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할머니 “죽음도 삶의 일부인데… 힘들게 가고싶지 않아” 조건희, 박성민 기자
《 설 전날인 4일은 연명의료결정법(일명 존엄사법)이 전면 시행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임종을 앞두고 회복할 가망이 없을 때 환자의 뜻대로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게 한 제도다. 존엄사가 국가 제도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가족끼리도 ‘품격 있는 죽음’에 대해 터놓고 대화하기를 꺼리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막상 아무런 사전 논의 없이 누군가가 임종기를 맞으면 연명의료를 계속할지를 두고 갈등을 겪는 가족이 적지 않다. 이번 설 연휴에 연명의료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눠보는 건 무엇보다 의미가 있다. 이를 위해 기자가 ‘연명의료 상담사’가 돼 어떤 대목을 고민해야 할지 미리 살펴봤다. 》
지난달 28일 서울의 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실에서 동아일보 조건희 기자(오른쪽)가 한 30대 여성의 사전의향서 작성을 돕고 있다. 조소현 인턴기자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4학년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의 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사전의향서) 상담실에 80대 여성 A 씨가 들어왔다. A 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서류를 잔뜩 꺼냈다. ‘웰다잉 학교’ 강의를 들었다는 A 씨는 ‘인공호흡기를 달지 말라’고 적은 유언장을 보여줬다. 해부용 시신 기증 서약서도 미리 작성해 놓았다. A 씨는 “죽는 것도 삶의 일부라는데 힘들게 버티다가 가고 싶지 않다”며 “공부를 웬만큼 하고 왔으니 어서 사전의향서 등록을 도와 달라”고 채근했다.
이날 A 씨가 작성한 사전의향서는 만약 임종을 앞두고 의식을 잃어 자신의 뜻을 말할 수 없게 될 경우에 대비해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을 거부하겠다는 뜻을 미리 국가 전산망에 기록해두는 문서다. 사전의향서는 연명의료계획서(말기나 임종기에만 작성 가능)와 달리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건강할 때 써둘 수 있다. 단,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이 지정한 상담실을 방문해 관련 교육을 이수한 상담사와 일대일 대면 상담을 거쳐야만 작성할 수 있다. 기자는 지난달 25일 교육을 받고 상담사 자격을 얻었다.
○ “가족과 대화할 때 고마움을 먼저 말해야”
서울 도봉구 창동노인복지센터에서 열린 웰다잉(well-dying) 교육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주민이 참석했다. 품격 있는 죽음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지만 연명의료 결정 제도는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제공
낯빛이 어두운 한 70대 남성은 “이걸(사전의향서를) 쓰면 내가 원할 때 아무 때고 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안락사와 혼동한 듯했다. 안락사는 약물 등으로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키는 것으로 국내에선 불법이다. 한 30대 여성은 “아주 특정한 상황에만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이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의향서를 작성했다. 저마다 상담을 받는 이유는 달랐지만 ‘고통을 무의미하게 연장하기보다 생을 차분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뜻은 같았다.
기자가 주변에 “연명의료 중단에 관심이 있으면 상담을 해주겠다”고 알린 후 며칠이 지나 ‘사건’이 터졌다. 지인 B 씨가 임신 10주인 아내에게 갑자기 “사전의향서를 쓰고 싶다”고 했다가 큰 다툼을 벌였다. 아내는 B 씨가 이런 얘기를 불쑥 던진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까운 가족일수록 조심스럽게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안내하지 않은 기자의 잘못이 컸다.
연명의료결정법을 만든 주역인 이윤성 국가생명윤리정책원장(서울대 의대 교수)은 “가족과 (연명의료 관련) 대화를 차일피일 미뤄도 안 되지만 서두르는 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그는 “가족과 갈등 없이 연명의료 중단을 얘기하려면 ‘죽음’보다 가족에게 평생 느껴온 고마움과 미안함을 얘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마지막 결정은 스스로 내리고 싶다는 뜻을 밝혀야 한다. 주변에 연명의료의 대상이 된 친척이나 지인을 언급하며 누구나 그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을 서로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녀에게 “병원비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는 말부터 꺼내는 건 금물이다. 돈을 아끼려 인공호흡기를 뗀다는 죄책감이 들 수 있어서다.
○ ‘몰라서, 멀어서’ 못 쓰는 현실
지난해 2월 4일부터 지난달 30일까지 사전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은 11만4147명이다. 65세 이상 노인 등록자만 따지면 국내 전체 노인 인구의 1.2% 수준이다. 노인의 91.8%가 연명의료에 반대한다는 2017년 보건복지부의 실태 조사를 감안하면 아직까지 매우 미미한 수치다.
기자의 상담 과정에서 대다수가 사전의향서를 모른다는 데 놀랐다. 지난해 5월 위암 진단을 받은 강기웅 씨(81)가 그랬다. 혹시 의식을 잃으면 꼼짝없이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해야 하는 줄 알았던 강 씨는 병원 측의 안내로 사전의향서를 쓴 뒤 안심했다. 박아경 국립암센터 사회사업실장은 “뉴스를 접할 기회가 적은 저소득층일수록 제도 자체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사전의향서 등록 기관이 턱없이 적은 점도 문제다. 사전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는 곳은 전국에 290곳이 전부다. 거기에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197곳)를 빼면 나머지 93곳은 서울·경기(32곳), 전북(17곳) 등 일부 지역에 편중돼 있다. 충북과 제주엔 각 1곳뿐이다.
홍양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대표는 “사전의향서 제도를 널리 홍보해야겠지만 그에 앞서 상담을 활성화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가까운 상담기관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홈페이지나 전화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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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때 ‘존엄사’ 얘기 나눠 보세요]68%가 환자 의식 잃은후 결정“
끝까지 치료를 받자고 한 건 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네요.”
지난달 28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 호스피스병동에서 만난 이모 씨(60·여)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 씨의 어머니(80)는 지난해 10월 자궁내막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항암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설명을 듣고도 이 씨는 어머니의 치료를 고집했다. 연명의료를 포기하면 어머니가 생의 의지를 완전히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3차 항암 치료도 소용이 없자 이 씨는 열흘 전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연명의료 중단’ 얘기를 꺼냈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선뜻 연명의료계획서를 썼다. 이 씨는 “돌이켜보니 어머니는 진작 마음의 준비를 하셨는데 자식들의 욕심에 고통만 연장시켜 드린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달 30일까지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연명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한 환자는 3만5839명이다. 이 중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해 직접 연명의료를 거부한 환자는 1만1555명(32.2%)이다. 나머지 2만4284명(67.8%)은 환자가 미처 뜻을 밝히지 않은 채 의식을 잃어 환자 가족들의 합의로 연명의료를 거부했다.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중시하겠다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취지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셈이다.
이는 죽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문화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할 때 이런 얘기를 나누지 않으면 큰 병에 걸린 뒤엔 더욱 말을 꺼내기 어렵다. 특히 환자가 먼저 ‘연명의료를 거부하겠다’고 말해도 가족들은 ‘환자의 본심은 연명의료를 계속 받고 싶다는 쪽일 거야’라며 지레짐작하기 일쑤다. 실제 지난해 존엄사법이 시행된 이후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밝혔음에도 가족들의 극렬한 반대로 제대로 된 상담조차 받지 못하고 숨지는 일이 적지 않다.
윤영호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말기 및 임종기 환자와 가족이 차분히 상담과 심리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상담료 등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