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신고 한 울릉도 답사여행
1995년 대구지검 영덕지청장을 하고 있던 어느 토요일 아침, 서울지검 동부지청 시절 같이 근무하였던 부하 직원 두사람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서울에서 멀고먼 영덕까지 찾아온 부하들이 반가워 하루밤 자고 가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실 울릉도를 가고 싶어 영덕을 찾았다며 저더러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때는 11월 하순 이미 울릉도 여행철이 끝나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을 것이라는 저의 충고에도 그들은 한사코 울릉도를 가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영덕까지 찾아준 부하들의 정성이 기특하여 예정에 없던 울릉도 여행을 감행하였습니다. 근무를 마치고 부랴부랴 간단한 짐을 꾸리고 오후 2시반 울진 후포항에서 배를 타고 세시간 반 바닷길을 달려 울릉도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부둣가는 폐허처럼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고 그 흔한 호객꾼 하나 없었습니다.
내일 육지로 나가는 배를 알아보니 아침 9시반이 유일한 배편이었습니다. 아뿔사 막연하게 오후 배가 있으려니 하고 울릉도 관광을 나섰는데 관광할 시간이 오늘 저녁밖에 없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전 준비가 없는 여행이 또 있을까? 하는 수 없이 코란도 택시를 대절하여 속전속결로 울릉도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어디가 어디인지 잘 알 수도 없고 그저 택시기사가 데려다 주는 대로 이곳 저곳을 구경하였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어둑어둑해진 나리분지의 광활한 모습과 낭떠러지 산길을 위험천만하게 운전한 택시기사의 곡예 운전기술 정도입니다.
관광을 마치고 식당을 찾았으나 기대와는 달리 변변한 음식이 없어 간단한 물회로 끼니를 때우고 허름한 여관에 들어가 기억이 남을 울릉도에서의 하루밤을 지내고 그 다음날 9시반 우리 세사람은 뭍으로 향하는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15시간 반을 울릉도에 체류하였고 그중 대부분이 밤이었으니 여행도 이런 여행은 제 생애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울릉도하면 이런 여행이 머리속에 남아 있는 저에게 얼마전 모임에서 울릉도를 여행하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아쉽고 미진한 울릉도 여행에 대한 기억을 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한번은 다시 가보아야 할 곳이기에 바쁜 업무속에서 주말에도 근무를 하는 부하들에게 미안하였지만 지난 주 금요일 하루를 휴가 내어 일요일까지 2박3일의 울릉도 여행을 감행하였습니다.
금요일 새벽 4시반 집에서 출발하여 차로 3시간을 달려 묵호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한 저희 부부는 일행과 그곳에 배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승객의 옷차림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모두가 등산복 차림에 등산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반면 저희 부부는 캐쥬얼 정장에 바바리를 입고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번 여행의 기억으로 그저 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지 않을까 생각하여 주말 나들이 복장을 한 것인데 저희만 완전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행 총무는 운동화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는데 왜 연락을 못받았냐고 물었고 저희는 애꿎은 카톡만 원망할 따름이었습니다.
울릉도를 40여번 오셨다는 울릉도 매니아 한국예술종합대학교의 배진환 교수님의 안내로 일반 관광 상품의 울릉도 여행과는 전혀 다른 속살 울릉도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명이나물이 인상적인 늦은 아침을 먹고 16명의 우리 일행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울릉도 도동항에서 고깃배를 타고 15분을 달려간 죽도입니다. 선착장에서 해발 107미터의 정상까지 사이에는 365계단이 720도로 회전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상에 올라 대나무 길을 조금 가노라니 믿기지 않는 아름다운 정원 풍경이 눈앞에 드러났습니다. 2대째 이곳에서 더덕을 재배하고 있는 김유곤씨의 더덕 농장이었습니다. 일행은 1시간 남짓 죽도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구두를 신었지만 산길은 산책로에 지나지 않아 그리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을 카메라에 담느라 발이 불편하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고 죽도 관광을 마쳤습니다. 울릉도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서너 곳을 더 관광하였지만 울릉도 시내라 구두로 다니는 것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2일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좀 걷는 코스가 있다는 배교수님 말씀에 다들 구두로 다니기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제의 경험이 있어 뭐 별거 있겠냐는 막연한 낙관론이 저를 지배하였습니다. 아침을 먹고 울릉도 일주도로를 시계방향으로 돌며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마다 멈춰서 사진기로 자연을 짤라 훔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구두로 관광하기에.
드디어 첫번째 걷는 코스에 도달하였습니다. 2008년에 새롭게 만들었다는 태하향목 모노레일. 정상에 올라가면 한국 10대 비경중 하나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등판각도 최대 39도의 모노레일은 해안 절경을 감상하기에 제격이었습니다. 그 높은 곳에도 민가는 있었습니다. KBS 인간극장 ‘낙원의 케이블카’ 편에 나온 노부부가 부지깽이 등의 산나물을 농사 짓고 있었습니다. 배교수님께서 그 노부부와 인사 하는 모습으로 보아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 노부부의 밭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한국 10대 비경중 하나라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이곳 정상에서부터 드디어 괴로운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저히 구두로는 다닐 수 없는 산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그다지 길지 않아 구두가 좀 망가지기는 하였지만 발은 여전히 건재하였습니다. 산길을 내려와 바닷가에서 먹는 막걸리는 세상의 그 어느 술보다 맛있는 명주였습니다. 그런데 제 구두와 발의 고생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드디어 18년전 제가 가보았던 그 나리분지를 찾았습니다. 나리분지에서 먹는 산채비빔밥을 모두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점심을 두둑히 먹고 그곳에서 각종 나물을 한보따리 사들고 우리는 오늘의 하이라이트로 향했습니다.
죽도가 바라보이는 울릉도 동북쪽 끄트리머의 울릉둘레길을 걷기로 한 것입니다. 산길 3킬로미터를 구두를 신고 저희 부부는 무리한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등산화를 신은 분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가벼운 신길이지만 구두를 신은 저희 부부에게는 거의 설악산을 등반하는 정도의 힘이 들었습니다. 미끌어지고 비끗하고 균형을 잃을까 조심조심하고 한발짝 한발짝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구두 등산을 하길 1시간 남짓 드디어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택시가 눈 앞에 드러나자 그 택시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약 15분간 계단 길을 따라 내수전 일출 전망대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그로키 상태가 된 아내는 도저히 갈 형편이 못되었고 지칠대로 지친 저도 택시에서 일행을 기다리자는 아내의 유혹이 정말 달콤하게 들려왔지만 언제 다시 올까하는 생각이 저의 마지막 힘을 끌어내 전망대로 저를 밀어 올렸습니다. 전망대에 올라서서야 왜 이곳이 전망대인지 실감이 났고 15분간 힘들여 올라 온 것이 절대로 후회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울릉도 구두 답사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해산물 가득한 저녁을 먹고 일행들은 노래방으로 향했지만 저희 부부는 이불 속으로 꿈나라 여행을 떠났습니다. 파김치처럼 실신한 듯 단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살 것 같았습니다. 일요일 아침 7시반 울릉도 도동항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와의 두번째 이별을 하였습니다.
배편에 대한 정보가 없어 허무하게 마친 18년전의 울릉도 여행과 신발에 대한 정보가 없어 구두를 신고 한 이번 울릉도 여행 모두 제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인생 여행에서도 다 갖춰진 여행보다는 이렇게 부족한 여행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인생길에 무엇이 부족하다고 아쉬워 하지 마시고 훗날 더 기억에 오래 남도록 하려는 신의 섭리라고 이해하시면 인생 여행의 발걸음이 훨씬 더 가벼워 질지도 모릅니다. 비록 등산화 대신 구두를 신었더라도 말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3.4.29. 조근호 드림
(방송 안내) 4월15일부터 26주 동안 매주 월요일 10시부터 11시까지 방송되는 극동방송(AM 1188 또는 FM 106.9) ‘사랑의 뜰안’ 프로그램에 조근호 변호사의 월요편지 코너가 신설되었습니다. 그 동안 썼던 월요편지 중에서 일부를 골라 청취자 분들에게 제 육성으로 전달해 드리게 됩니다. 시간은 대략 10:20-40 사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나시면 들어 주세요. 새로운 감흥이 있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