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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산해경(山海經)과 한국문화]
중국에는 4대 기서(奇書)라는 것이 있는데 『서유기』와 『금병매』, 『삼국지연의』와 『수호지』를 말한다. 이들 외 『산해경』이라는 책은 다섯 번째 기서로 꼽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무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럴 것 같아 보이는 이유는 『산해경』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지리와 문화 배경이 중국 밖에까지, 특이한 동식물과 광물, 남해의 여러 섬 들, 시베리아에 이르는 옛날 아시아 지리까지 포함하고 있는 데다 어떤 학자는 바빌로니아인들이 지은 아라비아의 지리서라고 하기도 한다. 아시아와 중국을 넘어 특정 지역이 아닌 세계 여러 대륙의 문명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해경』의 인식과 상상은 가히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저자 정재서 선생은 서론에서 말하고 있다.
“그 속의 문화는 다원적 상호 텍스트적인 성격을 지녔고, 특히 은(殷) 및 동이계 종족 문화와 깊은 상관관계에 있고, 고대 한국문화 역시 『산해경』과 친연성을 지니며 한국문화와 관련하여 풍부한 내용이 도처에 깔려있어서 주목받는다.”고도 했다. 『산해경』은 역사·지리서인가? 신화·민속을 담고 있는가? 도술서인가?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이 들고 이 책에 대한 정체성이 분분하지만 그런 궁금함은 읽으면서 찾아보기고 한다.
『산해경』의 성립은 파국, 초, 산동, 연, 추연, 동방 방사 등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의 성립 시기와 관련해서는 전국시대 연(燕)·제(齊)·초(楚)로 모아진다. 이들 세 나라는 지역적으로 중국대륙 동남방 해안에 걸쳐 있고, 『산해경』이 동이계 고서라고 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지역·문화·종족 등의 대상에 이설이 있으나 대체로 현재의 중국 요녕·산동에서 장강에 이르는 샤머니즘과 조류 숭배 등 문화적 특징으로 보면 알타이어계로 정리된다. 조류 숭배라는 모티프는 홍산문화와 장강(양쯔강)유역의 하모도(河姆渡) 문화에 이르기까지 옥기(玉器)라는 연속성을 유지한다.
고대 한국은 지리적·문화적·종족적으로 『산해경』성립 주체인 동이(東夷)와 상당한 친연성(親緣性)을 지니고 신화와 문화에 자주 보이는 조류 숭배와 샤머니즘 요소는 물론 여러 학자들이 주장해온 산동의 대문구(大汶口) 문화, 요녕의 홍산(紅山) 문화와도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다.
『산해경』의 배경과 성립 시기, 내용까지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저자는 한국과 관련된 부분을 찾아서 설명해 주고 있다. 저자 정재서 선생은 신화학자이자 문화평론가로 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서울대 중문과 석·박사를 거쳐 계명대 교수로 재직하기도, 하버드 대학 엔칭연구소, 국제일본문화센터 객원교수, 비교문학회, 도쿄문화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야기 동양신화』, 『동아시아 상상력과 민족 서사』등 많은 저서를 남기도 있다.
『산해경』에는 한국과 관련된 고대 한국의 역사와 지리적 정황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많은데(산재해 있다), 이는 고대사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삼국시대 전후 역사를 보완해 준다. 『산해경』「해내경(海內經)」에는 고조선과 관련한 이런 내용이 있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조선천독, 기인수거 외인애지)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과 천독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천독(天毒)인데 학자에 따라 천축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조선에 관한 기록이므로 이는 오기(誤記)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규원사화』에는 독(毒)은 육(育)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면 “ …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가 된다. 부정적인 기술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산해경』에는 직접적으로 고대 한국의 정황을 신화, 민속 등을 통해 묘사하기도 하지만 군자국(君子國), 대인국(大人國), 청구국(靑邱國), 백민국(白民國), 숙신국(肅愼國) 등 여러 나라 이름이 나오고, 또 고대 한국에서 유래했거나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웅산(熊山)과 풍백(風伯) 등 조선의 신들에 대한 기록이 다수 있다. 군자국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 무늬 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고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라는 식물이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를 동방예의지국 혹은 예의지방(禮儀之邦)이라고 하는데, “의관을 갖추고, …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는 구절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또 무궁화가 국화(國花)가 된 최초의 근거는 “훈화초(薰化草)라는 식물의 꽃이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다.”는 구절에 근거를 둔다. 민속신앙과 관련된 묘사에서는 “두 마리 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다.”고 한 것인데, 최남선(최남선(崔南善, 1890~1957) 선생은 “산신령과 호랑이가 함께 있는 한국 고래의 산신도(山神圖)와 잘 부합된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 한국인을 백의민족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은 백민국과 관련 있다. “백민국이 있다. 몸빛이 희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산다. 승황이라는 짐승이 있는데 생김새는 여우 같으나 등 위에 뿔이 있고 그것을 타면 2천 살까지 살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동이계 종족은 백색을 숭상한다는 말이며 부여의 경우가 그렇다. 몸빛이 희다는 것은 흰옷을 즐겨 입던 고대 한국 종족에 대한 신화적 표현이다. 승황(乘黃)이라는 신수(神獸)를 타고 오래 산다는 것은 앞서 군자국에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君子不死之國)’라고 한 이미지와 상통한다.
군자국 다음에는 숙신국을 서술하고 있는데 중국 문헌에서 아주 빈번히 출현하는 나라 이름이 숙신(肅愼)이다. 숙신은 고조선의 별칭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며 압록강 상류 지역에 있던 나라로 이곳에 웅상(雄常)이라는 나무가 있다고 하고는 “그들은 옷 없이 산다. 그러다 중국에서 성군이 즉위하면 그 나무에서 껍질이 나와 옷을 해 입을 수 있었다.”라고 했다. 이 말은 숙신국의 정체성을 무시한 중화주의적 관점인데 나무껍질로 옷을 해 입었다는 것이 기발한 발상이긴 하나 견해가 매우 자민족중심주의가 아닐 수 없다. 웅상은 아마도 숙신국의 신목(神木)으로 웅상이란 이름으로 보아서는 나무가 환웅 천황이 하강했던 신단수(神檀樹)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다.
숙신국은 불함산(不咸山)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불함산이란 오늘날의 백두산이다. 또 숙신국에는 날개가 넷인 비질(蜚蛭)과 짐승 머리에 뱀의 몸을 한 금충(琴蟲)이라는 동물이 있다고 했다. 이것들은 신화적 동물이거나 고대 백두산 일대에 서식했던 동물로 추정해 볼 수 있지만, 더 이상의 정보가 없어 정체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삼국유사』「단군신화」에는 기상신인 풍백이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과 더불어 환웅천왕을 모시고 하강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들 3명은 『산해경』에도 등장한다.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가 이에 응룡(應龍)으로 하여금 기주야에서 그를 공격하게 했다. 응룡이 물을 모아 둔 것을 치우가 풍백과 우사에게 부탁하여 폭풍우로 거침없이 쏟아지게 했다. 황제가 이에 천녀인 발을 내려보내 비가 그치게 했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풍백과 우사가 동이계 영웅인 치우 편이 되어 황제와의 싸움에 참여했다는 것인데, 이들이 「단군신화」에도 등장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풍백은 일명 비렴(飛廉)이라 하는데 이는 한국어 ‘바람’의 고어에서 유래했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는 날개 달린 형태의 신수(神獸)가 있다. 이것은 종래 기린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며, 풍백은 새의 머리를 하고, 사슴의 몸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람처럼 빠르게 날아다니는 속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무용총 벽화에 있는 신수는 풍백으로 간주된다. 풍백은 고대 한국 및 동이계 신화에서 친연성을 보이고, 어원학적 측면에서도 한국과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단군신화, 고구려 신화]
백제 고이왕(324∼386년 재위)이 아직기(阿直岐, ?~?)에게 『산해경』을 일본에 보내주라고 하였다는 일본측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산해경』이 널리 읽혔고, 그 전인 고조선 시대에도 신화가 퍼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광개토왕비문」에는 “어머님은 하백의 따님이셨다.(母河伯女)”라는 것과 유리왕(BC 19∼AD18년 재위)이 하희(河姬)와 치희(雉姬) 두 후궁이 서로 질투하여 일어난 싸움을 중재하다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불렀다는 「황조가(黃鳥歌)」에도 『산해경』의 내용이 보인다.
翩翩黃鳥(편편황조) 펄펄 나는 저 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다정한데
念我之獨(념아지독) 외로운 이 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그 누구와 돌아갈꼬?
황조 한 쌍으로 자신의 외로움을 부각시키고 있는 이것은 『산해경』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리왕이 굳이 황조를 자신의 처지와 비교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것은 『산해경』에서 황조가 바로 질투를 없애준다는 새이기 때문이다.
“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헌원산이라는 곳인데 산 위에서 구리가 많이 나고 기슭에서는 대나무가 많이 자란다. 이곳의 어떤 새는 생김새가 올빼미 같은데 머리가 희다. 이름을 황조라고 하며 울음은 제 이름 소리를 내는 것이고, 이것을 먹으면 질투하지 않게 된다.”
고려 시대에는 이인로, 이규보, 이제현, 이곡, 이색 등 문인들이 시문에 『산해경』관련 내용을 자주 언급을 하고 있는데, 특히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산해경』에서 언급되는 무당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우리 해동에도 아직 이 풍속이 남아 있어(海東此風未掃除)
여인은 무당 되고 남자는 박수가 되네(女則爲覡男爲巫) *覡(격)박수무당
그들은 자칭 신이 내린 몸이라 하지만(自言至神降我軀)
내가 들을 땐 우습고도 서글플 뿐이다(而我聞此笑且吁)
굴속에 든 천년 묵은 쥐가 아니라면(如非穴中千歲鼠)
틀림없이 숲속의 구미호일세(當是林下九尾狐)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2 -
무당을 여우인 구미호에 비유한 것은 재미있다기보다 섬뜩한 것 같다. 한국의 신화는 ‘문헌신화’와 ‘무속신화’로 크게 대별 할 수 있는데, 문헌신화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단군신화, 주몽신화, 박혁거세 신화 등이다.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처음 실린 것으로 알지만, 『위서(魏書)』에 이미 이렇게 실려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불렀으니 요임금과 같은 시기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할 만하여 즉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보내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선악 등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했다.”이것은 『산해경』에도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가 ‘하백의 딸’(광개토왕비문)이라고 하는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것들은 문헌신화이지만, 무속 신화에는 더 많은 이야기들을 『산해경』에서 차용하고 있다. 너무 길고 많아 생략한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산해경』을 누가 저술했는가 하는 것이다. 중국 전한 시대 우수와 왕충(王忠), 조엽 등을 거쳐 동진의 곽박(郭璞)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의심 없이 은나라 우(禹) 임금을 저자로 믿어왔다. 하지만 남송시기 우무, 주희(朱熹-朱子, 1130∼1200년)에 이르러서는 이를 회의하기 시작했고, 고려의 이규보도 그들과 같은 문제의식을 표명했는데 이규보는 세 가지 점에서 우 저작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첫째, 「해내경」마지막에 천제의 보물인 식양을 훔쳐다 홍수를 막은 곤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자식된 입장에서 부모의 허물을 가감 없이 서술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하고 둘째는 유수의 표문에는 우가 백익을 시켜 지었다 하고, 곽박은 서문에서 우가 구주(九州)를 분별하여 지었다고 하므로, 두 가지 설이 모순 된다는 것이다. 중국은 신화를 후대에 이르러 역사화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일찍이 『서경』에서부터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산해경』에서 태양의 여신 희화(羲和)나 외다리 괴물 기(虁)가 『시경』에서는 일관(日官)이나 악관(樂官)으로 변모하는 것이 그것이다. 『산해경』을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거나 황당한 책으로 간주했던 이규보 역시 기본적으로 사마천과 같이 유학적 소양을 지닌 지식인으로 신화 및 상상력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산해경』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형성되었다든가, 후대에 내용이 가필되거나 윤색되었다는 등의 변화 요소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논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불교 국가이던 고려는 사상적으로 조선 시대보다 오히려 융통성이 있었으며 한때(예종 시기) 도교가 흥성하기도 했으므로 도교와 친연 관계가 있는 『산해경』에 대한 관심이 컸으며, 지식인들이 열독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게 보는 데는 서왕모(西王母) 신상을 만들어 경배했다는 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서왕모 소상(塑像) 등에서 확인된다.
국보 제167호인 「청자 도교 인물 모양 주전자」는 헌선도(獻仙桃)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데, 이 청자 모양은 서왕모 신상 경배 습속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서왕모 소상]
[도교 인물 모양 청자 주전자, 국보 167호]
신화의 보고로 알려진 『산해경』은 오히려 중원문화와 거리가 먼 주변 문화의 집대성이며 정통으로 알려진 주(周), 한(漢) 문화보다 비정통적인 은 및 연, 제, 초 문화와 상관관계가 깊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에서의 『산해경』적인 제재(題材)는 이제까지의 중국 신화 인식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탐구되어야 하고 그간 불교 중심 편벽성으로 소홀했던 동북아 고유의 민간 신앙 및 습속, 특히 도교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벽화는 지금까지 간과해왔던 도교학적 접근도 시도해야 할 때라고 저자는 말한다.
“又東一百五十里 曰熊山 有穴焉 雄之穴 恒出入神人 夏啓而冬閉 是穴也 冬啓乃必有兵(우동일백오십리 왕웅산 유혈언 웅지혈 황출입신인 하계이동폐 시혈야 동계내필유병)”
⇒ 다시 동쪽으로 150리를 가면 웅산이라는 곳이다. 이곳에 굴이 있는데 곰굴이라 하며 늘 신인이 드나든다. 여름에는 열리고 겨울이면 닫히는데 이 굴이 겨울에 열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
웅산의 곰굴은 마늘과 쑥만을 먹으며 인간을 꿈꾸었던 웅녀의 보금자리였으며 이곳을 드나드는 신인은 환웅천왕이 아니었을까? 『산해경』의 이 기록은 고조선 신화의 또 다른 반영이었다. 『산해경』에는 이런 직접적 자료로 한국과 상관 가능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방계적 자료를 통해서도 친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 “신화적 존재로 예(羿)가 있다. 그는 열 개의 태양이 떠올랐을 때 아홉 개를 격추하여 가뭄을 막았고 사방의 괴물을 퇴치하여 백성을 구한 영웅으로 그의 이름 역시 조류 숭배와 상관되며 그가 태양신이자 명궁이었다는 사실은 고구려 건국 시조 해모수와 주몽 등과 관련이 깊다.
고구려 민족이 좋은 활을 생산했고 사전(射箭)에 능했다는 역사기록은 그 상관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회남자』, 『초사』등에 따르면 예(羿)의 생애는 고구려 건국 시조의 그것과 공통점을 넘어 구조적 상동성을 갖는데, 예는 하백의 부인 낙빈(洛嬪)과 사통하였고 하백을 활로 쏜다. 그 후 제자인 방몽(逄蒙)에 의해 피살된다. 한편 해모수(解慕漱)는 하백과 술법을 겨뤄 그의 딸 유화를 얻고 이들 주몽을 낳는다. 이들 신화는 혼외정사로 인한 하백과의 갈등을 공통의 모티프로 삼고 있다.
예와 해모수 간의 구조적 유사성은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에게서 또다른 양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고대 중국의 왕조 교체가 요, 순, 우, 탕 등 전설적 성군들의 선양(禪讓) 이야기 패턴을 반복함으로써 합법성을 획득해 왔던 것처럼 고구려 신화에도 충분히 시사되었으리라고 보여지고 고구려계 주몽과 부여계 해모수가 신화구조를 공유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해모수 신화를 매개로 예와 주몽 신화와의 관계성을 탐색할 여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원래 하백의 딸이었으므로 하백과의 관계성을 고려하면 예는 곧 낙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예의 제자 방몽은 바로 주몽의 아들인 유리다. 둘 다 스승이나 아버지가 죽어야 1인자가 된다는 점에서, 활의 명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각색인 것이다.
[도교(道敎)]
도교는 유교, 불교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종교 사조 중 하나로 동아시아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도교 기원지로 파촉(巴蜀)이라는 설과 동아시아 발해만이라는 설이 있는데, 발해만으로부터 연,제,초에 이르는 이들은 방사(方士)의 요람이라 할 만큼 도교의 종교적 모체에 관한 유력한 가설인 샤머니즘 기원설과 상응하여 파촉보다도 더 유력하다. 그런데 ‘동방기원설’은 동이계 신화 구역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도교 발전 혹은 도교에 의한 동이계 신화의 전유(專有)라는 문제가 생기지만, 신화는 역사의 이면으로 잠복하여 기층문화가 되었다가 지배, 중심주의로 표상되는 유교에 대하여 주변, 다원주의로의 반가치적 성격을 띠고 도교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은(殷)대 신화와 후대 도교와의 상관관계 속에 파악될 수 있다.
샤머니즘에서 조류 숭배는 역사 문헌으로도 입증되고 있는데, 고구려에서는 관모에 새 깃을 꽂아 그것으로 등급을 표시했는가 하며, 변한·진한에서는 장례 때 죽은 사람이 승천할 수 있도록 새 깃을 함께 매장한 풍속이 있었다. ‘무(巫)’는 갑골문에서 춤추는 사람의 형상을 본딴 글자로서 무(舞)와 자원적으로 같다. 선(仙)의 고자인 선(僊)은 춤을 출 때 소매가 펄렁거린다는 의미로 결국 무와 선, 샤머니즘과 도교는 춤, 조류, 비상 등의 이미지를 매개로 발생론적인 관계를 맺는다. 고구려 벽화에는 이런 이미지들이 가득하고 춤추는 인면조(人面鳥들)가 많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런 인면조들은 모두 『산해경』에서 유래한다.
『산해경』을 비롯해 『사기』「오제본기」, 『회남자』등 신화에 등장하는 황제(黃帝)와 신농(神農), 치우(蚩尤) 계열과의 전쟁 신화는 야장신(冶匠神)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들은 수차례에 걸쳐 대전(大戰)을 벌였다. 황제와 신농이 판천(版泉)에서 전쟁을 벌여 신농이 패하자, 신하인 치우와 과보가 복수전을 벌였지만, 이들도 탁록(涿鹿)에서 전멸했다. 그 후 신농의 후예 형천(刑天)이 다시 도전하지만 실패함으로써 천하는 황제에게 돌아간다. 이런 내용이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술이기(述異記)」와 「태평어람(太平御覽)」은 그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기록하기도 한다.
“치우씨의 형제 72인은 구리의 머리에 쇠의 이마를 하고 쇠와 돌을 먹는다. … 지금 기주 사람들이 땅을 파면 해골이 나오는데 마치 구리나 쇠 같은 것이 바로 치우의 뼈다. 치우는 … 구리의 머리에 쇠의 이마를 하고 모레를 먹으며 다섯 가지 무기 칼, 창, 큰 쇠뇌 등을 만들었다.”
『도교』에는 단약(丹藥)을 만드는 연단술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만큼 죽지 않고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기』「봉선서」의 이런 내용이 있다.
이소군이 임금께 아뢰었다.
“부뚜막신께 제사드리면 귓것을 불러올 수 있고 귓것을 불러올 수 있게 되면 단사를 황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황금으로 이루어 그것으로 음식 그릇을 만들면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이소군(李少君)은 한 무제 시기에 활약한 제나라 출신 방사(方士)인데, 방사란 샤먼에서 도사가 되기 전 과도기적 ‘신선가’라고 할 수 있다. 화신(化神), 즉 야장신(冶匠神)을 말하는 부뚜막신이 연단을 만드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는 것은 벽화에 등장하는 야장신과 관련해 주목된다. 아울러 이소군은 산동지역 팔신(八神)께 제사드릴 것을 무제에게 권유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유일한 인격신 치우를 제시하기도 한다. 연단술의 기원에 관한 내용들은 고구려 벽화의 야장신적 모티프에 연결되어 연단술과의 상관성, 나아가 발생론적 관계 측면까지 생각해 볼 여기를 준다.
[조선과 산해경]
조선 시대는 이전 시대에 비해 문헌·구전·역사 유물자료 등이 증가해 『산해경』수용이 여러 곳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이규경(李圭景, 1788∼ ?) 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정약용(丁若鏞, 1762∼1835)의 『여유당전서』,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붕유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연경재전집』,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등에서 특히 『산해경』이 많이 거론된다.
교조적 유교 이념이 지배한 조선이었지만 기서로 알려진 『산해경』의 문학·예술 분야에서의 수용은 활발해 이물(異物), 괴물(怪物)등 비현실적 상상력의 배후에 『산해경』이 있었다. 조선의 문인들은 삼국시대 이래 축적된 『산해경』에 대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문학, 박학(博學) 등 고증 목적은 물론 취미와 여흥 등 다양한 차원에서 『산해경』을 열독했다. “손으로 『산해경』을 펼치자 정신은 아득한 세상 밖에서 노니네.”라는 시구처럼 유유자적한 삶을 즐겼다. 이것은 은일시인(隱逸詩人) 도연명(陶淵明)이 「독산해경(讀山海經)」첫 수에서 “『산해경』을 훑어보니 잠깐 사이에 우주를 돌아보게 되네.(流觀山海圖 俯仰終宇宙)”라고 한 노래와 매우 닮았다. 많은 시가에서 「독산해경」을 모의(模擬)하거나 차운(次韻)한 것이다.
특히 서왕모와 관련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허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 1563∼1589)도 여기에 꼽힌다. 난설헌은 망선요[望仙謠]다.
瓊花風軟飛靑鳥(경화풍연비청조)
옥꽃 위로 미풍이 불자 청조가 날고
王母麟車向蓬島(왕모인차향봉도)
서왕모의 기린 수레는 봉래섬으로 향하네
蘭旌蘂帔白鳳駕(난정예피백봉가) *蘂꽃술예
목란 깃발 꽃술 배자의 흰 봉황 수레를 몰거나
笑倚紅蘭拾瑤草(소기홍란습요초)
붉은 난간에 기대어 옥풀을 줍기도 하지
天風吹擘翠瑤裳(천풍취벽취요상)
푸른 무지개 치마 바람에 날릴 제
玉環瓊佩聲丁堂(옥환경패성정당)
옥고리 패옥 소리는 댕그랑댕그랑
素娥兩兩鼓瑤瑟(소아양양고요슬)
선녀들 쌍쌍이 옥 거문고 타고
三花株樹春雲香(삼화주수춘운향)
삼주수(꽃) 주위에 봄 구름이 향기롭네.
서왕모 음영(吟詠)의 절창으로 여겨지는 이 시로 허초희는 지고지성한 서왕모의 신격과 화려함이라는 환상적인 세계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슬프고 아픈 현실을 초탈하고자 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조선 시대에는 마니아층이 형성될 정도로 『산해경』이 인기가 있었다. 시와 소설에서, 특히 서왕모 관련 모티브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 『산해경』은 기본적으로 지리서의 성격을 지니면서 신화의 내용도 담고 있는데 신화는 고대 역사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고 지리적 성격은 사지(史地) 고증에 참고가 되므로, 지리·역사 연구와 관련하여 이 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종, 성종 등 조선초기 임금은 민간에 있는 『산해경』을 바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성종 이후에는 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중국으로부터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덜한지 모르겠지만 사실 근년까지도 흉년이 들면 백성의 생활을 궁핍했다. 광해군 10년 영건도감(營建都監)을 만들어 궁궐 두 곳을 지었는데 공사 규모가 엄청났던지 “마무리가 이렇게 어렵게 될 줄 몰랐습니다.”는 상소가 빗발쳤고, 효종 4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져 영의정 김육(金堉-대동법을 시행한 재상)이 상소문에서 『산해경』신화를 비유하여 세금을 감면해 줄 것을 주청하기도 했다. 숙종 14년에 장렬왕후(莊烈王后)가 훙(薨)하자 대제학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애도하는 글을 지어 올렸는데,
“아! 슬프다. 울창한 저 신강(新岡)은 성조(聖祖)의 곁인데 네 능(陵)이 둘러싸여 있으니 많은 신령이 잡귀를 꾸짖어 물리칠 것이며, 엄연히 산세는 청룡이 서려 있고, 백호가 걸터앉아 일찍이 땅이 숨기고 하늘이 감추었던 곳인데 진실로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 체백(體魄)이 편안할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어찌 부우산이 멀다 하리요? 다행히 선영(先靈)이 가까이 있으니, 좌우에 있으면서 보좌하여 천년토록 국기(國基)를 공고히 하소서.”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부우산(鮒隅山)이라는 지명이다. 봉황새와 청조 등 신령한 새와 호랑이, 곰 등 맹수와 각종 보석, 신성한 뽕나무와 연못이 있는 명산으로 알려진 산으로 북방의 대신(大神) 전욱(顓頊)과 그의 아홉 후궁을 장사 지낸 명산이기 때문이다. 남용익은 장렬왕후 장지가 선대왕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전욱과 아홉 명의 후궁들이 묻힌 명산 부우산 못지않은 곳으로 미화했던 것이다.
조선당쟁의 역사에 있어 남인의 영수 허목(許穆, 1595~1682)은 1661년 현종 때 동해부사(東海府使)를 지내기도 했다. 그때 삼척지방에 빈발하던 해일을 막기 위해, 혹은 토착 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일명 퇴조비(退潮碑)라는 것을 세웠다. 동해송(東海頌)이라고 하는비문은 고전체(古篆體)의 운문으로 되어 있는데 동해의 각종 기이한 생물과 다양한 종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리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특히 대택(大澤), 양곡(暘谷), 부상(扶桑), 흑치(黑齒), 희화(羲和), 저인(氐人), 천오(天吳), 기(夔) 등 『산해경』에 등장하는 신, 괴물, 이방인 등이 비문의 주술적 취지를 한껏 고양시킨다. 옛날 무당이나 방사 계층이 그러했던 것처럼 허목은 「동해송」을 통해 『산해경』의 신화적 대동세계를 재현하고자 했다. 이는 조선 문인의 완숙한 『산해경』운용의 경지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그는 유학을 기본으로 하되 이에 얽매이지 않고 유불선 삼교합일적 입장에서 도가 불가를 자유롭게 회통했다. 이런 단학파는 김시습, 정렴 등 저명한 도인을 배출하면서 성황을 이루었다. 허목은 후기 단학파 맥을 잇는 중요한 인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척주동해비-삼척 육항산에 있다]
「척주동해비」는 『산해경』의 내용을 망라하다시피 언급하고 있는데 부상국(扶桑國)과 흑치국(黑齒國) 등 원방이국(遠方異國)들을 끌어와서 동해라는 특정 범주를 넘어 덧붙인 나라들이 여럿이 있고, 이역의 종족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면서 그것은 성인의 덕화에 의한 것이라고 밝힌 뒤 그 가르침은 무궁할 것이라고 하면서 ‘동해송’은 마무리됐다.
海外雜種 바다 밖의 여러 종족들
絶儻殊俗 인종도 다르고 풍속도 다르지만
同囿咸育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랐다네 *囿(유)동산,얽매이다
古聖遠德 옛 성인의 원대한 덕에 의해
百蠻重譯 모든 오랑캐들 통역을 거듭하여
無遠不服 그 어느 먼 곳도 따르지 않는 곳이 없네
皇哉熙哉 훌륭하도다! 빛나도다!
大治廣博 위대한 다스림 널리 미치니
遺風邈哉 남기신 그 가르침 영원하리다. *邈(막)멀다,영원하다
고성(古聖)의 옛 성인은 『산해경』을 저술한 우(禹)를 말하는 것이고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랐다네’라고 언급한 것은 이타성이 없는, 이른바 사해일가(四海一家)라는 이미지를 장식한 것이다. 허목은 성인인 우임금의 위엄을 ‘동해송’을 통해 다시 체험하기도 하고, 재현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척주동해비」를 건립하고 같은 시기에 우임금의 치수 업적을 찬양하는 「평수토찬(平水土贊)」을 지어 같은 장소에 비로 건립하기도 한 것을 보면 허목은 성인의 도가 살아나기를 바란 것이고 그것이 동해에서 살아나기를 바란 것이었다.
제 입으로 제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을 ‘우로보로스(Uruboros)’라고 하는데 이것은 합리주의자, 이상주의자 눈에는 자기 파괴적인 괴물로 보이지만, 연금술사가 보면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 정신과 육체의 대극(對極)을 합일한 견자(見者)로 보일 것이다. 조선 후기는 성리학이 교조화되어 탄력을 상실할 지경이었으나, 허목의 「척주동해비」건립이라는 이교적 행위는 시대를 뛰어넘는 통합적 사유, 회통적(會通的) 인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의도가 정치적이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완전한 허구’라고 생각하는 주술적 현실의 관점에서 읽어야 할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로보로스]
“다시 서쪽으로 350리를 가면 천산이라는 곳이다. … 이곳의 어떤 신은 그 형상이 누런 자루 같은데 붉기가 빨간 불꽃 같고 여섯 개의 다리와 네 개의 날개를 갖고 있으며 얼굴이 전연 없다. 가무를 이해할 줄 아는 이 신이 제강이다.”(又西三百五十里 … 有神焉 其狀如黃囊 赤如丹火 六足四翼 渾敦無面目 是識歌舞 實爲帝江也)
제강(帝江)은 혼돈을 이미지 한 것으로 혼돈의 신으로 불린다. 가무를 이해할 줄 안다는 점에서 동양의 뮤즈이다. 이외 저인(氐人), 비서(飛鼠), 승황(乘黃) 등 『산해경』에는 신이(神異)한 사람과 동물들이 창조적으로 각색되어 등장하는데 이를 이용한 현실에서의 시나 소설 속에서는 환상 세계를 다채롭게 구현해 왔다. 사이 ‘강남스타일’의 재킷 로고도 『산해경』에 등장하는 인어 저인에서 착상한 것이다.
“다시 동쪽으로 400리를 가면 단원산이라는 곳이다. …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너구리 같은데 갈기가 있다. 이름을 유라고 하며 이것을 먹으면 질투하지 않게 된다.”
“다시 북쪽으로 180리를 가면 혼석산이라는 곳이다. …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뱀에 있는데 이름을 비유라고 하며 이것이 나타나면 그 나라가 크게 가문다.”
이런 생경하고 요괴스런 이야기들이 『산해경』에는 반복과 가정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주술언어의 특징이기도 한데 문형의 반복을 나타내는 우(又)나 가정을 나타내는 자(者), 즉(則) 등의 글자를 자주 사용했다. 『산해경』에서는 예언과 징조 등으로 주술적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해경(海經), 황경(黃經) 부분에서는 이런 것들이 두드러지지 않으나 대황남경(大荒南經)에서는 주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문구 삽입이 있고, 대황북경에는 가뭄의 신 발(魃)을 축출하는 주어(呪語)로 보아도 될 만큼 주술적 성격을 부여한다. 신화 언어와 시적 언어는 특유의 표현 형식이 다른 어떤 언어보다 긴밀한 주술성과 상관되는 점에서 닮았다. 신화와 시가 동질적이다. 그러나 이런 원초적 동질성이 시에 대한 동일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화는 집체적인 정서에 바탕한 의도 되지 않은 허구임에 비하여 시는 개별적으로 출발한 의도된 허구이기 때문이다.
『산해경』이 시와 관련된 연관성은 도연명의 「독산해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도연명이 인생 중후반에 창작된 13수의 연작시에서 그 연기(緣起)를 말해 주는 ‘서(序)’에 상당하는 부분으로서 ‘메타 서사’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기일(其一)]
孟夏草木長 초여름, 풀과 나무 자라서
繞屋樹扶疏 집 주위로 우거졌네
衆鳥欣有托 뭇 새들 즐겨 깃들고
吾亦愛吾廬 나 또한 오두막집을 사랑하느니
旣耕亦已種 밭 갈고 씨뿌리고 하는 중에
時還讀我書 때때로 돌아와 책 읽는다네.
窮巷隔深轍 외진 곳 귀한 손님 올 리 없고
頗廻故人車 친한 벗들이나 찾아들까! *頗자못(약간)파
歡然酌春酒 반갑게 봄 술 따르고
摘我園中蔬 텃밭의 푸성귀 뜯네.
微雨從東來 보슬비 동쪽으로부터 내리고
好風與之俱 훈풍도 더불어 함께 불제
泛覽周王傳 「목천자전」을 두루 보고 *泛뜰범
流觀山海圖 「산해도」를 훑어보네.
俯仰終宇宙 잠깐 사이에 우주를 돌아보게 하네.
不樂復何如 진정 즐거운 일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5언 16구, 일운도저격(一韻到氐格)의 이 시는 여타 다른 구보다 2배나 구수가 많다. 이는 「독산해경」전체의 총서에 해당한다. 전원생활이 즐겁고 유한(有閑)한 정취를 노래한 시의 품격은 도연명 전원시의 백미로 꼽힌다. 전원생활의 지락(至樂)과 평담(平淡)함을 말하고 있는 시의 이면에 중요한 인식 전환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오두막집에서 우주로 이동하는 인식 차원의 이동이다. 그래서 이 총서와 3∼4구, 마지막 단락은 어떤 구절보다 의미심장하다. 마지막 13구 단락은 시인이 처한 당세(當世)의 현실에 대한 감개의 궁극적 동인(動因)을 말하고 있다.
「기십삼(其十三)」
巖巖顯朝市 공정하게 정사를 펼침에(암암현조시)
帝者愼用才 통치자는 인재 등용에 신중해야 한다.(제자신용재)
何以廢共鯀 어떻게 공공(共工)과 곤(鯀)을 제거했는가?(하이폐공곤)
重華爲之來 순(舜)이 그 일을 했도다.(중화위지래)
仲父獻誠言 관중(管仲)은 진실로 충언을 드렸으나(중부헌성언)
姜公乃見猜 제환공에게 용납되지 않았다.(강공내견시)*猜샘할(원망)할시
臨沒告飢渴 죽을 때에야 베고품을 호소했어도(임몰고기갈)
當復何及哉 다시 어찌할 수 있었게는가!(당부하급재)
이 마지막 시구는 『산해경』의 신화적 모티프로부터 연기(緣起)된 시심의 편력, 그 상승과 하강의 끝에 이르러 시인은 문득 신화적 세계로부터 현실 질서로 귀환한 것일까? 혹은 시인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유·도 양가 사상의 발현에 의해 도가적 방일로부터 유가적 엄숙주의로 전환한 것일까? 궁극적으로 이것은 「독산해경」의 결미로서 굴원(屈原)이 비분강개해 노래한 “문득 저 아래 고향을 내려다보면 … 돌아보다 발 붙어서 차마 가지 못하나니… ”라고 했던 심경으로 회귀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상 『산해경』속의 한국 문화, 한국 문화 속의 『산해경』을 맞추어보았다면 조선과 숙신, 부여, 개국, 맥국 등 『산해경』에서 보이는 고대 한국의 역사, 지리 관련 자료들과 이들을 성립시킨 종족의 활동 무대는 대체로 한반도 북부거나 중국 대륙 동북 3성과 하북성에 걸치는 영역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주변 문화적 요소를 풍부히 지닌 『산해경』은 중원 중심주의 혹은 식민사관에 의해 고대 한국의 영역을 가급적 한반도 또는 그 인근으로 귀속시키고자 했던 편향된 인식을 수정할 근거를 지닌 텍스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해경』성립은 고대 한국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다양하고 깊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