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JYP 박진영은 왜 삼위일체를 부정하나? 길 잃은 한글 성경 번역 때문
|크리스천투데이 : 2026.10.28 06:21
[기고] Lost in translation (1)
▲박진영 대표의 삼위일체 관련 영상 첫화면. ⓒ유튜브
서론
2003년 빌 머레이가 주연한 ‘Lost in Translation’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아마도 이 제목은 ‘통역 속에서 길을 잃다’ 혹은 ‘통역 속에서 헤맨다’는 의미일 것이다. 20여년 전 그 영화를 본 후, 필자는 사업차 중국어 통역자와 함께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간단히 한 문장을 말했는데, 통역자와 중국인 사장은 몇 분 동안 웃고 떠들었다. 때로는 필자가 길게 말했는데, 통역자의 통역에는 단 몇 초에 몇 마디로 끝내는 것이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통역자를 따로 불러,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호통을 쳤다. “당신의 임무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달만 하면 되는 거요. 나를 대신한다거나 내 대리인이라는 택도 아닌 자세 버리시오”라고 그녀의 역할에 대해 못을 박았다.
얼마간 통역 태도 변화가 있었다. 번역자이든 통역자이든,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가감 없이 내용 손상 없이 번역하고 통역하는 것이다. 특히 성경 번역에 있어 번역자는 의역하거나(paraphrase), 부연하거나(expatiate), 장광설을 펴거나(verbose), 내용의 미화(embellish) 없이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번역은 오래전 쓰인 외국어로 된 성경을 오늘의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새한글성경과 같이 20년 혹은 40년 후 미래 세대 젊은이들 세계의 변화된 언어를 예측하고 그 미래 시대 언어로 그 시대 젊은이들을 위해 번역했다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번역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근간에 로잔대회 선언문이 문자적(literally) 성경 읽기를 경고했다고 해서 말썽이 있었다. 요즘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설교자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JYP의 이단 성향에 대한 교계 논란을 보면서, 필자는 빌 머레이 주연의 영화와 예전 중국어 통역자를 생각했다. 번역자로 인한 혼란이 그저 감정적·문화적 혼란이 아니라 신앙과 영적 생명에서의 혼란이라면, 이보다 심각한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성경의 문자적 이해 없이 JYP의 논지와 논리에 대처하고 신앙 및 교리상 혼란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삼위일체에 대한 JYP의 유튜브 영상자료와 그의 견해에 반박하는 글들, 그리고 어떤 유튜브 방송들을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 그들은 다투어야 할 논지를 떠나,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로 다투는 것처럼 보였다.
JYP 주장을 반박하는 이들의 주장은 논지의 핵심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를 공박하는 어떤 이들의 논지는 대략 “우리를 바보로 아느냐? 역사적으로 그 많은 천재적인 교부들이 당신만 못한 바보들로 보이느냐? 잠자코 있어라. 겸손해져라!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당신이 무얼 말하든 당신은 이단이다! 신학교 가서 신학공부부터 하고 와서 말하라!”라는 것이 요지였다.
JYP는 구체적인 성경구절들을 제시하고, 그에 근거해 삼위일체설을 유튜브에서 공개적으로 부정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기둥 뿌리를 뒤흔드는 그의 도전에 대해, 개신교회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하다. 당신이 성경학자이거나, 대학교수이거나, 목회자라면, 당신은 그가 제시한 성경 구절 해석에 근거하거나 다른 성경 구절을 들어 반론을 제시해야 하는데, 필자는 그런 논거를 볼 수 없었다.
그가 주장하는 논지(arguments)와 논리(logic)가 성경 구절들에 기반을 둔 논지이고 논리라면, 성경에 기반을 둔 논리로 반박하면 될 일인데, 수백 년 혹은 1천여 년 전에 죽은 교부들의 이름이나 종교회의 결의가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신학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성경적 지식으로 무장된 학자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 필자의 한국 개신교계에 대한 유감이다.
필자에게는 JYP를 심판하려는 의도가 없다. 평신도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런 이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옹호하려는 의도 또한 전혀 없다. JYP를 이단으로 단죄하는 이들에게, 필자는 역사적으로 왜 당신들은 매번 이단에 대한 대처에서 실패해 왔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길 원한다. 당신들이 이단으로 단죄했다 해서 그 이단들이 망했는가? 현재 한국에는 이단 신도 수가 무려 200만여 명이고, 자칭 예수가 무려 50명이나 된다고 한다.
당신들이 지식적으로 교리적으로 헤매면서도 목에 힘주고 앉아있는 동안, 교주가 10년을 감옥에서 살다 나왔는데도 OOO는 멀쩡하고, 옛날 옛적에 이단의 낙인을 받고도 OOO는 전 세계적 교세와 영향력을 떨치고 있으며, 교주가 죽었음에도 OO교회의 교세는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당신들은 이단들에게 실질적으로 패배해 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영, 영혼, 혼, 그리고 마음: 한글 성경이 초래한 삼위일체 교리 혼란
JYP가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데 대해, 우리는 우선 그가 말하는 영(靈, spirit)과 혼(靈), 그리고 영혼(soul) 등의 어휘들의 문자적 및 개념적 의미와 차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기초적으로 영과 영혼은 무엇이 다른지, 영혼과 혼은 무엇이 다른지를 개념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읽는 한글 성경들(특히 개역개정 성경)은 영과 영혼과 혼과 마음과 생각을 뒤섞어 놓아서 밤새도록 읽을지라도, 심지어 천재라도 의미를 알 수가 없도록 혼잡하게 번역돼 있는 문제가 있다. 심지어 심령(心靈)이라고 ‘마음 + 영’을 합쳐서 새로운 어휘를 창조하고 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설교하니 누가 영과 영혼과 혼과 마음과 생각과 정신과 양심이 어찌 다른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개역개정 성경은 영어 성경의 영혼(soul)을 혼과 영혼이라는 서로 다른 어휘로 번역해서 혼란을 일으켰다.
JYP는 영혼이 아닌 ‘혼’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개역개정 성경에서 15회 발견되는 혼은 무엇인가? JYP는 영혼을 영과 혼으로 이원화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각 어휘들의 구별된 의미에 접근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영과 영혼과 마음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성경 본문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알아보면 각 의미상 구분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돼, 이를 모아 정리해 보았다. 영혼과 영의 의미는 서구인들에게도 구분된 개념적 이해가 쉽지 않은 어휘들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영혼(靈魂)이라는 어휘는 196회, 혼(魂)이라는 어휘는 15회 검색된다. 영어 성경들과 비교했을 때 개역개정판의 혼은 반드시 영혼(soul)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영혼(soul)을 혼으로 번역했으나, 때로 영을 혼으로 번역한 곳도 발견된다(예: 전도서 3:21).
서로 다른 영어 성경들을 비교해 보면, 영혼은 생명(life)과 마음(heart)의 동의어임이 발견된다. 영혼은 슬퍼하고 미워하고 원통해하고 고통한다. 의로운(righteous soul) 영혼이 있고, 지친(weary) 영혼이 있고, 만족한 영혼, 상한 영혼, 평화로운 영혼도 있다. 드물게, 심령은 하나님의 영혼(soul)을 말한다(KJV, NJB: 렘 14:19).
개역개정판 신약 속 심령은 모두 영(spirit)의 의미이다. 영혼은 ‘너/ 나/ 그/ 사람들’ 자신(-self)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혼이 떠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영혼의 감찰자(weigher)이시다. KJV 사도행전 5장 5절과 10절에서의 ‘ghost’가 영의 의미인지 영혼 혹은 혼의 의미인지는 한글사전으로는 분명하지 않으나, 성령(Holy Ghost)을 생각할 때 영(spirit)과 같은 의미임이 분명하다.
KJV 신약에는 성령님을 ‘Holy Ghost’로 번역한 곳이 89회나 발견된다. KJV 신구약 성경에는 ‘Holy Ghost’와 ‘holy Spirit’이 섞여서 번역됐다. 영어 성경들의 다니엘서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the spirit of the holy gods)’이라는 표현이 다수 발견된다. 그 표기에 있어서도 NIV와 KJV는 정관사로, NASB는 부정관사 a로 표기했다(a spirit of the holy gods). 여기서 gods는 삼위의 하나님들을 의미하는 번역일 것으로 짐작된다.
‘성령’ 표기에 있어서도 ‘holy spirit(시 51:11)/ holy Spirit(사 63:11)/ Holy Spirit(요 14:26)/ Holy Ghost 등 대∙소문자로 다양하게 표기됐다.
영(spirit)에는 자원하는 영(willing spirit), 상한 영(broken spirit), 압도당한 영(overwhelmed), 나약해지는(grows faint) 영, 낙담한 영(broken/ depressed spirit), 겸손하고 회개하는 영(humble and contrite in spirit), 은혜와 탄원의 영(grace and supplication)과 함께 파괴자의 영, 악령(evil spirit), 그리고 불순한 영(impure spirit)도 있다.
하나님은 영들을 감찰하신다(weigh, examine, 잠 16:2), 하나님이 사람 안에 영을 지으셨다(formeth the spirit of man within him, 슥 12:1). 영혼과 육체라는 표현과 함께, 영과 육체라는 표현도 발견된다. 중요한 것은 악령(evil spirit)과 불순한(impure) 영을 제외하고 믿는 자들의 영은 영이신 하나님과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마음(Heart)은 회개하는 마음, 실망한 마음, 행복한 마음(happy, cheerful, merry, glad, joyful heart), 고통스러운 마음(agony), 즐거움과 원한의 마음(glee and malice)이 있고, 마음을 내적인 사람(inner self/ NIV, 창 2:7)으로, 마음 속에 숨겨진 사람(the hidden man of the heart/NASB)으로 표현한 구절도 발견된다(벧전 3:4).
성경 66권에서 영혼과 영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구절이 한 곳 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는 혼(영혼)과 영의 대조, 관절과 골수의 대조와 함께, 마음의 생각(thoughts)과 의도(intents of the heart)의 대조가 일련으로 제시됐다. 이 말씀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아마 당신은 왜 ‘뼈와 골수’의 대조가 아닌 ‘관절과 골수’의 대조일까 생각할 것이다. 아마 영은 영혼(골수, 생각)과 같이 활성적이지 않으나, 완전히 정적이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활성적 골수의 활동은 생명인 피를 만들어낸다. 마음이 의도한 바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마음의 의도(뜻)와 생각은 모두 동적이다. 뼈는 움직일 수 없으나 관절은 움직인다.
글쎄다, 어찌 이런 수고로 영과 영혼과 마음의 개념적 차이가 한순간에 지식으로 확립되겠는가? 하여간 JYP가 말하는 혼은 영혼(soul)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러 성경 구절(사 42:1, 빌 2:8, 11, 막 13:32, 요 14:24)을 근거로 “하나님과 예수님은 다른 혼을 가져 한 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은 성인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나님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성인으로 나타나 “내가 하나님 아들이다. 내가 너희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하겠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내가 흘린 피로 너희를 구원하겠다” 그렇게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JYP의 주장은 육신을 입고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셔서 보통의 인간들과 같이 성장하시고, 장남으로 30년간 가족을 부양하시고, 그 과정에서 점차 소명을 인식하셨으며, 결국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해 사람들 앞에 나오셔서 3년의 공생을 사신 인성의 역사를 무시한 주장이다.
성경은 전조(표적)와 사건의 기록이다. 그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미 예언을 통해 수백 년 전 예언이나 사건의 전조(표적)가 있었다. 그는 스스로 선지자 요나의 사건을 그에 대한 전조(표적)라고 말씀하셨다(마 12:39). 그의 이 땅 위 활동과 마지막 날들이 복음서들을 통해 상세히 전해졌다.
주 예수의 이 땅 위에서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기록은 그의 영혼의 영적 상태(spiritual state of soul)로의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의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not as I will, but as thou wilt, 마 26:39)”.
JYP의 해석 논리를 적용하면 이는 아버지 앞에서의 뜻과 의지의 포기, 즉 영혼의 포기이다: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마 27:46)”를 거쳐, “아버지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Father, into thy hands I commend my spirit, 눅 23:46)”로 이어진다.
같은 표현이 집사 스데반의 입에서도 나왔다: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으소서(Lord Jesus, receive my spirit).” 개역개정 성경은 마태복음 27장 50절을 “영혼이 떠나시니라”로 번역했으나, 참고한 세 종류의 영어성경들(NIV, NASB, NJB)은 모두 “영이 떠났다(gave up his spirit)”로 번역했고, KJV는 “yielded up the ghost”로 번역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일반적으로 영혼이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 예수와 스데반의 경우 영으로 자신을 드렸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러한 과정에서 주 예수의 영혼은 온전히 영적 상태가 되어(영혼이 영과 동질화 되어), JYP가 주장하는 혼(영혼)이 아닌 영으로 자신을 영이신 하나님께 드렸고, 스데반은 자신을 영으로 예수께 드렸다.
육을 지닌 인간의 세계에서 영들의 세계인 하늘 왕국으로 승천하심으로 하나님과 완전한 일체를 이루셨다. 참고로, 한글성경들은 영어의 ”spiritual”을 “영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신령한”이라는 생뚱맞은 어휘로 번역해서, 말씀의 세계에 지대한 혼란을 일으켰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검색 숫자는 23회에 불과하지만, “신령한”은 기독교 신앙의 기둥을 기초부터 흔들어 놓은 매우 한심한 오역이다.
빌립보서 2장 6절의 “본체”는 하나님과 형상적인 일체(in the form of God)를 의미하고, 히브리서 1장 3절의 “본체”는 본질적인 일체를 의미할 것이다. 조심스러우나 내 믿음의 수준에서 나는 형상적 일체의 형상은 육체의 형상이 아닐 것이다.
창세기 1장 26-27절의 “하나님의 형상(image)”은 우리가 지닌 창조주의 영적 유전자이며, 나는 이 유전자가 우리 영혼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있는 영혼(living being(NIV, NJB)/ living soul(KJV)/ living person(NASB))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창 2:7). 영어 성경들에서는 본체가 ‘his being/ his person/ His nature/ God’s own being’으로 번역됐다.
요한복음과 바울서신들에서 반복되는 “~안에”라는 표현이 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를 읽을 때, 필자는 수학의 집합 이론(set theory)과 벤 다이어그램(venn diagram)을 생각하게 된다. 본체와 본질을 말할 때 어떤 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집합 이론을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을 해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이론으로 말씀을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어떤 집합 A의 부분집합이란, 그 집합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원소(elements)가 다른 집합 B에도 속해 있을 때 우리는 이를 부분집합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형이상학적 본질적 원소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영혼을 가지셨다고(JYP의 주장대로 혼을 가지셨다고) 가상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과 혼의 원소가 동일하면 두 분은 일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영혼과 영은 동질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JYP는 왜 혼이 다르면 생각과 뜻과 목적이 같은 존재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 인간적 입장만을 고집해, 왜 영혼을 개인적 특성으로 고정시켜야 하는가? 우리는 신들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됨(equality)를 포기하시고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박진영 씨 성경강의 썸네일. ⓒ유튜브
우리 말에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종교적 용어가 아니다. 흔히 부부 사이를 말할 때 “한마음 한 몸”이라는 뜻으로, 서로 굳게 결합함을 이르는 말이다(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어 성경들에서 영혼은 마음과 생명과 동의어다. 부부 양측 혹은 한쪽이 완전히 겸손해져서 본질적으로 영혼(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은 가능할 것이나, 몸이 하나가 된다는 점은 수긍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육체적 ”한 몸“은 제쳐 놓자! 혼이 달라서 마음이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부정하는 이들에게 역시 종교적 용어가 아닌 혼연일체(渾然一體)라는 사자성어를 제시한다. 이는 사람들의 생각과 뜻(의지)과 목적과 행동 따위가 조그만 차이도 없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물론 그들 각각은 자신의 혼을 가진 사람들이다. 믿음이 없는 이들도 마음이나 영혼의 일체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사자성어다. 심지어 믿음 없는 이들도 마음 혹은 혼의 일체화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왜 JYP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묻고 싶다.
그가 말했듯 삼위일체론은 성경 본문에 언급도 되지 않은 학문적 이론이다. 그런데 JYP는 영과 영혼과 혼과 심령과 마음이 뒤 엉켜 있어, 뭐가 뭔지 모르도록 번역된 한글성경의 어휘들을 억지로 풀어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고 있다(벧후 3:16)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고한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I and the Father are one)”고 말씀하셨다. 다른 이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 본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성경 몇 구절을 떼어 나열하고 스스로 해석해 “아니예요, 혼이 둘이 아닙니까? 예수님과 하나님은 일체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스스로 하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모는 것 아닌가? 한편으로 그를 믿는다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말쟁이로 모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고 배웠다. 이 말씀은 영이신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해야 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인 말씀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필자는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형상(창 1:26-27), 곧 하나님의 영적 유전자가 우리의 영혼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믿는 자의 영은 언제나 그 유전자의 본체인 하나님의 영과 연관되어 있다. 한글 성경들은 바르게 번역해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어휘의 혼잡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더욱 어렵도록 방해해 왔다. 이제 제발 한국개신교회는 그 폐해를 벗어야 할 때이다.
성령(Holy Spirit)
“성령님은 삼위 중 한 분이 아니”라는 JYP의 주장에 대해, 우선 우리는 성령께서 신이심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영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도 부정할 수 없다.
맞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JYP는 그 하나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필자는 그에게 묻고 싶다.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 곧 성령님이 땅 위로 오셨으니, 하늘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가? 하늘 왕국에는 하나님이 공석중이시란 말이 아닌가?
JYP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적 자원 곧 하나님의 본질적 원소(elements)를 유한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무한한 영적 용량의 일부를 이 땅 위의 믿는 자들을 돕기 위해 땅에 보내셨다면, 그 보내심을 입은 분은 하나님과 동질이시고 그러니 하나님과 일체가 아니신가?
집합 이론을 예로 들어보자. 성령님은 원소(elements)에 있어 하나님과 100% 일치하는 영이시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3이라는 원소를 무한수로 가진다고 가상해 보자. 그런데 유한한 수의 원소 3을 성령님이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분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이 성령이라고 집합적으로 이름 붙여진 여러 다른 기능이나 요소의 집합체인지, 양을 수 없이 나눌 수 있는 원소적인(elemental) 영인지 알 수 없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분신(other self/ alter ego) 같은 분이 아닌가?
JYP는 성령을 에너지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주의 에너지를 제어하시는 분이지 에너지 자체라는 주장은 근거도 찾을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다. JYP는 성령님이 에너지라는 어떤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요엘 2장 28절의 “부어주시는 영”은 예언을 하는 영, 환상을 보도록 하는 영, 꿈을 꾸도록 하는 영뿐 아니라 아홉 가지 다른 열매를 맺도록 하는(갈 5:22-23) 다른 능력의 원소들을 포함하는 영인지 우리는 아는 바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영(출 20:5, 34:14)이라 말씀하시고, 민수기 23장 19절에서는 후회가 없다 했으나, 여러 다른 곳에서는 후회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신다(삼상 15:11, 15:35).
성경 속에서 우리는 여러 다른 모습의 하나님의 영을 만난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단순하고 간단한 존재로 정의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성령의 도움으로 믿는 자가 이루는 영적 열매를 기술한다.
작물을 아는 농부는 작물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도록 돕는다. 여러 작물이 있는 농장에 여러 전문가가 있는지, 한 전문가가 모든 지식을 다 가져서 여러 작물을 담당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12장 4절 이하는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면서 한 분의 농부가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한다. 성령은 같고(4절), 같은 성령으로(9절), 한 성령이 행하사(11절),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13절).
하나님의 혼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성령님에게는 혼이 없다고 말하는 JYP의 주장에는 또 다른 논리적 모순이 있다.
인격 신이신 성령님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겠다. 로마서 8장 26절은 하나님과 연약한 믿는 자 간에 “말할 수 없는 탄식”의 중재자(intercessor)로서의 성령님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중재자가 되셨다. 육신을 입지 않으셨다고, 인격 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성령님을 삼위의 한 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하나님(자신)을 상대로 중재하신다는 말인가? 논리적 모순이 아닌가?
한글 성경의 보혜사(保惠師)는 중국어화합본(CUV)에서 유래했다. 아마 “보호하고 혜택을 주는 분“의 의미일 것이다. 신천 성서는 이를 별도자(別導者), 유도자(惟導者), 측도자(則導者)로 번역했다. 여기서 ‘생각할 유(惟)’를 쓴 유도자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6)”는 말씀을 반영한 번역으로 생각된다.
영어 성경들에서는 보혜사를 변호자(Advocate(NIV)), 위로자(Comforter(KJV)), 돕는 자(Helper(NASB)), 그리고 Paraclete(NJB)로 각각 일관성을 지켜 번역했다. Paraclete는 변호자, 중재자, 위안자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요한복음의 보혜사와 성령에 관련된 4개 구절을 읽어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떠나시고 후임자 혹은 예수님의 대리자로 성령님이 오셨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또 다른 보혜사”,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등의 말씀은 그런 해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성령을 성자 예수의 대리자의 위격으로 생각한다면, 성자의 위격을 인정하는 이가 어찌 대리자이신 성령의 위격을 부정하겠는가? 혹은 영혼의 영적화(spiritual state of soul) 과정이 필요 없는 100% 영이신 성령님에 대해, JYP의 혼은 적용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성경의 중요한 사건들에는 언제나 전조(표적)가 있다. 성령님에 대한 전조는 수백 년 전의 예언(욜 2:28)이고, 이는 오순절 사건과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17)로 실현됐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믿음으로, 믿음을 고백함으로, 우리의 영과 영혼은 성령의 부음을 받을 준비가 된다는 말씀일 것이고, 우리의 영혼은 영적인 상태를 이룰 준비가 될 것이다.
▲해당 영상 썸네일. ⓒ유튜브
맺는 말씀
필자도 JYP와 같은 평신도이다. 그리고 필자는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할 용의가 추호도 없다. 한국 개신교 신학은 대한성서공회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해괴한 번역성경을 출판하고 판권을 강조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을 보면서도 뭐라 한마디 말하는 이가 없는 신학이다. 구원론이 어쩌고 저쩌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신과 다르면 이단이라고 나팔을 불어대고 꽹과리를 쳐댄다.
필자가 읽은 성경에는 ‘칭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의 삶’이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할 수 없게 돼 있다. 성경 대부분의 분량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신다. 성경은 칭의와 의롭게 된 이들의 삶의 양면을 가진 동전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야고보서(2:17)를 배격한다. 그들은 칭의 전과 후의 시간적 경계를 망각한 영혼들을 양산해낸다. 그러한 배도자들이 주장하는 죽은 믿음의 신학은 죽은 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씀이 어려우니, 말씀의 기둥이 되는 어휘들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우니, 한국교회 교인들은 말씀이나 교리보다 체험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무시하게 됐다. 많은 한국교회 예배 행태가 이를 입증한다. 차가운 교회와 뜨거운 교회로 대별된다. 말씀이 혼란하니 지식을 포기한 믿음이 성행한다. 이단이 성행한다.
그래서 교회에 분란이 끊이질 않는다. 일단 분란이 일어나면 박터지게 싸우고, 언제나 세상 법정으로 몰려가서 부끄러운줄 모르고 법정을 시끄럽게 한다. 개신교 260여 교단들 각각은 사실상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교단들을 이단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2005년경 교단 수가 62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년 동안 그 수가 4배 이상 늘었다. 필자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오류 투성이의 한글 번역 성경에 있다고 본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발원해 숲과 평원을 흘러 다시 하늘로 흘러가는 구원의 강을 보지 못하고, 여기저기 큰 나무만 붙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과장된 손짓 발짓을 해대며 온갖 자극적 언어를 큰 소리로 외쳐대는 모습이 한국교회 교사들이다. 오역 투성이의 한글 성경을 잡은 손을 높이 들고 휘저으며 소리 높여 성경무오론을 외치는 모순된 교회가 한국 개신교회가 아닐까 싶다.
한국 많은 성경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쌀을 씻어 물을 부어놓고, ‘밥이 다 됐다’고 먹으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제 막 믿음을 고백해 의롭게 된 이들에게 말한다. “당신의 구원이 완성됐습니다. 앞으로 사는 것은 네 맘대로 사세요.” 구원론이니 무슨 무슨 훈련이니 성경구절 몇 구절을 암송시키고 그럴싸한 말로 세뇌시켜서 영적으로 허기진 영혼들을 칭의 전과 후 때감각이 없어진 영혼들로 양산해냈다. 천국과 지옥을 뒤섞어 혼란을 야기했다.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오역 투성이 한글 성경들에 있다. 그래서 이 글 제목을 ‘Lost in translation’이라고 붙였다.
260개 넘는 개신교 교단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단이 한 개 더해진다고 무슨 큰 일이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을 것이다. 글쎄, JYP의 삼위일체설의 부정은 당신들 생각대로 그리 만만한 사태가 아닐 수 있다.
우선 JYP는 문OO이나 정OO, 이OO와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지식수준을 가진 사람일 뿐 아니라, 오늘도 우리가 보는 바 대중음악가로 전 세계인들의 감성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특출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JYP는 개신교회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성경은 그냥 믿는 걸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타협하지 마세요. 끝까지 따져보세요.”
이제까지 강단에 서서 의미도 모르고도 큰소리로 외치면 자동으로 아멘으로 응답하던 교인들이 손들고 질문으로 대응한다면? 목양이니 뭐니 교인들을 말 못하는 바보 같은 양으로 취급하던 시대는 끝났는지 모른다. 교사로 설교자로 강단에 서기가 힘들어지는 시대가 오고 있는지 모른다.
마이클 송
전 동서성서학회 초역위원
※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