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위기 佛, 샹젤리제 성탄절 조명 점등 시간 2시간 줄여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가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빛나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매년 이맘때면 형형색색의 울긋불긋한 조명이 등장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유럽에 에너지 대란이 발생하면서 올해는 단조로운 하얀 조명이 주를 이뤘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관광객들이 많아졌는데 크리스마스 조명이 줄어서 안타까워요. 내년엔 좀 나아졌으면 좋겠네요.”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난 법대생 도냐 레아 씨는 예년보다 초라해진 크리스마스 조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날 샹젤리제 거리 가로수들은 예년처럼 불긋불긋한 조명으로 덮여 있지 않고, 단조로운 하얀 빛을 띠고 있었다. 전구는 에너지 효율이 좋은 발광다이오드(LED)로 교체됐다. 지난해에는 대로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까지 공중에 화려한 조명 장식이 걸렸지만 이날은 장식 없이 텅 빈 골목이 많았다. 에너지 위기가 심각해지자 당국이 크리스마스 조명 사용을 줄인 것이다. 조명이 꺼지는 시간도 크리스마스와 올해 마지막 날을 제외하곤 오전 2시에서 오후 11시 45분으로 앞당겨졌다. 당국은 점등 기간 에너지 소비를 평년 수준의 44% 이하로 줄이겠다는 목표다.》
이 같은 에너지 절약 방침에 따라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 체코, 헝가리 등 유럽 국가들의 크리스마스 풍경이 다소 어둡고 간소해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아 화려한 조명 장식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우려던 명품 브랜드와 대형 백화점들은 당국의 에너지 절약 방침을 고려해 에너지 사용을 줄인 ‘친환경 크리스마스트리’ 등 묘안을 짜내고 있다.
조명 줄인 ‘친환경 트리’ 등장
유럽의 기업들은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아 실적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조치가 완화되며 세계 곳곳에서 파리를 찾는 관광객이 늘었기 때문이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로 소비 심리가 얼어붙은 유럽에서 11월 말 블랙 프라이데이와 크리스마스 세일 기간은 소비를 늘릴 절호의 기회다.
샹젤리제 거리에 들어선 명품 숍과 백화점들은 소비자들의 발길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앙디오르 등 일부 명품 브랜드는 여전히 기존과 비슷하게 현란한 장식을 뽐내며 소비자들을 맞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조명 장식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동쪽으로 이동해 갈르리 라파예트 오스만 백화점을 가보니 내부 중앙에 등장한 트리가 수수했다. 빨강, 황금 등 화려한 색상으로 빼곡하던 지난해 트리와 달리 조명이 확 줄고 색상도 초록, 노랑 정도로 단순화됐다.
트리의 재질도 종이 등 친환경 재활용 재료를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 백화점 측이 에너지 절약 분위기를 고려해 ‘친환경 트리’를 제작한 것이다. 곳곳에 ‘지구’ ‘환경’이란 문구와 함께 초록 장식을 배치했다.
니콜라 우제 갈르리 라파예트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트리를 만드는 데 1900m에 이르는 LED 조명을 썼고 10일간 조립했다. 제작에 동원된 직원만 90명가량”이라며 “(크리스마스란) 마법 같은 시기에 파리를 빛나게 하면서도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올바른 균형을 찾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인근 프랭탕 백화점의 장마르크 벨레슈 회장도 로이터통신에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좋은 시민이 돼야 한단 생각에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있다”며 크리스마스 인테리어에 변화를 줄 것임을 예고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11월 중하순부터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도 축소되고 있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수도’로 불리는 북동부 스트라스부르는 크리스마스 조명을 20%가량 줄이기로 했다. 프랑스 전역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지난달 25일 시작돼 이달 24일 마감된다. 운영 기간이 예전보다 1주일가량 줄었다.
獨-헝가리도 간소한 성탄절로
간소한 크리스마스는 프랑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AFP통신에 따르면 독일 베를린에 있는 올라프 숄츠 총리 사무실 밖에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는 올해 단 4시간만 불을 밝힌다. 총리실이 솔선수범을 보이면서 독일 다른 지역에서도 트리 조명을 LED로 바꾸고 점등 시간을 줄이고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광장에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아야 불이 들어오는 트리가 생겼다. 자전거 페달을 돌려 발전된 전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트리 주변 조명은 배터리와 태양광 발전으로 얻은 전기로 밝힌다.
유럽 각국이 이렇게 에너지를 절약하려 안간힘을 쓰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난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정부가 지급하는 지원금으로 에너지 비용 급등을 체감하지 못할 수 있지만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이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파리 외곽 일드프랑스 지역의 에손에 거주하는 다 실바 프레데리크 씨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기자와 만나 “자영업자들이 전기료를 내지 못해 가게 문을 닫고 있다”며 “기업들의 어려움도 상당하다”고 했다.
“에너지 위기, 끝나려면 멀어”
유럽의 에너지난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에 맞서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 공급을 줄이면서 심화됐다. 가스와 석유 가격이 급등하며 심각한 고물가를 더 자극했고, 공급난까지 일으켜 기업 생산을 위축시키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또한 최근 “가스 가격이 진정되고 날씨가 따뜻해지며 일부에서 에너지 위기가 끝난다고 낙관하고 있는데 사실 유럽의 에너지 위기는 끝나려면 한참 멀었다”고 진단했다.
에너지 위기는 유럽의 경기 침체를 가속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11일 ‘2022년 가을 경제전망’에서 “불확실성 증가,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압박, 가계 구매력 저하, 취약한 외부 환경, 긴축 재정 여건으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및 대부분의 회원국이 4분기에 경기 침체에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힌 바 있다. 내년에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EU 집행위는 올 4분기와 내년 1분기(1∼3월)까지 2개 분기 연속 경제 활동 위축에 따른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며 ‘기술적 경기 침체’라고 규정했다.
유럽에서 에너지 위기가 고조되자 EU의 양대 축인 독일과 프랑스는 에너지를 나눠 쓰기로 합의했다. 프랑스는 독일에 가스를 보내고, 독일은 전기를 프랑스에 보내는 방식이다.
각국은 가스관과 가스시설 보호에 군 병력을 투입하는 등 국가 안보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 ‘노르트스트림-1’과 ‘노르트스트림-2’의 발트해 해저 구간에서 누출 사고가 발생하며 에너지 시설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공포가 커졌기 때문이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탈리아 해군 기뢰탐색함 ITS 누마나는 최근 북아프리카 천연가스를 운송하는 수중 가스관 위를 항해하며 수중 음파탐지기로 주변을 탐색하고 의심스러운 물체가 감지되면 수중 로봇으로 확인한다. 유럽 최대 천연가스 공급국인 노르웨이의 요나스 가르 스퇴레 총리는 9월 석유 및 가스 시설에 군을 배치할 것이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의 해상 시설에 대한 모든 공격은 동맹과 같이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유럽의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우크라이나 전쟁 전 45%에서 현재 15%로 줄었지만 한파가 심해지거나 에너지 시설이 공격을 받을 경우 유럽이 심각한 에너지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