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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와 협궤열차
김동정
인천역에서 수원행 수인선 전철을 탔다. 목적지는 소래포구역. 오랜만에 겨울 갯가 풍정風情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한편으론 젊은 시절 타보았던 협궤열차의 추억에 잠시나마 젖어보고도 싶었다. ‘코로나 19’에서 자유롭지 못한 몸이지만 조심조심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헹구어오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느리게 움직이며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던 협궤열차. 우리 곁에서 사라졌던 그 열차가 광역전철로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지난가을 무렵이었다. 인천-수원을 잇는 수인선이 완전하게 연결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수인선의 마지막 구간으로 남아 있던 ‘수원∼한양대 앞’이 개통된 건 지난 9월 12일. 모두 3단계로 나눠 공사를 진행했는데 25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수원역까지 수인선 전 구간을 타보고 싶었지만 내게 허락된 시간은 4시간 남짓. 소래포구역까지 갔다 오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곧 소래포구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차창 밖으로 잿빛 바다와 포구가 어슴푸레 바라보였다. 차를 몰고 인천을 몇 번 오가면서 얼핏 보았던 소래포구. 직접 와보긴 근 5년 만이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한쪽에 수인선을 알리는 기념비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충천하던 20대 중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몇 년을 허송세월 하다 경기도 성남으로 올라와 공장 기숙사에서 꿈을 키울 때였다.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구한 첫 직장은 도시락 용기를 만드는 회사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보내던 시절이었다. 연장근무까지 해가며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던 어느 날,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수원행 버스를 탔다. 한 번 가보는 거야. 두려울 게 없었다. 버스는 수원역으로 가고 있었다. 김밥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고 인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철퍼덕 철퍼덕, 쇳소리를 내며 서쪽으로 내달렸다. 마치 장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그게 협궤열차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덜컹거리는 열차 칸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보따리를 들고, 아이를 업고, 가방을 메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 열차가 정거장에 설 때마다 사람들이 우르르 타고 내렸다. 어느 역에서는 학생들이 줄을 지어 타는 바람에 가뜩이나 좁은 열차 칸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몸빼 차림의 아주머니는 머릿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쭈그리고 앉아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고 있었다. 허리 꼬부라진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겨우 자리에 앉아 옆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큼지막한 쌀 포대를 들고 탄 근육질의 청년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한껏 불편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학생도 보였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열차 안은 한증막처럼 후끈거렸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저마다 꿈을 가슴에 안고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산다는 것은 이토록 절절하고 애잔하다는 걸 그때 처음 느끼고 본 것 같다. 20대에서 30대로, 40대에서 50대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수시로 마음에 품은 것도 과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물음이었다. 그러구러 시간을 죽이며 보내던 어느 날, 희미하게나마 문득 터득한 것은 삶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지개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내 나름의 어설픈 생각이었다.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게 인생이라고 자위하면서 청춘을 보냈고 장년을 거쳐 어느덧 50대의 반열에 들어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물음표를 끝없이 던지며 살았지만 그럴수록 인생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깨달음을 향해 평생 수행에 정진하는 선승禪僧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아마도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되씹으며 살지 않을까 싶다.
수인선의 주 이용객은 학생들과 장사치들이었다. 이따금 양복 차림의 중년 남자며 미끈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도 보였다. 열차는 바쁠 게 없다는 듯 뒤뚱거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덜컹덜컹 흔들흔들, 덜컹거리고 흔들거리는 열차는 재미가 있었지만 지루했다. 휙휙 지나가는 논밭과 둔덕, 달팽이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드문드문 보이는 빌딩, 마을 옆으로 난 오솔길,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산숲, 곡선으로 뻗어 있는 실개천, 파란 하늘에 피어난 구름꽃, 전깃줄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의 긴 행렬, 들판 너머로 보이는 시가지……. 오목, 어천, 야목, 빈정, 일리, 성두, 원곡……. 역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이 역엔 뭐가 있을까 몹시 궁금했다. 아무 역에나 내려서 기분 내키는 대로 걸어보고 싶었다.
내 목적지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인천항. 수인선 종점이었다. 오후 몇 시쯤이던가? 드디어 인천에 도착했다. 인천이란 도시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거대했다. 그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거의 안보였고 굴뚝 연기를 내뿜는 공장들과 허름한 집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총총걸음으로 바다가 보이는 항구로 걸어갔다. 아, 바다가 성큼성큼 가슴에 안겼다. 잔잔하면서도 감미로운 바다였다. 문득 고향 바다가 생각났다. 하얀 갈기를 세우고 달려오던 파도와 굽어 돌아간 은빛 모래톱. 수평선으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그리움이 진하게 밀려들었다. 어디선가 동생이 오빠, 하며 달려오는 것 같았고, 저만큼 어머니가 나를 부르며 다가오시는 것 같았다. 타향살이의 외로움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갯바람이 훅 지나갔다. 저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한가운데 점점이 떠 있는 배들이 마치 인형을 세워놓은 듯 했다. 배 기름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서둘러 돌아가야 했기에 바다는 잠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리저리 배회하다 인천역으로 와서 수원행 열차를 탔다. 그게 내가 타본 마지막 협궤열차였다. 그 후로도 열차는 오랫동안 인천과 수원을 오갔지만 여기저기 떠돌며 바삐 사느라 타볼 기회조차 없었다. 먹고사는 일의 절실함이 온몸을 옥죄던 20대 청춘은 그렇게 지나갔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사라지는 건 아름답다 했던가. 아름다운 것은 사라지는가?
여기서 협궤열차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철로 폭이 1미터도 되지 않아 ‘꼬마열차’라고 불렀던 협궤열차는 1995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승객 감소로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더 빠르고 편리한 열차의 등장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것은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진 협궤열차와 그 열차에 대한 애절한 추억 때문이리라.
수인선 협궤열차가 달리기 시작한 건 일제 강점기인 1937년부터다. 소래에서 생산한 소금과 이천·여주에서 나는 쌀을 인천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일제가 만든 시설이었다. 광복 후에도 객차 6량과 화물차 7량을 달고 15개 역을 달릴 만큼 존재감이 컸다. 소래 사람들은 협궤열차에 소금과 곡식을 싣고 인천, 안산, 수원, 서울 등지로 나가 팔았다. 더구나 학교를 오가는 학생들에게 이 협궤열차는 없어서는 안 될 통학 수단이었다. 버스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서 순전히 열차에 의존해야 했다. 일제가 남긴 아픈 유산이지만 거기에는 그 시대를 거쳐 간 사람들의 낭만, 위안, 기쁨, 슬픔, 설렘, 사랑, 꿈, 그리움, 애틋함이 판각板刻처럼 남아 있다. 내 젊은 시절의 소중한 추억도 함께. 소래포구에 얽힌 추억도 되살아난다. 어느 해 가을 무렵, 아내와 찾았던 소래포구는 센티멘탈한 분위기로 우리를 반겼다. 철교를 걸으며 협궤열차의 추억에 잠긴 사람들과 그 밑으로 흐르는 바닷물이 수묵화처럼 마음을 적셨다. 어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고 짭짤한 생선 냄새가 코끝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가게마다 대하, 꽃게, 광어, 오징어, 바지락, 홍어, 농어, 멍게, 꼬막, 갈치, 해삼, 홍합, 주꾸미, 낙지 같은 싱싱한 생선이 가득했고 새우젓, 멸치젓, 꼴뚜기젓, 밴댕이젓, 게젓, 명란젓, 창난젓, 황석어젓 따위의 온갖 젓갈들과 멸치, 미역, 다시마 같은 건어물들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손님들을 맞았다. 매운탕, 바지락칼국수, 해장국, 생선구이를 내놓는 식당도 붐비기는 매한가지였다. 상인들은 가게 앞으로 나와 덤을 더 준다며 손님을 부르기 바빴고, 생선 박스를 가득 실은 오토바이는 좁은 시장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느라 진땀을 뺐다. 손에 장바구니를 든 젊은 엄마는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깨가 부딪치고, 손과 손이 스치고, 옷깃이 닿고, 침이 튀고, 발이 밟히는 그 복잡한 시장통에서 내가 느낀 것은 삶의 성스러움과 환희였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 냄새였고 바다 냄새였다. 값이 비싸다느니 싸다느니 싱싱하지 않다느니 싱싱하다느니 덤을 더 달라고 몇 개 더 집어넣고 하는, 옥신각신 아우성 소리에 섞여있는 소박함과 넉넉함, 그리고 기분 좋은 마음씀. 손때 묻은 돈을 주고받는 상인과 손님의 흐뭇한 표정, 목 아프게 외쳐대는 호객 소리. 아무리 듣고 보아도 싫지 않은 끈끈한 삶의 몸짓들이 골목골목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밀리고 밀치는 인파 속을 빠져나오는데 한참 걸렸다. 갯비린내 나는 선창가 또한 북새통이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오순도순 돗자리를 깔고 앉아 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 곁들이는 모습은 진정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고 포구에 어스름이 깔리자 홍시빛 노을이 한 폭의 그림인양 마음을 울렸다.
하지만 올 겨울, 소래는 조용하고 쓸쓸하다. 어시장은 활기를 잃어버렸고 주변 상권도 썰렁하다. 다들 몸을 움츠리는 겨울인 데다 ‘코로나 19’가 몰고 온 아픈 풍경이다. 모진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오면 좀 나아지려나? 그랬으면 참 좋겠다. 어시장 옆에 번듯하게 서 있는 현대식 건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생선을 파는 상인의 말로는 몇 년 전 시장에 큰 불이 나서 가게가 모두 타는 바람에 장사를 제대로 못했는데 며칠 전 새 건물을 지어 옮겨왔단다. 새 얼굴로 손님들을 맞는 어시장이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새 건물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여러 모로 좋은 일이지만 왠지 추억 한 자락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건물 바깥쪽의 포구로 나가본다. 옛 모습 그대로 깃발을 단 어선 수십 척이 출어를 기다리고 있다. 찬 바닷바람이 옷깃을 쉴 새 없이 파고든다. 코끝이 아리고 귀가 얼얼하다. 갈매기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창공을 휘젓고 있다. 아름다운 비상이다. 새해에는 저 갈매기의 힘찬 날갯짓처럼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으면 좋겠다. 갯가에 아무렇게나 쌓인 통발과 그물 더미의 주인은 누구일까. 뻘에 앉아 먹이를 찾는 백로와 왜가리. 사이좋은 친구처럼 정다워 보인다.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가 실루엣처럼 마음을 적신다. 통통통통~. 고깃배 두 척이 나란히 포구로 들어온다. 바닷물이 출렁출렁 거칠게 밀려간다. 오랜만에 보는 역동적인 풍경이다. 만선으로 돌아와도 판로가 막히면 어부들은 실망할 게 뻔하다. 그래도 어부들은 오늘도 바다로 나가 천직인 고기를 잡아온다. 고기가 잘 팔릴 거라는 한 가닥 희망을 안은 채.
서해의 바닷물이 뭍 깊숙이 쑥 파고든 지점, 포구는 방향에 따라 독특한 정경을 보여준다. 소래포구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바닷물이 들어와 배들이 들고 날 때가 아닌가 한다. 썰물과 밀물은 보기에 따라서 사색과 정서의 간극을 좁히기도 하고 넓히기도 한다. 정지해 있는 풍경보다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풍경이 더 마음에 와 닿는 건 인지상정이다. 장소는 어시장 끝머리, 서해를 앞 배경으로 두고 소래철교와 포구, 수인선이 지나가는 소래대교가 일직선으로 보이는 곳이다. 그 시간이 석양 무렵이면 금상첨화다. 계절은 산천이 깨어나 사방에 연둣빛을 뿌리는 4월경이면 더 좋다. 이때쯤이면 노을은 더 붉고 바람은 상긋하고 해님은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는다. 경험자의 조언(?)이니 마음에 새겨두시기 바란다.
협궤열차가 다니던 소래철교를 걸어본다. 저만큼 칙칙 거리며 열차가 달려오는 것 같은 환상. 철교 위에 서니 소래포구와 어시장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아, 저 멀리 소래산도 단정하게 솟아 있다. 시흥 처갓집 근처에서도 보이는 산이라 느낌이 각별하다. 처갓집에 갈 때마다 저 산을 바라보곤 했다. 정상을 밟아보진 못했지만 시흥 사람들은 소래산을 제 집 드나들 듯 자주 오르내린다. 해발 300미터 남짓한 낮은 산이지만 멀리서 보면 방추형의 피라미드를 닮아 보고 또 보게 되는 산이다.
다시 소래포구 쪽으로 건너와 아파트 단지를 병풍 삼아 드넓게 펼쳐진 광장 길을 거슬러 오른다. 바다를 옆에 두고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광장 입구에 있는 꽃게 조형물을 보고 더 올라가자 새우 모양의 타워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소래포구의 특산물인 새우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란다. 타워 전망대에 오르니 시정詩情 넘치는 풍경이 두 눈에 꽉 찬다. 온몸이 파닥거리는 물고기처럼 뛴다.
어느덧 하루해가 설핏 기울어 있다. 이제 소래를 떠나야 할 시간, 눈이 오시려는지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있다. 맑고 진한 삶의 이야기들이 퐁퐁퐁 솟아나는 곳, 여러분도 꽃피는 새봄에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그때쯤이면 ‘코로나 19’도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길을 열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