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피아노 조율
2025년은 정말 새해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고 또 새로움의 깊은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끝없이 미루다가 1월 3일 금요일, 내 옆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던, 낡은 피아노를 조율했기 때문이다.
10시 조금 지나 도착한 조율사가 몸체 몇 부분을 해체하고 건반을 하나하나 두드리며 철선을 조여 나간다. 10여 년, 아니 언제 조율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기간 동안 늘어지기만 하던 피아노의 철선이 제 음을 찾아 가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며 이어진다. 음악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소리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음 한음 점점 익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강선들의 긴장도가 높아짐에 따라 뭔가 부족하던 피아노 방은 그 이름에 걸맞게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내가 할 일은 온 신경을 소리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 조율사調律師에게 방해가 안 되도록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조율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모양이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건너가 보았더니 조율사는 건반에 이어진 부속에 나사가 풀렸다며 일일이 조이고 있었다. 피아노가 쓸 만하냐고 물었더니 '영창 피아노'에서 한때 수출용으로 생산한 제품인데 괜찮은 편이라는 말에 하찮게 생각하던 마음에서 벗어나 믿음직스럽기까지 했다. 이제 목소리를 잃었던 피아노는 제대로 소리를 낼 것이다. 계속해서 관리해야 하는 피아노보다는 전자 피아노를 하나 살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왕에 가지고 있는 피아노를 조율해서 쓰는 게 낫겠다는 집사람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길 잘했다. 어제, 학원 원장님 소개를 받아 조율사에게 전화했더니 일정을 잡아 보겠다고 해 다음 주나 되려나 했더니 오늘 10시에 오겠다고 문자가 와서 집안을 좀 정돈하고 기다렸다. 약속 시간인 10시 이후의 15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다는 것은 새로움을 향한 열정-기다림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아파트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편안하게 놓여 있지만 한동안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습하고 온도 차가 심한 곳에 거의 버려졌던 낡은 피아노에서 맑은 소리가 나게 된다니 감회가 새롭다. 30여 년 전, 선린촌 집 마당 한 켠에 10여 평 조립식 주택을 짓고 가게를 하면서 작곡과를 지망하는 딸의 레슨비를 마련했는데 주변에 아파트가 생기고 나서는 장사가 안 되어 그만두고 본채 마루에 있던 피아노를 옮긴 다음 피아노 레슨 방 겸 서재로 쓰려고 했는데 모든 것이 마음 먹은 대로 안 됐다. 외진 곳이라 레슨을 받겠다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고 사촌동생과 교우의 딸을 레슨비 없이 가르치다가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아 끝났다. 게다가 미흡한 단열재 탓으로 난방이 잘 안 되는 관계로 겨울에는 비우다시피 했더니 쥐가 들랑날랑하며 수출용 피아노가 쥐들 집이 되었으니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가. 피아노 아래에 고급스럽게 놋쇠로 장식한 페달 구멍 셋은 쥐들이 드나드는 현관이 되었고 내부의 굵은 각목 기둥과 건반 안쪽에 깔린 융단 몇 군데는 흉하게 갉아 먹었고 바닥에는 쥐 오줌으로 그린 지도가 남아 있었다. 피아노보다 좋은 집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놈들은 정말 최고급 호텔에서 생활한 것이리라. 돌이켜 보면 지금껏 관리에는 전혀 힘쓰지 않으면서 피아노에 대한 푸대접이 계속된 셈이다. 억울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집사람이, 피아노를 사서 들여 온 날 조율하러 온 분한테서 새 피아노가 아니라 쓰던 피아노 같다는 말을 들었다는 걸 나중에 알고 새 악기라는 이미지가 단번에 지워졌었다. 그 이후로도 집사람이 속아 샀다는 말을 가끔 했기 때문에 그런 심리는 점점 굳어졌는지도 모른다. 늘 관리가 잘 되어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학원에서 치는 피아노와 비교하면서 원래 타고난 소리가 그렇고 앞으로 소리가 좋아질 수 없는 것으로 내 생각이 굳어져 버렸으니 버림받은 피아노였던 셈이다.
두 시간이 넘는 조율이 끝나고 한번 피아노를 쳐 보라고 해서 나는 반주용 찬송가를 펼치고, 늘 칠 때마다 어렸을 때 교회에서 소풍 겸 야외 예배 볼 때마다 바라보던 소나무 숲과 그 앞에 서 계시던 선친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478장 '참 아름다워라'를 쳐 보았다. 소리가 전혀 달랐다. 손끝이 건반에 닿는 촉감까지 달라진 것 같았다. 새로움은 겉모습이 아니라 깊이 숨겨진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자기 음을 정확하게 찾은 검정 36과 하양 52, 88 건반이 바른 음정으로 자리를 잡으니 모든 혼란이 물러가고 정돈되는 느낌이 들면서 그 달라진 소리, 엄청난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방황 끝에 갈 길을 찾은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비전문가의 주관적인 판단이겠지만 부족한 기교를 떠나 소리 자체가 새롭고 맑으니 잘 치는 것처럼 들렸다. 찬송가 제목대로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짧은 시간이 그렇게 흡족할 수가 없다.
피아노 앞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낡은 피아노만 조율한 것인가 늙은 이 몸은 물론 심금心琴까지도 조율해야겠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너무나 섬세하고 가는 줄들이 너무 늘어지지 않고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도록 하면서 날마다 아침 해를 맞이해야겠지. 삶은 피아노 두드리기와 마찬가지이리라. 2025년은 피아노와 더 가까이 지내고 싶다. 원장님이 강조한 부분 연습에 힘써야 함은 물론이다. 오늘이라는 부분에 충실하기 위하여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수시로 조율하며 살아야 하리. 몸은 늙어 가지만 문학과 음악으로 귀한 시간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첫댓글 참으로 멋진 삶이예요. 음악은 삶을 윤대하게 하는 정신적인 양념이지요. 피아노 조육은 새로운 피아노로위 귀환이지요. 날마다 좋은 음악과 행복하세요.
Evergreen님, 방문 감사!
정말 잘 치지도 못하면서 피아노 얘기를 자주 쓰는 것은 은퇴 후 습작의 소재가 되었고 생활의 리듬과 끈기를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서주 글방 글 머리를 클릭해 보니 수필 127, 시 1340편을 썼더군요.
가폐 활동 덕분입니다.
맞아요.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한 작품식 모으다보니 산이되는 것 같습니다. 작품 2집 발간 하시죠. 종이말고 인터넷판은 싸지 않나요?작품성이 있는 것으로 따로 모아보시고 다듬어서 책 한권 분량을 집에 있는 컴퓨터에 담아보셔요. 부자이십니다.
@에버그린 Evergreen님, 늘 격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2024년에는 막연하게 생각하기만 했는데 더 늦기 전에 2025년에는 시조집과 수필집-소설?도 포함- 한 권씩을 내겠다고 목표를 정하고 정진하려고 합니다.
@西疇 / 지성해 맞아요, 늘 미루다보면 일이 안되지요, 저도 시평이나 후기 정도는 쓸 수 있게 기회를 주십시오. 빚을 갚아야지요. 좋은 성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