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40
8월5일[제1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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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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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tlQKq2ScEQ
[서울대교구 박남준 미카엘(신사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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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기적의 원동력, 내 작은 나눔>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가장 우세한 특징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풍성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족하거나 모자라고, 궁색하고, 쪼들리고, 그래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고대해왔던 젖과 꿀이 철철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더 이상 가난도 눈물도, 아쉬움, 불평불만도 없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맛’을 살짝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가 귀환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기억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너무나 넉넉합니다. 그야말로 대자대비하십니다. 하인들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암소도 한 마리 잡습니다.
풍성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주린 배를 가득 채웁니다.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셨던 카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해보십시오. 잔치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잔치가 망했다, 파장이 되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궁핍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서시니 즉시 상황은 반전됩니다. 여섯 개의 큰 돌 항아리에 가득 채워졌던 물이 순식간에 격조 높은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그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약 600리터의 포도주입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군중들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하루만 굶어보십시오. 눈이 핑핑 돌면서 오로지 머릿속은 먹을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흘을 굶어보십시오. 아무리 고상한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짐승으로 돌변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던 백성들의 구체적인 현실, 쓰라린 뱃속을 외면한 채 말씀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필요성, 그들의 눈물, 그들의 슬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하려는 동질감, 합일감, 일체감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귀여겨들어야 할 메시지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기적의 첫 출발점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우리 인간 측의 미약하고 작은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군중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의 작은 나눔(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떻게 보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나눔을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나눔이 빵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구심점, 출발점이자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사랑의 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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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AD__Zwgr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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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앞에서 그 정도의 꿈밖에 꿀 수 없단 말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만약 제자들이 자신들이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니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과 제자들의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당신 믿음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십니다. 그 씨가 잘 자라면 새들이 깃들어 쉬게 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행복입니다. 씨는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은 누군가를 쉬게 하고 힘을 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가 가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불안이고 인정받지 못함인데, 이웃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명을 가진 이는 능력자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지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온 세상을 배불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에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나의 능력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식의 작은 꿈은 버립시다. 작은 꿈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의 화학자, 엔지니어,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으며 355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폭발물 산업에서의 그의 발명품과 사업 벤처는 그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전쟁과 산업 분야에 널리 사용된 그의 발명품의 파괴적인 잠재력 때문에 종종 비판받았습니다.
1888년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동생 루드비히 노벨(Ludvig Nobel)이 프랑스 칸에서
사망했습니다. 프랑스 신문은 실수로 Ludvig 대신 Alfred의 사망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죽음의 상인은 죽었다(The Merchant of Death is Dead)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에서는 노벨이 폭발물을 발명하고 폭발로 인한 파괴로 이익을 얻었다고 비난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 박사가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노벨은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쿠르지 영감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고 난 후 변화하게 된 똑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이 자신에게 묶여 있다면 여전히 죽음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남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노벨은 자기 재산을 인류에 대한 긍정적인 기여에 보답하는 데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는 2,000억 정도 되는 재산으로 어떻게 세상에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개인과 조직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을 제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895년에 작성된 그의 유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남은 실현 가능 재산 전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나의 유언집행인이 안전한 증권에 투자한 자본은 기금을 구성하고, 그 이자는 매년 전년도에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안겨주었을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상금 형태로 분배되어야 합니다: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2,000억을 가진 부자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돈으로 온 인류를 먹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의 노벨상 제정은 그의 유산을 ‘죽음의 상인’에서 ‘인류의 은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물에 감사할 줄 알 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여길 때 사람은 그것으로 세상의 배를 불리는 일에 사용하게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 됩니다.
먼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물고기를 잡는 기술이든, 공부하는 기술이든, 예체능의 능력이든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 그것을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십니다. 나는 그 일의 일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은총의 통로가 되고 이 은총의 통로가 됨으로써 그 은총을 주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이 때문에 5천 명을 먹이는 기적 안에서 정작 놀라는 것은 빵과 물고기를 봉헌하고 그것을 다시 나누어주는 자기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고 계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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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것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어떤 것들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성서 해석의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 그대로의 해석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2000년 전과 지금은 제도와 문화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왕정국가였습니다. 한 국가에는 한 종교가 허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권과 신권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방의 종교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방의 종교는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두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크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병든 이를 치료해 주고, 어린이를 돌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과 말씀에 대한 해석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세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으로는 우리의 썩을 몸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제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졌지만 모두 썩어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꾼의 품삯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도, 오후에 일한 사람도, 저녁이 되어서 일한 사람도 똑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의 능력과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 쌓아온 업적과 성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아보니 12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여러 표징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그런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듯이, 우리의 나눔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기쁨이 됩니다. 수단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이 꽃동네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나눔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날이 오면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하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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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13-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외딴곳으로 가셨다. 외딴곳으로 물러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마 예수님께 큰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교부들은 이 빵 다섯 개를 율법서 5권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언서와 요한의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사람들에게 눈을 하늘에 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 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만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이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배불리 먹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역시 외딴곳에서 음식이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갔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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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레미야는 하난야의 말에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예레 28,6)라고 말합니다. 그는 멸망을 바라지 않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심판을 선고하라는 것이었기에 그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난야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임금과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물리쳐 버립니다.
내 마음 안에도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명백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알면서 거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거짓 예언자가 나를 속이는 순간에는, 정말 깊이 돌아보지 않으면 속아 넘어갑니다. 사람들이 하난야의 말을 따라가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부수시고 성전 기물들을 되찾게 하여 주신다는 말이, 그들이 믿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 마음으로 속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속삭입니다. 식별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기 때문에, 어떤 도식에 따라 간단하게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난야에게, 평화를 예언할 때는 그 말이 이루어져야 참예언자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멸망을 예언할 때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판 선고를 들은 이들이 회개하면 그 심판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을 때는, 진실하게 깨어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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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14-20)
1)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보다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사랑’인데,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제자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의 건의에는 예수님을 걱정하는 마음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쉬시지 않고 계속 일하시는 것이 걱정스러우니까 일단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건의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자신들의 배고픔도 의식했을 것이고, 예수님과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도 생각했을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이 없었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무 대책이 없을 때, 또는 해결 방법이 전혀 안 보일 때,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있다면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그럴 때에는 청원기도는 안 바쳐도 됩니다. 감사기도는 바쳐야 하지만.>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라는 제자들의 말은, 몹시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런데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말씀드리는 ‘기도’와 같습니다.
2)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표현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이지만, 뜻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배고픈 상태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예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뒤의 15장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이 말씀은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 있는 말씀인데,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으로, 또 ‘치유의 은총’으로 사람들의 영적인 허기와 갈증을 해결해 주셨는데, 이제 육신의 배고픔도 해결해 주려고 하십니다.
3)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몹시 당황스러운 명령입니다. 그들에게는 돈도 없고 빵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정을 잘 아시면서도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은, 당신이 따로 생각하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에 “내가 마련해 줄 테니.”라는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는 제자들의 말은, 뜻으로는 “저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4) 기적이란,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재료로 삼아서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 ‘기적의 빵’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빵을 받아서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명령이 말씀하신 그대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명령을 신앙인들이 잘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의 빵’을 군중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그것을 받은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 공동체는, 즉 교회는 사람들의 사정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바치는) 공동체이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만일에 세상을 향해서 담을 쌓아놓고서 신앙인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일이 되고, 또 사랑 실천을 외면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도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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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매일 빵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우리 시대에도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 세계의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하는 생각과 함께 '정말 굶주리는 모든 사람이 사라질 수 있다!'에는 일말의 의문이 듭니다.
왜냐면 먹을 것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구조적 가난이 생겨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두고 여러 가지를 연구하다가 장소적인 측면으로 이러한 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킨 장소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거리로 왕복 백 리 되는 거리임이 밝혀졌는데 그 당시 이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는 사람들은 한 끼 정도의 식사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식사 시간이 됐는데도 사람들은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혼자 먹을 수도 없고 나눠 먹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먹을 것을 내놓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마태 14,19) 나누기 시작하자 조그만 조각을 받아든 사람들이 하나 둘 슬그머니 자신의 것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나눠 먹기 시작했고, 내놓은 음식은 그 많은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즉, 나누고 함께할 줄 아는 공동체는 결코 모자라지 않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시대에 오셔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다시 한 번 일으키신다 해도 세계 각국에서 만연되고 있는 빈곤과 기아는 해소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내일을 위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또 탐욕스러운 자들이 끝없이 움켜쥐고 이웃이야 굶든 말든 쌓아두기 경쟁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산더미 같은 빵이나 엄청난 재물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닙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나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양이었지만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오천 명이 먹는 빵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우리 시대에도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우선일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1998년 IMF가 시작 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한 신부님이 어느 조그만 본당에 새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임 신부님이 매주 목요일 저녁에 지역의 홀몸노인들을 식사에 초대한다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딱 한 주를 하고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아 떠난 것을 알게 됐지요.
새로 부임한 신부님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요일이 되자 150여 명이 넘는 노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알아보니 성당 마당 한쪽을 유료 주차장으로 내놓고 그 수익금으로 운영을 한다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습니다.
새로 온 신부는 성당을 어떻게 유료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고 고민하다가 유료 주차장을 다 없애고 과감하게 '사랑의 쌀통'과 '사랑의 헌금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한 끼 밥을 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 숟가락씩 쌀을 모으고 ,한 주일이 지나면 '사랑의 쌀통'에 넣으십시오. 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만 덜 쓰고 1000원씩만이라도 모아서 '사랑의 헌금함'에 넣어주십시오."
이렇게 신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지요. 매주 목요일마다 150명에서 200명까지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넉넉하지도 않은 작은 성당에서 그 많은 식구들을 어떻게 다 먹일 수 있겠느냐고 신자들의 걱정은 이만저만 커져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랑의 식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신부님이 있었던 임기 내내 수많은 노인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드릴 수 있었지요.
여러분, 모두가 놀란 그 큰 은총을 체험한 신부가 바로 저입니다. 그 본당에 있을 때 저는 이렇게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사방 어디에서든 계속되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빵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 자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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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권동성 폰시아노 신부님]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할 때 하느님께서 도구로 삼으심>
요한복음 사가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를 전하면서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군중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대한 저마다의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왜 찾아 왔고, 예수님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군중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체험한 후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군중을 피해 혼자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활동에 대한 군중의 오해를 원하지 않으셨기에 군중을 떠나가십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현세적인 이익이나 성공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역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그리스도교 신앙도 그러한 현세적인 이익이나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내어 주고, 보다 낮은 자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다시금 우리는 예수님을 왜 찾고, 그분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빵을 많게 한 기적은 예수님 편에서 베풀어진 선물입니다.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잘 아셨다고 전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마태오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그들 중의 병자를 고쳐주셨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셨고, 이제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청하기도 전에 미리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측은히 여기고 보살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선물은 이처럼 풍성합니다. 모두가 함께 나누고도 남음이 있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더 가지고자 하는 우리의 욕심’ 으로 인해 부족함이 발생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할수록 우리는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지금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지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자신의 삶에 불만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더 가지고자 하면 누군가는 덜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폭력과 착취가 발생합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이웃은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제 나만의 불행이 아니라 이웃의 불행까지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는 빵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실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년의 ‘내어놓음’이었습니다. 소년의 헌신,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이 베품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할 때,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을 때, 그것이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해도 하느님께서는 큰 도구로 삼으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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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바라신 새로운 세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극심한 경쟁 구도 속에서 각자의 이익과 손실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 폭력과 전쟁과 억울한 죽음이 난무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이가 평화를 누리고 아무도 굶지 않는 세상을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 새로운 세상을 희망으로 일구어 가십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하며 시작됩니다. 그의 죽음은 세상의 권력자인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연 연회 때에 일어났습니다. 식사가 의인의 죽음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세상의 식사가 펼쳐집니다. 이 새로운 세상은 이전의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곧 옛 세상의 삶의 방식에서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러고는 연민 가득한 마음으로 세상살이에 지치고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여전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논리에 충실합니다.
세상의 논리에 따라 생각하며 예수님께 말씀 드립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의 뜻을 좀처럼 굽히지 않습니다. 많은 군중을 먹이기에는 자신들이 가진 것이 너무나 적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가지 먹을거리를 더한 수는 일곱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좋은 수, 완전한 수입니다. 많은 이를 위하여 일곱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자들의 말이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는 순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온전히 예수님께 가져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바라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내 사람들이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이전 세상에서는 주인이 좋은 자리에 앉아 종들의 시중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제자들이 허기진 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빵을 들어 올리시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신 뒤 그것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도로 내주시어 사람들과 나누게 하십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많은 이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입니다. 이런 기적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응한 이들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온갖 무상의 선물에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응답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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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믿고 살면 살아갈수록 느끼는 것은 예수님은 참 별난 분이시고 특이한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 점이 바로 저에게는 참으로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사실은, 그분은 특별히 배고프고 헐벗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좋아하시고 늘 그들과 함께, 그들 곁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삶에 지치고 힘겨워하며 배고픈 사람들을 보실 때,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신”(14,13) 이유는 팔자 편하게 휴가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동반자였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셨기에 외딴곳으로 물러가신 것입니다. 휴가를 위한 물러남이 아니라 애도를 위한 그리고 자신의 사도직 활동을 새로운 상황에 맞춰 조정하기 위해 물러났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마음은 찹찹하고 무거웠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군중들이 당신께 몰려오자 그런 군중들을 보시고, 당신 자신과 닥친 일을 잠시 잊은 채 그들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리시는 주님의 마음 씀씀이 한편 감사하면서도 한편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 역시도 주책없는 군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돌보기보다 자신을 찾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가엾은 군중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배려한 데 반해(=이타심), 군중은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만을 채우려는 듯한(=이기심)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시나마 쉬시도록 배려해 드리지 못하고 늘 우리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해 주고 도와달라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싶어서 한편 예수님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저녁때까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을 향하여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14,15)라고 말하는 제자의 표현에서 저의 모습을 봅니다. 군중을 챙겨주는 듯싶지만 이제 저희도 피곤하고 배도 고프니 좀 쉬면서 뭘 먹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라는 속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하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가난한 자들아, 너희가 알아서 너희의 문제를 해결하라!, 가 아니라 제자들아, 너희가 나서서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방치하는 게 교회의 처신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는 교회가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고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너희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라!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마른 자에게는 마실 물을 주는 것이며,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빵을 주는 것이며,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는 위로를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권고하자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4, 17)하고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합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충분하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대답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법 아래 이미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느낍니다. 그러기에 군중들을 예수님께서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고 재촉합니다. 늘 제자들은 함께 계신 주님을 망각하거나 자신들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실수를 범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거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들의 방법을 스승에게 제안하기보다 오히려 주님 저희가 어떻게 할까요?, 라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라고, 도와주시라고 겸손되게 청하는 마음이 필요했던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단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빵의 기적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턱없이 부족할 것 같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계산으로 너무 하찮고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넘겨지고, 손을 들어 아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축복을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이젠 더 이상 부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엄청난 양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14,19) 여기서 빵을 손에 들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 나누어주셨다는 말씀은 성체성사를 연상하게 합니다. 엠마오의 제자들도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주님을 알아보았듯이 빵을 떼어 나눔은 단순한 나눔이 아니라 삶에 지치고 상처로 찢긴 영혼들의 아픔에 예수님 친히 자기 몸을 함께 나누시는 것이며, 빵 뗌을 통해서 주님과 상처받은 우리 모두 하나 됨을 의미하는 중요한 신앙과 사랑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단지 성찬의 식탁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의 표양, 곧 당신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구원과 생명을 늘 세상의 부서지고 상처받은 영혼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은 곧 사랑의 나눔과 그 사랑으로 찢기고 상처받아 문드러진 영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당신 말씀을 교회와 교회 지체인 저희가 망각하지 않고 실행할 수 있도록 은총 내려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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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책에서 영화 스타워즈에서 제다이의 전사 요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소개합니다.
“해보겠다고? 해보겠다는 건 없어!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만 있을 뿐!”
솔직히 이 영화를 보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해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참 많지요. 그러나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과연 변하는 것이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런저런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소망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과연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명한 괴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용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동해야 한다.”
불가능한 상황이어도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만이 변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죽은 사람의 물건을 정리해 주는 유품정리사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게 제일 좋은 것은 써보지도 못한 채 죽는다고 말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생활에서 하는 사랑의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만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보화를 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을 해보지도 못하고 주님 곁으로 간다면 큰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하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먹을거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면서 불가능하다고 항변합니다.
우리의 사랑 실천만이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귀한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따라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쪽으로 향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일이 이 세상에서 환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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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손에 얹어 놓아라>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사랑으로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기아 문제는 해결된다고 합니다. 유엔난민기구의 2024년 통계자료는 7억 3,34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는 세계 인구의 9%에 해당됩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결식 아동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가운데 은총의 충만함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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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께 드리니>
마태오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그분께 드리니>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
나
가진
한 그릇의 밥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맛나게 먹이시네
나
가진
한 줌의 기쁨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활짝 웃게 하시네
나
가진
한 모금의 시간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넉넉하게 돌보시네
나
가진
한 가락의 눈길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부드럽게 살피시네
나
가진
한 옴큼의 마음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따뜻하게 품으시네
=====================
ㅔㅣ
[서울대교구 故 조덕현 야고보 신부님]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외딴곳으로 가셨다. 외딴곳으로 물러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마 예수님께 큰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교부들은 이 빵 다섯 개를 율법서 5권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언서와 요한의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사람들에게 눈을 하늘에 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 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만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이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배불리 먹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역시 외딴곳에서 음식이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갔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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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예수님처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삽시다-
“주님, 저를 거짓의 길에서 멀리하시고,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 119,29)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새벽 뉴스를 확인하니, “사상 최악 폭염, 2018년 이후 첫 40도...열흘은 폭염”, 기후위기가 현실화되는 불길한 느낌입니다. “평화의 하느님 말씀을 억누르지 마라. 전쟁은 패배다.” 교황님의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시 말씀입니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패배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하느님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전쟁입니다. 어제 읽은 삶의 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불교에서 관觀은 지혜로 경계를 비추어본다는 의미이다. 관심觀心은 마음을 그리 보며 바르게 살핀다는 의미가 되겠지. 앞으로 세상을 잘 관觀하여 길 잃지 말고 인연이 닿거든 또 보자.’ 주지 스님의 편지에 착안한 작가는 관병觀病이라는 단어를 발굴해 병을 헤아리고, 살피며, 관계하는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투병鬪病, 치병治病도 아닌 반려병伴侶病이랄까?”
이런 지혜와 일맥상통하는 ‘놀다’라는 시입니다.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정현종 ‘놀다’시 전문>
어느 시인이 책상 위에 붙여놓고 자신을 경계했다는 다음 대목의 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서 책만 읽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이 또 있겠는가?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우라. 학자도 땀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며, 다양한 일들을 경험해봐야 한다. 노동은 책 읽는 것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신의 글 속에서 쓸데없는 잡담과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든 과일이든 스스로 예쁨을 경계해야 한다”
다산 옛 어른이 말씀도 마음에 새겨집니다.
“한 갑자의 공부를 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바로 ‘마음’과 ‘일상’이다.”
모든 공부를 귀결하는 말마디가 ‘마음’과 ‘일상’입니다. ‘마음관리’와 ‘일상’을 충실히 살아냄이 참으로 중요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참 예언자 예레미야와 거짓 예언자 하난야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리자 비로소 말문을 여는 하느님의 사람, 예레미야입니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보내시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용기의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소통의 일치관계에 있는 기도의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예레미야와 대칭구조에 있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예레미야의 긍정적 덕목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착한목자 예수님은 말그대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이며, 그의 덕목은 기도, 자비, 지혜, 용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후에 계속되는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예수님은 깊은 관상적 휴식의 기도를 위해 외딴곳을 찾습니다. 삶이 복잡하고 힘들수록 외딴곳의 쉼터와 샘터, 배움터와 기도터의 마련은 필수입니다. 저에게는 이른 새벽마다 강론을 쓰는 집무실이 외딴곳입니다. 예수님이 한결같이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살 수 있게 한 것도 외딴곳에서의 아버지와의 깊은 내적일치의 기도 덕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외딴곳의 광야에 도착했을 때 미리 대기하며 기다리고 있는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처신에서 착한목자로서 그분의 자비와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나타나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의 존재가 다음 대목에서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언행은 정직하여 속일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주눅들지 않으시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신 자비와 지혜의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고치심에 이어 군중을 먹이심으로 구체적 사랑이 표현됩니다.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진 것 전부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 놓아 나눴을 때, 즉시 이어지는 주님의 봉헌의 기도입니다. 군중을 풀밭에 자리 잡게 명하신후 진인사대천명 마음으로 봉헌기도를 바칩니다. 마치 광야여정중의 오아시스 미사를 상징하는듯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눠주었다.’
그대로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이요 이런 절박한 자세로 미사를 봉헌해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군중들을 감동시킨 제자들의 나눔이요 예수님의 봉헌기도에 마침내 모두가 배불리 먹은 기적입니다. 아마도 군중은 가진 것을 다 자발적으로 비워 나눴을 것이니 차고 넘치는 기적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기적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광야 인생 여정중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기도와 회개,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진실과 용기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두오니, 진리의 말씀을 제 입에서 결코 거두지 마소서.”(시편 119,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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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 자선의 통로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늘 복음은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얘기입니다. 제자들은 굶주린 사람들을 걱정하고,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주님께 제안합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우리가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저도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나무라시지는 않고 그러나 “그들을 돌려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무라시지는 않고 새로운 길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새로운 길이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긴 하지만 실은 당신이 주시는 방식인데 지금까지 제자들은 이렇게 줘 본 적이 없고 어쩌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없는 것을 어떻게 줍니까? 사실입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결과를 놓고 보면 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줄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가진 것이 없어도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진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 말해서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것을 주거나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서 나눠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형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 나눠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것도 받는 것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선 받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가운데 받는 것을 잘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줄 마음이 없이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받아서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는 것이니 하느님께서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제게 많은 후원을 해주시는데 그것으로 제 주머니 채운다고 생각하시면 후원해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주시는 것을 넙죽넙죽 잘 받습니다. 옛날에는 정말 저의 가난을 생각하며 안 받으려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 저는 여러분이 주시는 것을 다 받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주님께 받으신 것을 오늘 제자들처럼 나누시도록 제가 다만 통로가 되어 드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자선의 통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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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
<나눔의 기적!>
오늘 복음(마태14,13-21)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오병이어의 기적 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신 다음 군중에게 나누어주시니,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 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빵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 사화가 '네 복음서'에서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관복음(共觀福音)인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에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이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 말씀이 등장하지 않고, 필립보를 시험하시는 말씀(요한6,5)과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라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인 빵의 기적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기적을 낳는 기적의 주체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처럼 기적을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기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내가 지니고 있는 유형무형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굳건한 믿음과 희망 안에 머물러 있는 신앙인들은, 나눔을 통해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다시 되돌려 드립니다. 그것도 기쁘게.
'보잘것 없는 것들이' 모여 기적을 만듭니다. 그리고 '작은 나눔들이' 모여 또 하나의 빵의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도 믿음과 희망 안에서 기쁘게 빵의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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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8.05.월."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 16)
나눔의 빛이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힌다.
나눔의 빛이
바로
섬김의 빵이다.
기쁘게
주는 것이
기쁘게
나누는 것이다.
생활속의
나눔이 바로
생활속의 참된
진리이다.
나눔의 빵은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을
치유한다.
나눔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은총의 통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나눔이다.
나눔은
회개의
참된
실천이다
절절한
사랑이
나눔이다.
공동체의
생명은
나눔으로
성장한다.
삶의
이야기는
나눔의
이야기다.
복음이
있는 곳에
나눔의 빵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눔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의 나눔이
우리를 살린다.
우리에게는
나눔이 있다.
나눔이
살 길이다.
나눔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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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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