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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이 어딘가 했더니… 임득명 등고상화(登高賞華), 정선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 조정육 미술사가
▲ 임득명 ‘등고상화’ 옥계12승첩 1786년, 종이에 연한 색, 24.2×18.9㎝, 삼성출판박물관
무릉도원을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다. 작가들은 어떻게 이렇게 무릉도원을 실감나게 잘 그렸을까 하는 것이다.
안견(安堅·조선 전기)을 비롯하여 이하곤(李夏坤·1677~1724), 원명유(元命維·1740~1774), 이광사(李匡師·1705~1777), 김수철(金秀哲·조선 후기) 등 많은 조선시대 화가들이 무릉도원을 그렸다. 조석진(趙錫晉·1853~1920), 안중식(安中植·1861~1919), 변관식(卞寬植·1899~1976) 등의 근대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에서 안견과 안중식은 ‘도원도’를 그린 대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안견은 불후의 명작으로 알려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렸고 안중식은 가장 많은 ‘도원도’를 남겼다. 화가들은 모두 복숭아나무를 그릴 때 꽃잎을 세밀하게 그린 것도 아닌데 척 보면 복숭아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그렸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임득명과 정선이 그린 두 작품을 감상하면서 해답을 찾아보자. 복숭아꽃 흐드러지게 핀 인왕산 자락
누구라도 만나면 환하게 웃어줄 것 같은 봄날. 7명의 선비가 필운대 근처에 있는 언덕에 올랐다. 필운대는 서울 인왕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다. 등산용 짚신을 급하게 꿰어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올라온 이들은 도성 안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 봄날의 경치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계절은 바야흐로 꽃이 다투어 피기 시작하는 음력 2월. 온 천지가 생명으로 들떠 있다. 이날의 모임을 기념하여 임득명(林得明·1767~?)이 붓을 들었다. 수묵으로 쌀 같은 미점(米點)을 찍듯 고목을 그린 다음 봄빛에 어울리게 연한 담채로 봄꽃과 나무를 그렸다. 그리고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려 ‘등고상화(登高賞華)’라는 제목을 써 넣었다. ‘높은 곳에 올라 꽃을 감상하다’란 뜻이다.
‘등고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 없는 무명씨들이 아니다. 그림을 그린 임득명을 비롯하여 중인 시인들이 모여 결성한 옥계시사(玉溪詩社)의 멤버들이다. 옥계시사는 1786년 7월 천수경·장혼·김낙서·임득명 등 13명의 중인층 여항 시인들이 옥류동(玉流洞) 옥계(玉溪)에 모여 결성한 시 동인 모임이다. 13인의 동인들은 계절마다 읊은 시 156편을 모아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을 엮었다. 이 시첩에 임득명이 4점을 그려 합장하였다. 그는 옥계시사의 시회 장면을 지속적으로 그렸는데 5년 뒤인 1791년에는 11장의 그림이 담긴 ‘옥계십경첩(玉溪十景帖)’을 완성했다. 그림의 내용은 ‘동인들이 정원에서 모이는 모습이나 산수 속에서 노니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내어 이야깃거리로 삼는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그렸다. ‘등고상화’에 그려진 꽃은 거의 미점을 찍어 놓아 정확히 어떤 꽃인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림 속의 꽃이 복숭아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꽃과 함께 그려진 연둣빛 나무는 버드나무다. 예로부터 인왕산 일대는 봄이 되면 복사꽃으로 유명하여 상춘객들이 반드시 들러봐야 하는 코스였다. 안평대군이 자신의 꿈에서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장소를 찾아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은 곳도 인왕산 기슭이었다. 도화동(桃花洞)이란 동네 이름이 생겨난 곳도 인왕산 계곡이다. 유득공(柳得恭)의 시에도 ‘도화동의 복사꽃 나무 1천그루’라는 표현이 있어 인왕산이 복숭아꽃밭으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필운대에서 맞이한 봄
▲ 정선 ‘필운대상춘’ 1740~1750년대, 비단에 연한 색, 27.5×33.5㎝, 서울 개인 정선이 그린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을 보면 인왕산 자락에 자라고 있는 나무와 꽃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임득명이 ‘등고상화’에서 미점으로 봄날의 분위기를 표현했다면, 정선은 각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로 대상을 정확히 묘사했다. 이 작품은 8명의 선비가 필운대에서 봄 경치를 감상하는 모습을 그렸다. 오른쪽에는 선비들의 모임이 열린 필운대가 그려졌고 저 멀리 원경에는 남산과 관악산이 보인다. 남산 꼭대기에는 애국가의 한 구절,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을 확인할 수 있는 낙랑장송이 그려져 있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성에는 꽃과 나무가 빼곡하다. 소나무와 버드나무와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가장 많이 눈에 들어오고 그 사이사이로 집들이 배치되어 있다. 빌딩과 건물이 전부를 차지하고 어쩌다 길거리에 가로수 몇 그루 심어져 있는 현재의 서울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같은 장소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전원적이다. 이렇게 서울이 운치 있는 도시였다니. 도시 위로 안개가 자욱하게 뒤덮여 분위기를 더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야말로 ‘그림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박문수(朴文秀·1691~1756)는 인왕산 일대의 봄 풍경을 ‘희고 붉은 자두꽃 복사꽃 만 가지에 가득 피었네’라고 노래했다. 조선시대 때 인왕산의 봄은 온통 ‘희고 붉은 꽃이 가득한 무릉도원’이었다. 작가들이 그린 그림 속의 나무를 세어보면 소나무, 버드나무, 오동나무, 대나무, 복숭아나무 등이 단연 으뜸이다. 옛 그림을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무릉도원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 결론이 나왔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무릉도원을 잘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사는 곳이 바로 무릉도원이었기 때문이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할 수 있었던 비법도 평소에 자주 보던 풍경을 그렸기 때문이다. 임득명이 ‘등고상화’를 그리면서 점 몇 개로 복숭아꽃밭의 분위기를 살려낼 수 있었던 것도, 정선이 한양 풍경을 운치있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도 눈만 뜨면 하르르 하르르 떨어지는 복숭아꽃을 보며 생활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본 만큼 그릴 수 있다. 관심을 기울인 만큼 알 수 있고 맛보는 것만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환경이 중요하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이 1000여년 전에 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읽고 조선의 화가들이 가장 조선적인 ‘도원도’를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일상생활에서 보는 복숭아꽃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무릉도원이라는 것을 안 조선의 화가들은 도원을 찾아 더 이상 환상 속을 헤매지 않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 가까운 곳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그곳이 바로 도원이었다. 내가 몸담고 사는 이곳이 무릉도원이고 극락이고 천당이며 파라다이스고 유토피아다. 아무리 극락이 좋다한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지옥이라면 미래의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곳을 무릉도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수많은 화가들이 복숭아꽃이 핀 도원도를 그린 이유일 것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 주간조선
우화등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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弼雲臺 賞春
필운대상춘(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