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321임진왜란[壬辰倭亂]
400여년 전 어느 날, 한양의 백성들이 남산에 있는 봉수대에서 다섯 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대. 조선 시대에 봉수대는 연기와 불로 급한 일을 전달하던 통신 수단이었어. 특히 한양에 있는 남산 봉수대는 우리나라 전 지역의 소식을 모으는 곳이었지. 게다가 다섯 줄기의 연기는 위급한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인 거야. 도대체 어떤 큰일이 벌어진 걸까?
임진왜란의 발발 - 1592년 4월, 일본이 침입
10만 군사를 기르자 - 이이의 십만양병설
1583년 어느 날, 이이는 왕을 찾아가 “나라가 태평하니 군대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아 적이 침범해 와도 막아낼 수 없습니다.”라며 10만의 군사를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얼마 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소식에 조정에서는 일본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사신으로 보냈지. 황윤길은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전쟁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김성일은 반대했어. 그리고 10년 뒤, 일본은 2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어.
빠르게 밀려오는 왜군
1592년 4월, 왜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어. 왜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한양을 향해 쳐들어왔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조선 군대는 여기저기서 패하고 말았지.
선조는 신립 장군에게 희망을 걸었어. 신립은 탄금대1)에서 배수진2)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막아내는 것은 어려웠지. 결국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졌어. 왜군은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지.
조선 시대에는 긴급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국경 지역에서 한양까지 이어지는 전국의 주요 산봉우리에 횃불이나 연기를 피울 수 있는 봉수를 설치했어. 여러 갈래로 나뉜 봉수는 한양의 남산에 모여들었는데, 평상시에는 횃불을 한 개, 외적이 나타나면 두 개, 외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개, 국경을 넘으면 네 개, 접전이 벌어지면 다섯 개를 올렸어. 날씨 때문에 횃불이나 연기를 피울 수 없을 경우에는 대포, 뿔피리 소리로 알리거나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렸지.
봉수는 빠르지만 자세한 소식을 전할 수 없었고, 비밀리에 알리는 것이 불가능해 ‘파발’이란 걸 만들었어. 파발은 약 30리(12km)마다 역참을 만들어 릴레이 방식으로 문서와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인데, 말을 타고 달려가는 ‘기발’과 걸음이 빠른 사람이 달려가는 ‘보발’이 있었어.
의병과 관군의 승리 - 조선의 반격이 시작되다
의병(義兵)
전쟁 초기에는 관군의 패배로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에 처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손에 죽었고, 온 나라가 일본군에 짓밟혔지.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분이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우리 수군이야.
한편, 바다에서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어. 의병이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난 의로운 병사들을 말해. 의병은 마을의 지리에 밝다는 이점을 이용해 매복·기습·유격(게릴라)전을 벌이며 용감히 왜군을 막아냈지. 주로 전직 관료와 유생, 승려가 의병장이었고, 농민이 중심이 되었어.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은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경상도의 곽재우와 정인홍,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고경명과 김천일, 함경도의 정문부 등이 있어. 또 묘향산의 서산대사와 금강산의 사명대사도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쳤지. 특히 곽재우는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채 백마를 타고 싸워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는데, 왜적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해.
행주치마를 두르고 - 행주 대첩
이처럼 수군과 의병의 활약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명나라의 구원병이 도착했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1593년 1월 평양성을 공격하여 되찾았고, 후퇴한 왜군은 행주산성으로 향했지. 이때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백성들과 관군이 죽을 각오로 싸워 왜군을 물리쳤어.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 대첩이야.
특히 행주 대첩 당시 왜군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 그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어. 이때 입은 앞치마를 부녀자들의 공을 기린다는 의미로 ‘행주치마’라고 부른 거야.
코무덤, 귀무덤
일본의 교토에 가면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적이 있어. 조선 사람들의 코를 베어가 묻어 놓은 귀무덤(耳塚)이 바로 그것이야. 그런데 왜 이런 무덤이 생겼을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람의 귀는 둘이고 코는 하나다. 죽인 조선 사람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보내라.”라는 상상도 못할 악랄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야. 그러자 왜군들은 군인과 민간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코와 귀를 베었어. 전쟁의 끔찍함을 상상할 수 있겠니? 그런데 우리 선조들의 한이 서려 있는 귀무덤과 코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진주 대첩과 진주성 함락 적장을 안고 뛰어 내리는 논개
1592년 4월, 전쟁이 시작된 후 일본군의 세력은 파죽지세3)였어. 그래서 전쟁 초기 1~2개월 동안 관군은 계속 지기만 했지. 하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조선군도 승전보4)를 보내기 시작했어. 대표적인 전투가 10월에 벌어진 진주성 싸움이야.
당시 진주 목사 김시민은 4,000명도 안 되는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어. 3만에 가까운 일본군에 비하면 크게 열세였지. 10월 6일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어.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성벽에 기대어 놓고 그것을 밟고 기어올라 성벽을 넘으려 했지. 또 3층짜리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조총으로 사격을 가했어.
하지만 성안의 백성들은 김시민의 지휘 아래 활을 쏘아 일본군을 막아내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에게는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끼얹어 물리쳤어. 일본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어. 하지만 아쉽게도 김시민은 왜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지.
그런데 1593년, 진주성에서의 패배를 앙갚음하려는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어.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은 함락당하고 말았지. 이 싸움 당시, 논개라는 여성은 적장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순국했어.
불타고 있는 경복궁
전쟁은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됐어. 명군과 일본군이 두 차례의 전투를 치른 뒤 1593년 4월, 휴전 회담을 시작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어서, 백성들은 왜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나라 군대를 먹여 살리느라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어.
1597년 일본이 휴전 회담을 깨고 다시 쳐들어 왔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해. 하지만 조선의 육군과 수군은 왜군을 모두 물리치고 전쟁을 끝냈어.
7년에 걸친 두 차례의 왜란으로 온 나라는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잡혀갔어. 또 정부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백성에게 곡물을 받고 벼슬을 팔아 신분을 높여 주어 신분 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어.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 경복궁, 불국사 등이 불에 타는 등 문화재의 손실도 컸어. 그리고 도자기 기술자와 성리학자들이 일본에 납치되어 갔는데, 이들은 후에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돼.
임진왜란을 부르는 다른 말
일본은 원래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보잘 것 없어서 우리나라처럼 청자나 백자를 만드는 건 꿈도 꾸지 못했어.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의 훌륭한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지. 납치된 도공들은 쉴 틈 없이 도자기를 만들고, 일본인에게 기술을 가르쳤어.
조선 도공들 덕분에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게 된 일본은 17세기 중엽부터 유럽에 백자를 수출했어. 이로 인해 유럽은 일본을 ‘도자기의 나라’로 부르기 시작했어. 그러나 뛰어난 기술자를 모조리 빼앗긴 조선에서는 오히려 도자기 문화가 후퇴하고 말았지. 임진왜란이 조선과 일본의 도자기 기술을 서로 뒤바꿔 놓은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해.
장군의 생애
이순신 장군은 1545년 서울에서 태어났어.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했던 그는 28세 때 무과(武科)에 응시했지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거꾸로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낙방을 했어.
하지만 4년 뒤 무과에 합격한 후 여러 변경 지역의 장수와 정읍 현감을 거쳐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었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전라 좌수사로 있던 이순신은 1592년 5월 옥포 해전을 첫 승리로 이끌었어. 이어 사천·당항포·한산도·부산포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지.
거북선
거북선은 조선의 판옥선을 개량해 만들었어. 판옥선이란 조선 수군의 전투함이야. 노를 젓는 1층과 함포를 발사하는 2층으로 구성된 크고 높은 배로, 왜군이 쉽게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했지. 거북선은 돌격용 전투함으로, 구조는 판옥선과 비슷하지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심이 박힌 거북 등딱지 같은 것이 있고, 그 아래 노를 젓는 사람과 포를 쏘는 포수가 있었어.
또한 뱃머리에 용머리와 도깨비 머리를 달고 있어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지. 또한 2개의 돛이 기동력을 높일 수 있어, 적의 배 사이로 깊숙이 침투하여 접근전을 펼칠 수 있는 조선 수군의 최고 무기였어.
한산도 대첩
이순신 장군의 가장 통쾌한 승리가 뭘까? 바로 세계 3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 대첩이야. 1592년 7월 몇 차례의 해전에서 패한 일본 수군이 모든 함대를 모아 총공격에 나서자,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했어. 그런 다음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적의 함대를 둘러싸 포위하는 ‘학익진 전술’을 폈지. 포위당한 왜군은 많은 군사와 배를 잃고 도망치기에 바빴어.
명량 대첩
1597년 8월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돌아왔을 때, 남아 있는 배는 겨우 13척이었어.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실망하지 않고, 부녀자들에게 강강술래를 하며 빙글빙글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 같이 위장하고, 물살이 거센 울돌목(명량)으로 왜선을 유인하여 133척을 대파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어. 그것이 바로 명량 대첩이야.
노량 대첩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어. 1598년 11월,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일본군 전함 300척과 노량에서 최후의 해전을 벌였어. 안타깝게도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을 맞아 사망해.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죽는 순간까지도 “싸움이 위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대. 우리 민족의 진정한 영웅은 이렇게 죽음을 맞았어.[검색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