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sine92의 블로그 http://sine92.egloos.com/2586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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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들뜨게 만드는 글, 역시 연암 박지원....
騷壇赤幟引
글을 잘 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 글자는 비유컨데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典掌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 같다.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 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대저 장평의 군사가 그 용감하고 비겁함이 지난 날과 다름이 없고, 활.창.방패.짧은 창의 예리하고 둔중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건만, 염파廉頗가 거느리면 제압하여 이기기에 족하였고, 조괄趙括이 대신하자 스스로를 파묻기에 충분하였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 하는 자는 버릴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진실로 그 장수를 얻는다면 호미.곰방메.가시랑이.창자루로도 모두 굳세고 사나운 군대가 될 수 있고, 천을 찢어 장대에 매달아도 정채가 문득 새롭다. 진실로 그 이치를 얻는다면 집안 사람의 일상 이야기도 오히려 학관學官에 나란히 할 수 있고, 어린아이들의 노래나 마을의 상말도 또한 《이아爾雅》에 넣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篇과 장章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비유컨데 용감하지도 않은 장수가 마음에 정한 계책도 없이 갑작스레 제목에 임하고 보니, 아마득하기 굳센 성과 같은지라, 눈 앞의 붓과 먹은 산 위의 풀과 나무에 먼저 기가 꺾여 버리고, 가슴 속에 외웠던 것들은 벌써 사막 가운데 원숭이와 학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글을 잘하는 자는 그 근심이 항상 혼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거나,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
대저 갈 길이 분명치 않으면 한 글자도 내려 쓰기가 어려울뿐 아니라 항상 더디고 껄끄러운 것이 병통이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헤아림을 비록 꼼꼼히 하더라도 오히려 그 성글고 새는 것을 근심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자 명마인 추 도 나아가지 않고, 굳센 수레로 겹겹히 에워싸도 여섯 마리 노새가 끄는 수레는 이미 달아나 버린 것과 같다. 진실로 능히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게 되면 마치 눈 오는 밤에 채蔡 성을 칩입하는 것과 같고, 토막 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면 세 번 북을 울리고서 관關을 빼앗는 것과 같게 된다. 글을 하는 도가 이와 같다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
나의 벗 이중존李仲存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 를 모아 엮어 열 권으로 만들고, 이를 이름하여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하였다. 아아! 이것은 모두 승리를 얻은 군대요 백 번 싸워 이긴 나머지이다. 비록 그 체재와 격조가 같지 않고, 좋고 나쁨이 뒤 섞여 있지만 제각금 이길 승산이 있어, 쳐서 이기지 못할 굳센 성이 없고, 그 날카로운 칼끝과 예리한 날은 삼엄하기가 마치 무고武庫와 같아, 때를 따라 적을 제압하여 움직임이 군대의 기미에 맞으니, 이를 이어 글 하는 자가 이 방법을 따른다면, 정원定遠의 비식飛食과 연연산燕然山에 공을 적어 새기는 것이 그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방관房琯의 수레 싸움은 앞 사람을 본받았어도 패하고 말았고, 우후虞 가 부뚜막을 늘인 것은 옛 법을 반대로 하였지만 이겼으니,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은 처남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體를 모아 열 권으로 묶은 《소단적치》란 책에 써준 글이다. `소단적치`란 `문단의 붉은 깃발`이란 뜻이고 붉은 깃발은 대장군의 상징이다. 지금까지 과거에서 높은 등수로 합격한 모범 답안만을 엮어, 과거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실린 글을 익혀 과거 시험을 준비한다면 어떤 문제가 출제되더라도 답안 작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해마다 출제되는 문제는 같지가 않고, 채점하는 사람의 기준 또한 서로 다르니, 예전 모범 답안을 외우는 것이 과연 수험 준비에 어떤 도움이 될까? 사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도 꼭같이 적용되는 것일 터이다. 아무리 예상문제를 많이 보고, 모범 답안을 많이 외워도 논술 답안은 영 잘 써지지가 않는다. 막상 문제가 주어지면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고, 게다가 예상문제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출제되는 법은 결코 없으니, 예상문제를 익히고 외우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걸까? 그럴진대 이 난감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연암은 대뜸 글쓰기를 장수가 병법을 운용하는 것에 비유하여 말문을 연다. 모두 12가지의 비유를 동원하여 설명했다. 그 비유가 참신할 뿐 아니라 글쓰기의 정법定法과 활법活法을 다 말함으로써, 일정한 법칙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응변작제應變作制, 인정입격因情立格 하는 활물活物로서의 글쓰기를 천명하고 있다. 주제를 뒷받침 해주는 효과적인 예시 속에 글쓰기의 원리를 힘 있고 깊이 있게 천명한 글이다. 먼저 그 각각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글자는 비유하면 병사이고, 뜻은 비유컨대 장수라 했다. 한편의 글이 수없이 많은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듯, 하나의 부대는 수많은 병사들로 구성된다. 병사가 아무리 씩씩하고 수가 많고 지닌 무기가 훌륭해도 지휘관이 우왕좌왕 허둥대고 보면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문장력이 제 아무리 좋고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아도 주제의식이 분명치 않고 보니 지리멸멸하여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부대에 유능한 지휘관이 없어서는 안되듯이, 한편의 글에는 뜻, 즉 주제가 없어서는 안된다. 주제가 없는 글은 지휘관 없는 군대와 같다.
제목은 공략해야 할 적국이라고 했다. 글 쓰는 이는 쓰기에 앞서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무엇을, 왜,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쓰는지를 분명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 할 수 있다. 전쟁에 임하는 장수는 먼저 공략해야 할 상대방에 대해 철저히 파악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덮어 놓고 싸우고 보자는 식은 무모하다. 무엇을 쓸 것인지 가늠도 없이 일단 쓰고 보자는 식으로는 결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전장典掌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먼저 진지를 구축하여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무조건 넓은 벌판에 군사를 풀어 놓고 싸우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절한 위치에 파둔 엄호와 진지는 수 많은 군대의 힘과 화살의 소모를 덜 수가 있다. 글쓰기에 있어, 적절한 전거를 끌어오거나 알맞은 인용, 혹은 예시는 글에 탄력을 붙여주고 신뢰를 더해준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 같다고 했다. 글자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 단락을 만든다. 단락들은 서로 유기적 연결과 통일성을 추구하며 전체 글을 구성한다. 병사들이 모여 분대 또는 소대를 이루고, 소대가 모여 중대 또는 대대가 된다. 중대나 대대가 모여 전체 여단을 형성한다. 각각의 단위들은 보다 큰 단위의 지휘 통제 아래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락과 단락 간의 결합과 짜임새도 장수의 명령 아래 빈틈 없는 통일성과 유기적 연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고 했다. 별도의 통신수단이 없던 과거 전쟁에서 명령의 전달은 나팔과 북, 그리고 깃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진군 나팔은 전진을 명령하고, 북은 퇴각 명령을 전달한다. 나팔과 북소리로도 혹 부족할까하여 깃발을 가지고 또 명령을 전달한다. 깃발이 시각의 배려라면, 북소리 나팔소리는 청각의 배려이다. 멋있는 군악대의 취주吹奏는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북과 나팔이 적군을 무찌를 수는 없지만, 이것 없이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주제, 동일한 내용이라도 어휘의 적절한 선택과 효과적인 문장 표현을 갖추게 되면 글에 설득력이 더해진다. 소리를 내어 읽어도 껄끄러움 없이 순순하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다. 넘치는 표현 없이도 제 뜻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조응照應이라는 것은 봉화이다. 적이 쳐들어오면 변경에서 봉화가 오른다. 그 봉화는 잇달아 전하여져서 후방의 본진에까지 도달한다. 직접 적이 쳐들어 오는 것을 보지 않고서도 후방에서는 적의 침입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글쓰는 사람은 할 말을 아껴둘 줄 알아야 한다. 앞에서 슬쩍 던져 놓고 뒤에서 이를 받는다. 그래서 산단운련山斷雲連이라고 했다. 봉우리만 내민 산을 구름이 끊어 놓았다 해서 구름 아래 산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가리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일이 다 말하지 않고도 말한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이른바 사단의속辭斷意屬, 즉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호조呼照라고도 한다.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라고 했다. 들판에서 지리멸렬한 백병전이 한창일 때, 그리하여 상대와의 우열이 드러나지 않고 혼전이 거듭되고 있을 때, 전차 부대나 기마 부대가 뛰어들어 적병을 공략하면 우열은 단번에 어느 한편으로 기울고 만다. 글이 지지부진하여 잘 나가지 않을 때 참신하고 적절한 비유는 글에 아연 생기를 불어 넣어 준다.
억양반복은 끝까지 싸워 남김 없이 죽이는 것[ 戰 殺]이라고 했다. 억양이란 한 번 높이기 위해 일부러 한 번 낮추거나, 반대로 낮추기 위해 한 번 추켜 주는 것을 말한다. "얼굴은 못생겼는데 마음씨는 착하다"와 같은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억양은 문장 단위에서 뿐 아니라 단락 단위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억양이 점층되어 마침내 주제가 완전히 피력될 때까지 반복되고 나서 글은 끝난다. 적군과의 전투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죽이거나 투항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전투가 소강국면에 접어 들어 진전이 없으면 성벽에 사다리를 걸친다. 일단 어느 한 지점이라도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성을 공략할 거점을 마련할 수가 있다. 적은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쏘고 끓는 물을 퍼부으며 저항할 것이다. 먼저 성벽을 타고 올라 교두보를 확보하고 나면 성문을 여는 것은 시간 문제다. 파제란 원래 글의 첫 서두를 일컫는 말이다. 이 글의 서두는 그런 의미에서 파제의 한 실례를 보여준다. 글의 첫부분은 "글을 잘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라고하여 글쓰기와 병법을 연관짓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글의 제목은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다. 앞서도 말했듯 `소단`이란 `문단`과 같은 뜻이니 글쓰기와 관련된 말이고, `적치`란 대장군의 `붉은 깃발`이니 군대와 연관된 것이다. 이 글은 `소단적치`란 제목이 붙은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를 파제하여 글쓰기와 병법을 한 자리에서 나란히 이야기 하게 된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다. 싸움에 승리를 거두고, 포로를 점검해 보니 반백의 늙은이도 끼어 있다. 중늙은이가 싸워 보았댔자 아군에 무슨 해를 미쳤겠으며, 마지 못해 끌려 나온 것이 분명할 진대, 이들은 오히려 석방하여 놓아 주는 것이 점령군의 금도襟度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이는 적중의 민심을 안정시키는데도 큰 효과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글은 하나하나 곱씹어 시시콜콜히 다 말해야 맛이 아니다. 말할 듯 말하지 않고 함축을 머금는데서 글쓴이의 의도가 더 생생하게 전달된다.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장한 승리를 거두었으면 대오를 가다듬어 돌아와야지, 승리감에 도취되어 마냥 그곳에 머물 수만은 없다. 점령지를 정돈하고 후속 조처를 취한 뒤 하루빨리 개선하여 다음 전투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글을 쓸 때 혹 독자들이 못알아 들을까봐 시도 때도 없이 중언부언 주제를 되풀이 해 말하는 것은 좋은 글쓰기의 태도가 아니다. 독자의 식상을 부른다.
이상 첫 번째 단락에서 제시한 글쓰기와 병법을 견준 12가지 비유를 설명해 보았다. 이 단락 원문의 구문 변화를 눈여겨 보면 연암이 말한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다. 같은 단위의 병렬인데도, 처음엔 `A 譬則B也`의 구문으로 시작하고서, 곧바로 `A者 B也`의 구문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여기서도 B에 해당하는 단위를 두 글자에서 네 글자로 점층시켜 변화를 주었다. 다시 `A猶B也`의 구문으로 바꾼 뒤 금세 `A者 B也`의 구문을 다시 연결시켰다. 이 경우에도 A와 B에 해당하는 부분에 두 글자에서 네 글자로, 다시 다섯 글자로 점층시키는 등의 굴곡을 주어 문장에 끊임 없이 변화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해서 글쓰기와 병법을 일대일로 대응하여 설명한 연암은, 이어지는 둘째 단락에서 다시 전고典故와 비유, 억양반복의 방법을 활용하여 글쓰기와 병법의 관련성을 보다 더 긴밀하게 다진다. 여기서 병법의 예로 든 것은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평 싸움이다. 조나라의 백전노장 염파는 진나라 왕흘의 군대를 맞이하여 저들을 지치게 할 양으로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아는체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약을 올리며 싸움을 걸어도 일체의 반응이 없었다. 양식은 자꾸 떨어져 가고, 군대의 사기도 영 말이 아니었다. 진나라는 하는 수 없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염파는 늙었다. 염파는 겁먹었다. 그래서 안 싸운다. 우리는 젊은 조괄이 장수가 되어 올까봐 가장 겁난다. 염파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 않다. 이 유언비어에 혹해 조나라는 염파 대신 경험 없는 풋내기 조괄을 장수로 교체하였다. 의기양양해서 부임한 즉시 조괄은 뭔가 보여주려고 그날로 군대의 지휘체계와 명령계통을 다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는 준비도 없이 군대를 출정시켰다. 그 사이에 진나라는 백전백승의 노장 백기白起를 아무도 몰래 투입시켜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조나라 군대를 기다렸다. 막강한 조나라의 40만 대군은 진나라 백기의 유인에 걸려 하루 아침에 섬멸 당하고 말았다. 그 후 강대했던 조나라는 다시는 힘을 떨치지 못하고 패망하고 말았다. 왜 똑같은 군사가 꼭같은 무기로 싸웠는데, 염파가 이끌면 적과 맞대항할 수 있었고 조괄이 대신하자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한꺼번에 죽고 말았을까? 그럴진대 승리의 관건은 좋은 무기나 병사에 있지 않고, 이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역량에 있지 않겠는가?
글쓰는 것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아무리 훌륭한 주제와 글감이 있고, 뛰어난 문장력을 지녔다 해도 `이치를 얻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글이 지녀야 할 `결`이다. 물에 물결이 있고, 살에 살결이 있으며, 바람에 바람결이 있듯, 글에도 결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달리 말해 장수가 적을 격파하는 용병술에 비유할 수 있고, 글쓰는 이의 재량하고 판단하는 역량에 견줄 수 있다. 그래서 연암은 둘째 단락의 결론을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로 맺는다. 이는 달리 말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은 병사의 잘못이 아니다"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책임은 어디까지나 지휘관에게 있는 것이다. 지휘관이 훌륭하면 호미나 죽창을 가지고도 정예의 군대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다. 되는 대로 장대에 천을 쭉 찢어 매달아도 술을 달고 융단에 화려한 수를 놓아 장식한 멋진 깃발 보다 효과적인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꼭 고담준론만을 일삼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평범한 소재, 늘 주고 받는 우스개 말도 꼭 놓일데에 놓이면 참으로 깊은 이치를 담게 된다. 꼭 사람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하는 소재,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이야기, 철학자의 근엄한 경귀를 인용하는 것만이 글을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와 병법이 이렇듯 한가지 원리일진대, 훌륭한 장수가 되고자 병법서를 열심히 읽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기 위해 글쓰기 이론을 열심히 익히면 되는가? 시론 책을 줄줄 외우면 좋은 시를 쓸 수 있고, 소설작법대로 따라 쓰면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는가? 논술 참고서만 열심히 읽고 외우면 논술시험에 만점을 받을 수 있을까?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으니 딱한 노릇이다. 시론을 열심히 읽으면 읽을수록 시는 점점더 쓰기가 어려워지고, 작문 이론을 배우면 배울수록 이것도 걸리고 저것도 걸려서 한 줄도 더 쓸 수가 없다. 병법을 열심히 익히긴 했지만, 이론에 얽매이다 보니 막상 실전에서는 어쩔줄을 몰라 우왕좌왕 좌충우돌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연암은 이를 `합변지기合變之機`와 `제승지권制勝之權`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찔러 말한다. 논술고사 답안지를 채점할 때마다 늘상 느끼는 일이지만, 단락 개념도 분명하고 주제 의식도 더할 수 없이 선명한데, 막상 읽고 나면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마치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내용이 천편일률이다. 문제지를 나눠주고 3분쯤 지나고 나면 수험생으로 가득찬 교실에서는 일제히 볼펜을 가지고 맨 종이 위에 글씨 쓰는 소리가 흡사 말 달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리고 나서 다시 10분쯤 지나고 나면 그 소리가 그치고 여기저기서 볼펜을 굴리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소리가 난다. 작정도 없이 기세 좋게 시작한 글쓰기가 금세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연암은 이를, 용감하지도 않은 장수가 마음에 정한 계책도 없이 갑작스레 제목에 임하고 보니 산 위의 풀과 나무만 보고도 늘어선 적병인 것만 같아서 기가 팍 꺾이고 마는 것에 비유했다.
글쓰기의 원칙은 있지만 정해진 법칙이란 있을 수 없다. 글의 법도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마다 달라지고, 때마다 달라진다. 주변 상황의 미묘한 변수에 따라 천변만화의 파란을 일으킨다. 병법도 다를 바 없다. 융통성 없는 교주고슬膠柱鼓瑟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수학문제를 잘 풀려면 그 원리를 알아야 한다. 수학문제를 외워 답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논술 시험을 잘 보려면 사고력과 창의력을 길러야지, 답안을 외워서 쓸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연암은 `혜경蹊徑` 즉 갈 길을 분명히 알고, `요령`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갈 길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글에는 주제가 뚜렷해야 한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글쓰는 이는 글쓰는 동안 내내 이 물음에서 떠나면 안된다. 그러므로 갈 길을 잃지 말라는 주문은 `입주뇌立主腦`, 즉 주제를 명확히 세우라는 것이다. 명나라 이어李漁는 《한정우기閑情偶記》 〈입주뇌〉에서, "주뇌主腦란 다른 것이 아니다. 작자가 입언立言하는 본의本意를 말한다"고 했다. 주제가 명확치 않고서는 글은 마냥 헛돌고 만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었다던 항우가 힘이 부족해서 패한 것이 아니다. 음릉에서 길을 잃어 늪속에 빠지고 보니, 천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도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요령만 얻는다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요령이란 `갈 길`에 대한 선택이다. 주제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어느 길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요령을 얻어야 한다는 주문은 글의 구성과 관련된다. 기승전합起承轉合의 전개는 불변의 원칙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변화는 백출한다. 내 생각을 읽는 이에게 오해 없이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납득시키려면 어떤 순서와 어떤 단계로 글을 펼쳐야 할까? 이 미묘한 저울질이 바로 합변지기合變之機, 제승지권制勝之權이다. 한무제 때 그 겹겹히 포위한 한나라의 군대를 오랑캐의 선우는 여섯 마리 노새가 끄는 수레만으로도 유유히 달아나 버렸다. 제 아무리 좋은 글감을 마련하고, 예상되는 반론에 대응할 논리를 준비해도 합변의 요령을 얻지 못하면 겹겹히 에워싸고 자료를 거듭 준비해도 종내 설득력 있는 한편의 글이 되지는 못한다.말이 많아야 좋은 글이 아니다. 중언부언 하는 글이 친절한 글이 아니다. 말이 간결해도 핵심을 꿰뚫어야 한다.
《소단적치》란 책은 과거에 이미 급제한 모범답안만 모아 엮은 것이다. 말하자면 `득승지병得勝之兵`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기 실린 글을 모범으로 삼아 열심히 익힌다면 글쓰기의 요령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합변지권合變之權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황에 달린 문제이지, 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상황은 언제나 고정됨 없이 변화한다. 설사 같은 주제를 다룬 문제가 나왔다 하더라도 예전 답안지 그대로를 가지고는 급제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관은 옛날의 법을 그대로 따랐는데 싸움에서 졌고, 우후는 옛날의 법과 반대로 했는데 전쟁에서 이겼다. 한신은 병법과 반대로 배수진을 쳤지만 이겼고, 임진왜란 때 신립은 한신을 따라 배수진을 쳤건만 무참하게 패배하였다. 왜 그랬을까? 요령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범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과거를 옳게 배우려거든 과거를 맹종치 말라. 새 것을 쓰고 싶거든 옛 것에서 배워라.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지역이 다를진대, 그러한 차이가 빚어내는 미묘한 변화의 `결`을 읽어, 가장 적절한 `새 길`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소단적치인〉에서 연암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정민 [글쓰기와 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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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쓰신 정민교수님에 대해 궁금하여 반남박씨종보카페(cafe.daum.net/bannampark) 에서 정민교수님 관련 글(http://cafe.daum.net/bannampark/GiHs/3)을 첨부합니다.)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의 한국문학 홈페이지에서 펌 하였습니다.
연암 박지원 선조님 글을 써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정민박사 관련 메일 모음
상공(相公)을 뵈온 후에-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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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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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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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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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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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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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3. 충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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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 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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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0739@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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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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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조교수(한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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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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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博(조선후기 보문론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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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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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국어국문, 동대학원(석·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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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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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鄭 珉)
→ 직위 : 교수 → 전화 : 02 - 2290 - 0739 → 메일 : jung0739@hanmail.net → 홈페이지 : http://www.hykorea.net/jung0739
프로필 : 1987. 8-1992. 7. 한국도교사상연구회 총무이사 1993. 8-1994. 7. 한국도교사상연구회 편집이사 1993. 3-1995. 3. 한국한문학회 출판이사 1995. 3-1997. 2. 한국한문학회 연구이사 1997. 3-1999. 2. 한국한문학회 섭외이사 1995. 11-1997. 10. 한국18세기학회 섭외이사 1999. 3- 현재 한국도교문화학회 섭외이사 1999. 5- 현재 한국시가학회 섭외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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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문학 홈페이지-
옛글 공부방-연암 산문 읽기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 미학 [연암 산문 읽기]
[내가 읽은 책] 연암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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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이 돌아왔다[2004.11.18]“고전 현대적 리메이크 필수”정민
우리나라 고전 작가 중에 단 한 사람의 문호를 꼽는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연암 박지원을 택하겠다.
그는 중국 역대 대가의 반열에 놓아도 당당한 경쟁력을 지닌다.
현대에 내놓아도 전혀 기죽을 일이 없다.
그의 사유가 보여주는 힘은 읽는 이를 항상 압도한다.
한다하는 학자들도 그의 글 앞에서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는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읽어도 너무 쉽고 재미있다.
따져 읽자면 한정 없이 어렵고, 가볍게 읽자면 너무나 경쾌하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 치고, <양반전>과 <허생전>을 모르는 이가 없다.
열하일기》를 모른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란 말과 같다.
하지만 정작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는 사람은 만나기가 어렵다.
이번에 보리출판사에서 박지원의 시문과 《열하일기》를 한꺼번에 4책으로 펴냈다.
열하일기》는 상중하 3책으로 면수만 무려 1,938면이다.
박지원의 시문을 따로 엮은 것은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란 제목으로 546면의 분량이다.
《열하일기》는 1959년 북한 문예출판사에서 이상호의 번역으로 나온 것을 새롭게 펴냈고,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는 홍명희의 아들로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낸 홍기문의 번역이다.
처음 책을 받아들고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했다.
축복이 벼락처럼 쏟아진 느낌이랄까.
박지원의 문집은 합쳐 봐야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번에 나온 책으로 2책 분량만 더 나오면 완역이다.
그런데도 그의 문집은 지금까지 완역되지 않았다.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할 수 없어서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만큼 행간이 깊고 문맥을 잡기가 어렵다.
《열하일기》만은 진작부터 부분 번역되어 읽혔고, 1966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한 국역본도 있다.
하지만 빛깔 바랜 누런 갱지에 인쇄된 낡은 판본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딱딱한 한자말투는 읽기를 방해한다.
그의 산문 선집도 간혹 출판되었지만, 《껄껄 선생》을 능가하는 분량은 지금껏 나온 적이 없다.
우아하게 편집된 새 책을 보고, “먹다 남은 장도 그릇을 바꾸어 담으면 새로운 입맛이 난다”고 한 연암의 말뜻을 실감했다.
예전 북한에서 간행된 것은 나도 진작에 복제본을 지녔던 터, 새 책을 펼치니 이 책이 과연 같은 책인가 싶다.
이번 《열하일기》 3책과 《껄껄선생》의 간행으로 대중과 공유하는 연암학은 첫 물꼬를 튼 셈이다.
북학의 번역은 우선 읽기에 쉽다.
우리의 옛 글맛이 그대로 살아있다.
‘훨씬 틀스러워 보였다.’
‘한꺼번에 맞춰 불러 모둠힘을 쓰는 바람에.’ ‘살림이 제일 푼더분해 보였다.’ ‘
날이 희읍스름할 때’, ‘창자가 맞통하다시피 되었다.
’ ‘입에 침이 없이 탄복을 했다.
’ 잠깐만 들춰봐도, 도처에서 귀에 익되 이제는 낯설어진 우리식 표현들과 만난다.
정경도 눈앞에 그린 듯이 생생하다.
글자에 얽매이지 않고 핵심을 찔러 우리말의 결로 옮겼다.
각주를 주렁주렁 달아야 겨우 이해될 대목도 그냥 간결하게 압축해서 전달의 효용성에 치중했다.
그러다 보니 학술적으로는 다소 문제될 부분도 없지 않다.
하지만 연암의 본뜻을 헤아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열하일기》를 찬찬히 읽다 보면, 마치 영화 필름이 눈앞에서 돌아가는 것만 같다.
18세기 후반 청나라 변경과 북경의 풍경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책 속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지적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미묘한 담론을 만들어낸다. 섬세한 묘사와 절묘한 비유에 얹혀 전해지는 지성의 힘에 독자들은 자꾸 위축된다.
문장의 묘미는 또 어떤가?
치고 빠지는 특유의 너스레와 층층이 포개진 행간을 헤아리는 일은 무척 즐겁고 매우 괴롭다.
몇 해 전 나는 연암의 길을 따라 북경에서 열하를 찾았었다.
고북구 장성을 지날 때, 연암이 글씨를 썼다던 장성 벽에다 연암을 흉내 내서, ‘연암 후 220년 한국의 아무개 이곳을 지나다’라고 먹글씨를 남겼다.
위대한 문장의 현장에 선 느낌이 자못 장엄했다.
그의 자취가 담긴 곳곳을 지나면서 한 위대한 정신이 과거를 어떻게 현재화 하는지 절감했다.
연암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살아있고 힘 있다.
나는 그 앞에서 늘 맥을 출 수가 없다.
열하에서 코끼리를 본 소감을 쓴 〈코끼리 이야기〉를 읽을 때는 움베르또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낙타 이야기가 겹쳐졌다.
에코에게 200년 전 연암의 이 글을 읽히면 그가 얼마나 놀라 자빠질까?
계속 이 생각만 했다.
요술 구경〉을 읽고는 그 꼼꼼한 묘사력과 절묘한 비유에 압도되었다.
하루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인식론의 깊은 본질을 꿰뚫었다.
그의 사유는 현대적이고 기호학적이다.
그가 보고 느낀 사물의 세계, 인간의 질서는 지금도 하나 변한 것이 없다.
그의 글이 갖는 파괴력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는 얽매임 없이 툭 터진 지성이다.
고백하건데, 나는 연암과 만나서 크게 변했다.
생각도 달라졌고, 글쓰기도 변했다.
그의 글을 꼼꼼히 읽어본 독자라면 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줄을 잘 알 것이다.
들으니, 북한에서 국가적 사업으로 간행된 고전문학선집 100책이 앞으로도 ‘겨레고전문학선집’이란 이름으로 속속 간행되리라고 한다.
고전에는 남북이 없다. 이념도 없다.
고전을 통해 남북이 만나고, 시대를 넘어 옛 정신과 만나, 우리의 내면 또한 나날이 풍요로워 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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