도 함께 공유하는 성이었다
일제강점기 1924~1926 년에 해체되었던 것을 1980년대부터 복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