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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에 대한 과학, 철학, 종교,
트랜스휴머니즘 이론들을 총망라한 백과사전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주요 철학자, 과학자, 문필가, 신학자들이 삶의 의미에 관하여 쓴 100여 가지의 이론과 성찰들을 체계적으로 분류, 요약, 정리한 최초의 책이다. 저자는 쇼펜하우어와 비트겐슈타인 같은 전통적인 철학자들의 삶의 의미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대니얼 데닛, 에드워드 윌슨, 미치오 카쿠 등의 인지과학자, 진화생물학자, 이론물리학자들의 논의로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삶의 의미 문제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나아가 레이 커즈와일 등 미래학자들의 최신 이론을 검토하면서 과학기술이 죽음을 제거할 경우 삶의 의미에 대한 인류의 문제제기가 어떤 중대한 변화를 맞을지 트랜스휴머니즘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우주의 진화와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이 궁극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이 책에서 논의된 삶의 의미라는 사유의 숲 속을 여행하다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절실한 물음에 자기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 철학, 종교, 트랜스휴머니즘 이론에서 추려낸
삶의 의미에 대한 101가지 시선
삶은 힘겹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을뿐더러 욕망을 충족시킨다 해도 절박한 철학적 질문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인 숱한 고난과 죽음을 포함한 세계에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은 결국 고통을 겪고 소멸하는데,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종국에는 소멸하고 만다면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오랫동안 삶의 의미를 연구해온 저자는 철학자, 과학자, 작가, 미래학자의 이론을 토대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서양 지성사에 한 획을 그었던 수많은 이론 중 100여 가지를 분류하고 요약하여,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그 당위성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 책에서 제시한 학자들의 사상을 추적하다 보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의미한 질문 혹은 말할 수 없는 대답
철학과 종교를 넘나들며 삶의 의미를 총망라하다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난해하기 때문에 과연 대답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무언가를 확실하게 또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대답의 정확성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전제 하에 삶의 의미를 종교적, 불가지론적, 허무주의적,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총체적으로 살펴본다.
유신론자와 일부 무신론자는 삶이 객관적으로 유의미하거나 적어도 유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삶의 의미가 전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견해는 오직 한 부류, 주관적 무신론자들의 입장이다. 나머지 모든 부류는 삶이 객관적으로 어떠하다고 주장한다. 허무주의자는 삶이 객관적으로 무의미하며, 불가지론자는 삶이 객관적으로 그 의미를 대답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주의자는 의미의 객관적 성분과 주관적 성분이 둘 다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만약 철학자가 개인에 의존하는 주관적 가치를 의미의 원천으로 강조하면, 그 철학자는 주관적 자연주의자이다. 반면에 철학자가 사람들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 가치를 의미의 원천으로 강조하면, 객관적 자연주의자이다. 그러나 많은 사상가는 의미를 창조한다는 말도 옳고, 객관적으로 좋은 대상들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말도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구분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 능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트랜스휴머니즘
고통, 질병, 노화, 죽음이 제거되면 삶은 유의미해질 수 있을까?
생명과학과 신생기술이 고통, 질병, 노화, 죽음들을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하는 학자들은 인간이 영생을 얻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의 영생은 대략적으로 개별 의식의 중단 없이 영원히 지속하는 물리적 영생이다. 과학과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 인간은 영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평균 기대수명이 날로 증가하는 추세 속에서 대다수 과학자는 인간의 수명이 계속 연장되리라고 내다본다. 실제로 노화의 비밀이 서서히 풀리고 있으며, 대체용 조직과 장기를 제공하는 기술을 비롯한 인체 냉동 보존술 등으로 생명을 연장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 밖에도 뇌 스캐닝 기술, 인공지능 프로그램, 로봇공학을 활용하여 영생을 얻으려고 한다. 컴퓨터 과학자이자 미래학자로 꼽히는 레이 커즈와일과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벡은 컴퓨터 성능의 지수 향상과 기타 기술들이 맞물리면 개인의 의식 내용을 가상현실로 업로드하는 것이 가능해지리라고 예측한다. 만일 이 가능성이 실현된다면 삶은 완전히 유의미해질 수 있다. 의미와 가치가 계속 출현한다면, 유의미한 과정에 참여하고 그 과정을 촉진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맹목적인 신앙이나 쉬운 해답으로 의미의 본질을 흐릴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 제공하는 제한된 즐거움과 의미를 누리면서 인간의 한계를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을 역설한다. 대단한 성능의 인공지능이 활약하는 세계에서 비가시적 논의들은 그 영향력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진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좋은 것들의 양과 질을 늘리고 반대되는 것들을 줄이며 사는 것뿐이다. 그래야만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다면,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기 바란다.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 본질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연구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P.16
정말로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이토록 많은 고난과 죽음을 포함한 세계에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인간 삶의 중심에 위치한 철학적 질문이다. 우리는 행운아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고통을 겪고 소멸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이 절로 나온다. 우리의 모든 희망, 계획, 열망, 사랑이 결국 라진다면, 그 모든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리의 질문은 단지 학술적인 논제로 머물지 않는다. 이 질문은 인간 실존의 핵심을 꿰뚫는다.
P.87
스미스는 종교의 기본 주장이 참인지 여부를 묻지만, 이 질문에 확정적으로 대답할 길은 없다고 인정한다. 삶과 세계는 우리에게 불명확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우리는 확실한 토대에 발을 딛고 삶의 의미를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들의 기본 주장에 힘을 실어줄 근거가 있다. 즉, 삶의 전형적인 현상은 해결을 바라는 문제로서 나타나며, 그 해결은 인간적 노력과 타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은 종교의 주요 개념들인 수난, 희망, 노력, 은총과 잘 어울린다. 요컨대 종교적 관점이 옳음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종교의 관점은 삶의 현상들을 썩 잘 서술한다. 종교는 우리의 실재 경험에 내장된 듯한 실재의 범주들을 보여준다.
P.188
허무주의의 도전은 오늘날의 개인들과 문화에 이로운 도전일 수도 있다. 예컨대 종교적 형이상학을 채택함으로써 허무주의를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그런 형이상학 등의 시스템들이 과연 진리인지 의심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한에서, 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우리는 주장했다. 그러나 허무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반박적이거나 쓸모없거나 양쪽 다이다. 허무주의를 긍정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용감한 대응이지만 결국 허무주의를 받아들이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여전히 질문들이 남아 있다. 왜 그리 쉽게 포기할까? 허무주의를 끌어안음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을까?
P.270
러셀은 형이상학적 이야기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스스로 창조하는 아름다움과 발견하는 진리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노동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동은 우리의 내적 본성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헤어는 우리가 세계에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했다. 싱어는 우리가 창조와 사랑을 통해 의미를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클렘케는 우리가 예술과 일과 사랑에서 주관적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호소 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사상가들은 객관적 의미가 상실된 후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의미 창조뿐이라고 주장한다.
P.390
커즈와일은 수확 가속의 법칙이 우주 전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주의 다른 곳들에도 다양한 단계까지 진화한 생명이 존재한다고 추측한다. 다른 곳에서도 생물의 진화, 지능의 진화, 기술의 진화, 컴퓨터의 진화, 마지막으로 생물 종과 그 종이 개발한 기술의 융합이 일어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진화는 수확의 가속에 의해 추진된다. 물론 많은 요인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예컨대 핵전쟁, 기후변화, 소행성 충돌, 박테리아, 자기복제 나노봇, 소프트웨어 바이러스가 진화를 망칠 수 있다. 그럼에도 커즈와일은 낙관론을 견지한다.
P.513
우리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우리의 지적인 정직성과 감정적인 진실성의 증거로 품고 살 수밖에 없다. 맹목적 신앙이나 쉬운 대답들을 채택하는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겁쟁이들의 싸구려 해결책들을 조롱한다. 그리고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를 파괴하려 한 힘들에 무릎 꿇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죽을 것이다. 우리는 그 힘들을 물리치려 애쓰지만 아직 물리치지 못했다. 당분간 우리는 삶이 제공하는 제한된 즐거움과 의미를 누리면서 인간의 한계들을 제거하기 위해 애쓰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최선을 다해 억눌러야 한다.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삶의 한 가지 방식일 따름이다.
진화론적 관점에 의해 유발되고 가장 잘 표현되는 유형의 희망은 어떤 비합리적인 구석도 없다. 과학자이자 시인은 그 희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손잡이를 돌리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필름이 돌고 또 돌며 천문학 전체가 펼쳐진다.
하늘 한 구석에서 피어 오른 생명이
무대로 뛰어올라 백만 가지 역할을 할 때까지.
생명은 점액을 남기며 쏜살같이 대양을 가로지른다.
땅을 정복하고, 날기 위해 날개를 펼친다.
이어서 정신이 꽃피어 죽지 않는 법을 터득한다.
무덤 너머 타인들의 가슴속에 둥지를 트는 법을.
나는 손잡이를 돌린다. 나와 비슷한 타인들이
영화를 만들었고, 지금 나는 가만히 앉아서 관람한다.
포효하는 세계를 마치 책처럼 읽는 신적인 특권을 누린다.
이것이 그대의 과거라면, 그대의 미래는 어디로 상승할지,
오 정신이여, 원소들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정신이여!
줄리언 헉슬리
율리시스
알프레드 테니슨
가치 없는 삶이네, 할 일 없는 왕이 되어
이 불모의 바위섬, 평온한 벽난로 옆에서,
늙은 아내와 함께 있으면서, 날 알지도 못하고
먹고, 자고, 긁어모으기만 하는 야만족에게
하찮은 법을 시행하며 산다는 것은.
난 여행을 그만두고 살 수 없네. 내 삶의
술통 바닥까지 마시리라. 내 삶 내내
난 더없이 기쁨을 누렸고, 엄청난 고난도 겪었네,
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때론 홀로, 해변에서,
비를 가져오는 히아데스1 별들이
어스름한 바다를 비바람으로 뒤흔들 때도.
내 명성은 온 세상에 퍼졌네,
항상 굶주린 가슴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네, 번화한 도시,
여러 풍습과 풍토, 원로원, 왕실 제도,
그런 가운데 영예롭게 존경받은 나 자신을.
저 멀리 바람 세찬 트로이 벌판에서
이 애는 내 아들, 텔레마코스이네, 난 그에게
왕의 권위인 홀과 왕국을 맡기리라, -
내가 사랑하는 그는 이 고된 직무를
현명하게 수행할 것이네, 서두르지 않는 신중함으로
야만스러운 백성들을 온화하게 하고,
부드러운 통치로 쓸모 있고 선량하게 만들 것이네.
그는 거의 흠잡을 데가 없네,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고, 예를 갖추는 데 있어 소홀함이 없으며,
내가 없을 때 우리 가문의 신들을 정중하게 받들 거네.
그는 그의 일을 하고, 난 내 일을 하는 거야.
나에 필적하는 영웅들과 싸우며 기뻐했었네.
난 내가 겪었던 그 모든 것의 일부분이네,
그 모든 경험은 둥근 아치 문이네, 거기를 통하여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영원히 영원히 멀어져 가는
저 가보지 않은 세상의 빛이 가물거리고 있네.
얼마나 지겨운가, 일이 끝나, 멈추어 서고,
쓰지 않아 녹슬고, 더 이상 빛나지 않는 삶이란!
마치 숨 쉬는 것만으로도 삶인 것처럼!
삶에다 삶을 쌓아 보았자 여전히 별것 아니며,
내 삶은 얼마 남지 않았네. 하지만 남은 모든 시간을
저 영원한 침묵으로부터 구하여, 새로운 것을 이루리라.
삼 년여의 세월을 허송하는 것은 역겨우며,
이 잿빛 영혼은 마치 떨어지는 별처럼
인간 생각의 저 마지막 경계 너머 있는
지식을 찾아가기를 열망하고 있네.
저기 항구가 있네, 배의 돛이 부풀고,
어둡고 드넓은 바다가 어렴풋이 떠오르네.
나의 선원들, 무수한 역경을 거치며
한마음으로 함께 일했던 영혼들이여 -
천둥과 햇살을 늘 즐겁게 맞았으며,
자유로운 가슴과 이마로 맞섰네 -
그대들과 나는 이제 늙었네.
노년에도 하지만 영예와 노고가 있네,
죽음은 모든 걸 끝내지만, 그 종말이 닥치기 전에
신들과 맞섰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고결한 성격의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바위들에서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하네.
긴 하루가 저무네. 달이 천천히 떠오르네.
바다는 갖가지 소리로 온 주변에서 신음하네.
자, 오라, 친구들이여,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는 것이
너무 늦지는 않았네. 배를 바다로 밀어내고,
자리를 잡고 앉아, 울부짖는 저 파도에 맞서라,
내 목표는 해가 저무는 곳, 모든 서녘 별들이
목욕하는 곳을 지나 계속 항해해 가는 것이니,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아마 심연의 바다가 우리를 침몰시킬 수도 있고,
또는 신들의 낙원인 엘리시온2에 닿아,
우리가 알았던 위대한 아킬레우스3를 만날 수도 있어.
많은 것을 잃었지만, 아직 남은 것도 많아.
그 옛날 땅과 하늘을 움직였던 그 힘은
이제 예전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그래도 우리야,
한결같은 기질을 가진 영웅적인 심장의,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굳건한 의지로
노력하고, 구하고, 찾고, 그리고 결코 굴복하지 않는.
1 히아데스(Hyades)는 황소 별자리의 별 무리로서 비를 불러오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2 영어 원문의 '행복한 섬' (Happy Isles) 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이 죽어 가는 낙원 '엘리시온' (Elysium)을 말한다.
3 아킬레우스(Achilles)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다.
여기 한 늙은이가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장면인가. 젊음이 온갖 희망과 시도 끝에 이 고갯길에 이르렀다. 이 사내는 70년 동안 아프게 공들여 지식을 모았다. 그는 한 마리 동물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죽음이 그를덮쳤다. 죽음이 이긴다.
윌 듀런트
우리의 행성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현재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굶주림, 지속적인 위험, 사랑보다 더 많은 증오가 있다. 행복한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 경쟁보다 협동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곳, 지루한 일은 기계들이 하는 곳, 하는 일이라곤 죽이는 것밖에 없는 흉측한 기계들이 들어설 자리를 위해 사랑스러운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곳, 시체들의 산더미를 생산하는 것보다 즐거움을 촉진하는 것이 더 존중받는 곳.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라.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 각자 안에 갇힌 예술가가 있다. 그를 풀어주어 만방에 즐거움을 퍼뜨리게 하자.
버트런드 러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