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시인은 늘 진리의 빛 곧 말씀과 성령으로 살기를 소원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시 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다윗은 비록 원수들의 추격과 억압으로 인하여 도망 다니지만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맡겼음을 압니다.
사무엘상 26장에서도 자기를 죽이려고 쫓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에 맡긴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복음을 들고 네팔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게 하시고 그 복음을 듣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임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의 의와 나의 뜻이 아닌 오직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날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119:17-32
제목 :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19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20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1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24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26 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사오니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27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28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29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30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31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시편 119편의 제3연과 4연이다.
3연은 김멜이라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 ‘께몰’(후대하다)로 시작하며 4연은 달렛이라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 ‘따베카’(붙었사오니)로 시작한다.
각각의 구절들이 다 연결되는 하나의 이야기체는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신앙인이 겪는 희로애락이 다 담겨져 있다.
하여 각 연마다 축복 저주 찬양 감사 고백 탄원 간구 신뢰 지혜가 뒤섞여 있다.
물론 이것들이 일관성을 가지고 기록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중요한 핵심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1연과 2연은 인간의 참된 복과 행실의 기준이 하나님 말씀에 있음을 강조하며 그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순종의 열정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오늘 본문인 3연은 하나님의 말씀인 규례를 사모하는 자로서 주님의 깨우쳐 주심과 계명을 지키는 자로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하며 4연은 비록 영혼이 눌려서 녹는 중에도 주의 말씀에 약속된 소성케 하시는 그 은혜를 간구한다.
시인은 자신의 눈 곧 영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그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살고 있으므로 주의 계명인 말씀을 숨기시면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주의 말씀을 사모하되 마음이 상할 정도로 사모한다.
(18-20)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이 땅이 영원한 것인 양 주인으로 살아가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벨이나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미하게 보면서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의 말씀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믿으며 이 세상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던 자들이다.
그들의 본향은 이 땅과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몸소 행동으로 살아낸 자들이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나를 비롯한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 아담의 생명 곧 만들어진 생명으로 태어났다.
아담의 생명은 그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과 분리된 자 곧 죽은 자들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고전 15:22a)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이렇게 하나님 없이 살던 자들이 전도를 통해서든지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든지 교회에 나가게 되거나 하나님 말씀을 들으므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의 기도는 대부분 그들의 소원이나 어려운 상황을 바꿔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이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이전에 만났던 하나님과 전혀 다르고 생소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는 너무나 따뜻하고 자상하며 기도도 잘 들어주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180도 바뀐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것이다.
나의 소원과 간구를 잘 들어주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자신을 고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저 내가 원하는 소원이 잘 이루어지거나 기도의 응답을 잘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앙의 전부요 믿음이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면 아마 그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신앙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셨다.
(히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신앙에는 왕도가 없다.
누구라도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완전한 곳이 아니라 더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 응답을 잘 받는 이들의 경우 자신의 신앙이 좋아서 응답을 잘 받는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이는 착각 중에서도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의 초보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기도 응답을 잘 이루어주시며 이를 통하여 그들이 더 나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종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 곧 만물 위에서 오셨으며 다시 만물 위로 올라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땅에 있는 세상의 모든 종교는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여 땅의 것들을 말할 뿐이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들은 아무리 위로 올라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애를 써도 그 위에 올라가 본들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다.
종교의 끝은 허무와 상실일 뿐이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나무줄기를 타고 그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으면서까지 올라가고 또 올라간다.
그런데 그 나무 끝에서 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끝은 결국 낭떠러지이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떨어지는 충격만 클 뿐이다.
그런데 이 애벌레가 고치가 되어 나비가 되었을 때는 차원이 다르다.
나비는 나무 끝만 아니라 그 이상을 날아서 올라갈 수가 있다.
애벌레가 보는 그 나무 끝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는 것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이 곧 거듭남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과정은 고치이다.
이 고치라는 무덤의 기간이 있을 때 비로소 나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치 없는 나비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처음 신앙생활을 하여 하나님을 맛본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전혀 생소한 모습은 다름 아닌 이 고치의 자리에로 인도하심이다.
그 고치의 자리가 바로 고난의 자리요 무덤의 자리이다.
이 고난이라는 무덤을 통해서 비로소 나비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의 초보자들은 거의 말씀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심성은 어떤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들의 소원을 아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사인으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 곧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가 전부였던 신앙인들에게 말씀을 보게 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전하기 원하시는 참된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이 복음인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인 거듭남 곧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 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나는 오늘도 이 말씀을 사모한다.
내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되 내 마음이 상하기까지 사모한다.
이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비록 희미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었던 믿음의 조상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런 것처럼 나 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부끄럽지 않은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영혼이 오늘도 주님의 은총 속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를 사모하되 나의 심령이 상하기까지 사모하오니 나의 마음을 만져 주옵소서.
나의 영안을 열어주시고 주의 법의 기이한 것 곧 영원한 그 나라를 보게 하옵소서.
주님 외에 어떤 것도 내 마음을 가득 채우지 않게 하시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네팔이 빙하호의 붕괴와 홍수로 인하여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 그들에게 완전한 소망과 위로가 되시는 예수를 전하기 위하여 복음생명선교회와 대구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가 어제 네팔로 떠났습니다.
이들이 들고 가는 복음과 함께 사랑의 쌀을 나눔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저들에게 참된 평안과 위로가 임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그들이 성령 안에서 주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주의 자녀들이 진정 하나님의 부끄러운 자들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우리를 주의 선하신 길로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