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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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엔 몇 개의 소도구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에 대한 뜻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같이
하나님이 자녀들이 보라고 써놓은 성경은
그 무엇 하나 허투루 볼 것이 없이
아주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어나 지리적 특수성, 지명의 뜻 등!
히브리어로 된 '베데스다'는
'베이트(집)'+헤세드(은혜)'의 합성어입니다.
즉,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베이트(집)'라는 단어가 들어간 지명이 여럿 있는데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베들레헴'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레헴'이 '떡'이니까 '떡집'이 되는데
예수님이 '산 떡'으로 오셨으니
그 지명도 의미하는 바가 참 큽니다.
그것도 말의 먹이인 말구유에...^_^;
이처럼 베데스다도 그 이름이 가진 뜻이
참 의미심장한데 연못에 이런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거기다 '양문'곁이랍니다.
'양문'이란 양이 드나드는 문을 말하는데
성경에서 '양'은 곧 '예수님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어린양'으로 불리우는 예수님은
이미 구약시대의 제사에 주된 제물로 사용된
양이 상징하는 것처럼
죄가 없는 순결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죄'라는 것은 한번 결과되어지면
그 원인을 없애기 전까지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반드시 져야만
사라지게 되는 원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피할 방편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죄없는 짐승에게 인간의 죄를 전가하여
그 짐승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깊고도 놀라운 사랑입니다.
어찌 짐승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리 살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짐승도 계속 죽어야만 하지요.
그러나 이제 그 번거로운 행위를
단번에 끝낼 수 있는 분이 오셨습니다.
영혼이 없는 짐승이 아닌
죄가 없는 실체가 오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의 죄의 빚을 단번에 청산하신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정리해 놓으시고...
그 다음에 '병자' 셋이 등장하는데
듣기만 해도 심각한 중병에 걸린 사람들임을
바로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맹인,
하나는 다리 저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중풍병자입니다.
행각 다섯에 모인 사람들이 많기에
이 셋은 단순히 숫자만 가지고 얘기하기 보다는
이 세 부류의 병자들이 주된 병자라고 봐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힘으로는 거동이 불가능하거나
목적지를 찾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연못 이름도 하필 '은혜의 집'이고,
위치도 '양문' 옆입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듯이
'은혜'란 '선물'이라는 뜻이고
선물은 받는 자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며
주는 쪽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즉, 이 연못이 가진 이름의 뜻을 분석해보면
병이 낫게끔 돼 있는 원리가
'선물'의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본문의 얘기가
뭔가 앞뒤가 맞질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은혜요 선물'이라고 앞에서 운을 띄워놓고
흘러가는 내용은 천사가 동하게 하는
연못에
선착순 일등하는 병자만 낫게 해준다며
얼마나 빨리 그 연못에 도착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얘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소경, 절름발이, 중풍병자는 모두
자신의 능력으로는 연못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인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낫게 된다고
전제가 돼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 연못이 아무리 효험이 있으면 뭐합니까!
거기까지 갈 수가 없는데...!
이건 마치 미국 의사에게 가면 병이 낫는데
미국까지 갈 차비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용한 의사가 있으면 뭐합니까!
의사에게 갈 수가 없는데...!
또, 연못으로 들어가야 나을 수 있다면
그건 건강한 사람이나 가능한 일 아닌가요?
몸이 멀쩡하지 않고서는 제 발로 걸어서
연못까지 갈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럼 건강한데 연못엔 왜 들어갑니까?
이 아이러니한 얘기를
굳이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은 애초에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원을 얻을 방법과 힘이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꺼내놓고
정작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한번 추적해봅시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5:5)
'38'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난 후
광야생활을 계산하면 38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입국을 앞두고 쓸데없이 정탐꾼을 보내는데
거의 전부가 못들어가겠다고 하고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광야생활 중에 태어난
사람들만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원주민을 보니까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같질 않더란 말이죠.
그래서 포기하게 된 것인데...
원래 '가나안'이라는 곳은 약속으로 주어진
은혜의 땅입니다.
내가 힘들여 수고해서 획득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해서 얻은 땅이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은혜의 상징으로
이 '38'이라는 숫자를 가져다가 사용한 것입니다.
또 38년간 병을 앓았으면
이 사람이 청년시절 병을 얻었다 해도
거의 60에 가까운 나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청년 시절에 병을 얻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는가 하면
병을 고쳐준 예수님이 성전에서 다시 그 사람을 만나
이렇게 얘기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5:14)
죄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 것이 그 힌트입니다.
일찌기 청소년 시절에 죄로 인해
병을 얻었다 해도 나이는 여전히 많습니다.
다시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럼 대답이 보통 어떻게 나와야 맞습니까?
"네~,낫고싶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죠.
그런데 이 중풍병자의 대답이 특이합니다.
아니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죠.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 싶은건 당연한데 그딴 건 왜 묻습니까?
문제는 병이 나으려면 지금 저 연못까지 달려가
1등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돼서 이러고 있구만.
누가 날 저 연못에 넣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하소연만 늘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주어진 전제가, 연못에 1등으로 들어가야만
병이 낫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엉뚱한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병을 주시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시는
실체가 앞에 와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불가능한 상황속에서
푸념만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38년 된 중풍병자의 병을 단번에 고쳐주십니다.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은 그 어떤 조건도 없이
공짜로 선물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이렇게 일어납니다.
생각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았는데
결과가 나에게 쥐어져 있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어 그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사람이
성전으로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여전히 구걸하다가 "우리를 보라"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에 쳐다보다가,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3:6~8)
하나님은 이렇게 하십니다.
돈을 좀 얻을까 하였던 앉은뱅이에게
그가 상상치 못한 최고의 선물을 주십니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길
즐겨하시는 분이시라 그렇습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아는,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11:9~10)
이 내용의 결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달랑 이것만 외우며 최면을 걸뿐...!
이 다음의 본문은 이렇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11~13)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분은 자녀인 신자에게 최고로 좋은 것만 주신다!
그러니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을 구해라!
이 얘길 하려고
앞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내용을 쓴 것인데
인간들은 결론은 내팽개치고
자신의 필요만을 위해 혈안이 돼있습니다.
자녀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부모가 원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혹시 엉뚱한 것을 구한다 해도
하나님은 결국 성령을 주고싶으신 겁니다.
지옥에 가면 마음이 아프니까요.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구절은 참으로 소름이 끼칩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갭이 얼마나 큰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고급한 도덕적,윤리적 기준을 정해놓고
스스로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가 실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자!'
이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입니다.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자는 것이지요.
천국은 그 개념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하는데
인간은 어떤 '상태'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환경을 만들려고 애씁니다.
죄인들끼리 모여서 무슨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천국은 오직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 뜻을 수준에 따라 조금씩 실천하며
자녀답게 성장해 가는 자에게만
보여지고 누려지는 곳입니다.
교회의 뜻이 왜 '에클레시아'입니까!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녀를 통해
확장되어지는 무형의 세계이며 실체입니다.
이 세상은 실체의 전부가 아니고
여긴 잠깐 훈련을 위해 거쳐가는 곳이며
영원한 하나님나라인 천국을 위해
믿음으로 소망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라나야 할 훈련장입니다.
비신자들이 종종 신자보다 나은
도덕관념과 실력을 자랑하지만
신자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베데스다 연못까지
도저히 갈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룰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무지함때문입니다.
지혜의 근본이 왜 하나님이냐구요?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손에 붙잡혀
하나님 주도의 삶을 사는 것에 행복을 누리십시오.
나의 생각과 의지가 변화되는 것에
만족을 누리십시오.
이만큼 큰 것에 감사하십시오.
첫댓글 넘 좋은 말씀 감사해요.이분 목사님의 글을 매일매일 올려주세요.여기는 중국인데요. 이렇게 좋은 말씀 듣기가 힘들어요.꼭 많이많이 올려주세요.감사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