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205. 묵상글 (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 먼저 행복하고, 같이 행복한. 등 )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먼저 행복하고, 같이 행복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는 주님 말씀은
내 말을 안 들으면 쥐뿔도 없고 잘 들어야 떡 한 조각이라도 주겠다는
우리 인간적인 처사와 같은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내 맘에 들고 안 들고’가 하늘나라 입국의 기준인가 그 말입니다.
그럴 분이 아니고 그러니 그럴 리 없지요.
주님께서는 당신 좋도록 아버지 말씀 들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선 당신 말 들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당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아버지의 나라 곧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공생활 제1성으로 말씀하셨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하느님의 나라 곧 아버지의 나라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너무도 당연하고
그러니 누가 하느님 나라 백성이라면 아버지 뜻의 완수가
그의 목표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너무도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관건은 무엇이 아버지 뜻인가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모두 행복해지는 것이고,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의지)은 호의(好意)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는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악의가 있다는 것은 모순이지요.
사랑이신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아버지의 좋으신 뜻이고 이런 사람에게 성문이 열리고,
이렇게 성문을 열고 들어갈 때 다른 사람도 그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같이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자기만 들어가고 성문을 닫아버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모두 이래야 하지만
수도자는 그중에서도 더더욱 이래야 합니다.
수도자란 보물이 묻힌 밭을 먼저 발견하고 사는 상인처럼 행복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발견하고 소유한 사람(선취자)입니다.
그리고 자기만 오르고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만 소유하지 않고 공동으로 소유하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많이 전하는 사람(증거자)입니다.
여기서 자문합니다.
말로만 ‘주님, 주님!’ 하지 않고 실제로 주님 말씀 실천합니까?
그래서 사랑합니까?
그래서 행복합니까?
그리고 증거합니까?
먼저 행복하고 같이 행복한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러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오직
믿음이
다만
믿음만이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게
믿으렵니다
오직
희망이
다만
희망만이
희망한다고
말할 수 있게
희망하렵니다
오직
사랑이
다만
사랑만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사랑하렵니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갖게 된 사제 성소는 본당에 계신 신부님을 보면서 생겼습니다. 본당 신자들과 함께하며 아이들과도 즐겁게 놀아주는 신부님을 보면서 저의 꿈은 ‘신부님’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저에게도 ‘신부’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제 생활을 25년 넘게 했지만, 저의 꿈을 키우게 했던 본당신부로는 겨우 만 5년을 넘겼을 뿐입니다. 특수사목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던 어렸을 때 보았던 본당신부가 그리웠습니다. 본당신부가 되어야 진정한 꿈을 이루고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책임과 의무가 가득한 특수사목의 삶보다는 신자들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본당신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 오랜만에 본당신부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문득 과연 특수사목을 하고 있을 때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답은 ‘아니오’였습니다. 신자들과 함께하는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오해와 반대를 받으면서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부가 했던 말이 정답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본당신부는 그냥 미사만 충실하면 돼.”
묵상 중에 큰 착각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사제는 기능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자리에 머물러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행복한 자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즉,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예수님 닮은 사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만 기억하면 어떤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잊어 버리고 대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리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 주님!’하고 눈물 흘리며 외치는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 자체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리든 상관없습니다. 딱 한 가지, 주님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갈 때, 하늘 나라는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군자는 홀로 있을 때 가장 신중하고 조심한다. : 신독(愼獨)(‘대학’, ‘중용’).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외형의 집인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육신이 거주하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마음의 “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1)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라고 말씀시고,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면 될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 곧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고, 오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숙한 신앙인은 삶으로 말합니다
작심삼일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돌아보면 결심과 행동은 언제나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은맛을 내야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님의 계명을 합리화시키는 데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갈수록 물러지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로마2,13).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고 그 실천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신앙고백이나 찬미의 말도 그 진실성은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실행하되 내 뜻을 이루려고 애달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두면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십시오.
어떤 사람은 성지순례나 기도회, 피정을 다녀와서는 너무 좋았다고 자랑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좋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새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좋았다는 것은, 변화된 삶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삶으로 말합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실천의 어려움을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고 적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반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큰바람과 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걱정할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곧 흔들려 방황하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26). 성녀 마더데레사는 말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요”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십시오”(알베리오네신부). 실천하면 할수록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하늘을 그리워하면서도 내 뜻을 고집한다면 정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날이 되기를 소망하되 욕심부리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 나라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위정자들이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 지구에서 살고 있는 인류를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릅니다. 30,000년 전까지 지구에는 현생인류 이외에 네안데르탈인이 함께 살았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어느 순간 지구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 비슷한 지능을 가졌습니다. 체격은 현생인류보다 더 강인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도 도구 지능, 자연 지능, 언어 지능, 사회적 지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은 이런 지능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사회적 지능이 현생인류보다 약했습니다. 사회적 지능은 관계를 맺고,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회적 지능은 ‘종교’를 만들었고, 종교는 고통과 재난을 이겨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종교는 조직을 통합하고,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신념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지능은 목적을 위해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선물을 주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우리말로는 ‘눈치’가 생긴다고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구슬을 만들었지만, 구슬을 이용해서 목걸이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통합할 수 있는 지능이 부족했던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의 경쟁에서 뒤처졌고, 빙하기와 기후변화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2000년이 넘도록 계속 이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聖事)’입니다. 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고, 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납니다. 성사는 무뎌진 신앙을 하느님께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모시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도록 말씀의 식탁으로 이끌어 줍니다. 고백성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성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성사입니다. 두 번째는 ‘애덕(愛德)’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너희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치료해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다. 너희들 중에 가장 굶주리고, 병들고, 목마른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제도와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진정한 교회의 역사는 ‘애덕’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나눔, 가난한 이와 더불어 사는 모습을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과부와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 교육, 복지는 교회의 이런 나눔이 발전하여 병원, 학교, 사회복지시설로 성장한 것입니다. 산업의 발전과 대량 생산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자본주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어린아이들이 노동의 현장에서 학대당하였고, 많은 노동자가 일한 만큼 급여를 받지 못했습니다. 고용주의 편의에 따라서 부당하게 해고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은 발전하고 좋아졌는데 그 혜택이 균등하게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교황님들은 ‘노동헌장, 새로운 사태, 지상의 평화’와 같은 회칙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을 따라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지금의 근로기준법과 노동자들을 위한 배려는 교회의 이런 주장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내 가족, 내 이웃,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은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잊어버리고 나의 영혼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도 예수님께서 원하신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과 같은 말씀을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도 하셨습니다. 기억나실 것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지만, 사람이 많아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주님께 이런 사실을 알렸더니 주님은 그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말로 하는 사랑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실행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말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못 할 사랑이 없습니다. 말로는 나눠주고 아껴주고 기도해 주기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실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넘쳐나는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사랑이라 말하지만, 사랑이 아닌 것을 가끔 만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따뜻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함께 하는 것을 꺼리는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신앙의 길에서도 같은 모습을 봅니다. 사랑을 전한다고 하면서 나누지는 않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 실행은 없습니다. 봉사는 하지만 내가 빛나기 위한 봉사이지 그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 마음에 경종을 울리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린다면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부러진 우산
몇 해를 멋지게 쓰고 다닌 우산이 있습니다.
멋지게 쓰고 다녔다는 것이 우산이 아름답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 우산은 온통 검은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검은 우산은 제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늘 도와주었으니 그 자체로 멋진 우산이었습니다.
비가 내린 어느날, 우산을 쓰고 밖에 다녀왔습니다.
지붕이 있는 곳으로 들어와 젖은 우산 그대로 내려놓았습니다. 우산을 말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참 후 나와보니 우산의 한쪽 살이 부러져 비스듬히 누워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바람이 그랬는지, 오래되어 녹이 슬어 견디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우산은 그렇게 누워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 떠 올랐습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당연한게 아닐까요?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고 구부러지는 모습 말입니다. 그렇게 우산은 자신의 소명을 다했음을 제게 통보했습니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인생의 시간처럼 말입니다.
오늘, 부러진 우산이 제게 이런 가르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구부러져 소명을 다할 수 있으니 누군가의 비를 막아줄 수 있는 오늘 최선을 다해 그 소명을 다하라고….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슬기로운 삶
반석 위에 인생집 짓기
오늘 새벽에 읽은 슬기로운 교황님의 강론에 대한 충고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최대한 10분이다. 8분이 지나면 강론은 산만해지고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강론은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결코 10분 이상 넘지 마라. 언제나!(Never go over 10 minutes, ever!)’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5분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10분은 인간의 말이며, 15분은 마귀의 말이라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정말 긴 강론은 고문입니다. 삶이 진실하고 절실하면 강론도 짧고 순수합니다.
다음 현자의 말씀도 문제는 나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삶의 가장 큰 걸림돌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내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다산>
이래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회개가 슬기로운 삶의 지름길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부단한 선택의 과정이 인생입니다. 무수한 선택으로 이루어져가는 인생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인생집 짓기입니다. 제가 70대 넘어 주로 읽는 책은 자서전이나 평전, 회고록입니다. 위인들의 인생집이 어떠했나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760쪽에 달하는 “앙겔라 메르켈, 자유”란 메르켈 전 총리의 회고록입니다.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로 2006-2021까지 무려 16년간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로 16년간 재임했던 분입니다. 54년생이니 현재 70세입니다. 얼마나 충실한 삶이었는지 거대한 나무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충실한, 참으로 한결같이 노력한 삶이었음을 봅니다. 언젠가 갑자가 잘 지어지는 인생집은 없습니다. 결코 우연이나 요행의 집짓기는 없습니다. 모든 위인들의 책을 읽을 때 마다 깨닫는 진리입니다.
나무는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보이지 않게 성장합니다. 사람역시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인생집 짓기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똑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내 고유의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둘중 하나를 선택하여 평생 짓는 인생집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은 5장에서 7장까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입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슬기로운 삶이냐 어리석은 삶이냐 둘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반석 위에 평생 인생집을 지어가는 이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하루 아침에 며칠만에 지어지는 날림집 같은 인생집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최선을 다해 짓는 인생집입니다. 방법은 단 하나 주님의 진리 말씀을 사랑하고 실행하는 수행자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시작하면 언제든 늦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주님 반석 위에 회개와 더불어 말씀을 공부하고 실행함으로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저 역시 하루하루 인생집을 짓는 마음으로 평생 쓰는 강론입니다. 이런 주님을 사랑하고 찾으며 인생집 짓기에 전념하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슬기로운 이들의 고백이 더욱 우리를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한결같이, 길이길이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 말씀을 실행함으로 하느님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이런 슬기로운 삶을 선택하여 하느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될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집짓기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집은 기초와 과정이 튼튼하기에 웬만한 폭풍우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어리석은 사람의 인생집입니다. 결코 이런 인생집을 선택하는 이는 없을 것이나, 주님을 떠나 말씀공부와 실행에 소홀하면 이런 사상누각沙上樓閣될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그러나 나의 이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이런 모래 위에 지어지는 어리석은 이들의 인생집도 많을 것입니다. 폭풍우의 시련과 고난이 왔을 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인생집이라면 대책이 없습니다. 인생집을 짓는데 요행이나 우연, 비약이나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하루하루 우직할 정도의 말씀 실행의 한결같은 노력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7)
강물이 밀려왔다
영적으로 풀이하면, 말씀을 제대로 듣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대비 되고있습니. 유혹의 때에 그 집은 무너집니다. 사악한 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집은 모래가루에 덮이고, 성난 물이 영혼 속으로 밀려들어 옵니다. 이 혼탁한 죄악의 강물은 그 집의 주춧돌까지 흔듭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최후의 심판 때 닥칠 위험에 대해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됩니다.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필리 4,13 참조)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습니다. 악인은 자신의 사악함과 어리석음이 하느님 때문이라고 우길 수 없습니다. 그는 본성에 따라 나아가지 않고 물러섬으로써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그러면 그는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짓을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누가 하느님을 뵙는가? 복 있는 자가 하느님을 뵙는다. 그러면 누가 복있는 자인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복 있는 자다.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마태 5,
</div><!--AfterDocument(564120,35144)--><div style=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어떤 집인가?
강만연 [fisherpeter] 241204. 22:52 ㅣNo.178188
우리는 믿음과 신앙을 비유할 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성 위에 지은 집에 비유해 표현하기도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빗대어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두 개를 대비시켜서 표현하는 목적의 밑바탕에는 무너지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건축물 구조 이론에 의하면 기초가 좌우할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복음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 말씀을 실천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반석이 되는냐 모래성이 되는냐로 결정되는 것처럼 말씀을 전합니다. 사실 이게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을 생각하면 첫 구절이 제가 개신교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인용한 구절입니다. 그당시 성경에는 '주여 주여'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주님이라고 합니다. 호격만 다르지 뜻은 같습니다. 약 30년 전에 이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랑 지금 이 의미를 받아들일 때랑은 큰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이 구절을 제가 어디서 가장 많이 사용했는가 하면 서울 종로 제일은행 앞이었습니다. 같은 개신교이지만 약간 사이비라고까지는 아니지만 좀 이색적인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 즐겨 사용한 것입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왜 그 의미가 별 차이가 없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변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시대가 변하면 바뀔 수 있습니다. 30년이라는 세월도 그런데 당연히 2000년이라는 시간의 세월도 이 진리는 변할 수 없는 진리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묵상할 때 단순히 반석과 모래성이라는 그 자체 비유가 상징하는 의미를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게 그럼 반석이고 모래성 같은 기초인지 그걸 잘 묵상해야 이 복음을 잘 묵상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반석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모래성은 반대로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토목을 전공한 친구 때문에 토목관련 자료를 번역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20년쯤 된 세월이라 기억이 가물하지만 그 의미는 확실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 아주 금방 이해를 할 수 있을 텐데 조금은 아쉽지만 한번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이 내용을 신앙에 접목하면 유용한 면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아주 큰 고층 건물을 지을 때 당연히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하게 됩니다. 그 위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경우는 돌과 같은 암반과 같은 게 있는 지역도 있습니다. 그 주위에는 일반 흙으로 분포돼 있습니다. 만약 이 경우에 기초를 세울 때 문제는 흙으로 된 부분에는 같은 강도로 해서 어떤 지지물로 기초를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조물의 하중이 암반에 가해지는 하중만큼 흙에도 똑같은 하중을 가했을 때 흙이 받은 하중이 암반에 가한 하중과 동일한 하중이 되도록 설계를 해야 나중에 그 위에 골조물 같은 지지대를 세워 기초를 올려도 안전한 무게중심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건물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체는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리가 봤을 땐 암반 높이만큼 흙으로 땅을 전체 메우면 겉보기엔 흙으로 덮여서 어느 정도 그걸 마지노선으로 해서 좀 더 흙을 보강해 평평하게 하면 마치 균등하게 기초를 만든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이게 마치 도로라든지 하는 것 같은 경우에는 그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건물을 세운다든지 할 때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하중을 견디지만 나중에는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만 된 주변을 토대로 해서 올려진 건물은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도 아주 당연한 사실인데 왜 제가 길게 설명을 드렸느냐 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신앙에 접목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신앙생활이 어떤 게 신앙생활인지 그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그저 성당에 기본적으로 주일미사 안 빠지고 신심단체에 가입돼 있으면 그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교무금 내며 다니면 얼추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어쩌면 이와 같은 신앙도 훌륭한 신앙생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신앙이라는 게 시대의 개념과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저는 반석이라는 개념을 이런 개념으로 접근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이 어떤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이 사실은 주변 사람들의 수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형편없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사람보다 좀 낫다고 해서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신앙이 좋은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자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남과 비교를 해서 판단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봤을 때 자신의 신앙이 어떤지 그걸 보고 자신의 신앙을 판단해야 제대로 잘 하고 있는 신앙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바탕이 되지 않으면 모든 불화가 여기서 다 생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 부분 이런 면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주 짧은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지만 그간 저의 경험과 주변 사람들을 보면 대개 다 그런 문제점을 가진 것 같기도 해서 이와 같은 묵상을 해봅니다. 이런 게 정립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세월 믿음의 시간을 가져도 세월만 흐를 뿐이지 자신의 신앙의 성장의 발전은 미비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믿음은 맡기는 겸손에서 /
박윤식 [big-llight] 241204. 21:16 ㅣNo.178185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이와 같을 것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말을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이다. 비에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마저 불어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집을 비유로 드셨다. 모래 위와 반석 위의 집이다. 반석 위의 집은 기초가 튼튼해 웬만한 지진, 어지간한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런 집을 짓길 원하리라. 하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기초가 너무 약해 쉽게 무너질 게다. 일부러 그곳에 집 지을 이가 어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반석 위인지, 아니면 모래 위의 집인지를 가끔은 뒤돌아보자.
참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튼튼한 신앙생활을 진정으로 바랄게다. 반석 위의 집처럼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그 믿음을! 그런데도 실천이 어려운 건 어쩜 잘 모르기에. 기초가 강하면 결실 역시 견고하리라. 그것은 성모님을 꼭 닮은 겸손이다. 그렇게 사는 게 반석 위에 집짓는 거다. 별것이 아닌데도 대부분 착각한다. 분수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면, 비천한 꼴로 꼭 전락하리라.
반석 위에 집짓기는 주로 믿음을 기초로 인생을 설계하는 것일 게다. 주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삶을 전개할 때, 우리는 세상 풍파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서 있는 존재이리라. 그러기에 주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이는, 대부분 반석 위에 집 짓는 이리라. 반대로 모래 위에 집짓기는 불신을 기초로 인생을 설계하는 것일 수도. 온갖 의심으로 부정적으로 살아갈 때, 모래알처럼 흩어질 게다. 따라서 거짓과 위선으로 주님 말씀을 외면하는 이는, 꼭 모래성을 쌓는 이다.
겸손한 이는 반석 위에 사는 이로 다들 기쁘단다. 기쁨과 함께해야 믿음이 튼튼해진다나. 이렇게 하늘 나라에는 기쁘게 산 겸손한 이들이 들어간다. 기쁘면 감사하게 되고, 감사드리면 겸손해진다. 이 세상에서는 환영받고, 저세상에서는 영광 속에 살리라. 그러니 어찌 겸손을 믿음의 기초라 하지 않을 수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는, 우리가 겸손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시기이다. 미래를 믿지 못하기에 많은 이들이 주저한다.
다들 돈과 재물에 매달리고 건강이 최고라고만 생각한다. 불안이 원인인가? 평범하게 맡길 수는 없는지? 미래도 건강도 아버지께 맡기며 살 수는 없는지? 복음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는데! 그렇다. 맡기면 보호해 주신다. 반석 위에 집 짓는 이 되자. 맡기지 못하기에 은총이 함께하지 않을 게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모양이니까. 주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모시고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능력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주님 말씀은 집을 짓는 데 중요한 반석과 같다.
그러기에 “주님, 주님!” 하고 외치지만 말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말고 그분 말씀을 실행으로 옮길 때 주님과 맺은 신뢰는 무너지지 않는다. 참된 신뢰로 주님 말씀을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받아들이자. 지혜로운 이는 맡기며 사는 이들이다.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내세우면 어리석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그분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자. 불안 속에 떨지를 말고, 즐겨 맡겨 보자.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은 명확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줍니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7,22-23).
이 말씀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가 사라진 봉사,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였지만 정작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루는 친목만이 전부인 모임들, 자기 뜻을 이루고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많은 활동,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을 잃어버린 아주 분주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먼저 기도하십시오.
성체 앞에 머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기도와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는 힘을 반드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봉사와 활동을 하십시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7,24)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활동과 봉사가 여러분을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힘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멘.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첫 걸음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 존재의
참모습을
만나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실행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올바른 실행은
언제나
반성과
새로움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실행으로
드러납니다.
말씀과 함께
호흡하는
실행입니다.
실행의 방향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어리석음의
껍질을
벗어버릴 때
생명의 참모습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행위는
생명의
발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실행의 문(門)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슬기로움은
말씀을 듣고
우리가
실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실행과 함께
주어집니다.
실행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참모습을
만나는
실행의 삶이
대림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실행의
삶입니다.
믿는 것을
실행하는
생명의 날
되십시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간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요?
요즘 저는 세상 부족하지만 교우들에게 성숙하고 균형 잡힌 성모 신심을 전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 가톨릭교회 교우들의 깊고 강한 성모 신심 앞에 놀랄 때도 많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각별합니다.
전 세계 어떤 나라 신자들보다도 묵주기도를 많이 바칩니다.
레지오 마리에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각 본당에는 성모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신 레지오 단원들이 때로 기도 요원으로, 때로 봉사 부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모 신심은 조금 성찰과 점검을 필요로 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지니는 성모 신심이 때로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성모님을 바라볼 때, 신앙의 모델이나 우리 신앙 여정의 동반자로 보기보다 우리의 끝도 없는 바람을 들어주시는 기적의 요술 방망이로 여깁니다.
30년 전 지니고 있던 성모 신심이 조금도 성장하지 않고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성숙하고 균형잡힌 성모 신심을 지니기 위해서는 복음서 안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신앙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으며, 마침내 신앙인으로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셨습니다.
우리는 카나 혼인 잔치의 어머니로서 당신 자녀들의 결핍과 고통을 절대로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는 어머니,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어머니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성금요일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서 끝까지 혼절하지 않고, 아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영신적으로 동참한 어머니, 자신에게 다가온 극심한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그 고통에 담긴 참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던 어머니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구세주 하느님의 잉태라는 자신에게 다가온 너무나 놀라운 초대앞에, 다른 부르심 받은 사람들처럼 거절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기꺼이 예라고 응답한 나자렛의 마리아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숙하고 균형 잡힌 성모 신심의 소유자는 더이상 성모님께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며
졸라대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 여정에 언제나 동반해주신 성모님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며, 이제는 내가 어머니께 무엇을 드릴까? 고민하는 그런 사람이 올바른 성모 신심 소유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남은 생애 동안은 더이상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고 졸라대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 대신 내게 베푸신 그분의 크신 업적과 자비에 수시로 감사하면서,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매일 그분께 한 가지씩 선물을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가능하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아들의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맺는 열매와 덕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말씀의 열매와 덕은 삶의 어려움에 의해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안정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25절) 비와 강물과 바람이라는 말로 인생의 온갖 상황,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박은 사람은 이런 재앙 어느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다. 바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바위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고 굳건히 서 있는데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을 인생의 모든 파도 저 너머에 올려놓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필리 4,13)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은 자가 된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며 우리 안에 주님을 탄생시키는 삶, 그래서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도 무너진다
어제 꿈을 꾸었습니다. 축구선수 메시와 함께 산속 어딘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즐거운 상태였습니다. 깊은 계곡물을 발견했고 각자 수영을 즐겼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물이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반대쪽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방향 쪽에서 뱀이 둬 마리가 헤엄쳐서 오고 있었습니다.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고 해서 ‘그냥 지나쳐 가줘라!’하는 마음으로 그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그러나 그 뱀들은 여지없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팔로 막아 팔을 두 군데 물렸습니다. ‘빨리 독을 빼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잠에서 깼습니다.
사제가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꿈을 꾸면 꿈 해석을 찾아봅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꿈은 나의 무의식의 표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뱀에 손을 물리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무언가를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새해 첫날에는 저희가 주교좌 성당이라 주교님들과 교구청, 대리구청에 근무하는 사제들이 다 오니까 좀 부담되는 날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긴장되거나 하지는 않는데 ‘그것 때문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다 보니 깊은 계곡물도, 지나가는 뱀에 물리는 것도 예전보다는 덜 무서워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뱀에 물렸을 때는 두렵기도 하였지만, 심한 두려움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직 믿음이 많지 않고, 앞으로는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존재라는 믿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키워갈까요? 성경 읽고 성체 영하면 믿음이 증가할까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그 믿음으로 살아내면서 그 믿음이 확고해지고 증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도 계속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되뇝니다. 예수님의 따듯한 심장을 갖는 게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영해서 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실천에서 이 믿음이 증거되지 않으면 내가 완전히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계속 실천으로 믿음을 확고하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주장하듯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 주님!”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신앙입니다. 믿음과 실천은 손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바퀴 빠진 손수레처럼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의 불순종은 그의 기초가 취약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위기감이 치솟자 자신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는 ‘불순종의 행위’였습니다. 믿음은 있었으니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왕직을 박탈당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위험이 닥치면 무너집니다.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다른 성당의 어떤 신자분이 오셔서 상담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모르는 분이라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교구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렇게 유명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분은 미사 때 맨 앞에 앉고 기도도 오래 합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성당에서는 어떤 봉사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내가 그분에게 아무 할 말도 없다는 것을 거짓말로 여기고는 그럼 자신도 할 얘기가 없다며 나가버리셨습니다. 본인이 먼저 면담하자고 해놓고. 그분은 적어도 아주 조금은 자신이 유명한 인물이라는 믿음이 저를 통해 줄어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져 갑니다.
반면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나 코리텐 붐 여사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이 죽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보통 인간은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통해 콜베 신부님은 당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용서하기 싫은 원수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용서할 때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행동이 예수님처럼 되지 않으면 베드로는 결코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물 위를 걷지 못할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겠어!’라고 의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며 당신처럼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할 수 있었을까요? 행동이 그리스도를 닮아있다고 스스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도 죽게 됩니다.
믿음은 집과 같습니다. 행동은 집의 기초입니다. 행동이 없으면 믿음의 집은 모래 위에 지은 것처럼 고난이 닥쳐오면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뜻에 대한 실천 의지가 확고하면 비로소 허물어지지 않는 믿음의 집이 지어질 수 있습니다. 비록 믿음이 작아도 성장시키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행동이 기초고 믿음이 집임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은 믿음 안에 사시지만, 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믿음의 집에는, 그 집이 얼마나 화려하건 간에 머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몸은 믿음의 집이고 물은 그에 따른 행위입니다. 행위가 없는 자의 믿음은 결국 익사로 끝나고 맙니다. 이 말씀을 명심합시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이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1.24-27).”
1)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믿음도 없이 다른 신앙인들이 부르는 것을 흉내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뒤의 15장에 나오는, 어떤 ‘가나안 여자’가
처음에는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 여자는 처음에는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라고 소리 질렀고, 그 다음에는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간청했습니다(마태 15,22.25).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5,24.26).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 여자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이’ 자기가 숭배하고 있던 우상에게 청하는 것처럼 예수님께 간청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들’이라는 말은, 우상숭배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간청을 들어주시기 전에 먼저 그 여자를 우상숭배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여자가 사용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호칭을 흉내 낸 것이었거나,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간청하려면 예수님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믿음 없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빈말’입니다.>
2) 예수님을 믿긴 하는데, ‘말로만’ 또는 ‘생각으로만’ 믿고, 그 ‘삶’은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대해서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26).”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3) ‘믿음’이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으로 믿는 것은 중요한 일인데, ‘믿는 대로 사는 것’이,
즉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믿는다는 말만 하는 것은, 또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입니다(야고 2,20).
<쓸모가 없다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4) 24절의 ‘반석 위에 지은 집’에 관한 말씀과
26절의 ‘모래 위에 지은 집’에 관한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돌밭에 뿌려진 씨’에 연결됩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마태 13,5-6).”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집에 관한 말씀’의 ‘비, 강물, 바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환난, 박해’입니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 또는 말로만(생각으로만) 믿고 행동으로 실천하지는 않는다,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5) 그런데 환난과 박해가 없을 때에는 ‘뿌리’가 없다는 것이 표시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편안한 시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게 되면, 그동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잘 드러나게 됩니다.
‘삶의 실천’을 통해서 신앙과 생활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고난과 시련을 잘 극복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금방 무너져 버립니다.
가지고 있던 믿음을 잃거나 버리고, 신앙의 길과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나를 믿는다면,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말고, 믿는 사람답게 살아라.”
<‘기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실천 없이 기도만 잘하는 것은 ‘빈말’입니다.
기도는 ‘삶의 실천’을 통해서만 진짜 기도가 됩니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7,21.24-27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알고 배움에 있어서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실천 없이, 배운 것을 실제로 적용해봄으로써 단단하게 다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꾸 더 많은 지식을 내 머리 속에 집어넣으려고만 하지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머리로 알게 된 것은 실제로 해봐야 ‘진짜 내 것’이 되는데 그 과정을 생략하기에, 행함을 통해 제대로 알고 나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머리 속에 있는 것을 ‘안다’고 착각한 상태에서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만 하기에, 앞을 향하고는 있지만 정작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를 지탱할 단단한 반석이 없기에 내가 발을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마치 늪에서처럼 푹푹 꺼져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과 기도 중에 대화할 때나, 성경 공부를 통해 그분 말씀에 대해 배우고 난 뒤에, 그것이 나의 구체적인 행동과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는지 아니면 그저 머리 속에서만 맴돌며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자기의 부족한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게 만드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하느님과 그분 뜻에 대해 아는 지식은 그것으로 인해 나의 삶이 변화될 때에야 비로소 나를 참된 길로 이끄는 진정한 지식, 즉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행동과 삶이 변화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쁨과 보람을 느껴야 더더욱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생활에 정진하고 싶다는 의지와 힘이 생기지요.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건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깨달았다면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시간만, 성경 공부하는 양만 늘려가면 그건 나의 거룩함을 과시하는 위선이 되고 타인의 부족함을 단죄하는 교만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건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아닙니다.
한편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내 뜻과 바람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 중에 어디로 가고 싶냐’고 누가 물으면 당연히 천국에 가고 싶다고 답하지만, 그 천국에 지금 당장 가야한다고 하면 망설여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기 싫은 건 아니지만, 내가 이 세상에 만들어 놓은 ‘내 왕국’을 포기하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은 것이지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왕국이 있습니다. 내가 주인인 나라,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나 좋을대로 하는 그 상태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는 겁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분 나라에서 종처럼 살기보다 내 나라에서 왕처럼 살고 싶습니다.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분 뜻을 따르며 살기보다 내 뜻을 이루며 살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그분 백성으로써 제대로 살 수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결단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입으로만 ‘주님 주님’ 거리지 말고 하느님을 내 삶의 참된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섬기라고, 말로만 ‘아멘 아멘’ 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라고, 그러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세워놓은 왕국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내 왕국이 아무리 크고 대단해 보여도, 내 욕심과 집착으로 억지로 쌓아올린 왕국은 고통과 시련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리면 금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약하디 약한 ‘모래성’일 뿐입니다. 그런 건 백 채 천 채를 갖고 있어도 다 부질없지요. 그러니 그 어떤 모진 파도와 거센 바람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벽돌집을 내 마음 안에 지어야겠습니다. 그 집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순명을 통해서만 지을 수 있습니다.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
우리는 주위 사람으로부터 어떤 사람을 놓고 ‘그 사람은 진국이야!’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아!’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주님께서 ‘모래위의 집’과 ‘반석 위에 집’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그 기준을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실천은 오랜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몇 가지의 행동을 보고는 ‘진국’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지요.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사람이 이웃의
진실하고 우직한 삶을 보고 하는 말이 바로 ‘진국’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여기서 모래와 반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모래는 잘게 부서진 돌들인데,
누구도 그것을 작은 돌이라 하지 않습니다.
모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움직이는 것의 반대인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모래는 한 자리에 있지를 못하고 물이 내려오면 움직이고 떠내려가기 까지 하지요. 그런데
이와 반대로 커다란 바위는 어떤 홍수 같은 물벼락이 몰아쳐도 그 자리를 지키는 충실함을 지키고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이해관계로 바로 변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한결같이 변하지 않고 곁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내가 그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데도 변함없는 신뢰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 하느님을 닮아 인간관계에서도 ‘진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시온에 서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변함없는 하느님의 집으로 여깁니다.
그 성전은 견고한 성 안에 있어서 세상의 어떤 전쟁이나 이변이 있어도 늘 그 자리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의 희망과 위로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이사 26,1-2)
구약에서 하느님을 표현 할 때 흔히 ‘바위’나 ‘성채’, 또는 ‘보루’에 비유해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사람은 늘 음직이고 방향도 잡기 힘든 ‘바람’으로 보지만 그만큼 하느님만이
변하지 않으신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견고한 성읍, 보루를 비유해서
겨레를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든든함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변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구원으로 이르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24-25)
우리 사회는 말 많은 사람, 변덕이 많은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을 은근히 꺼려합니다
.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는 많은 경우 오래가지 못하지요. 그런데 말 많은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역사적 문화 배경이라 그런가요?
이곳에서 산행을 하다보면 한국 사람들과 마주 칠 때가 있습니다.
얼굴을 보거나 행동을 보면 거의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얼굴이 굳어 있거나 말 없이 딴전을 부리며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분위기가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의 대부분의 경우는 몇 마디를 꼭 하며 눈인사를 하고 미소를 보입니다.
그래서 산행의 분위기는 낮 설지 않고 기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동족이면서 어색하고 멀게만 느껴지지요.
사실은 수다스럽고 쓸 데 없는 말참견도 꺼림없이 하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말이지요.
우리는 말 없는 사람, 점잖은 사람으로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 때문일까요? 그래서 실없이 웃거나
말을 걸면 안되는 것일까요? 유머와 부드러움, 그리고 남에게 대한 배려와 따뜻함을 간직한
성실하고 신의를 가진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성숙한 사람이겠어요?
주위 사람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진국’의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분명 성숙한 신앙인일 것입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 그래서 늘 주님의 말씀을 입에 발리거나 머리에만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니라 말씀을 조화롭게 실천과 배합하는
그래서 변함없는 ‘진국’의 삶을 사는 오늘의 우리가 되어야 하겠지요.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41205. 대림 제 1주간 목요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