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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자 유다 다대오 (눅6:12-16절)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거대한 빛 2개를 공중에 다셨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 외에도 수없는 많은 반짝이는 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기에는 해와 달은 낮과 밤을 주관하지만 왜 별들은 많이 만드셨을까요. 그 많은 우주의 별들이 과연 필요할까요. 현대 과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모든 별들이 다 필요하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별들을 하나님의 백성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에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늘의 별들의 숫자만큼 수많은 자손을 주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나는 존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고 함으로써 해와 달을 부모님에 비유하고, 별들을 형제에 비유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분명해집니다. 그 중에 제일 큰 별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놀라는 것은 해와 달이 우리 눈에 보기에는 아주 큰 것 같지만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해와 달보다 더 큰 별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베드로나 요한, 안드레 같은 인물이 큰 것 같지마는 사실은 숨어있는 제자들 중에 더 큰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열두 제자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제자들 중에 다대오, 레디우스, 유다라는 이 사람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을 제자로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다대오 유다에 대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그의 이름의 의미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 사람의 이름이 셋입니다. 헬라어로 ‘다다이오스’ 즉 다대오는 “가슴” 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 중에 가장 유명하지 못한 제자입니다. 마태, 마가는 똑같이 ‘다대오’ 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의 이름은 “유다” 가 본명입니다. 그의 이름을 유다로 쓸 때 가룟 유다와 혼동이 됩니다. 또 가룟 유다 때문에 그에게 불명예가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로 부르지 않고 제자들은 다대오라는 별칭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는 그를 유다라고 기록합니다. 누가는 역사적인 안목이 날카로운 사람입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목메어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천 후의 기록인 사도행전에서는 유다라 불러도 혼동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본명을 밝힌 것입니다. 다대오라는 그의 이름은 열 두 제자들끼리 붙여준 그의 애칭입니다. 다대오는 히브리어 “닷”에서 온 말로 어미의 젖가슴, 가슴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3절의 고대 역본에는 레디우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렛” 은 마음, 가슴, 사랑의 뜻입니다. 유다는 찬송한다, 감사한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은 본명이 유다, 애칭은 다대오, 혹은 레디우스 이렇게 셋이 된 것입니다. 열두 제자는 구속사에 필요해서 선택이 되었는데 유다 다대오도 그 신비 속에 선택되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대오 유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초대교회의 교부들 사이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유다는 가룟 유다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월절 엿 세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러 나사로의 집에 머무시며 잔치를 하실 때 마르다는 일을 보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불평을 시작합니다.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가룟 유다가 불평을 하고 있을 때 다대오 유다는 그 곁에서 찬양을 하고 있었다고 교부들은 전합니다. 가룟 유다가 불평의 세계, 원망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 다대오는 감사하고 찬양하는 세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적극적 사랑의 사도라고 한다면 다대오 유다는 고요한 사랑의 사도입니다. 비록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해서 그는 가슴의 사람이라,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라는 호칭을 받았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기를 원했고 주님의 좌, 우에 앉기 위해 다툼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다대오 유다는 그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형제들을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감싸주고, 사랑하며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그의 이름을 부를 때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사람”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사물과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바로 그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며 그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며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피할 곳을 찾을 수 있는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눅21:17-19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면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같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전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셋째로 그의 전적인 구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창조 시에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사망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고 새로운 신변의 변화가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유다, 다대오, 그는 비록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배우며 그 사랑으로 형제들을 가슴에 품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고 해서 그 이름도, 애칭 그대로 가슴의 사람, 가슴에 사랑을 품은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2. 그는 침묵을 아는 제자였습니다.
리버풀의 어느 항구 주변에 있는 조그만 초등학교에서 미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어린 학생이 교사를 찾아와서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발 부탁인데 예수님의 얼굴을 한 번만 그려주세요.’ 순간 그 교사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네가 스스로 예수님을 먼저 그려 보겠니. 네가 그린 후에 그것을 내게 보여주렴’ 학생은 조금 난처하여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아이의 도화지에는 한 개의 조그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이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사랑의 광채를 단지 이렇게 밖에 나타낼 수 없어요.’ 아마도 이 어린아이는 주님의 사랑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리스도께서도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대화 내용을 통하여 각 제자들의 심성과 믿음의 분량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대오라는 이 제자는 주님을 삼 년 동안 모시는 가운데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최후의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자신이 떠나가시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요14:1-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그때 성급한 도마가 먼저 묻습니다.
*요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의 말씀과 제자들의 이해는 서로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도마의 관심은 육신의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알기 원했습니다. 평소에 도마는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며 주님의 가시는 길에 동행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가시는 길을 물었습니다. 그 길을 알아야만 주님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마의 우매하고 답답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자상하고도 세심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선포는 자신의 전체 사역의 핵심이며 교훈의 진수였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는 세 단어로 구속사적 의의와 상징적 의의를 함께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의 도마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화제를 돌려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요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으며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헌신했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나 놀라운 기적의 행사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유대인의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생각을 정확히 간파하신 주님은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곡해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고 판단하시고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이를 바로 잡아 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때 빌립이 엉뚱한 말로 묻습니다.
*요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의 간청은 지금까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무위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구약시대에 많은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자신들에게 직접 보여 달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빌립의 영적 무지에 대해 주님을 아무 탓도 아니 하시고 다시 자상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요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성부 하나님의 계시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보아야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야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제자들이 아버지를 믿은 것 같이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면서 이제 자신은 아버지께로 가는데 자기 대신에 아버지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과 그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지만 제자들은 성령을 알고 그분을 영접하고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을 소상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은 다시 주님을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다시 주님을 볼 것이며 그 이유로 주께서 다시 사신 것같이 제자들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제 제자들은 진심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며 그때가 되면 제자들도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으며 제자들을 통하여 주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일입니까. 누가 이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사람, 삼 년 동안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에 묵묵히 순종하며 따라오던 한 제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요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그는 가룟인 아닌 유다 즉 다대오였습니다. 다대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의 오랜 침묵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한 마디 말로 주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3. 그는 사랑을 아는 제자였습니다.
다대오는 참으로 단순하고 순진한 제자였습니다. 나플레옹의 러시아 대 원정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모스크바에서 패배한 나플레옹은 코자크 기병에게 쫓기어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되어 그는 말을 버리고 어느 마을 길가에 있는 양복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는 지금 러시아 군에게 쫓기고 있소. 나를 좀 숨겨줄 수 있겠소.’ 시몬이라는 집 주인은 신앙심이 두터운 유대인이었기에 별 볼 일 없게 생긴 이 남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를 불쌍히 여겨 침실 벽장 안에 숨겨주었습니다. 그 사람의 위에 이불을 여러 채 뒤집어씌우고 나자 대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러시아 군인이 여러 명 달려 들어와 집을 샅샅이 뒤지고 침실의 벽장을 열어 이불을 창으로 몇 번 쑤셔보고는 나가버렸습니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가자 나플레옹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나와서는 시몬이 권하는 술을 몇 잔 마셨습니다. 가까스로 황제의 위엄을 회복하며 그는 말했습니다. ‘그대는 짐의 생명의 은인이로다. 소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하라.’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시몬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정 그러시다면 저 구석 쪽의 지붕을 좀 고쳐 주시오. 비가 자꾸 새지 뭡니까.’ ‘아니 그것밖에 부탁할 것이 없는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 ‘아, 그러면 저 옆의 양복점 보이시죠. 저 집을 다른 곳으로 좀 옮겨 주세요. 저 집 때문에 손님을 많이 빼앗기거든요.’ 나플레옹은 기분이 점점 상하였습니다. ‘그대는 내가 프랑스의 황제인 것을 모르는가. 나는 나플레옹이다. 이번에는 꼭 들어주겠으니 좀 그럴듯한 소원을 말해 보거라.’ ‘옛! 황제라고요.’ 그는 깜짝 놀라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실은...폐하께서 저 이불 밑에 숨어 계실 때 군인들이 창으로 찔렀지요.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면했습니다. 폐하께서도 몹시 겁에 질린 듯하셨는데 그 당시의 기분이 어떠했는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나플레옹은 귀 밑까지 붉어지며 얼굴이 몹시 일그러졌습니다. 그리고 대성일갈하며 큰 소리로 명령했습니다. ‘내가 겁을 내다니....저런 무례한 놈은 당장 총살감이다.’ 잠시 후에 도착한 프랑스 군인에게 말하기를 ‘이 사나이를 체포하라. 그리고 날이 새면 즉시 총살하도록..’ 시몬은 결박을 당하고 나무에 묶여 눈을 가리고 총살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사형이 집행되면서 병사가 소리를 높입니다. ‘하나, 둘.’ 그때 뒤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잠깐 멈추시오, 이 사형을 취소하라는 황제의 명령입니다.’ 사형장에서 겨우 풀려 난 시몬에게 황제의 편지라고 하면서 병사는 한 장의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그때 기분이 어떠했는지 이제 알겠는가.”
다대오의 소원도 시몬처럼 참으로 간단합니다. 도마는 주님의 가시는 길을 바로 알아서 주를 따라가기를 원했습니다. 빌립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같이 하나님의 얼굴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다대오는 자신의 일보다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나타내었습니다.
*요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질문에서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이 말씀의 뜻이 중요합니다. ‘나타내신다.’ 라는 이 단어를 바울 사도가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용했습니다.
*딛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똑같은 헬라말입니다. ‘보여주시고’ 의 정도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딛2:12-13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바울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셨다고 했지만 다대오는 아직 메시야를 잘 알지 못합니다. 속죄양으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열방까지 구원이 이루어지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비 온 뒤에 햇빛이 확실하듯이 자신들에게는 맑고, 밝고, 깨끗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셨다는 것과 주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다 알게 하셨고 마지막 떠나시는 일부터 주의 죽으심 이후에 될 일도 확실하게 보여주셔서 자신들은 큰 복을 받았지만 이토록 아름답고 신령하고 대단한 사실을 왜 제자들에게는 알게 하시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게 하지 않으시는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다대오의 마음은 지금까지는 주님의 사랑으로 묵묵히 동료들만 사랑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 주님이 떠나시는 이 시점에서 그의 간절한 사랑은 세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 떠나시기 전에 주님의 크신 사랑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지도록 확답을 주십시오. 약속을 주십시오. 저들도 우리와 동일한 축복 속에 거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다대오의 간절한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대답을 주셨습니다.
*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헬라어로 “에안 티스 아가페 메” 인데 이 말을 직역하면 “사람이 쉬지 않고 나를 지속적으로 사랑한다면” 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회적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다음 구절에 연결되는데 “내 말을 지키리니” 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생활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나아가 아버지와 주님이 함께 오셔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신령한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놀라운 약속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사랑을 지닌 다대오는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베드로나 바울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유다, 다대오는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이름대로 종으로, 제자로, 성도로, 아껴주고, 섬겨주고, 용서해 주고, 밀어주는, 이름도 빛도 없는 섬기는 제자는 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베드로 보다, 더 많은 바울보다, 별과 같은 작은 빛이지만 이 땅에는, 교회에는,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종이 더 필요합니다. ‘주여! 내가 빛이 적으나, 이름도 없으나, 보잘 것 없으나, 다대오는 되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가슴의 사람으로,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사랑을 전하는 종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의 일상의 기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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