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사
강 문 석
천지가 꽁꽁 얼어붙고 온 세상이 순백으로 변할 때마다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눈이 많이 퍼붓던 전방에서 유독 추위에 약해 고생했던 병영생활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혹독한 한파를 이기기 위해 전우들은 부대 안 양지바른 막사 앞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곤 했다. 반백년을 거슬러 올라야하지만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땐 부대에서 매월 지급되는 C레이션 박스 속에 ‘아리랑’ 담배가 두 갑씩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체로 피울 때라도 누가 한 사람만 나서서 담뱃갑을 열면 오륙 명이든 칠팔 명이든 다 해결이 되었다. 보릿고개가 상존하고 있던 시절이지만 담배인심 하나만은 어디서나 그렇게 각박하지 않았다. 이처럼 서로 나누는 담배인심을 구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부대 안 미군들은 과연 듣던 소문대로 코리아가 못살긴 못사는 나라로구나 하고 놀란다. 그때 우리는 미군을 ‘거번먼트 이슈’의 약자인 ‘지아이’라고 불렀다.
지아이란 원래 미국에서 특별한 일에 쓰려고 소집한 병사를 칭하는 말이지만 그보다 병사를 속되게 이르는 뜻도 들어있어서 그렇게 낮추어 불렀던 것이다. 당시 한국파병이 결정된 지아이들은 오리엔테이션을 거치면서 거지가 득실거리는 나라 코리아에 가서는 눈 감으면 코 베인다는 경고를 수도 없이 듣게 된다. 배를 타고 한국으로 이동해오는 20여 일 동안에도 이러한 당부는 이어져 그들은 결국 우리 카투사들에게도 경계심을 늦추질 않았던 것이다.
그랬다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흐르면서 한국인들의 따스한 인정을 발견하고부터는 스스로 부대 내 피엑스로 달려가 팔말이나 말보로우 캔트 같은 서양 사람들의 담배를 사와서 같은 막사 안 카투사들에게 보루 떼기로 안기곤 했다. 당시엔 미군부대에 배속된 우리 한국군을 지금처럼 카투사로 정확하게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아이들을 빼고는 모두들 카츄샤로 불렀고 누가 물으면 본인들도 카츄사로 대답하곤 했다.
아마도 톨스토이 소설 <부활>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이 노래로 만들어져 크게 히트하면서 발음이 비슷하다보니 그렇게 잘못 불리어졌던 것이리라. 소설 속 비련의 주인공 Katyusha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KATUSA인데도 그땐 왜 그리도 모두들 우둔했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카투사 지원경쟁률도 8대1을 넘어서고 있지만 반세기 전엔 전혀 그렇질 못했다. 한국군에서 희망하면 그냥 부대를 이동하듯 쉽게 그쪽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난 그때 막 상등병을 단 주제에 제대가 가까운 고참 병장과 갈등을 빚어 스스로 부대를 떠나온 경우이다. 병장의 이어지는 구타를 한없이 억울한 것으로 받아들인 게 발단이었다. 광화문전화국에서 입대한 황해도 사나이 안 병장은 작전운용과의 자기 조수 불침번 근무를 초번이나 말번에 넣도록 압력을 가해왔지만 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빤한 불침번 순번을 한 번도 그렇게 짜지 않았다. 안 병장에게 고마워할 것까지야 없겠고 그는 내가 본부중대 서무계를 스스로 물러나게 만든 장본인임에는 틀림이 없는 위인이다.
통신대대 한군데서 복무한 것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긴 한다. 카투사 제도는 동족상잔으로 뼈아팠던 한국동란 당시에 전사나 실종으로 부족해진 미군병력을 보충하느라 만들어지게 되었다. 카투사는 70년 가까운 세월을 거치는 동안 주한 미군부대의 중요한 임무를 함께 담당해왔고 한때는 2만7천명에 이른 적도 있지만 지금처럼 미군이 4만 명인 시대에도 6천 명이란 병력으로 맡은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
그래서 그 역할이 새삼 막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화시대에 우리가 즐겨 쓰는 지구촌이란 말처럼 미국도 그만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2년이란 시간을 미군들과 함께하는 카투사 생활만큼 미국의 문화를 속속들이 익히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마음만 먹으면 영어회화를 익히는 기회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땐 인종차별로 인한 모멸감도 없지 않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미군들끼리 피부색으로 갈라져 흑인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흑인 장교를 백인 사병들이 무시하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백인 병사가 흑인 대대장이나 중대장 책상에 걸터앉는 게 예사였다. 그런데 흑인들은 그러한 대접을 스스로 자초하는 측면도 있었다. 심한 경우는 일주일이 넘도록 세수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기상하여 세면대 앞에서 밤새 생긴 눈곱이나 침 흘린 자국만 털어버리고 세수를 생략하는 걸 당번근무로 숙소를 순찰하다가 목격하기도 했다.
이처럼 위생청결도 문제지만 육식을 즐겨서 그런지 그들의 몸에선 특유의 노린내가 났다. 그러한 흑인 병사들일수록 한국군 병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고 몇몇은 그런 일로 사고를 치고 몽키 하우스를 드나들기도 했다. 어찌 보면 백인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그렇게 푸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난 31개월 군대생활 절반 동안이나 병장 계급장을 다는 바람에 막사에선 독방을 썼다. 짓궂은 우리 병사들은 같은 막사 안에서 미운 짓하는 양키를 하나하나 봐두었다가 한꺼번에 괴롭히기도 했다.
추운 겨울날 한밤중에 그들에게 몰래 골탕을 먹이는 장난을 치는 것이다. 마른 오징어다리 두세 개면 가능했고 우리 한국군 병사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자주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 같다. 막사마다 우리 병사들과 양키들이 사오 명씩 들어있었지만 석유스토브 위에서 타는 마른오징어 냄새에 기겁을 하고 내의바람으로 잠자리를 탈출하는 쪽은 미군들이었다. 오징어 태우는 냄새는 화장장에서 시체를 태우는 냄새와 다르지 않았기에 오징어를 먹지 않는 그들로서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난 그럴 때마다 사건으로 보고되어 시끄러워지지 않도록 미군들 앞에서 그런 장난질을 한 병사를 찾아서 호되게 나무라는 쇼를 해보여야만 했다. 지금은 카투사 선발자격부터도 문턱이 높아 그만큼 더 까다로워졌다. 지원자는 영어 구사능력이 어느 수준을 넘어야 하고 유학파나 국내 일류대학 출신들까지 많아져 품격을 높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 위상이 달라진 만큼 미군들이 한국으로 배치되어 올 때 거치는 오리엔테이션에서도 카투사를 그만큼 인정하게 된 것이다.
자기네들과의 협력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카투사는 모두가 엘리트들이며 장차 한국을 이끌어갈 인재들이라고 다소 과장되게 소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지아이들은 카투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한국에서의 군대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카투사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단다. 상종가를 치고 있는 후배 카투사들이 새삼 부럽다. 그러고 국적을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함께 방위하면서 지아이들과 아름다운 우정까지 나누고 있다니 더욱 믿음직스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