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39
8월4일[연중 제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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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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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Q0p2BwnX48
[예수회 손우배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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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찰 없는 성공이 곧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사무실에 직원이 없는 관계로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서, 비슷한 일을 하시는 분들의 고충과 애환을 120퍼센트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대체로 안 그러시지만, 일단 내려 까고 시작하시는 분들도 꽤 계십니다.
주방에서, 분리수거장에서, 들판에서 땀흘리며 일을 하고 있노라면, 일단 바라보는 특유의 시선도 느낍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는 척결하고 극복해야할 측면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감정 노동 종사자들, 서비스 업종 종사자들, 요식 업소 종사자들, 그 얼마나 소중한 일에 종사하고 계시는데, 보다 존중받아야 하고 배려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정말 우리에게 큰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 표현하고, 주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하던 직종에 상관없이 기쁨과 열정을 갖고 하면, 그 일이 바로 주님을 위한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내게 있어 썩어 없어질 양식은 무엇이며,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에 혈안이 된 사람들의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과 내면, 영혼과 본질을 우선시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그럴싸한 말과 결과에만 몰두합니다. 그 끝은 언제나 실망과 허탈함과 좌절감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견뎌내야 했던 오랜 독방생활 중에, 철저한 고독,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 열렬한 기도 끝에 그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식별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한치 눈앞의 것에만 몰두하지 정작 가장 중요한 본질에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영원이라는 상표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이든 가짜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양이 그럴듯 해보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실상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성,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찰 없는 성공이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겸손이 사라진 권위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심과 지성이 결여된 명예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정직과 나눔이 없는 부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참된 부와 그릇된 부, 진품과 명품, 영원한 보화와 짝퉁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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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TO3z7ENq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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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각자의 이것을 발견하기까지 굶주리고 목마르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예수님께서 ‘성체’라는 주제로 이끄시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내어주셔 교회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너지가 떨어져 지쳐감을 의미합니다. 언제 사람이 지칠까요? 불안할 때입니다. 안 좋은 감정은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차피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처지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면 사람이 지치지 않을까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죽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더 큰 공포를 피하기 위한 피신처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함’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더 많은 인정을 받았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주지 않고 더는 작가로서 좋은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전 KBS 아나운서인 이혜성 씨는 똑똑하고 예쁘면서도 ‘인정중독’에 빠져있었습니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녀는 공부를 잘해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인정을 받아도 배가 고파서 폭식증에 시달렸습니다. 먹으면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마음, 이것이 배고픔이고 목마름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인정받음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진주를 들고 시장에서 그것을 팔려고 다니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렇게 귀한 물건을 들고 다닐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이에게 그 진주를 준 부모만이 그 진주의 가치를 압니다. 우리 각자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라는 진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를 창조하신 분에게 봉헌한다는 말은 그분만이 그것을 5천 명을 먹이실 만큼의 가치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 테라피’, 곧 의미 치료를 한국에 소개한 책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의 공동 저자 박상미 교수는 24세 때 수돗물이 얼 정도로 단열이 안 되는 옥탑방에서 인생을 끝내려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왔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남자친구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몰래 사귀고 있었으며 가난은 그녀를 더는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이틀 동안 잠들어 있다가 깼을 때 그녀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자기 죽은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죽기를 원했던 그녀는 “살려주세요!”를 연발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다시 몸속으로 돌아왔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주어진 은총이라고 믿으니 그 삶을 주신 분이 왜 자신을 창조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처럼 심리적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의미를 찾아주는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였고 그것을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 살과 피는 내 빵과 물고기를 바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창조자로 믿고 그분이 나를 창조하신 뜻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저도 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아까워하며 불만에 싸여있을 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고 그제야 나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나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을 때 더는 신학교 생활이 지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이유는 나를 바쳐 목숨을 걸고 수행할 사명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찾지 못한 이유는 나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줄 존재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가 바로 아이가 부모를 만나듯이 우리가 당신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라고 알려주는 창조자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통해 우리가 할 일을 알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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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7월 9일에 휴가를 떠난 부주임 신부님이 이번 주 목요일에 돌아옵니다. 건강하게 잘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제가 보좌신부로 있을 때도 휴가를 갔습니다. 당시에는 월요일에 가서 금요일에 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주일을 껴서 휴가를 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여름 행사를 마치면 주로 바닷가로 가서 스쿠버 다이빙을 했습니다. 겨울 행사를 마치면 산으로 가서 스키를 타거나, 산행을 했습니다. 시간도 흐르고, 세상도 바뀌어서 요즘은 주일을 포함한 휴가를 가곤합니다. 휴가를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건강입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휴가를 즐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휴가는 몸이 떨릴 때보다는 마음이 떨릴 때 가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간입니다. 지나치게 바쁘면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휴가를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 이런 광고도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 휴가를 떠나라!’ 셋째는 여유입니다. 휴가를 가려면 비용이 필요합니다. 휴가 중에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람에게 휴가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넷째는 친구입니다. 혼자서 휴가를 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친구와 함께 휴가를 떠납니다. 저도 피정은 혼자서 간 적이 있지만, 휴가는 늘 친구와 함께 다녔습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서 몸과 마음을 여유롭게 재충전하는 휴가를 떠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휴가는 주차장이 아닙니다. 휴가는 주유소와 같습니다. 주유를 마치면 차는 다시 목적지로 떠나기 마련입니다. 휴가라는 주유를 마치면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은 주차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당에 와서 영적인 말씀을 듣습니다. 성당에 와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영적인 주유를 마치면 가정으로,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영적인 충만함을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간디의 눈에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살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먹을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삶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늙게 되고, 뜻하지 않지만 병이라는 친구가 불쑥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삶의 시계가 멈추고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운명입니다.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은 ‘인생’이라는 짧은 휴가를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인생이라는 휴가에서 영적인 주유를 잘 마치고 우리의 본향인 영원한 생명에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움이 많아도, 신앙이 깊어도, 오랜 수도생활을 했어도 우리는 이 짧은 휴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돌아가야 할 곳을 모르고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양식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새 인간을 입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한다.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인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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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24-35: 나를 믿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의 빵의 기적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감사와 찬미보다도 호기심과 어떤 이익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6-27절) 군중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에 마음을 두고 있다.(참조: 마태 12,28; 사도 10,38; 에페 1,13; 4,30; 2코린 1,22)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신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주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시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앞에 신뢰를 얻도록 하라고 하시며,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탁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그리스도, 하느님의 일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당신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루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믿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27절 참조)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0-31절)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빵을 위한 빵만을 찾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기적보다도 만나의 기적이 더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2-33절)
여기서 만나는 참된 빵이 아니며, 빵의 상징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한 현세적 양식이었고, 빵의 기적도 현세적인 배고픔을 면해준 것으로 이것 또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절)는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여기서 이 빵은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구체적인 인격체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빵보다는 물질적인 빵을 택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참된 빵과 동일시하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의 빵이며, 하느님의 선물 그 자체이시다. 신앙만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우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생명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새 인간”(에페 4,24)이다. 그리스도를 택한다는 것은 죄로 물든 “옛 인간”(에페 4,22)을 벗어버리는 것과 또한 성령에 힘입어 끊임없이 새롭게 변모될 수 있도록 죄를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2코린 5,17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를 “새 인간”이라 한다. 이는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3)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는 끊임없이 변모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오신 생명의 빵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며 그분을 닮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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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이집트의 고기 냄비는 ‘옛 인간’의 생활 방식입니다. 그런데 옛 인간의 삶은 충만하지 않습니다. 광야 길에 지친 이스라엘이 이미 잊은 듯하지만, 이집트는 설령 먹을 것이 있었다 하여도 종살이하던 집이었습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억눌려 부르짖었기에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시켜 주시는데, 이스라엘은 그 해방을 잊고 음식이 주는 쾌락을 찾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람을 속이는 욕망”(에페 4,22)이라는 표현이 특별히 눈에 들어옵니다. 욕망, 어떤 것을 좋다고 여겨 그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람을 속인다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이 참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수 건너편까지 애써 예수님을 따라간 이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빵을 청하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바로 생명의 빵이시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분을 떠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옛 인간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음식을 구하려고 수고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찾고 있는 것을 더 이상 찾지 말라고, 그 빵이 생명을 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옛 인간을 벗어 버리지 못합니다. 마치 이집트의 음식을 그리워하여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처럼,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있어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배까지 마련하여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옛 인간을 만족시키는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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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물도 밥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1) 여기서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라는 말씀은,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이 표징인 줄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기적의 빵’을 먹었으면서도 그것이 표징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생각만 하면서 나를 찾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나의 신원을 보증해 주셨다.”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고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은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기적만은 아니고,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계시하신) 표징이었는데, 사람들은 배불리 먹은 것만 생각하느라고, 그 일이 표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2)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앞의 4장의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연상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요한 4,11)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배가 고플 때 밥을 찾고, 목이 마를 때 물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생존하려면 물도 마셔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것 이상의 무엇’이 더 있습니다. 이야기 속의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여자였습니다. 그 상황이 실제 상황일 수도 있고, 여자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그 여자는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갈증과 허기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신 것은 단순히 ‘몸의 갈증’ 때문이었지만,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의 갈증과 허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하느님의 생명수’였습니다. <복음서에는 그 여자의 뒷이야기가 없는데, 아마도 분명히 그 여자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 덕분에 인생의 갈증과 허기에서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배불리 먹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허망하게 끝날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과 생명수’를 받아먹고 마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3) ‘기적의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과(요한 6,15)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다닌 일은, 비록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대부분 정말로 먹고살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즉 날마다 힘들게 겨우겨우 살아가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실제로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예수님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폄하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짜로 배고픔의 고통을 안 겪어본 사람들이,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또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잘 모르면서 함부로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사도로 인정하면서 사도단이 특별히 바오로 사도에게 당부한 것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갈라 2,9-10)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우선 당장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옳습니다.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 다음이고... 언제나 항상 ‘사랑’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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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동철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나의 바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향하고 있나요?>
오늘 복음 단락은 요한복음 6장 1절부터 시작되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표징을 보여주신 다음날, 표징을 보여주신 장소를 기준으로 호수 건너편에 위치한 카파르나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전날 예수님께서 주신 음식을 배불리 먹은 군중의 일부가 예수님을 찾아 호수를 건너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다시 찾아온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군중의 바람은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음식을 바라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예수님의 바람은 군중이 영원한 생명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군중은 예수님께 자신들이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군중은 전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라고 말했지만, 그 표징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만족하지 못한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예수님은 십자가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승리를, 인간의 죄마저도 용서하는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표징마저 믿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찾아다닙니다.
군중이 그러했듯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확신을 가지고자 하지만, 보고 나면 또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한 가지 바람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것을 바랍니다. 채울 수 없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을 우리 마음은 계속 요구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표징으로 십자가를 보여주셨고, 빵의 모습으로 묵묵히 먹히러 오십니다.
표징 (세메이온 σημεῖο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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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삶 속의 모든 사건들을 하느님의 섭리를 가리키는 표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표징은 삶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향한 길잡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오늘우리 삶은 예수님을 만나는 생명의 자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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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종엽 바르나바 신부님]
<영원한 생명의 양식>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오늘 복음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이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 곧 생명의 빵!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성사를 영하라는 말씀이겠지요.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군중은 이렇게 알아듣습니다.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라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요한 6,3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의 빵과 군중들이 요구하는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는 빵은 어쩌면 처음부터 겉돌 수밖에 없는, 어긋난 톱니바퀴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청하며 얻고자 하는 것은 단지 배고픔을 채워줄 일상의 빵이 아니라, 영적 배고픔을 채워주는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계명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성체여야 합니다. 물론, 육신 생명과 이 세상을 미워하거나 외면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너무나도 당연하게,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라면 하느님 말씀과 계명에 따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행동하는 살아있는 믿음, 궁극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전례를 이끄는 말은 “주님께서는 창조하신 풍요로운 자원을 사람들 손에 맡기시고, 당신 자녀들인 우리의 식탁에 음식이 모자라지 않게 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1독서 탈출기에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줄 터이니, 너희는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나는 이렇게 이 백성을 시험해 보겠다.”(탈출 16,4)
그렇습니다. 하느님 말씀과 생명의 양식으로 거듭 난 이들은 먼저는, 당신 자녀들의 식탁에 음식이 모자라지 않게 하심과 둘째는, 그날 먹을 만큼 날마다 청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고, 또 그렇게 살아냅니다. 욕심내지 않는다면, 남의 것을 탐내거나 뺏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여분의 것을 내어놓고 나누고 베푼다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이미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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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유진 바오로 신부님]
<영화로 나누는 생명의 빵>
주일 저녁에 날아간 제주도의 휴가는 김민기 씨의 사망 소식으로 자연스레 우리만의 바닷가 추모음악회가 펼쳐졌다. 친구 신부들은 김민기의 음악으로 떼창을 하며 술에 젖은 이야기가 익어갔다.
44년 전 신학교 입학을 위해 부모님과의 가족 송별식 날, “나 이제 가노라”라며 <아침이슬>을 목청껏 불렀었고, 우리는 10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 때 문화원의 헌정 영상 <어두움에 빛을>의 배경음악을 위해 노래 <금관의 예수> 사용을 기쁘게 허락해 주던 김민기와의 사연을 나누며 노래했다.
<친구>를 함께 부르며 천국으로 떠난 동창 신부들을 소환했고 <가을편지>, <꽃피우는 아이>, <아름다운 사람>, <작은 연못>, <상록수>, <바람과 나>, <잘가오> 등등 이어지는 노래들에 마른 눈동자들은 이내 촉촉해졌다. 불의했던 한 시대에 그의 음악은 그렇게 우리의 고마운 양식이 되어준 게다.
제1독서는 불평 가득한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비처럼 내려주시는 내용의 말씀이다. 그분은 묵묵히 성실하게 사랑의 역사를 펼쳐 가신다. 제2독서처럼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젖은 옛 인간을 벗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거룩함과 의로움 속에서 창조되는 새 인간이 되도록 거룩한 양식을 선사하는 것이다.
마침내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선포한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음’(요한 6,35 참조)을 선언하신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힘쓰는 것이 신앙임을 깨우쳐 주는 그런 말씀이 선포되는 주일이다.
‘생명의 빵’인 주님 안에 담긴 진리와 진실을 전하는 문화 사목으로 또 하나의 영화작업이 세상에 나오는 시점이다. 오는 8월 15일 다큐멘터리 영화<1923 간토대학살>이 전국 극장에서 개봉된다.
101년 전 간토(關東, 관동) 지역에서 행해졌던 조선인 대학살은 인류 역사에 유래를 볼 수 없는 반인류적인 범죄이자 제노사이드(genocide)인 학살사건이었는데, 일본 정부는 그런 과거를 끊임없이 부정해 왔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양심인들이 있어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와 스기오 의원 등 일부 일본 정치인, 시민단체 관계자, 역사학자, 학살 피해자 유족들을 중심으로 고군분투한 끝에 역사의 사실을 세상에 내어 놓는 영화가 완성된 것이다.
지난 5월 7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상영되었고, 5월 13일은 일본 국회에서 상영되어 파란을 일으킨 영화가, 휴가 중인 7월 25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제작진이 출연하며 이제 일반 극장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다. 김태영, 최규석 감독의 헌신의 산물인 <1923 간토대학살>은 가톨릭문화원이 영화의 ‘공동 제공’으로 완성을 함께 한 작품이다.
미사에서 나누는 ‘천상의 양식’은 삶의 현장에서 시대와 문화에 필요한 양식이 되어야 한다. 故김민기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잔잔하지만 도도하게 양식을 나누어주었고, 천상의 빵은 그렇게 누군가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 그누군가의 고단하고 지난한 땀방울에 고마움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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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신부님]
연중 18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건너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 준 양식”인 메추라기 떼와 만나를 먹은 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선포하시며, <제2 독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고, 옛 인간을 벗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로 많은 이들을 먹이신 후에 군중을 피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오자, 그곳까지 몰려 온 군중의 세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청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군중의 질문은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 25)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6-27)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에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브로시스)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 34)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군중의 질문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여기서, ‘일’(에르가)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이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그분의 뜻을 우리가 실천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곧 ‘믿음’이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요한 6,27)으로 믿지 않는 이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세 번째> 그들의 질문은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그러나 이 빵은 더는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빵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곧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동시에, 이 빵을 먹는 사람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마침내 군중은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사실, 물질의 빵과 생명의 빵인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질의 양식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살과 피로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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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져버리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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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 세상에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냥’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실수한 사람에게 “왜 그랬어?”라고 묻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냥”이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이 무책임한 단어에 화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무책임한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되겠지.’라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나’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연히 자기가 만든 ‘나’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남이 만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갖 불평불만을 다 쏟아내곤 합니다. 부모님 탓, 조상 탓, 형제자매 탓, 친구 탓, 회사 동료 탓, 환경 탓,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 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남이 나를 만들었을까요? 큰 착각입니다. 자기가 만든 ‘나’를 부정하는 것은 현재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라면서 책임감 없이 사는 우리입니다. 그 결과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지금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바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고유한 ‘나’를 만들면서 지금을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남 탓, 조상 탓, 환경 탓, 하느님 탓 등을 하고, ‘그냥, 어떻게 되겠지.’ 등의 무책임한 말로 꽁꽁 싸매고 사는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 혼자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언제나 함께하시기 위해 생명의 빵을 매 미사 때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은 빵을 배불러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빵이라는 사실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거저 주어지는 빵을 계속 먹고 싶어 했기에 하느님의 일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일을 해야 예수님의 빵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실 주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계속 베풀어주신 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닌 무상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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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생명의 빵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사랑에도 암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이다. 사랑에도 항암제가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정채봉).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에 이은 이야기입니다. 빵의 기적에 사람들은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그 기적이 지닌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또 다른 생명, 곧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는 분, 삶의 질을 높여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빵으로 오천 명을 먹여 살리는 육체적인 생명이 있듯이 썩어 없어지지 않을 빵을 먹여서 살리는 참다운 생명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드러난 은총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은총을 주시는 분께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 주님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 많은 치유를 경험했던 이들, 주님의 말씀과 손에 의해 치유를 받았던 이들은 오늘 여기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 지상을 떠나 하느님 안에 새 생명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을 가진 육이 아니라 육을 입은 영입니다. 영이 먼저입니다. 그럼에도 육을 중심으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이 빠지면 껍데기입니다. 우리는 알맹이, 하느님의 영을 지켜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지만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준 것도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신명 8,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밥보다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 한마디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날, 내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 주일미사참례를 한 다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개인 일이 급해 주일을 궐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행, 휴가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주일을 궐하면서 휴가를 하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무엇을 앞세우는가에 따라 믿음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체는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영생의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얼마나 잘 준비된 마음, 믿음으로 모셔야 하는지요? 요즘 많은 사람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습니다. 웰빙 식품을 먹으려 애씁니다. 영양보조식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영원한 생명의 빵인 성체 한번 모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썩어 없어질 빵과 생명의 빵은 서로 대비를 이룹니다. 다시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먼저 챙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에 앞서 성체를 모실 수 있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계심을 기뻐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체를 주신 이유를 알고 성체를 갈망하면 좋겠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 못 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더 바람이 없겠습니다.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에 속하는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로 오는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2,14) 영이 맑으면 영이신 주님과 통합니다. 성시간에 참여하는 어린이 복사들의 모습을 보면 여러분이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썩어 없어질 세상의 헛된 것에, 매이지 않고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달콤하게 유혹하고 끌어당긴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앞세워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파리들이 지하실 바닥에 쏟아진 꿀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먹다보니 발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서 도저히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죽어가면서 파리들이 말했습니다. “한 순간의 달콤함 때문에 이렇게 죽어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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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결단>
요한 6,24-35 (생명의 빵)
그때에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결단>
삶은
피할 수 없는
결단의 연속입니다
함께 배 부르려
자신을 내어놓는 것과
제 배를 채우려
굶주린 이를 외면하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쓰러진 이 일으키려
몸을 숙이는 것과
높은 곳에 오르려
약한 이를 짓밟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더불어 가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과
홀로 나아가려
뒤쳐진 이를 내치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정의를 외치며
힘겹지만 참 생명을 누리는 것과
불의에 무릎 꿇어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아낌없이 내어놓는
충만함에 배부른 것과
게걸스런 탐욕을 채우려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모든 이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삶의 결단은
그리스도인에게
피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결단을
다그칩니다
섬김과 나눔의 거룩한 예물로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오직 주님만을 주님으로 받드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한낱 당장의 사리사욕을 채워주는
종으로 삼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결단!
생명의 양식인 주님처럼
다른 이에게 먹힘으로써
죽음의 기운 가득한 세상에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과
모든 이에게 먹히시는
생명의 양식인 주님을
홀로 소유하여
죽음의 양식으로 삼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결단!
중간은 없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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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탈출(Exodus)의 여정>
-참 아름다운 삶-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저에게는 하루하루가 넘어야 할 ‘산’입니다. 지어야 할 새로운 ‘집’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아마 앞으로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바로 매일 강론쓰기가 그러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최소한 대칭구조를 이루는 두 사람입니다. 더불어 하는 이, 역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더불어, 끊임없이 탈출의 여정에 올라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이들이 아름답습니다.
몇가지 아름다운 사례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8월4일 주일이라 기념하지 않지만 원래는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1786.5.8.-1859.8.4.) 기념일입니다. 전세계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으로 그의 전설적인 말년을 소개합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는 감동입니다.
“1855년경, 아르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숫자는 한 해 동안만 해도 2만 명에 달했다. 이를 하루 단위로 나누어 계산하면 매일 평균 60명이 방문한 것이다. 비안네 신부는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에게 하루 최소한 16-18시간까지 고해성사를 줬고 교리를 가르쳤고 기도했다. 비안네는 하루 평균 두세 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1859년 8월4일 새벽 2시, 요한 마리 비안네는 아르스에서 41년5개월 동안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향년 73세에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한 날 아르스의 모든 사람이 슬피 울었다.”
비안네 사제의 감동적인 하느님 사랑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느니 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바란다. 순간순간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제혀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 마다 제 마음이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기를 바라나이다.”
비안네 사제의 삶의 원동력은 바로 하느님 사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심신이 아파 아침미사에 거의 못나오던 수도형제가 칸톨 부재로 어려움을 겪자 초인적 믿음으로 연이어 칸톨을 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고맙고 자랑스러워 부재중인 원장과 기쁨을 나눈 대화를 소개합니다.
-“피델리스 수사의 책임감과 활약이 놀랍고 감사하네요! 아침미사부터 끝기도까지 칸톨 훌륭히 소화해 내고 있고, 저녁기도 후렴도 성공적으로 불렀고 방금 성가지도 역시 잘 끝냈습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힘들어도 칸톨하기 위해 참는다고 합니다. 자랑스럽고 고마워 기쁜소식 알립니다.”
“놀랍습니다. 신앙에서 나오는 저력같습니다.”-
요즘 프록스꽃이 한창입니다. “청춘의 기쁨, 열정”이란 꽃말도 멋집니다. 이 꽃을 받은 분이 보낸내 메시지입니다.
“아멘! 꽃말이 주는 설레임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감사합니다.”
하느님 주시는 청춘의 기쁨, 열정으로 사는 사람이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그러했고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러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신선한 기쁨을 선사합니다. 이렇게 사는 분들이 진정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우면 원망없는 세상이 된다.”<다산>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춘풍;春風)처럼 부드럽고 하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가을서리(추상;秋霜)처럼 엄격하게 하라.”<채근담>
엊저녁과 아침성무일도 후렴의 뒷맛이 지금까지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오늘 하루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로 노래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이런 기도내용을 믿고 실천하는 이들이 영적으로 참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우리 삶의 여정은 ‘더불어, 탈출의 여정’입니다. 평생 이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의 전형적 모범이 제1독서 주인공 모세요, 제2독서 주인공 바오로요,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이고 그 뒤를 따를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이들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 탈출기에서 모세의 인도하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이들과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니 하느님 들으라 하는 불평들입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그대로 욕망에 노예된 우리의 보편적 모습니다. 영육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영적 삶을 살기는 이처럼 힘듭니다. 자비로운 주님은 이들에게 저녁 어스름에는 메추라기 고기를 내려 주고, 아침에는 만나 양식을 배불리 먹여주시니 우리가 부끄러워집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모세가 주고 받는 말이 마치 우리가 이스라엘 자손이라도 된 듯 부끄러워 더욱 분발하게 합니다.
“이게 무엇이냐?”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저절로 이들과는 반대로 살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되니, 이들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불평불만 대신 찬미감사로 응답하며,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중에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으로 주님과 함께 힘차게 희망차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불어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모세가 그러했고 예수님이 그렇게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둘째, ‘생명의 빵’ 예수님을 찾고 믿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시고자 이 거룩한 생명의 잔치이자 주님의 희생 제사인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일은 이런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온힘과 온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하느님의 일은 없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I AM the bread of life).”
모세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이름이 ‘나다(I AM)’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고백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I AM the Light of the World)
“나는 문이다”(I AM the Gate)
“나는 착한목자이다”(I AM the Good Shepherd)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는 길이다”(I AM the Way)
“나는 포도나무다”(I AM the Vine)
하느님은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고스란히 닮은 예수님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분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우리를 언제나 구원에로 초대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과 하나되어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첩경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을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 주님을 찾는 성소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이런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찾지 않고 엉뚱한 세상적인 것에서 찾기에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른 영혼들입니다. 세상에 주님 아닌 그 누구가, 그 무엇이 이런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셋째, 새인간을 추구하는 삶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평생목표요 과제가 새인간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사랑하여 날로 닮아갈 때 새인간으로 변모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이요 새인간의 정체를 밝혀주며 우리를 고무 격려합니다. 주님을 그대로 닮은 새인간의 모범인 바오로의 육성을 듣는 듯, 단숨에 읽혀지는 대목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마십시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가르침을 받은대로 살아가십시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인간을 입으십시오.”
죽는 날까지 계속될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평생과제입니다. 이 기쁨, 이 맛, 이 재미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을 통한, 기도를 통한, 교회를 통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무상 은총이 우리를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여 날로 주님을 닮은 새 인간으로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의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시고 날로 당신을 닮은 새인간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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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일용할 양식>
정해진 양식, 필요한 양식, 이 둘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할까?
풀어서 얘기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먹어야 할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다 청해서 먹어야 할까?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만나를 줄 터이니 일용할 양식만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만나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입니다. 거두는 수고를 인간이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수고를 한다 한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그 수고가 헛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베드로가 고기잡이할 때의 그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 최고의 어부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과 만나는 그날처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그때까지 자기가 고기를 잘 잡아서 고기를 많이 잡고, 자기가 애를 많이 썼기에 많이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힘이 있지요. 능력과 노력이 그것인데 신앙이 없는 인간은 보통 자기에게 능력이 있고 거기에 노력까지 다하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베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만은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는데 예수께서 하라는 대로 하니 많이 잡게 되었고, 이때 그는 예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주님임을 깨닫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기를 써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됩니다.
만나에 담긴 또 다른 뜻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만큼만, 달리 말하면 정해주신 대로 거두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필요한 만큼 청하는 것을 불허하시는 것일까요? 프란치스코는 가난에 관해 얘기하면서 필요가 곧 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필요해서 청하는 것과 욕심으로 청하는 것은 다르다고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신다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청합니까?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조금 필요한데도 많이 필요하다고 필요에 거품이 없습니까?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다시 말해 하루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천년을 써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욕심부림으로써 결국 필요가 아니라 욕심으로 청하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내게 더 필요하다 하진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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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6,35)
<영적인 음식!>
오늘 복음(요한6,24-35)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의 시작'입니다.
뜨거운 8월 한 달 동안 우리는 주일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 24절-69절의 말씀인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지금처럼 무더운 날씨에 잊지 말아야 일은 수분을 잘 섭취하는 것입니다. 특히 육체적 일을 하시는 분들은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육체의 건강이 크게 위협을 받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죽음 저 너머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인 음식'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음식을 먹기 위해서, 영적인 힘과 육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 자주 미사에 참례하고,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전례헌장 10항'은 전례(典禮.Liturgia)를 '교회 활동의 정점(頂點.꼭대기)이자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전례 중의 전례'가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체성사(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결국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매일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체와 성혈을 바라보고,
믿음의 귀로 말씀을 귀담아 들읍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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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생명의 빵이다." (요한 6, 35)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생명의 빵을
만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생명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생명의 빵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생명의 빵은
사랑으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생명의 빵은
내려옴으로
용서를 이끌어
내십니다.
생명의 빵은
우리를 한 없이
기다려 주십니다.
생명의 빵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생명을 온전히
바치십니다.
생명의 빵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만납니다.
생명의 빵이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생명이
오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빵으로 오십니다.
썩어 없어질
욕심을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을
기쁘게 받아 먹습니다.
생명의 빵이
우리의 배고픔과
우리의 목마름을
영원한 기쁨으로
채워주고 계심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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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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