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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에서 전도
행 17:1-9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행 17:1-9 /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소동]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갔다. 거기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으므로 2) 바울은 늘 하던대로 회당에 가서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펴놓고 설교를 하였다. 3)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설명하고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였다. 4) 청중 가운데 여러 사람이 감동을 받고 신도가 되었다. 많은 경건한 헬라 사람과 그 도시의 귀부인들도 신도가 되었다. 5) 그러나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폭도들이 바울과 실라를 끌어내어 시의회에서 처벌받게 하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6) 폭도들은 거기서 두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자 그 대신에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끌고 의회로 가서 아우성을 쳤다.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은 바울과 실라가 이곳에도 왔는데 7) 야손이 그놈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소. 그놈들은 모두 가이사 대신에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반역자들이오.' 8-9) 이 말을 들은 시민과 치안관들은 이 일을 처리하는 일로 한때 떠들썩하였으나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놓아 주었다.
사도 바울의 세 차례에 걸친 이방 전도 여행 중 제 2차전도 여행(행15:36-18:22)의 일부분으로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유럽 선교의 중심지 데살로니가(1) 바울의 일행은 빌립보에서 사역 도중 투옥 되었다가 명예롭게 풀려난(행 16:11-40) 후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를 지났습니다. 이곳은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약 52km 아볼로니아는 암비볼리에서 또 50km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볼로니아에서 다시 58km의 서방으로 내려오면 데살로니가가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일행이 장장 160km의 긴 도보 여행을 한 데살로니가는 당시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 도시이며,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회당도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선교 전략(2-3) 빌립보에서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 강변 기도처를 사용했지만, 데살로니가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라 함은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며, ‘세 안식일’이라는 것은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을 머물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한 것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행 13:46; 롬 1:16)라는 그의 전도 원칙을 따른 것이며,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신 전도방법이었습니다(눅 4:16). 그리고 바울의 모든 선교전략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선교전략은 비시디아 안디옥(13:14-41)을 위시한 모든 선교지역에서의 선교주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초대교회 선교의 대강령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선포해야 할 것은 오직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어야 합니다.
복음전파의 결과(4-9)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복음을 영접 했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해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선포되면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 두 종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생명을 얻는 기쁜 소식이 되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소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문제로 바울을 시기하며 반대하였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전도자들을 박해하며, 불량한 자들을 앞세워서, 소동함으로, 성도들을 핍박하고, 권력의 힘을 동원하여, 불명예로, 반정부주의자로 모략함으로 고소했습니다.
적용: 바울 선교는 오직 예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고 전하는 복음은 어떤 것 입니까?
저에게는 누구보다 이쁜 초등학생 딸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딸이 "아빠, 영어로 가족이 뭔지 알아?" "Family지." "그럼 아빠 Family의 어원이 뭔 줄 알아?" 딸이 '어원'이라는 말을 쓰는 것에 놀라면서 동시에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난감했습니다. 가족(family)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고대 로마에서 하인이나 노예를 가리키는 말. 논, 밭, 집, 가축처럼 한 남자에 속한 생산도구를 지칭하는 단어에서 현재의 가족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딸에게 설명할까 고민하는데 딸이, "아빠는 그것도 몰라? Father+And+Mother+I+Love+You. '아빠 엄마 사랑해요'를 섞은 거잖아." 저는 웃으며, "그래, 미영이 말이 맞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설 교 >
천하를 어지럽게 한 사람들
행 17:1-15 / 김 조 목사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한 오늘의 삶 속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잘하는 것 같으면서 잘 못가고 있고 또 포기한 인생처럼 막되게 살아가기에 세상은 혼란스럽고 복잡해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 각계가 혼란해져 있습니다. 어디에 소망을 두고 어떤 방향으로 달려야 할지 방황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진정 내가 살고 가정이 회복되며 나라와 민족이 복 받고 사는 길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우리를 찢으셨으니 낫게 하실 것이요 치셨으니 싸매어 주시겠다(호6:1)하셨으니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 밖에 없음을 먼저 믿는 민족의 양심인 우리 성도들이 바르게 제시하고 가야합니다. 100년 전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좌절과 혼돈 속에서도 성령 충만 받은 성도들 통해 평양에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나라를 구하는 핵심이 되었으니 이제 이 땅에 그 역사가 재현되기를 기도해 온 삼락교회 성도들이여! 이제 시작되었으니 이 때 놓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함으로 하나님께로 영광이요 우리에게 큰 기쁨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이 2차전도 여행에 결정이라 할 수 있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의 전도가 오늘 말씀입니다. 아시아로 가고자 할 때 성령께서 막으시고 마게도냐 환상 보여주신 것(16:6-10)이 그 당시에 세계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가 있는 남부유럽을 복음화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이곳이기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곳이요 오늘날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이루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쳐 세계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1차전도 여행 때도 그러했고 예수님이 복음 전파했을 때도 구원 받는 자와 반대자가 있었던 것 같이 데살로니가에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는 귀부인들이 믿게 되었으니 시기가 난 유대인들이 불량배를 동원하여 소란을 일으켜 바울 사도가 머물던 야손의 집을 수색하여 잡지 못하니 그 가족들을 잡아 관청에 고발하기를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자들이 여기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로마의 법질서를 어기고 예수를 왕으로 삼는다고 하며 정치적 죄목을 씌운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한 말이지만 사도들은 사단의 천하를 어지럽게 하며 방황하는 자를 하나님께 인도했던 것으로 오늘 우리도 사도들처럼 혼탁한 천하를 어지럽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되기 원하여 “천하를 어지럽게 한 사람들”이라 제목하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사명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1-6절)
빌립보에서 좋은 일 하고도 고발되어 엄청난 고초를 당하였던 사도들이 160km나 떨어진 데살로니가에 와서 죽을힘을 다해 전하고 있음을 살전2:2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니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복음전파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기에 극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한 것으로 생명보다 사명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담대할 수 있고 천하를 정신 차리게 사단의 세력을 어지럽게 하는 능력자 된 것입니다. 자기의 사명도 모르고 육체의 안일마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먹기 위해 사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 위해 창조하셨다고(사43:7)하셨고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벧전2:9)하셨으니 복음전파가 우리의 사명이기에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고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바울사도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득불해야 할일이라고(고전9:16)했고 최선 다해 복음 전파함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로 세상 썩었다 탓만 하지 말고 우리가 썩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일 제시에 사회를 계몽 하여 문맹을 퇴치시키며 소망을 주워 이 나라를 이끌 어떤 기독교입니다. 다시 한번 이런 역사 있도록 우리의 사명 의식 새롭게 함으로 이 민족 살리는 역사를 이루시기 원합니다.
2.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사람입니다.(1-3, 10-11절)
빌립보에서 그 고난을 받고도 “유대인의 회당”을 찾고 “자기규례대로” 복음 전하였으며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라 하지만 자기 동족 유대인을 구해야 한다는 것으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13:46 롬1:16)하여 어느 곳이나 회당에서 전도한 것이 자기 전도의 규례가 되었던 것이요 전도의 핵심 또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과 심판으로 성경 말하는 그리스도가 곧 예수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믿어 달라고 애원하거나 사정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 갖고 선포하는 것으로 당당하고 자신 있게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1:5)하시던 예수님의 권위를 보게 됩니다. 성도여! 우리는 예수 믿어 구원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천국 시민입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자신 갖고 이 복음 전해야 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목적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의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는 귀부인이 있었고 베뢰아 사람을 신사적이라 말씀 받아 믿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적대시하는 유대인들이 많아 고초를 겪으면서도 확신 갖고 선포하여 어떤 환경이나 그것을 이겨내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천하에 구원 받을 만한 이름 예수 밖에 없다고 힘서 확신 갖고 선포하여 사단의 올무에 죽었던 자들 다시 살려내는 능력 있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3. 좋은 결과가 있게 됩니다.(4-7, 10-13절)
극렬한 반대자들인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 가는 곳마다 따라와 방해하고 고통을 주웠으나 유대인에게 먼저라고 하며 가는 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반대자들이 유대인들이 때마다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명에 불타고 확신 갖고 선포하는 곳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많은 사람이 믿게 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메게도냐의 수도로써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로 “영토의 심장”이고 불리던 곳이라 그러기에 바울사도는 이곳을 발칸 반도의 전역에 복음을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고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저항을 받기는 했으나 베뢰아 사람은 신사적이었다. 이 말은 가문이나 출신성분이 귀족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탐구하며 악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하였다는 것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을 받았으니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신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고 날마다 성경을 삼고하였기에 미든 자가 더욱 많아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천하를 어지럽게 복음 전하는 자에게 좋은 결과가 있게 됩니다.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계속적으로 주의 일함으로 좋은 결과를 받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마치겠습니다.
평양의 대부흥100주년이 행사요 구호로 끝나면 안 됩니다. 진정 내가 살고 살맛나는 나라와 민족 만들 수 있 복음전파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명하신 사명의식 새롭게 하여 생명보다 더 귀한 줄 알고 최선을 다하시고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고 확신 갖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여 좋은 결과 얻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두 부류의 사람들
이성우 목사
오늘은 3월 들어 첫 번째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이제는 기온도 제법 봄기운이 완연해 져서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데 그 중에 날씨가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각 계절들은 제각기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가지고 있는데, 봄의 계절은 우선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와 산천초목, 그리고 우리 몸과 마음을 녹여 줄 수 있어서 참 좋은 계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따뜻한 봄기운을 머금고 만물이 새롭게 약동하는 이 생명의 계절에 그동안 여러 가지 상황과 이유들로 인해서 꽁꽁 얼어붙었던 여러분들의 영혼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넘쳐나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는 마음도 따뜻함과 열정으로 가득해 져서 행복과 웃음이 넘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창조 이후로 계속해서 크게 두 부류의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의 상태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시고 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각각 낮과 밤이라고 칭하신 것이 6일 동안의 창조 사역 가운데 첫째 날에 이루어 진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였던 이 세상은 질서와 충만함, 그리고 광명의 세계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이 질서와 광명의 세상이 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던 이 세상이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세력인 사탄의 개입과 역사로 말미암아 질서와 혼돈이 공존하며 광명과 흑암이 교차하는 세상이 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갈등과 긴장의 세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언제든지 분열과 분쟁, 미움과 질투, 분노와 다툼, 그리고 파괴와 죽음을 불러오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간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투쟁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확실한 승부로 끝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탄의 영역인 죄와 죽음의 권세를 짓밟아 버리고 의로움과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셨던 것입니다. 이 날의 승리는 대 역전승의 승리이기 때문에 더욱 빛나고 멋진 승리이며, 통쾌함을 맛보게 만들어 주는 승리였습니다. 감사하고 행복한 것은 이 놀라운 영광의 승리가 하나님의 만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몫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최후의 승리, 승리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마지막 날에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탄이 공중의 권세를 잡고 역사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사탄과의 영적인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의 역사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탄의 역사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에 행하실 심판을 통해서 사탄이 무저갱에 갇히게 되는 그 날에 영원히 끝나게 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들은 최후의 승자가 되어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이 땅에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되어온 하나님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로 인해서 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흐름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생명과 죽음의 공존과 갈등, 신앙과 불신앙의 대립과 긴장관계,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엄염한 존재, 더 나아가서 감사와 불평의 대치와 그 결국이 하나의 역사 속에서 공존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과 모습은 우선은 우리 인간 자신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하나님의 선물로 세워진 가정 안에서조차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며, 그 범위가 확대되어갈수록 사실은 더욱 분명하고 치열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고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대립과 갈등 관계 속에서 자기들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사탄의 손아귀에서 사탄의 지배와 조종을 받는 존재로 전락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안타깝고 놀라운 사실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 속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사탄의 하수인처럼 그 역할을 감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만들거나 실족하게 할뿐만 아니라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도록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출애굽 공동체인 모세 공동체 안에서도 있었으며, 심지어는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부르심을 받고 만들어져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12제자들 가운데도 있었고 초대교회 안에도 존재했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의 서신서의 말씀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온 몸을 바쳐 헌신적으로 세워 섬겼던 교회들 가운데서도 쉽게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며, 안타깝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음을 잊지 마시고 긴장감을 가지고 자신과 신앙 공동체를 이 악한 사탄의 역사로부터 지켜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탄의 역사에 반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 또한 줄기차고 신실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시대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일꾼으로 부르셔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며,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여 주심으로 사탄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의 도구가 되어서 쓰임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을 꼽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2제자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강권적인 변화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는 정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감당했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자신을 헌신한 사람으로 목숨을 걸고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한 사도 중에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에도 여지없이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이 곳곳마다 어디든지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해꾼들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에는 그의 복음 사역을 도왔던 유명 무명의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헌신적인 섬김과 동역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선교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많은 동역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사도 바울과 같이 천막을 만드는 업을 가지고 있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자신들의 목이라도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내놓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7장 1절-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성령의 보내심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이었을지라도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의 현장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늘 그러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어디든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고 핍박하려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과 실라 일행의 소아시아와 유럽을 향한 2차 전도 여행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바울의 유럽 선교는 오늘날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역사상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바울 일행이 마게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인 데살로니가에서 약 한 달여 동안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더니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영접하였는데, 그 곳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그것을 시기하여 벌인 소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 일행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어디든지 복음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전도자들을 영접하며 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복음을 배척하고 전도자들을 핍박하며 복음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아니면 은근한 방법으로 방해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바울 일행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하심으로 사역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으며 어려움 중에도 복음의 열매가 맺게 하심으로써 사역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바 복음 전파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표현을 쓴다면 이러한 사실은 복음 전파에 대한 사탄의 방해 공작이 있지만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못했을 때에는 자신의 욕심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가 예수님께로부터 심하게 책망을 받은 일이 있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이후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 개인의 경우에도 정 반대의 두 부류의 삶이 교차하며 공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십니까?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진리 편에 서서 고난을 감수하면서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며 감당하는 일에 사도 바울처럼, 그리고 그의 증거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대했던 사람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십니까? 아니면 보이지 않게 사탄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신의 욕심스런 생각에 이끌려서 알게 모르게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거나 복음의 역사에 걸림돌이 되었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십니까?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은 적극적인 방해도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해당되며 그 결국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가운데 복음의 역사에 적극적인 협력자요 동역자들이 되셔서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 나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
박찬길 목사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Pentecost)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내려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부활절후 50일째 되는 날이라서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지난 한달 동안 성령 충만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성령강림절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미리 알고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면 더욱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게 됩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게 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 겁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변화되었다는 겁니다. 생각이 변화되고 가치관이 변화되고 의식구조가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니까 새로운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가만히 있지를 못하지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전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회개설교를 하니까 3천명이 돌아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니까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사도들이 여기 저기로 흩어져서 생명을 살립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살아납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납니다. 각양각종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얼마나 큰 변화가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 초대교회에만 잠깐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도 역사하고 미국에도 역사하고 한국에도 역사합니다. 이번 여름에 우리 청년들이 단기선교를 가는데, 두 명이 더 늘어서 네 명이 간다는데, 가보면 알지만 터키에도 역사하고, 이란에도 역사하고, 팔레스타인에도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성령 충만은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게 나타나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령은 은사로 나타나서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여러 가지 은사가 나오지요.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통역을 주십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방언을 하게 됩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게도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평안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이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평안이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을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에 평안이 있지요.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뜨겁습니다. 찬양을 드리면 기쁩니다. 교회에 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삶의 생기가 넘칩니다. 주일날 제자훈련 클래스가 있는데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2부 예배가 끝나면 좀 쉬었다가 시작하는데, 얼마나 뜨거운지 일찍 끝나도 밤 10시입니다. 보통은 11시에 끝납니다.
지난주간에 연회에 갔다가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자훈련 얘기를 했더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 제가 보기에도 그 사람들 제정신(?)이 아닙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요?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에서 헌신하다가, 월요일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주일 밤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가니 제정신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제자 훈련하는 거에 겁먹지 마세요. 제자훈련을 하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이처럼 피곤해도 피곤하지가 않은 겁니다. 지칠 줄을 모릅니다. 신이 납니다. 삶의 생기가 넘치고 의욕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일에도 능률이 납니다. 공부도 잘 됩니다. 가정도 화목이 넘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 충만은 이렇게 좋은 거예요.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것이 성령 충만이에요. 금보다 귀한 것이 성령 충만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성령 충만을 구하셔서 성령 충만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인들 중에는 성령 충만을 원하면서도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성령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성령 충만해야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못해서 답답하게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원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다면 원인을 분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원인을 분석하잖아요. 무엇이 잘못됐나?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나?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찾아내면 문제가 해결되어 순조롭게 나아갑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성령 충만을 원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다면 자신을 낮추고 말씀을 들으며 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나에게 성령 충만을 막고 있는 둑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깨닫기만 하면 성령 충만은 자동적으로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과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의 일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합니다. 3절에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내가 전하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이잖아요.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 구세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짧은 기간 동안 전도를 했는데, 2절에 보면 세 안식일이라고 했거든요. 세 주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헬라인의 많은 무리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소요를 일으킵니다.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아다닙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을 사람은 유대인이잖아요. 유대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구세주를 갈망하고 있었잖아요. 구약성경에서 그것을 증거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으면 믿어야지요. 헬라인의 많은 무리들과 많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른 것처럼 그들도 따라야지요. 그런데 그들은 핍박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를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복음이 증거될 때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핍박하는 사람이 있듯이, 교회를 다니면서 성령 충만을 받는 사람도 있고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이나 성령 충만을 받거나 안 받는 것은 원리에서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유대 사람들을 보면서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 설교가 비약인지도 모르고 적용이 잘못됐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것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로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고정 관념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지난해인가 해군사관학교 학생들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에 이상한(?) 지도를 봤습니다. 우리 나라 지도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겁니다. 서울이 아래에 놓여 있고 부산 제주도가 위에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런 지도는 본적이 없거든요. 우리는 서울이 위쪽에 있어야 하고 제주도는 아래쪽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교육을 통해서 고정된 사고방식이지요. 사실 지형의 실물이라는 것은 바라보는 곳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는 거예요. 서울이 아래쪽에 있을 수도 있고 부산 제주도가 위쪽에 있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보셨나요?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지만 고정관념을 깨면 더 넓은 세계관을 볼 수가 있고 더 넓은 세계관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지도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은 해군이 세계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의미로 만든 것인데, 그런 우리 나라 지도를 보니까 그 생각이 나더라구요. 우리 나라가 진해 부산 제주도에서 태평양을 향해서 세계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그냥 들어오더라구요. 저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잘못된 고정관념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거예요.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도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실 분이 아니거든요. 죄인들과 어울리는 분이 아니에요. 자기들이 생각하는 구세주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자기들의 고정관념을 정해놓으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구약성경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와요. 그런데도 자기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의 잘못된 고정관념 중에 하나는 성령을 받지 않고도 신앙 생활하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령 받지 않으면 교회 다니는 데에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지 않으면 예수 믿는 데에는 문제가 됩니다.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성령 충만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아시지요. 공부하는 것하고 학교 가는 것하고, 직장 다니는 것하고 일하는 것은 다른 거예요. 교회 다니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거예요.
보세요. 성령 충만하지 않고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가 있고,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고,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고, 얼마든지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분들은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히 받지 않고는 예수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은혜의 단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성령 충만해야 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해야 신앙생활이 바로 되는 겁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오늘 이 시간에 다 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의 잘못된 고정관념 중에 하나는 성령이 나에게 임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성령이 나에게 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분들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개입하셨잖아요. 그런데 착각하지 마세요.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바울은 믿음의 열정이나 실력이 대단한 분이에요.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개입하신 거예요. 방향을 고쳐주신 거예요. 이런 것을 가리켜서 특별 은혜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바울과 비교할 수도 없으면서, 아니 어떤 면으로 봐서도 비교할 상대가 되지도 않으면서 바울처럼 성령이 임하실거다. 꿈 깨세요. 성령은 구해야 하는 거예요. 나는 가만히 있고 성령께서 모두 알아서 해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미신이에요. 성경 여러 곳에서 성령을 구하라고 했어요.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구하는 거예요. 구할 때에 성령이 역사하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령 충만의 고정관념을 모두 깨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깨도 아프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을 깨야 성령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둘째, 자신의 자아가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사사기 시대의 상황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겁니다. 사사 시대 이전에는 일만 있으면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갔어요. 그래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이었어요. 그런데 사사시대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거예요. 이 사람도 자기의 뜻대로 하고, 저 사람도 자기의 뜻대로 했어요. 사공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자아가 강할수록 성령을 가로막습니다. 내 신념이 강할수록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나의 주장, 나의 경험, 나의 판단, 나의 철학, 나의 비전..., 이런 것들로 채워져 있으면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계획, 완고함, 고집이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은혜도 차단시키고 성령의 역사도 제한한다는 겁니다.
때때로 기도할 때도 보면 기도가 잘못되어서 성령 충만을 차단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것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내 식으로 성령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성령 충만하게 해주시고 저것은 저런 식으로 성령 충만하게 해 주세요. 심지어는 누구와 같이 성령 충만하게 해 주세요. 자신이 생각하는 성령 충만의 공식을 세워 놓고는 성령 충만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하게 되나요? 이런 것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내 자아가 강한지 안 강한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속회에 가시거든 말씀 나눔을 할 때에 다른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만 강하게 이야기한다. 대화가 안 된다. 그러면 자아가 강한 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 스스로 관리하지 않으면 내 자아는 저절로 강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 자아를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가 강해져서 성령 충만하게 하는 것을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된다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자아가 성령 충만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모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경험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가치판단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철학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셋째, 불순종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삼으셔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초대교회도 보면 제자들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되는데 아무나 데려다가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120명의 사도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여기에 순종합니다. 순종할 때에 성령이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모이지 않았다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종종 한국에 가서 부흥회를 해 보면 말씀에 반응하는 모습이 여기와는 좀 다른 것을 느낍니다. 먹고사는 것은 여기가 월등한데 신앙생활의 열정이나 아멘은 한국이 더 낫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할 때에 경험하는 것인데 순종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침체되는 겁니다. 이민사회에 얼마나 유식하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 유식함이 순종하지 않는 걸림돌이 된다는 겁니다. 순종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성령 충만이 안 되는 겁니다.
어느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이 성도는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도 헌신하지 않고 계속 구하기만 했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겁니다. 불순종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으면 순종해야 합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성령 충만하면 헌신하게 되지만 헌신하다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성령 충만하면 기도하게 되지만 기도하다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성령 충만하면 전도하게 되지만 전도하다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가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을 터트려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을 제거하지 않고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얼마나 완고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견고하게 쌓아놓았는지 웬만한 역사에는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정 관념과 자기 계획이나 불순종과 고집이 꺾여야 합니다. 꺾여야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고, 둑이 터져야 강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을 모두 제거하셔서 하나님이 성령 충만하게 하실 때에 그 은혜를 다 받아드려서 언제어디서나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저희 심령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을 모두 깨트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강한 자아와 불순종을 깨트리게 하셔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하게 되는 심령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한 삶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모든 교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데살로니가 전도
김영규 목사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
오늘은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빌립보를 떠난 바울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1) 이 도시들은 마게도냐를 통과하는 로마의 “이그나시아 가도”(Via Egnatia) 위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암비볼리는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약33마일(약53km) 떨어진 곳에 있는, 마게도냐 동부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아테네의 식민지였다가 로마 시대에 이 지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고대 별명은 “아홉개의 길”이라 불리웠는데 그 이유는 트라키아와 마게도냐의 많은 길들이 여기서 교차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 도시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일찍이 식민지로 만들고 암비볼리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암비볼리의 뜻은 둘러 싸인 도시란 뜻으로, 스트뤼몬 강 하구에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입니다.
아볼로니아는 암비볼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30마일(약48km) 지점, 암비볼리와 데살로니가 사이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건강한 사람의 걸음으로 걷는다면, 빌립보에서 암비볼리까지 하루, 암비볼리에서 아볼로니아까지 하루, 아볼로니아에서 데살로니가까지 하루가 걸리는 여정입니다. 바울 일행은 이 도시들에서 대략 하루 정도씩 머물고 데살로니가로 직행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 도시들에서 전도하지 않은 이유는 이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데살로니가는 아볼로니아에서 서쪽으로 약 37마일(약59km) 지점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에게해의 테르마키우스 만의 정점에 위치하여 상업이 발달 된 곳입니다. 아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마게도냐를 넷으로 나눌 때에 두 번째 지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테르마(온천)라 불렀으나, 주전315년, 카산데르가 이곳을 건설하고, 빌립이 데살리 군대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여, 그의 아내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의 딸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입니다. 주전 145년에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마게도냐 전체의 수도로 정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현재 이름은 살로니키이며, 인구 약 7만 명의 도시로 남아 있고, 인구의 절반은 유대인이며, 36개의 회당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 당시부터 이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약 3주 동안 머물면서 전도했습니다. 회당에서 설교한 것이 3주인지, 데살로니가에 머문 것이 3주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어찌되었든지 바울은 회당을 거점으로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1-3) 바울의 초기 전도 방법은 하나의 관례가 되었습니다. 즉, 유대인의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성경을 강론하고, 예수님이 그 성경에 예언 된 메시아이심을 알리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회당 전도 방식은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에서 두란노 서원으로 옮기기까지 항상 지켰던 원칙이었니다.(행9:20, 13:5,14, 14:1, 17:10,17)
바울은 주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관한 예언들을 설교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몇 가지 특징적인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강론하며...뜻을 풀어...증언하고” 강론한다(dialevgomai)는 말은 설교라는 의미보다는 토론한다는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영문 성경에는 “reason, argue, interpret”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논증조의 설교입니다. “뜻을 풀어”(dianoivgw)란 말은 완전히 개방한다(open thoroughly)는 뜻입니다. 예언의 해석입니다. “증언하다”(parativqhmi)는 말 역시 어떤 사실을 비교적으로 제시하고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어에 담긴 의미를 종합해 보면 바울의 설교는 구약 예언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증명했다는 말입니까? 구약 성경에 담긴 예언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들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것(미5:2), 유다지파에서 오실 것(창49:10), 이새의 자손,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실 것(사11:1,10), 동정녀 탄생(사7:14), 그의 외모, 성품, 사역(사53장) 등등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도덕이나 윤리적인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예언 된 메시아, 구주라는 사실만을 증명하는 데 치중했습니다.
바울의 설교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두 가지 내용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해를 받고”(pavscw)란 말은 고난당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가 고난입니다만 특히 십자가 죽으심은 고난의 정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고난당할 이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내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다면 속죄도 없습니다. 용서도 없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지옥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집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rise again from the dead”(NASB)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습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썩어서 영원히 멸망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시기 위해서 먼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가 부활합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구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구원 받은 헬라인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주로 헬라인들입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4) 여기서 말하는 경건한 헬라인이란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는 헬라인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처럼 회당멤버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회당 멤버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문의 개종자”(PROSELYTE OF GATE)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문간 정도에 머무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열렬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우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철저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처음에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 1:9) 이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았는데, 이제는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이제는 그 하나님 자녀가 되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열렬히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습니다. 이제는 유대인이 말하는 문간의 신자가 아니라 참 메시아를 믿고 진짜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 보면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해졌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10)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땅에서 고난을 이길 정도의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배워야 될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장점입니다. 이들은 두 가지 모범적인 믿음의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순순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설득 당하는 믿음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권함을 받고...따랐다” “권함을 받고”(peivqw)란 말은 설득당하다, 동의하다, 확신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상당히 다양한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감화 받고(공동번역), 승복하여(새 번역), 믿고(현대인), were persuaded(NKJV), believe(KJV) 등등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복음을 논리적으로 전할 때에 감화 받고, 동의하고, 설득당하고, 승복하고, 믿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조금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세상 지위 때문에, 체면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 때문에, 혹은 관습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바로 애굽의 바로와 같은 사람, 아합 같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강퍅한 사람, 교만한 사람이라 하여 심판의 제일 순위에 놓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결단은 바로 신앙에 설득당하는 결단입니다. 오늘 주님의 복음 앞에 설득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생 후회하지 않는 축복의 사람이 될 겁니다.
둘째는, 사도들의 삶에 동화되는 믿음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설득 당할 뿐만 아니라 따랐습니다. “따르다”(prosklhrovw)란 말은 제비뽑아 할당하다, 분배하다, 자기 몫으로 하다는 뜻입니다. 요즘 말하는 로또 있지요? 제비뽑기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되는 축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최상의 로또입니다. 선택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후회 없는 구원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상 무리에서 벗어나 완전히 하나님 백성의 무리에 가담합니다. 하나님 백성과 삶을 함께 합니다. 따르다는 말을 영어 성경에 보면, consorted(KJV), devout(NKJV, ASV), joined(NASB, RSV, NIV) 등으로 번역합니다. 이들은 복음을 들을 때에 이것이 내 몫이구나, 이것이 내 분복이구나, 내 운명이구나, 생각하면서 성도의 회중에 참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 즉 교회 공동체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제는 세상 사람들의 무리로부터 하나님 자녀의 무리로 삶의 장소를 옮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는 삶의 목표가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성도들과 삶을 함께하는 참여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헬라인들의 회심과 함께 본문에 특별히 언급된 것은 귀부인들의 회심입니다.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습니다. “귀부인”(gunaikw'n te tw'n prwvtwn) 이들은 아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부인들, 예를 들면 총독의 부인 정도 되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이들이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고 영혼까지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 있어도 영적으로 빈곤합니다. 높은 지위가 있어도 마음의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명성이 있고 지식이 있어도 인생에 풀지 못할 짐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공회원으로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고 재산이 있어도 영혼은 구원받지 못하고 방황했습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매달 천 명 이상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죽으려고 했었다는 사람은 더 많아요. 그만큼 인생이 고달프다는 뜻입니다. 오늘 귀부인들의 회심은 바로 이런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삶의 모든 짐에서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유대인들의 소란
헬라인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고 구원받은 것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유대인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에도 7만 여명의 인구 중에 절반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세력이 상당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5-7)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으니라.”(행17:5-9)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시기했습니다. 참 복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종교적 지위를 빼앗기는 것에 분노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시장의 불량배를 동원하여 선동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장에는 할 일 없는 건달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이들을 다 돈으로 매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돈을 주지 않아도 난동 부리는 일에는 신이 나서 나서는 것이 속된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야손의 집으로 무조건 쳐들어갔습니다. 야손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유대인이라고 다 배척한 것은 아닙니다. 야손이나 아리스다고, 세군도(행20:4)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열심히 믿었습니다. 아무튼 무리들은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왔고, 야손은 이들의 동태를 보고 바울과 실라를 미리 빼돌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야손과 일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끌고 읍장들 앞에 고소했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6-7) 그들의 고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로마 황제 외에 다른 임금을 섬기려 한다. 이 두 지는 다 거짓말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했다는 말은, 세상을 뒤집었다는 뜻입니다. “turned the world upside down” 무슨 혁명을 했다는 뜻인데, 바울은 거리에서 선동을 한 적도 없고, 사람들을 소란케 한 일도 없습니다. 조용히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바울이 황제 외에 다른 임금을 섬기데 한다는 것도 전적인 왜곡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에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마27:11) 주님은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유대인들은 조상 덕분에 천국 백성이 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혈통주의자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에서 복음이 이르는 곳마다 박해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40)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사도 바울 역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유대인들의 소란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박해를 이겨야만 하는구나! 바울은 후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살전2:14) 믿음의 초기부터 반대나 박해를 이기는 성도,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