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步 시집
날아가는 은빛 연못
自序
어떤 영화에 등장한 한 엑스트라가 소녀에게 들려준 동화 얘기다.
옛날에 이 근처에 큰 연못이 있었단다. 철새들이 겨울이면 떼를 지어 날아와 놀다 갔지. 그런데 어느 한겨울 밤 너무도 추운 적이 있었구나. 그래서 잠자던 철새들의 발이 그만 연못에 다 얼어붙고 말았단다. 그 가엾은 새들이 어떻게 되었겠니? 다 얼어죽고 말았을 거라고? 그런데 말이야 그렇질 않았어. 다음날 아침 사람들은 놀랍게도 하늘로 날아가는 연못을 보았지. 새들이 발에 매달고 날아가는 은빛 푸른 연못을……
이 짧은 동화는 나에게 눈물을 글성이게 한다. 연못을 달고 창공을 날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스러운 일이겠는가.
1994년 봄 林步
우이동 시쟁이들 / 임보
우이동 시쟁이들 참 멍청해 그 좋은 부귀공명 꿈도 못 꾸고 저승도 시 없으면 못 갈 사람들
마당 한 귀퉁이에 연잎을 띄워 놓고 인수봉 손짓하며 소줏잔 권하는 황소보다 천진한 채희문 시인
산과 바다와 섬들을 품어다가 방 속에 가둬 놓고 혼자서 웃는 유유자적 만년 소년 이생진(李生珍) 시인
세이천(洗耳泉) 오른 길에 더덕밭 일궈 놓고 난초 아내 매화 아들 떼로 거느리고 화주(花酒)에 눈이 감긴 홍해리(洪海里) 시인
우이동 시쟁이들 참 기똥차 보리밥 풋나물에 그리 살아도 강산풍월 쌓아 놓고 크게들 놀아.
오체투지(五體投地)* / 임보 승려들은 마른 손뼉을 치면서 선답(禪答)을 재촉하고
중생들은 종일 전신을 던져 예불을 드린다
사원의 마루는 무릎에 닳아 골골이 패었는데
오늘도 불상은 입을 열 기미가 없다 *오체투지 라마교에서 전신을 땅에 던져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는 의식
조장(鳥葬) / 임보 티벳의 어느 사원에서는 깃발에 경(經)을 적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는데, 경을 읽은 바람들이 하늘을 푸르게 푸르게 채우고 있었는데, 천의 독수리들도 떠난이의 살점을 뜯어 그렇게 하늘로 날아 바람과 함께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미나리꽝에 연꽃 둬 송이 / 임보
어떤 사람은 만경창파(萬頃蒼波) 호숫가에 어떤 사람은 심산유곡(深山幽谷) 기암(奇巖) 밑에 또 어떤 사람은 정든 고향 땅 언덕 위에
별장을 짓고 초당(草堂)을 세우고 자연과 더불어 멋스럽게 산다고 하네
나도 꿈은 있네 이 풍진(風塵) 떨치고 돌아가고 싶은 곳 높지 않은 산 넓지 않은 들 골짝도 아니고 강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 비강비곡(非江非谷)
사람들이 보아도 탐내지 않는 곳 미나리꽝에 연꽃 둬 송이 오동나무 가지 위에 까치 둬 마리.
어떻게들 알았을까 / 임보
우리들이 새벽 서울을 탈출하는 것을 어떻게들 알았을까?
아침 7시쯤 조치원 들판을 지날 때 일찍 깬 미루나무들이 도열해 서서 번쩍 번쩍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가 황간쯤 달렸을 때는 날짐승들도 이미 그 소식을 알고 연변의 숲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축포처럼 하늘을 가르고 솟아 올랐다
그리고 정오쯤 드디어 충무의 고갯마루에 오르자 아, 바다가 치마를 풀고 달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들 우이동 시인 몇이 며칠 무인도로 탈출한다는 것을 어떻게들 미리 알았을까?
더운 바다 / 임보
부지섬 보리밭에서 바라다보면 바다는 다 벗은 채 누워만 있고 조금살 주는 물에 미친 갈매기 청과부 모래펄 타는 몸살에 둬 개의 더운 섬이 젖무덤처럼 바닷살 사이로 솟아오르네.
주문진 새벽 바다 / 임보
동해 바닷가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셔 보았는가? 주문진 갯가 횟집 다락에서 밤을 세워 바다를 마셔 보았는가? 그대들의 체중으로 바다는 절반쯤 기울고 그대들의 내장에서도 새벽 파도가 일어나는 그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그걸 아직 모르면 시 쓰는 주태백이 그대 친구 몇 놈 데불고 해당화 필 무렵 한번 해 보게 한 보름쯤은 그대 몸에서 파도 소리가 철석일 거야 바다 바람이 일렁일 거야.
양구시편(楊口詩篇) 1 / 임보
큰 놈이 머리를 깎고 양구 훈련소로 떠나던 날 제 누이는 눈이 벌겋게 붓고 제 에미는 몸져 눕고 말았다 전쟁 때도 아닌데 뭐 그러느냐고 말로는 그렇게 달래면서도 애비도 상추밭에 들어가 애문 상추 뜯으며 하늘만 연상 보고 있었다
60년 전에는 할애비가 짊어지고 압록강을 넘나들던 서러운 땅 30년 전에는 이 애비가 논산에서부터 38선까지 지금껏 지고 온 동강난 땅 오늘은 아들놈 여린 어깨에 넘겨 메주고 돌아서는 이 무겁고 한서린 땅
수천만 에이커의 대륙을 가진 서양 젊은이들을 방학이면 국경도 없이 스위스로 아테네로 알프스로 캠핑을 떠나는데 겨우 몇 평 땅 짊어진 조선의 아들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뜨거운 불볕 밑에서 총칼에 날을 세우고 핏줄끼리 으르렁대고 있는가?
무엇이 이 땅에 담을 쌓고 무엇이 이 땅에 불을 붙이는가? 누가 어린 아들을 말에 태워 전쟁터로 몰았다던가? 몇 천년을 두고 두고 일만 어버이들은 아들의 고삐를 끊었거늘 누가 한 애비의 잔인한 얘기를 역사에 그렇게 기록해 뒀는가?
양구시편(楊口詩篇) 2 / 임보
양구 송죽여관 뒷뜰 목판 위에서 생면부지 늙은 애비들이 소주잔 서로 건네며 고된 세상 얘기 주고 받는데
첫 외출 나온 이등병 아들놈들 땀에 젖은 내의를 빨면서 에미들은 휴대용 가스렌지에 장국을 끓이고 있네
저집 개다리 이집 닭다리 전라도 날된장에 충청도 풋고추 섞어 먹이면서 쌍둥이 토인처럼 검게 탄 아들놈들 등을 만지며 밤을 넘고들 있네
30개월 바친 청춘 이제 겨우 두 달 지났다고 손가락 꼽아 헤아리며 하늘을 보면 자운영 꽃밭보다 붉은 별무리들이 잉잉거리며 타네 고추밭에 이는 불꽃보다 맵고도 맵게 타도 있네.
양구시편(楊口詩篇) 3 / 임보
새벽 3시쯤 별들이 떼로떼로 엉클어진 하늘 그것도 그대의 집 뜰에서가 아니라 휴전선 부근 양구쯤 가서 뚫어진 하늘 구멍을 보았는가 그대 아들이 밤새워 초소를 지키는 군사분계선 가까운 어느 마을에서 새벽 3시쯤 하늘을 보면 별들이 별들이 아니라 상처인 것을 별들이 별들이 아니라 뚫린 구멍인 것을.
술잔 속에 빛나는 별 / 임보
시를 찾는다 시인을 찾는다 거만하고 서럽고 멍청한 그런 시 그런 시인을
묵은 잡지의 퇴색한 활자 속에서 혹은 서점의 먼지 낀 서가 한 구석에서 숨도 못 쉬고 억눌려 고꾸라져 있는 그를 문득 만나면 잃어버린 혈육을 다시 찾은 듯 전율을 느낀다
그런 날 밤이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를 안고 술을 마신다 그가 설령 천리 밖에 살지라도 그가 설령 이 세상을 이미 등졌을지라도 우리는 함께다
내 술잔 속에 빛나는 별 그는 그렇게 내게 와서 나를 삼키고 간다.
숙맥 / 임보
어느 시인은 수상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100년 후쯤은 이 시대 시인의 순수성이 수상의 경력으로 측정되리라고 생각해서 순수의 편에 서고 싶은 욕망 때문에서였다.
그런데 그가 실수한 것은 수상거부를 그의 경력으로 기록한 것이었다.
100년 후의 한 거머리 비평가가 그의 이 기록 속에서 순수를 잃은 그의 저의를 캐낼 줄을 그는 미처 생각지 못한 순수한 숙맥이었다.
시인학교 / 임보
삼복염천 해변시인학교에 가면 팔도 시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데
비행기를 타고 오는 시인 자가용을 몰고 오는 시인 버스에 실려 오는 시인
시를 쓰는 시인들도 천차만별이데
어떤 놈은 호텔에서 뒹굴고 어떤 놈은 여관에서 묵고 어떤 놈은 민박으로 지내고 어떤 놈은 교실 바닥 신세
시 쓰는 놈들도 천차만별이데
청산유수 언변둥이 묵묵부답 거만둥이 허장성세 허풍쟁이 의기소침 못난쟁이
바람둥이 새침둥이 술고래 담배고래 대가 중견 조무래기
시인들은 많아도 시인은 없다고 구천동에 숨어 사는 시쟁이 한 놈 소주잔에 투덜대다 되돌아가데.
이른 봄 / 임보
얼음이 풀리고 있네 봄이 왔나 보네
아내는 양지밭에 의자를 내놓고 늙은 시에미 까치집 머리를 다듬고
세 번 떨어진 둘째딸 짱구는 저 몸만큼 큰 책가방 메고 <수석(首席)> 독서실로 떠나네
통장이 큰놈 민방위훈련 통지서를 놓고 간 다음 집배원은 결혼청첩장 둬 개 데불고 오네
강아지는 마당 귀퉁이 일찍 녹은 땅을 열심히 파고 나는 다락에 누워 늙은 두보(杜甫)의 수척한 시들을 더듬어 읽네
봄은 왔는데 아직 봄 같지 않네.
일상 / 임보
며칠만에 한번씩 프라스틱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뒤꼍에 흩어져 있는 개똥을 치우고 친구가 이민을 가며 맡겨 놓은 늙은 감귤나무와 능소화 화분에 물을 주고 아침 식후 30분에 테노르민* 한 알 먹고 낮에는 여기 저기 쏘대며 머리 큰 애놈들 앞에 놓고 국어 작문 가르치다 답답하면 우주통합론도 좀 시부렁대보고 저녁 되면 얼큰한 된장국에 밥 말아 먹고 큰 활자들만 뽑아 석간을 읽다가 심심하면 TV 돌려가며 흘러간 노래도 들어보고 11시쯤 홀로 메실주 한 잔 훌쩍이다가 시들해진 아내 엉덩이도 더러 만져보고.
*테노르민 : 혈압강장제
세상 벗기 / 임보
노모(老母)가 팔십에 이르러 세상을 뒤엎네
오줌도 똥도 무서워 않고 자시는 음식 곁에 나란히 놓네
고승들이 평생을 걸어도 만지기 힘든 탈속(脫俗)을
염불도 모르는 저 어른 어떻게 깨쳤을까.
어느 여름 일기 / 임보
절름발이 검둥이가 수캉아지 다섯 마리를 낳고
백목련이 푸른 잎들 사이에 시절도 모르고 둬 송이 꽃을 뽑아 올리다 말았다
누가 낮술을 하자고 불러내지나 않을가 기다리다
왕유(王維)의 시를 둬 편 더듬거리며 읽었다
구름은 떼로들 몰려 북한산 골짜기를 부지런히 넘어가고
아이들은 종일 시시덕거리며 수영장을 오르내리고 있다
금방 터질 것 같은 예감의 세상은 아직 그대로 있다.
가을엔 / 임보
가을엔 목관악기도 살이 오르나 보다 지난여름 어느 긴 오후엔 폐부의 맨 아래 골짜기를 겨우 적시던 대금의 저 산조가 이 밤에는 목까지 가득 넘치며 출렁이는구나
가을엔 동산의 달도 더 붉게 익나 보다 지난봄 어느 저녁엔 뜰에 나서야 드디어 밝던 그대 이마 위의 작은 사마귀 이 밤에는 감은 내 눈 속에서도 오히려 부시도다
가을엔 무딘 내 코도 맑게 트이나 보다 내 유년의 마른 식탁 위에 빛나던 금빛 토하젓 그 향긋한 냄새 이 밤에는 천리 반생을 거슬러 어느덧 먼 남도 따스한 개울에 벌써 닿아 있구나 이 혀는―.
식구 / 임보
청운산장 오르는 중턱쯤에 <샘터>라는 곳이 있는데 우물가에 포장 한 간 치고 물과 바람이나 마시고 사는 한 노파가 있는데 그 집 볕 밝은 뜰엔(뜰도 산이지만) 사람으로 치면 열네댓쯤 먹어 뵈는 토종 황구(黃狗) 한 마리와 또 사람으로 치면 예닐곱쯤 먹어 뵈는 어리디 어린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볕을 쬐며 놀고 있는데 그 괴가 황구 꼬리를 물고 귀찮게 굴어도 그냥 눈만 껌벅이며 날아가는 산새들이나 쳐다보고 있는 전생에 어느 절간 청직이나 해 묵었던 놈 같기도 한 고런 능청스런 개가 한 마리 있는데 주인 노파가 도토리 자루를 지고 숲에서 내려오면 동자놈 제 스승 맞듯 반갑게 달려가는데 글쎄 이 자리가 한 십여 백 년 전엔 이 식구들 서로 얽혀 살던 무슨 절이나 하나 서 있던 그런 데나 아니었는지 내 생각도 이리 달아오른 걸 보면 나도 옛날 그 뜰을 자주 기웃거려 보던 한 그루 물푸레나무나 아니었는지.
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 / 임보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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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의 향기 / 무명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