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는 모터스포츠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힌다. 1960년대 말 르망에 출전한 이후 최근까지 총 19회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1980년대에는 F1에 엔진을 공급하는 등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꾸준하게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랠리와 같은 특수한 경기에서도 포르쉐 차량을 직접 끌고 참전하는 드라이버도 있을 정도.
세계적으로 입증받은 성능 덕분에 포르쉐는 ‘골수 팬’으로 통하는 단단한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다. 그동안 쌓은 레이싱 헤리티지로 인해 자동차 만들기에 대한 자존심도 높다. 하지만 이러한 ‘고집’이 포르쉐를 위험이 빠트리기도 했다. 소수의 마니아만 보유할 뿐, 많은 소비자들이 찾지 않는 자동차 회사로 전락한 것.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포르쉐가 성공한 모델은 911이 전부였을 정도다.
아이러니하게 지금의 포르쉐를 만든 것이 ‘골수 팬’이었고, 발목을 잡은 것도 ‘골수 팬’이었다. 결국 포르쉐는 골수 팬과 거리 두기를 선택했고, 이때부터 새로운 변화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시장 확대를 위해, 생존을 위해서다.
그 시작은 1990년대부터다. 엔진과 변속기가 뒤에 있고 후륜을 굴리는 ‘RR’ 방식에서 벗어나는가 하면 911을 바탕으로 4도어 세단을 내놓으려 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당히 성공했다. 포르쉐는 어떻게 골수 팬들과 ‘합의’를 했을까?
수냉식으로 엔진 변경합니다, 하지만 감각은 유지하겠습니다.
포르쉐는 993에서 996으로 변경되면서 엔진 구조를 변경했다. 공랭식에서 수냉식으로 변경한 것. ‘포르쉐는 공랭식이지’를 외치던 골수 팬들의 반발이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특유의 엔진 사운드와 주행 감각, 난이도 높은 유지 관리가 911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911에 일반 승용차 엔진 형식이 들어간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했다.
수냉식으로 변경되면서 같은 이점은 일반 승용차 수준으로 향상된 유지 관리, 이로 인한 성능 향상이 용이하다는 것에 있다. 6800rpm 정도까지 돌릴 수 있었던 엔진은 7000rpm을 넘어설 때까지 사용할 수 있으면서 열로 인해 운전자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됐다.
수냉식이지만 공랭식 특유의 감각과 사운드를 최대한 재현해 ‘포르쉐 노트’ 명성을 이어갔다. 이제 엔진 문제로 골치 아픈 일이 없으니 새로운 소비자도 두려움을 갖지 않고 포르쉐에 입문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배기량 줄이고 터보차저를 달아볼까 합니다, 하지만 더 강렬해질 것입니다.
수냉식으로 변경한 이후 다운사이징 시대가 오면서 포르쉐도 더 이상 자연흡기 엔진을 고집할 수 없게 됐다. 포르쉐의 선택은 배기량을 줄이는 대신 터보차저를 추가하는 것. 이 때문에 골수 팬들 사이에서는 마지막 자연흡기 911이라며 991 버전 모델을 더 찾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포르쉐는 911은 물론 박스터 & 카이맨에도 터보차저를 추가했다. 심지어 6기통에서 4기통으로 배기량은 물론 기통수까지 줄였다. 911의 배기량은 3.0리터로, 많게는 800cc까지 감소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911과 718의 판매량은 전 세계적으로 더 많이 증가했다. 낮아진 배기량으로 세금 이득을 볼 수 있으며, 자연흡기 엔진에서 느낄 수 없는 강렬한 마력과 토크감을 즐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터보차저 특유의 지연 현상도 포르쉐는 최대한 해결했다. ‘스포츠 리스펀스’ 기능을 활성화시키면 엔진과 변속기의 반응을 극대화하는 등 새로운 경험도 느낄 수 있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포르쉐의 궁극적인 모델은 ‘터보’를 사용한다는 점도 골수 팬들을 설득시키는 요소가 됐다. 지금이야 모든 포르쉐가 터보차저를 쓰지만 과거에는 911 터보 혹은 911 GT2와 같은 특수한 모델만이 터보차저를 사용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터보 엔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터보 노하우를 방출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저도 저렴한 차를 팔아보겠습니다, 하지만 더 잘 달릴걸요?
예나 지금이나 포르쉐는 항상 비싼 값에 차를 판다. 때문에 포르쉐를 구입하는 것은 성공의 상징으로 통한다. 그런 포르쉐가 996을 바탕으로 엔진과 변속기 배치만 거꾸로 만들고 차체도 작게 만들어 911의 반값에 구입 가능한 스포츠카를 만들었다. 그것이 박스터였다.
박스터는 새로운 헤드램프 디자인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포르쉐의 상징인 엔진 배치까지 바뀌는가 하면 당시로는 파격적인 가격에 판매됐다. 골수 팬들은 진정한 포르쉐가 아니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박스터는 당시 존폐 위기가 거론됐을 정도로 열악했던 포르쉐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세계적인 경제 호황까지 맞물리면서 스포츠카, 오픈카와 같은 비주류 모델의 수요가 크게 높아진 덕도 봤다. 여기에 911과 달리 균일한 전후 무게 배분을 바탕으로 항상 언제든지 911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SUV를 만들어보겠습니다, 하지만 포르쉐 정체성은 버리지 않겠습니다.
박스터에 이어 포르쉐는 SUV를 내놓을 결심을 한다. 박스터까지만 해도 골수 팬들이 반대했지만 SUV인 카이엔이 등장했을 때 전 세계 자동차 미디어에서 우려 섞인 반대를 쉼 없이 쏟아냈다. ‘충격’, ‘경악’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엔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현재까지 포르쉐에서 가장 잘 팔리는 모델로 꼽힌다. 단순히 포르쉐 배지만 달고 있는 SUV가 아니었다. 모양만 SUV 일뿐 포르쉐의 정체성은 고스란히 담긴 또 다른 포르쉐였다. 카이엔은 일상생활에서 탈 수 있는 포르쉐를 원했던 소비자들의 수요를 폭발시켰다.
카이엔의 대성공은 프리미엄 브랜드는 물론 럭셔리, 슈퍼카 브랜드까지 SUV를 덩달아 내놓게 할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한 모델로 꼽힌다.
이제 수동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더 빨리질 것입니다.
포르쉐의 상징인 911. 여기에 더 빨리 달리고 서킷에서 포르쉐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모델로 ‘RS’ 라인업이 존재한다. RS를 택하는 소비자들은 수준 높은 운전 실력을 갖췄으며, 그만큼 포르쉐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변속기는 수동변속기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911(991) GT3 RS부터 자동변속기인 PDK만 탑재하기 시작했다. 이제 서킷에서 복잡하게 기어 레버와 페달을 조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서킷에 집중한 전용 모델에 자동변속기만 탑재된다는 점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포르쉐는 성능과 기록으로 답을 했다. 이제 수동변속기로는 따라갈 수 없는 기록을 만든 것. 여기에 자동변속기를 사용함으로 인해 GT3 RS와 같은 고성능 모델에 입문을 꺼려 한 소비자들까지 추가로 유입시켰다.
포르쉐의 자동변속기 PDK는 국내시장에서도 포르쉐 판매량을 늘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과거 팁트로닉 변속기를 사용했을 때는 느린 반응으로 ‘역시 포르쉐는 수동 변속기지’라는 평가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응이 매우 빠른 PDK 변속기 탑재 이후 소비자들은 변속기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 PDK와 함께 조화를 이룬 런치 컨트롤은 모델에 따라 5000~6000rpm부터 엔진 회전수를 올린 후 총알처럼 가속하는 모습으로 소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자동변속기의 편의성과 보다 강력한 새로운 경험이 오히려 포르쉐의 수요를 늘리게 만들었다.
실패 사례 : 디자인과 시프트 패들
포르쉐의 새로운 도전이 항상 성공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996을 내놓으면서 원형 헤드램프가 아닌 새로운 디자인을 추가하려 했지만 911 팬층으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박스터도 마찬가지.
이 때문에 996 후속 모델인 997과 신형 박스터에서는 다시 원형 헤드램프로 되돌아갔다. 비슷한 램프 디자인을 가졌던 초기 카이엔도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보다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팁트로닉을 사용하던 시절 포르쉐는 스티어링 휠에서 손을 떼지 않고 수동 변속 조작을 할 수 있는 기능을 마련했다. 현재처럼 시프트 패들이 아닌 버튼을 두었던 것. 위 버튼을 누르면 기어 단수를 올리고 아래 버튼을 누르면 단수가 내려가는 방식이었다. 버튼 위치도 모호해서 조작할 때 더욱 불편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타사와 다른 포르쉐만의 독특한 조작법이었지만 반응도 느리고 빠르게 운전할 때 적합하지도 않아 좋지 못하나 평가를 받았다. 결국 포르쉐는 PDK 도입 이후에도 한동안 이러한 조작법을 이어갔지만 결국 2010년 공개한 911 터보를 통해 패들을 도입했고, 현재는 PDK를 사용하는 모든 모델에 시프트 패들을 적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