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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묵상글 (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 산을 오르는 이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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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04 04:25
- 산을 오르는 이유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오늘도 어제 그제와 마찬가지 구조입니다.
독서 이사야서의 예언이 복음의 예수님에 의해 실현되는 구조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산 위에서 잔치를 베푸실 거라는 이사야 예언대로
복음의 주님께서 산 위에서 사천 명을 위한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눈치채셨겠지만 이 잔치는 등산객들의 술판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거한 파티를 즐기는 이들의 잔치도 아닙니다.
이사야서도 그렇고 복음도 그런데 이 산 위에 오를 이들은
모두 다리 절고 눈멀고 말 못하는 불구자들이며
그래서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과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사실 건강하고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굳이 산에 오르진 않을 것입니다.
불구자들과 불구로 인해 수치와 설움을 당하는 이들이나
산 위에서 치유와 위로와 구원을 받기 위해 오를 것입니다.
“이 산 위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이제 이해가 됩니다.
왜 주님께서 다리 저는 이들을 산에 오르게 하시는지.
평지도 걷기 힘든데 다리 저는 이들이 왜 산을 오르는지.
왜 앞을 못 보는 이들을 주님께서 산에 오르게 하시는지.
도우미 없으면 오를 수 없는 산을 왜 맹인들이 오르는지.
이 산을 오르게 하는 것은 성한 다리가 아닙니다.
이 산을 오르게 하는 것은 올라야만 할 필요이고,
오르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다리가 성해 이 세상 여기저기 신나게 구경 다니고 싸돌아다니느라
산에 가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우리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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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년 전, 우연히 길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친구가 “와~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라고 묻습니다. 이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 잘 지내지. 너는 어때?”라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도 “나도 좋지. 너 좋아 보인다.”라고 인정해 주었고, 다음에 만나서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누자고 약속하면서 헤어졌습니다. 이 친구와의 만남 뒤에 그 짧은 대화가 계속 기억났습니다. ‘정말로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물음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에 그렇게 잘 지내지 못할 때였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또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잘 지낸다”라고 말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이 아닌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마음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나온 말일까요?
우리는 자기를 숨기려는 마음이 일차적인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허세로 가득 차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를 숨길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나약한 ‘나’ 자신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계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고백하면서 그분께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주님께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자 많은 군중이 몰려듭니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 불구자들, 말 못 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당시에는 상선벌악과 인과관계의 원칙을 내세워서 병을 죄의 결과로 보는 모습이 가득했습니다. 따라서 병이 있어도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다가옵니다.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께 굳은 마음으로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는 사람이 커다란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그냥 되돌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배고파서 되돌아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를 것을 걱정하시면서 말이지요.
병의 치유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이상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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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친해졌고 가까워졌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미안함은 사소해졌고 고마움은 흐릿해졌다(드라마 ‘응답하라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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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시기”는 자신의 ‘간절한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고 어두웠던 암흑의 군사독재 시절에 ‘김지하’ 시인은 그 간절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금관의 예수)
오늘 <복음>에는 ‘간절한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 곧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참조).
이들은 자신의 갈망을 품고, 더러는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의 다가왔지만,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 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군중은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5,34-3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 곧 우리 가운데 빵이 있다는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빵 “일곱 개”는 완전함의 숫자요, 거기에 더하여 ‘물고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도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찰”(마태 15,37)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진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알고’있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를 ‘찾는 사람’, 곧 “참된 빵”이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진정한 순례자요 대림의 길을 걷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이미 찾은’, ‘이미 와 있는’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 군중이 가엽구나.”(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안에 당신이 새겨준 가엾이 보는 마음을 드러내시어,
제 마음이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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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성찰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허물로 누벼놓은 삶에도 불구하고 지켜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날인데 은총의 새날을 만들지 못한 안타까움에 부끄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으로 배부르게 해 주시길 청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베풀어 주셔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는 마음은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먼저 내놓고 감사하면 더욱 풍성해 집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합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며 지니셨던 마음은 측은지심, ‘가엾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향한 ‘애간장이 녹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공명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질 때 예수님의 기적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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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트 프리스코의 반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본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것도 기쁨이지만, 반 모임에서 만나는 것도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다섯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했습니다. 저를 포함 11명이 복음을 읽고 느낌을 나누었습니다. 자매님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이정재가 이런 대사를 하였습니다. “내가 해방될 줄 알았으면 친일파로 살았겠나!”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살았던 사람은 대한민국이 그리 쉽게 독립할 줄 몰랐습니다. 자매님은 암살 이야기를 하면서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산 사람도 이렇게 말할 거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가 있는 줄 알았으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을 텐데!”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나라가 있음을 믿기에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복음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형제님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말씀을 나누면서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학생 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충격받았다고 했습니다. 책은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명이라고 했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이고,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만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형제님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작년에 세례받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사제가 세례 대상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청합니까?’ 그러면 세례 대상자는 대답합니다. ‘신앙을 청합니다.’ 사제는 또 묻습니다. ‘신앙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그러면 세례 대상자는 대답합니다.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세례받았을 때 응답했던 말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날과 그 시간’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고통을 느낀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고, 당신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면 인간입니다. 당신이 믿는 종교를 타인에게 설명하기보다는 당신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믿는 종교를 이해하게 하십시오.’ 톨스토이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함께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과거는 지금 하는 일이 쌓인 것이고, 미래는 지금 하는 일들로 채워지기에 인생에서 중요한 건 바로 지금입니다. 그러니 지난 일 때문에 후회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상태’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라고 말했습니다. 11명이 복음 말씀을 나누니 말씀의 식탁이 풍요로워졌습니다. 반장님이 본당 소식을 전하고, 실천 사항을 정하면서 복음 나누기를 마쳤습니다. 복음 말씀이 살아 있는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장애인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저도 반 모임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며,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반 모임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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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 주님은 언제 쉬실까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갑자기 든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드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성경에 의하면 다리 저는 이, 눈먼 이, 불구자, 말 못 하는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왔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고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우리 주님은 언제 쉬실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쉴 시간을 찾기는커녕 주님 옆에 사흘이나 머물러 있던 사람들의 굶주림을 걱정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어디서 저런 체력과 정신력이 나올까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납니다. 그분에게서 치유를 받고, 그분에게서 감동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주님의 지치지 않는 힘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함으로써 주님의 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찬양은 주님께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주님께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주님의 기쁨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데려다 줄 것입니다.
찬양합시다.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합시다. 주님의 넘치는 사랑을.
⭐특별히 훌륭하다면….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한 요리 경연대회 채널에 손이 멈췄습니다.
두 팀 모두 면을 주재료로 대회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밀가루와 같은 물을 가지고 서로 더 맛있는 면 요리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팀은 반죽을 만든 후 숙성에 들어갔고, 다른 팀은 주어진 시간인 1시간 중 반을, 반죽을 만들고 치대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드디어 요리 경연 시간인 1시간이 끝났습니다. 심사위원들은 30분 동안 반죽을 치대서 면을 뽑아낸 팀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물이 담백하며 단순합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국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국물을 특별하게 만드는 면이 담겨 있습니다. 면만 먹어도 맛있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음식이 호화롭지 않아도 그 재료가 특별하다면 그것만으로 훌륭한 음식이 됩니다.
우리 삶이 호화롭지 않아도 그대의 특별한 삶만으로도 충분히 그대의 인생은 훌륭합니다. 그대가 걸어온 시련과 고통은 그대를 더욱 풍미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이렇게 그대는 이미 특별한 맛과 향을 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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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선택이자 은총이다
“하느님의 꿈을, 참행복을 선택합시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삶은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꿈을, 행복을 선택합시다.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이런 이들이, 하느님의 꿈을, 행복을 선태해 사는 이들이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혼자만의 즐거움은 아무리 커져도 원래 상태로 되돌아 간다. 즐거움은 나누어야 더 커지고 더 오래간다.”<다산>
“즐거움은 누림을 급히 하지 않아야 늙도록 이어지고, 복은 다 받지 않아야 후손까지 간다.”<사잠>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42년 동안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많이 강조해온 주제가 영적전투와 더불어 하느님의 꿈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존엄한 품격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적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동력도 이런 꿈과 희망, 비전에서 나옵니다. 참 행복과 기쁨도 하느님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실현될 때 나옵니다.
한밤중 일어나니 설마설마하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불행한 소식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역사적 퇴보의 비현실적 현실이며 후진국에서도 있을까 말까한 대다수 국민의사에 반하는 비상계엄선포가 국회의 의결대로 속히 해제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피해도 최소한으로 끝나길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정말 유능한 정부라면 국민을 꿈꾸게 하고 희망과 비전을 지니게 할 것입니다. 이런 꿈과 희망이 비전이 사라질 때 대다수 국민은 길을, 빛을 잃고 방황하며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자는 물론이고 믿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꿈꿔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물론이고 성서와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은 실현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꿈나무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천상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사라지면 탐욕의 본능만 남고 세상은 아수라장의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얼마전 흰눈으로 가득 덮힌 온누리를 보며 예전 써놨던 하늘꿈이란 글이 생각났습니다.
“땅도 춤춘다
추위도 막을 수 없다
밤새 하늘 꿈꾸고 나니 온통 흰눈 덮인 하얀땅
하늘 은총이 온누리를 덮었네.”<2009.12.>
과거가 사람을 만들지만 하느님 꿈의, 하느님 희망의 미래가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하느님 꿈의 희망이, 비전이 우리를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이사야서의 하느님의 꿈은 얼마나 고무적이요 위로와 힘을 주는 지요!
“만군의 주님께서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모든 민족’, ‘모든 겨레’, ‘모든 사람’등 예외없이 모두가 구원되는 그날의 현실을 꿈꾸는 이사야가 당신의 참 아름답고 좋은 꿈을 우리와 나눕니다. 이런 꿈의 사람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며 삽니다. 무지와 죽음의 너울과 덮개를 치워버리고 함께 나누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삽니다. 언젠가 그날을 오늘 앞당겨 살며 고백합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위에 머무르신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 잔치에 잘 어울리는 우리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야 말로 부단히 하느님을 꿈꿨던 희망의 사람, 비전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사야의 하느님 꿈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며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고치시고’ ‘먹이시는’ 잔치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나누어 주었고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합니다.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바구니에 가득합니다.
없어서 가난과 굶주림이 아니라 나누지 않아 가난이요 굶주림이니 이는 하느님 책임이 아니라 우리가 나누지 않은 책임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꿈꾸는 희망의 사람, 비전의 사람은 하느님의 꿈나무가 되어 그 사랑의 열매를 부단히 나누는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하느님의 나라 미사잔치가 우리 모두 하느님을 꿈꾸며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게 하십니다.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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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오 15,30)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사랑하고픈 사람과
사랑받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사랑하고
사람이 사랑받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안고픈 사람과
안기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안고
사람이 안기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주고픈 사람과
받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주고
사람이 받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먹이고픈 사람과
먹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먹이고
사람이 먹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낫우고픈 사람과
낫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낫우고
사람이 낫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일으키고픈 사람과
일어나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일으키고
사람이 일어나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살리고픈 사람과
살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살리고
사람이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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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5,30)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을 예수님의 발치에 데려다 놓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건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갖가지 병을 앓는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앉아 계시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올라가 앉아 계신 이 산을 교회로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나머지 부분 위에 세워졌으며,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그리로 옵니다. 산상 설교 때처럼 군중을 따로 떼어 놓고 제자들만 그곳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정말 많은 군중이 모였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귀가 먹었거나 갖가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앉아 계신 산으로 올라온 군중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는 약속된 것들을 듣지 못하는 귀먹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러는 영혼의 눈이 멀어 참빛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더러는 이성에 따라 걷지 못하는 다리저는 이들입니다. 더러는 사지가 성하지 않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저마다 영혼이 고통받고 있는 이들 각자는 예수님께서 앉아 계시는 산으로 군중과 함께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다가가지 않는 이들은 치유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분의 발치에 데려다 놓은 이들은 치유를 받습니다. 가장자리까지 온 이들, 곧 그런 것들을 얻기에 자신이 합당치 못하다고 느껴 그리스도의 몸 가까이까지만 온 이들도 치유를 받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흔히 교회로 불리는 무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저기 예비신자들이 보입니다. 저들은 말하자면 변방에 데려와 놓인 몸의 지체인 사람들 뒤에 와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몸, 곧 교회의 발치까지만 와 있는 것입니다. 그곳으로 온 그들은 귀가 먹거나, 눈이 멀었거나, 불구이거나, 몸의 어디가 굽어 있습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말씀’의 뜻에 따라 치유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이 사람들은 군중과 함께 교회로, 곧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 산 위로 가 그분 발치에서 치유받는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군중은 그곳에서 일어난 변모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던 사람들이 더할 수 없이 온전한 상태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우리는 하느님의 무와 인간 지성의 무를 치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무가 우리의 한 부분이라면, 아무개를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우리의 한 부분이다. ‘지성은 존재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 지성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자유로이 부정하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바꾸어서, 지성은 존재를 알 수 있음은 물론이고 비존재도 알 수 있다. 지성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지성은 하느님처럼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 왔다.
지성이 부정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부정은 초월의 형식이다. 그것은 아무개의 이것이나 저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하느님을 이것이나 저것으로 표현하기를 거부한다. 부정의 길은 지성이 무이며,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하느님의 형상인 우리도 어느 정도 “부정의 부정과 거부의 거부”를 할 수 있다.
이 황홀한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바로 앎이다. “앎은 ’밖에’ 있는 것, 곧 존재와 맺는 황홀한 관계다." 그것은 신성의 내부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 여기”와는 무관한 순수한 앓이 있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순수한 앎에는 의지가 들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우리의 마음과 의지가 하느님 안에서 황홀하게 합일될 때. 은총은 모든 아름다움올 •• 영혼의 황국 속으로 직접 부어 넣는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의 영혼이며, 바로 거기에서 ‘순수한 앎’이 일어난다. 바로 거기에서 복이 일어난다. 그 복은 행복선언에 약속되어 있는 복, 곧 “하느님을 뵙는 복”(마태 5,8) 이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 됨이 보인다. 하나 됨이야말로 복이다.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영혼의 복이다. 그것이야말로 영혼의 아름다움이자 영예다.(290)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9절: 인노첸시오 3세부터 보니파시오 8세까지의 교황직
인노첸시오 3세:
인노첸시오는 교회 내적인 면에서 교회법을 어긴 주교 선거에 단호히 개입하고, 이른바 “중대 사건”을 교황청에 유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위권을 관철하였다. 교황청의 행정관청, 수도회, 성직자의 개혁들을 통해 질서를 배려하였다. 그의 “직무상”(ex officio) 부당한 고위 성직자나 주교들을 교황청의 종교재판소로 끌어들여 다스렸다. 이단자에 대해서는 우선 부드럽고 관대한 태도를 취했고, 그의 평화적 개종 시도가 실패하고 또한 그의 사절인 시토회 소속인 가스텔나우의 베드로가 남부 프랑스에서 카타리파에 의해 살해되자(1208.1), 그는 1209년에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이 시도가 무섭고 참으로 부끄러운 유혈로 진행된 데 대한 책임은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첫째로 교황사절 아르날두스 아말리치와 몽포르의 백작 시몬의 광신에 있었다.
인노첸시오가 교회 내의 청빈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 의의를 확고하게 인식한 것은, 그의 업적 중 하나로 기록되어 남을 것이다. 그는 롬바르디아의 억겸파들을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돌보았고(1201), “가톨릭의 가난한 자들”이라는 단체를 창립하였다(1208).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1209/1210년에 그의 작은 공동체에 대한 교황의 인가를 간청하고자 로마로 왔을 때, 그를 친절하게 맞이하였다. 탁발 수도회는 후에 교회의 가장 강력한 발판이 되었다. 인노첸시오는 권력을 확장하는 모든 과정에서도 내면 깊이에서 무엇인가 공통되는 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이 결코 떨어진 적이 없는 부와 사치로부터의 내적인 거리였다.
그가 1215년 11월에 약 500명의 주교와 800명의 수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할 수 있었던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그의 교황 치세에서 최고점을 나타냈다. 그것은 전 서구 그리스도교의 위압적인 열병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세의 절정에서 교회생활의 유례없는 정점이었다. 개혁 결정들은 교회의 내적 쇄신과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후 관구회의와 교구회의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실체 변화 교의의 신조 결정과 매년 부활절의 고해와 영성체 규정은 영속적인 것이 되었다.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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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 [fisherpeter] 241204. 0:18 ㅣNo.178155
오늘 복음의 내용도 익히 잘 아는 내용의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대목을 유심히 보고자 합니다.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구자, 병든 이 등등 다양한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치유를 받은 병자들을 보고 그들을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때 이 사람들이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알 리가 만무했을 텐데 왜 어찌 해서 병을 직접 고쳐주신 예수님을 찬양해도 찬양해야 하는데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사실을 보면서 그당시 사람들은 실제 설령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의 아들인 성자의 위격을 가진 것 자체를 이해를 못했다고 할지라도 자기들이 치유된 기적의 은총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인지했나 봅니다. 이런 사실도 실제 그당시 그와 같은 사람들의 지적인 수준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오늘날 상식으로 보면 한편 놀라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으로 봐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당시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수준 이하의 수준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수준이었기 때문에 복음에 비유가 많이 등장했다고 하는 그런 말도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 같은 수준의 사람이었다면 복음에 비유가 많이 나오지 않았을 거란 추측도 해본다고 합니다.
문제는, 사실 어떤 문제가 있어서 문제가 아니라 제자들의 모습을 냉철하게 들여다 봤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해 주신 후에 그때 그 군중들의 모습을 보시고 마음이 무척 아프셨습니다. 3일 동안이나 같이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 상태로 돌아간다면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 상황 이후에 제자들의 반응을 우리는 조금 깊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빵을 어디서 구하겠느냐 하는 반응입니다. 이런 반응을 보인 제자들의 모습을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여기에선 이런 반응을 하기 이전에 먼저 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님 말씀에 공감을 하고 같이 걱정하는 일이 우선시 됐어야 했습니다. 그런 연후에 그런 입장을 표명하는 게 순리입니다.
물론 어떤 혹자는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상황이 아니니 별반 차이가 없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결과로만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는 정해진 일반상식대로만 살 수 있는 게 다가 아닙니다. 그렇게만 산다면 인간세상이 삭막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사람사는 세상은 로봇 같은 아무런 감성과 감정이 없는 기계가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계와 달리 인간적인 정이란 게 마치 인간세상을 온전하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게 무엇보다도 더 필요하고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법을 집행하고 판단을 할 때 물론 법대로 해야 하겠지만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처럼 매정하게 법대로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상참작이라는 걸로 양형을 하는 경우도 있듯이 말입니다. 그럼 이와 같은 것을 우리 교회에 접목해서 한번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지 한번 묵상해봤으면 합니다. 사랑, 연민, 측은지심 이런 말처럼 이런 걸 우리는 수도 없이 듣곤 합니다. 이런 말이 그냥 단순히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 말씀이 우리의 피부에 와 닿아 그게 현실적으로 실천을 할 수 있고 진정으로 공감을 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말만 신앙인이고 종교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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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복음은 구원의 희망을 /
박윤식 [big-llight] 241203. 18:02 ㅣNo.178154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무척 바쁘셨을 게다. 낮은 언덕배기는 물론 구릉지, 물가에서도 설교하시고 심지어는 배위에서도 설교하셨다.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에 두고 군중이 모인 곳이면 이곳저곳 마다치 않으시고 두루두루 다 다니셨다. 그리고 백인대장의 병든 종, 나병 환자를 포함한 여러 병자를 고치셨기에 잠시의 겨를도 없었다. 그러기에 편안히 계셨을 리가 만무하다.
예수님의 이 바쁨을 적나라하게 나열한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와 사천 명을 먹이시는 광야에서의 사흘간의 일정을 살펴보면, 가히 그 바쁨의 정도가 짐작이 된다.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에서는, 실로 얼마나 많은 병자인지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또 사천 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고, 고통 받는 이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이는 가히 우리의 상상을 넘는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여기서 배불리 먹일 빵을 어떻게 구하겠습니까?”라고 따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불안하고 열악한데도 당신 뒤를 따르는 군중을 보시고 이르신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게 없으니 말이다. 길가에 쓰러질지 모르니 굶겨서 보내지는 말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다독인 후,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들고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그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다들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사실 예수님 마음으로 다가가면 이웃의 고통은 가엾이 여겨지고, 그 부족함을 안아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에 작은 기적이 일어 날 게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눈먼 이, 불구자들을 시도 때도 없이 고쳐 주시자 군중은 그분을 찬양하였다. 물론 사천 명을 먹이신 그 빵의 기적은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을 가지신 착한 목자이시다.
아마도 이 기적 같은 치유와 드라마틱한 기적에 곳곳에서 박수와 탄성이 웅성이며 퍼졌으리라. 이렇게 그분께서는 그 아픔들을 손수 끌어안으셨다. 이처럼 아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 한 해의 끝자락인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주위에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을 둘러보자.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시간, 맡겨 주신 일들이 아픔을 겪고 있는 그들과 함께할 수도 있을 게다. 그 아픔의 자락에서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어쩌면 멋지고, 거기서 만난 게 다 귀한 선물이 되리라.
이처럼 부끄러운 지난 삶에서 새로운 희망이 되살아나면, 그게 하느님의 영광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고통으로 지친 이를 살피는 여유를 갖자. 우리가 이것을 깨우치도록 하느님은 오늘의 선물을 허락하셨다. 예수님도 아픔의 장소에 언제나 열정으로 달려갔듯이, 온정의 손길 기다리는 곳으로 봉사의 발길을 돌려보자. 가엾이 여기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도 그 마음을 지니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마음으로 군중 모두를 배불리 먹이셨다. 이는 그분께서 마련하실 영원한 잔치에 온전히 참여하여 누리게 될 행복을 미리 보여 주시는 기적이다. 그분이 주실 일용할 양식은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을 만큼 풍족하리라.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가진 신앙인이다. 그 희망이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다. 이 기쁨이 솟는 넘치는 희망은 하느님 자비와 치유를 체험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이러면 날마다 만나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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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저 군중이 가엾구나”(마태 15,32).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으로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15,30)을 고쳐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굶주림까지도 해결해 주시고자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에서 일으키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이는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15,30).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그 사랑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을 데려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빵의 기적’은 치유 기적을 체험한 이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 바로 ‘군중’을 위하여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산으로 오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어 주실 은총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그리고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셨습니다.
대림 시기 동안 우리도 ‘군중’이 되어 보면 어떨까요?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때,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은총이 필요한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며 죽음을 없애 주신 구원’을 체험시켜 줄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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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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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십니다.
그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시고
군중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오늘의 장소를
산이라고 말합니다.
1독서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산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
그래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그 산에서 이루어진 치유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 왕국이 왔을 때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물론 치유가 이루어진 것은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치유의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치유된 사람만 기뻐할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기쁨은
군중이 꿈꿔왔던 것이 눈 앞에 펼쳐졌다는 것에서
옵니다.
희망해 왔던 것이 헛된 것이 아님을 보았을 때
오래 전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했을 때
그들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메시아가
눈 앞에 와 계신다는 것은
그 동안의 설움과 답답함을
한꺼번에 해소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
희망하고 있는 것이
헛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루어질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수록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볼 수 있다면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오늘 빵 일곱 개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하느님
우리의 배고픔을 걱정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사랑을 믿고
희망의 끈을 한 번 더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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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2.04.수.'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 37)
하늘 아래
있어서는 안될
일이 우리에게
다시
일어났습니다.
간밤에
우리는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시대정신에
한참
뒤떨어진
진풍경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단 한 번도
빵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리석게도
자기 스스로를
몰락으로
몰고 갑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권력에도
끌려다니지
않으십니다.
목숨을
내놓지는
못할지언정
목숨을
위협하는
뻔뻔한 작태를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는
어리석은
거짓의
삶입니다.
행복과 평화를
만드는 빵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가치와
양심으로
돌아가야 할
생명의
대림시기입니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썩어 있는
빵은
결코 모두를
배불리
먹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빵은
오늘도
자신의 목숨을
우리에게
내놓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뜨겁게
살아야 할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
생명의 빵에서
출발하는
희망의
새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빵은
평화를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평화를 되살려
우리에게 주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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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사야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는 크게 전례의 성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1월 28일~12월 16일까지가 전반전이라고 할 수 있고, 12월 17일~24일까지가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의 전례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깨어 기도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반면 후반전의 전례는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전반기 매일 미사 첫 번째 독서는 이사야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자 중의 예언자, ‘예언자들의 왕’으로 손꼽히는 이사야는 기원전 765년에 태어나,
742년에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으며, 700년대 신앙과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던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단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혼동과 우여곡절의 시절, 갈팡질팡하던 백성들에게 희망과 격려의 언어로 위로했던 참 예언자였습니다.
40여 년간 예언자로서 백성들의 영적생활을 동반했던 그의 메시지 핵심주제는 주님을 향한 백성들의 불충실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결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듣기 좋은 말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 힘든데, 가슴을 후벼 파는 ‘지적질’과 듣기 싫은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니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언어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예수님의 도래를 가장 세밀하고 밝히고 계시한 예언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조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서 깊이 통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를 주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메시지가 얼마나 참되고 강렬했으면 예수님께서도 즐겨 읽으셨고 인용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안에서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인생 드라마 각본의 원본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각본에 따라 당신의 인생을 장엄하게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은 너무나 신랄하고 강렬해서 청중들의 가슴을 칼로 후벼 파는 느낌을 줄 때가 많았는데, 다른 한편 마냥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백성들을 달래고 격려하며 신속히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가 그렇습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야서 25장 6~8절)
보시다시피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강렬한 에너지로 가득 찼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건드렸고, 삶을 변화시키도록 자극하였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의미에서 이사야 예언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진 구름 위의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이 삶의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아파했고 살았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한 언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언어는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언어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이자 동료 인간으로서 건네는 희망과 생명의 언어, 위로와 격려의 언어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분의 말씀에는 허점이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을 실제 삶에서 살고 계시니 그 말씀에 힘과 생명력이 넘칩니다.
교황님께서 매일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종을 울려 삶을 변화시키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시대 여타 수많은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빈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 대한민국 사회는 어쩌면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살았던 시절과 비슷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또 다시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을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깜’도 안 되는 이, 정말 파렴치한 이, 어쩌면 그렇게 얼굴 두꺼운 이까지 나서서 스스로를 향해 적임자 운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서슬 퍼랬던 이사야 예언자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우리나라입니다.
사심이나 자신의 안위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는 사람, 그저 이 나라 이 백성이 삶의 전부인
그런 지도자의 등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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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장애인들과 말 못 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다.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발치에까지 온다. 그들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라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그분의 발치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다. 사람들은 비록 외딴곳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지칠 줄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32절) 제자들이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만 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33절)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그들이 더욱 동정심을 느끼도록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절) 물으신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신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이 차별 없고 순수한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이룰 수 있다.
복음은 이 기적 사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또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사상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외딴곳에서 백성을 먹이신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우리와 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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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선악과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사용된다
오늘 봉헌에서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당신을 따르던 이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배고프게 돌려보내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먹이려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빵이 없었으면 기적을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분은 마치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처럼 그럴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도 무언가 요구하시는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중국 소설 『나는 남편을 파산시키려고 매일 열심히 일한다』는 자기 삶이 미리 정해졌다고
믿는 여성 린멍(Lin Meng)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유하고 헌신적인 남자인 그녀의 남편은 더 큰 성공을 거둔 후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게 될 운명입니다.
린멍이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린멍은 그래서 남편의 사업을 망하게 하려고 결심합니다.
그녀는 남편의 돈으로 실패한 엔터테인먼트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값비싼 직원을 고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남편의 자원을 고갈시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저항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그녀의 새로운 노력과 꿈을 지원합니다. 남편을 파산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성공이 뒤따릅니다.
그녀가 자금을 조달한 영화는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대 히트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쇼를 위해 고용한 값비싼 유명인은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그녀의 가장 무모한 사업 결정조차도 예상치 못한 이익을 가져옵니다.
그녀의 노력은 파멸을 초래하기는커녕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남편의 그늘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남편도 아내인 린멍을 더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를 단순히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엄청난 힘과 비전을 지닌 파트너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왜 요구하셨을까요? 단순히 당신에게 받은 것에
감사하기만을 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본래 그들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습니다.
그 일에 그들이 봉헌한 것이 쓰여 자신들도 하느님의 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하느님도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유학을 다녀오고는 공부가 쉽지 않음을 알고 신부가 되었을 때 다시 유학 가라고 하셨을 때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느낍니다.
주교님이 저에게 있는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상호 존중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내가 그분을 위해 아무것도 봉헌하지 않는다면 본당에 나가 본당신부를 하였어도 크게
고마워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분께 합당한 사제가 아니라고 여겨 적당히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의 죄를 위해 모든 보속을 해야 더 완전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 혼자 모든 것을 이루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예수님의 보속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24)
저는 신자들에게 봉헌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그 봉헌된 것으로 신자들에게 다시 돌려줘 그것으로 선교할 자금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소공동체에 돌려줘 가정방문 할 때 선물을 사라고 하고 가두 선교할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봉사하는 그분들이 낸 교무금과 헌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신자들을 존경하게 되고 신자들도 본당 신부에 합당한 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1849년 세관의 검사관으로 일하던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아내는 오히려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아마 이 해고가 당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그리고 아내는 현금 뭉치가 든 작은 가방을 가져와 꺼내 놓으며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혹시나 해서 당신 봉급에서 지금까지 따로 마련해 놓았어요.
당신이 글을 쓸 동안 우리는 이 돈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 남편의 이름은 너새니얼 호손이고 그가 그렇게 해서 쓴 소설이 유명한 ‘주홍글씨’입니다.
‘주홍글씨’나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위대한 소설을 집필하게 된 것에 어떤 누구도 호손이 자기 능력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아내와 함께 받아야 정당할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무엇을 이루어냈을 때 그것이 누구의 공로인지 정확히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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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원상복구하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마태 15,30-3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대림 시기는 모든 억압과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메시아, 즉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이고, 메시아(구세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구원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30절-31절의 ‘예수님께서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는 앞의 11장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6)”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실제로 하시는 일을 설명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8).”
이 예언은 ‘메시아 시대’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메시아, 즉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여러 가지 신체장애를, 인간들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억압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굶주림의 고통’도 그런 고통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해방과 구원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2)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시는 일에 관해서,
마르코복음에 있는 다음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5.37)”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좋게 하다.’ 라는 말은, 천지창조 이야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에서 온 표현입니다.
그래서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는 “저분은 고장 난 이 세상을 고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처음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메시아시다.” 라는 뜻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한 사람의 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은,
원죄 때문에 세상이 온통 망가지고 고장 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 세상과 인간들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분, 즉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3)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고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이야기 속의 장애자들과 배고픈 사람들은 곧
나(우리)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나(우리)를 고쳐 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야기 속의 ‘군중’과 ‘장애자들’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서 ‘군중’이라는 말은 장애자들과 병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들을 데리고 온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온’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응답해야 하고
또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한처음의 완전함’이 회복된 나라이고, 신앙생활은 그 ‘완전함’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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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5,29-37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곁에서 많은 군중들이 함께 다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혼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시려면 자리잡고 앉을 장소가 한정적이고 시야가 제한되는 산보다는 호숫가가 더 적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사람들을 앉게 하시고,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고 호수 쪽으로 좀 저어 나가신 다음 그들을 가르치시기도 했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 도착하신 다음 거기 머무르지 않으시고 굳이 산으로 오르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러신 이유와 의도가 궁금해집니다. 많은 군중들이 낑낑대며 주님을 따라 그 산을 올라 치유를 좀 해주십사고 청하며 그분 곁에 여러 병자들을 데려다 놓았다는 사실에서 그 궁금증은 더 커지지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이 배고플까봐 끼니까지 챙기시는 분께서, 병자들이 당신께 좀 더 수월하게 다가가도록 그냥 평지에 머무르실 수는 없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 그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그날 벌어질 기쁨의 잔치에 대해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덮개를 없애시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기쁨의 잔치를 ‘산 위’에 마련하시는 이유는 산이 당신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지존하신 분께서 당신 백성을 만나기 위해 친히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으니,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백성이라면 최소한 그분께서 머무르시는 산에 오르는 정도의 수고는 감수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기쁨의 잔치에 초대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땅히 드려야 할 ‘정성’이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라는 보물은 시련과 고통이라는 과정을 충분히 거칠수록 그 빛을 더하는 법입니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자기가 받은 게 은총인 줄도 모르고 허투루 흘려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배고프지 않으면 입맛이 없고, 입맛이 없으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또한 매일 매일이 잔치라면 거기에 참여하고 싶은 갈망이 생기지 않고, 아무리 상다리 휘어지게 준비해도 굳이 잔칫집까지 가는 수고를 하려고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로 하여금 산에 오르게 하십니다. 거동이 불편한 병자들을 배려하지 않으셔서가 아닙니다. 건강한 이들로하여금 이웃과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그들을 당신 곁에 데려오는 수고를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병자들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에서 열리는 기쁨의 잔치는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것임을 그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선의에서 우러나는 자발적인 의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만, 이웃에 나에게 베풀어주는 호의와 자비에 감사하며 기뻐할 줄 알아야만, 이제부터 당신이 일으키실 빵의 기적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셨지만, 그 마중물이 된 봉헌에는 제자들도 참여했습니다. 또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건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한 이들 모두가 기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나눔의 과정에 동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메시지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입니다. 재물이든 건강이든 재능이든 시간이든 다 마찬가지지요. 하느님께서 그 선물들을 주신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누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바라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여 기적에 봉사하는 사람, 기적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내 일처럼 공감하며 함께 하려는 이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삶은 놀라운 기적들로, 기쁨 충만한 잔치들로 가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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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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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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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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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삶
<2024.12.4> 아침을 여는 묵상 (암 1:1~2:3절)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삶❞
❚ 회개함으로 세상을 향하여 달려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 수레를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심판을 피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 욕망과 교만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1~5절).
아모스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남 유다 드고아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과 주변 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했습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시기였습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 있을 때 영적으로 타락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마음의 목자 아모스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타락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시온에서부터...예루살렘에서부터...’(2절).. 이곳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곳으로부터 심판이 비롯된다는 사실은 전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풍요롭던 목자의 초장과 갈멜 산 꼭때기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메섹’의 죄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반복적으로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를 사용하는데, 이를 직역하면 ‘...셋 때문에 그리고 넷 때문에...’로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숫자 칠(3+4=7)이 완전한 것을 지칭하였기에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죄악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이며, 아람은 이스라엘(길르앗)을 침공해 잔인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육했습니다(3절). 하나님은 아람의 궁궐에 불을 보내십니다(4절). 불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다메섹의 견고한 빗장도 꺾으실 것입니다(5절).
진정한 영적 건강함은 물질적 풍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 건강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결국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나 아람의 왕 하사엘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힘과 권력과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시기를 맞이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이...’살육하였습니다.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보다 힘이 있고, 좀 더 갖게 됐을 때 교만해 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비로 주신 것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자에게 자비를 나타내시는 분(시 18:25)이십니다. 심판의 불 수레를 피하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욕망과 영적 교만을 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불신과 분노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6~12절).
두 번째 심판을 받을 나라로 등장한 도시는 가사입니다. ‘가사’는 블레셋의 대표 도시로 당시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블레셋의 죄악은 대규모 노예무역을 한 것인데, 그들이 사로잡은 자들을 에돔으로 인신매매했습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이 죄의 형벌은 사형입니다(출 21:16).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8절)입니다. 즉, 블레셋의 남아 있는 마지막 생존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심판과 그로 인한 멸망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세 번째 등장한 나라는 ‘두로’입니다. 이들의 죄악 역시도 가사와 같이 모든 사로잡은 자들을 에돔에 넘긴 것입니다(9절). 두로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다메섹과 같이 성과 궁궐을 불사르는 것입니다(10절).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 국가로 여겨졌으므로 이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악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에돔의 죄악은 특별히 형제 유다를 향하여 긍휼을 보이지 않고 그들이 칼을 들고서 제 형제를 뒤쫓으며, 형제 사이의 정마저 끊고서 늘 화를 내며 끊임없이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11절). 이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형벌은 불로 인한 심판이었습니다(12절).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분노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생명 존중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교만에 빠진 자들을 향하여 진노하십니다. 분을 품을수록 인간은 잔인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사회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이를 제어하지 못하면 생명 존중의 마음도 잊어버리고 씻을 수 없는 죄악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혹 지금 내면에 분노로 가득하다면, 그것을 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와 그 뿌리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함으로 불 심판을 피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욕심과 복수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13~2:3절).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작은 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낳은 벤암미에게서 비롯된 민족입니다. 암몬 자손들은 자신들의 땅을 넓히려고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를 정도로(13절) 참으로 잔혹하고, 악랄했습니다. 하나님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궁궐들을 태워 버리시고, 전쟁하는 동안 폭풍 속의 회오리바람 같은 거친 함성이 들리고, 싸움이 맹렬(14절)하므로 멸망을 당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암몬은 인간적 탐욕으로 세상 것을 쟁취하고자 했지만, 도리어 그들의 왕국은 약탈당하고, 왕과 지도자들은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15절). 모압 역시 롯이 그의 큰 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하여 얻은 아들의 후손입니다. 모압 족속은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로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들은 에돔 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유골을 불살라 재를 만들 정도로(2:1절) 비인간적이고 반인륜적인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는 에돔에 대한 분노와 복수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압에 불을 보내어 그리욧 궁궐들을 불태우며, 주변의 강대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멸망 받게 될 것(2~3절)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탐욕이 결국 우리 자신을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게 할 것입니다. 내 욕심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삶, 다른 사람을 짓밟고서라도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가는 비인간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의 대장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복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 힘과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싸우려다 보니 패한 인생만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공의 가운데 행하여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생명 경시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시키는 흉악한 범죄들로 인하여 사회적 불안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끔찍한 죄를 저지릅니다. 악은 또 다른 악을 낳고, 죄의 결과는 멸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를 인정하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진정한 샬롬이 임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죄의 길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생명의 길을 걸어감으로 영과 육이 강건케 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끝이 없는 욕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겸손히 나아가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암 1:1~2: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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