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시간
원제 : The Children's Hour
1961년 미국영화
감독 : 윌리암 와일러
원작 : 릴리언 헬만
출연 : 오드리 헵번, 셜리 맥클레인, 제임스 가너
미리암 홉킨스, 페이 페인터, 캐런 밸킨
'벤허'로 정말 세계적인 대흥행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의 대작을 완성한 윌리암 와일러는 차기작으로 뭘 골랐을까요? 사실 소규모 드라마장르에 능했던 윌리암 와일러가 50년대 들어와서 다양한 장르에 손을 댔기는 했지만 자신의 전문 장르가 아닌 대작 스펙타클 '벤허'로 크게 성공한 것은 어떻게 보면 특이한 경우입니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고 '벤허'만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마치 대작 전문 감독인 줄 알겠죠. 물론 70mm 대형 화면에서 좌우로 길쭉하게 펼쳐진 '벤허'의 대형 영상은 4:3 비율 시절에 나름 대작이라고 했던 '삼손과 데릴라' '쿼바디스' 같은 영화를 쭈그러뜨릴 위력을 보여주었지요. 4 : 3 화면 비율로는 나오기 어려운 시원한 규모를 보여주었으니까요.
윌리암 와일러가 '벤허' 때문에 유명해진 건 아닙니다. 이미 그 이전에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2회, 칸 영화제 수상 1회 등 감독으로 누릴 거 다 누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벤허'까지 터져 주었으니 어떤 추가 성과에 대한 욕심은 없었을 겁니다. 그 후 차기작으로 그가 뽑아낸 작품은 의외로 흑백영화 '아이들의 시간' 입니다. 이 작품은 유명작가인 릴리언 헬만의 원작 희곡을 각색한 영화죠. 그런데 이미 1936년 '이 세 사람(These Three)' 이라는 제목으로 그 원작 각색물을 윌리암 와일러 감독은 직접 연출했습니다. 평가도 좋았죠. 영화도 잘 만들었고. 윌리암 와일러 최초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25년만에 스스로 리메이크를 했을까요? 그것도 흑백으로? 1956년 '우정있는 설복' 이후 그는 칼라영화로 전환했는데.
평소보다 훨씬 살을 찌우고
등장한 셜리 매클레인
오드리 헵번, 제임스 가너
아마도 1934년에 초연되었고, 1936년 영화화 된 애초의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내보려고 한 것 같습니다. 1936년 작품은 사실 릴리언 헬만의 원작에서 중요한 내용인 '동성애'를 쏙 뺀 작품이었습니다. 동성에 대신에 두 여자와 한 남자 간의 삼각관계로 이야기를 비틀어 버렸지요. 물론 그럼에도 직접 각색을 담당한 릴리언 헬만의 빈틈없는 시나리오 때문에 영화는 꽤 강렬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출세작을 탄생시킨 윌리암 와일러였지만 아마도 원래의 원작을 반영하고 싶은 미련이 남았었나 봅니다. 그래서 결국 1961년에 리메이크를 하고 말았습니다. 무려 오드리 헵번과 셜리 매클레인 이라는 두 유명 배우를 등장시켜서. '벤허'로 더 이상 이룰게 없는 상황이 된 그는 자신이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를 선택한 것이겠죠. 크게 결과에 연연 안하고.
1936년 영화와 같은 내용이지만 대신 캐런(오드리 헵번)과 마사(셜리 매클레인) 의 동성애적 관계가 삽입되어 버렸으니 자연히 캐런의 연인인 의사 카딘(제임스 가너)의 비중은 다소 줄어들었습니다. 캐런과 카딘의 조합이 그리 중요한 비중이 되지 않자 당연히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하고 하는 과정도 없습니다. 그냥 영화 시작부터 연인입니다. 1936년 영화는 삼각관계이다 보니 세 사람의 관계가 중요해서 그들이 만나고 관계를 맺고 학교를 설립하는 과정부터 차근차근 펼쳐지는데 리메이크 작은 이미 학교운영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요. 그러니 그들이 어떤 우여곡절을 걸친 관계라는게 설정되지 않죠.
거짓말한 메리에게 벌을 내리는 캐런
1936년 작품에서 '마사'역으로 등장한
미리암 홉킨스가 이번에는 마사의
주책바가지 이모로 출연한다.
손녀의 거짓말에 흔들리는 할머니
이러다보니 단점이 뭔가 하면 못된 학생 메리에 의해서 카렌과 마사가 몰락하게 될 때의 허망함과 애틋함이 훨씬 덜 합니다. 1936년 '이 세 사람'에서는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의기 투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그 과정에서 동고동락한 카렌, 마사, 카딘의 특별한 관계,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들의 학교에 대한 각별함이 쫘악~ 깔리는데 그런 고진감래로 얻은 그들의 공든 탑이 메리의 못된 거짓말로 하루 아침에 무너지니 얼마나 허망합니까? 메리에 대한 미움도 커지다보니 그 캐릭터도 힘을 크게 받죠. 그런데 '아이들의 시간'에서는 그런 감정이 훨씬 덜 일어납니다. 그냥 늘 영화에서 벌어지는 주인공들의 풍파일 뿐이에요. 메리라는 캐릭터도 36년 작품은 너무나 사악하고 영악한, 그야말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악마였는데, 리메이크 작품에서는 그냥 성격 못되고 철이 없는 못된 아이 정도로 느껴집니다. 메리의 캐릭터가 훨씬 멋이 없어요. 즉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 다음에 무너뜨리는 것과, 다 이루어진 상황에서 시작해서 무너지는 것과는 관객이 느끼는 공허감이 다릅니다.
삼각관계에서 동성애로 바꾸다 보니 두 여성의 캐릭터도 대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거의 비슷한 느낌을 주었던 미리암 홉킨스(마사)와 멀 오베론(캐런)과 달리 셜리 매클레인(마사)은 선머슴같고 여성적 매력이 없는 모습이었고, 오드리 헵번(캐런)은 예쁘고 호리호리한 여성이었죠. 마사와 카딘의 관계도 그냥 친구 애인일 뿐이에요. 이러다보니 전체적인 캐릭터의 힘이 살지 않아요. 심지어 조연 캐릭터인 주책바가지 이모와 틸포드 부인(미리암 홉킨스)의 캐릭터도 그렇습니다. 36년 작품에서는 마사와 캐런이 주책바가지 이모에 의해서 얼마나 두고두고 피해를 입는지 잘 그려졌는데 여기서는 그다지 주책도 아니고 비중도 훨씬 적어요. 틸포드 부인도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유지급인지가 묘사가 안되고.
오해를 풀러 왔지만....
1936년 영화와 거의 흡사한 화면구도와
동일한 대사가 나오는 장면
즉 1936년 작품은 7명의 아주 두드러지고 색깔이 강한 캐릭터들끼리의 불꽃튀는 접전이었다면 61년 리메이크작은 그냥 오드리 헵번과 셜리 매클레인 이라는 두 스타를 앞세우고 제임스 가너를 들러리로 세워서 만든 세련된 화면과 예쁜 구도를 지닌 영화입니다. 비극적 파탄을 다룬 내용인데 화면은 동화속 무대처럼 예쁘고 아기자기 합니다. 칼라로 만들었다면 더 예뻤겠지만 흑백화면도 마치 추억속 동화같이 잔잔하고 아름답습니다. 캐릭터의 개성 보다는 아름다운 화면 꾸미기에 더 치중한 영화같았지요. 캐릭터에 힘이 훨씬 덜 부여되니 아무리 오드리 헵번과 셜리 매클레인이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어도 36년 작품처럼 강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36년 작품에서는 생략되었던 공허하게 빈 집에서 두 여성이 겪는 내용은 진부한 후반부의 사족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결국 윌리암 와일러가 굳이 리메이크를 한 것도 30년대 못 반영한 동성애에 대한 부분을 넣고 다시 만들려고 한 것일텐데 아쉽게도 61년 당시에도 그런 소재는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아마 70-80년대에 만들었다면 훨씬 강력하게 부각시킬 수 있었겠죠. 셜리 매클레인도 후반부 연기를 어떻게 감정을 전달해아 할지 참 고민스러워 한 느낌입니다. 유명한 메이저 영화 배우에게 아직 1961년인데 그런 연기를 시키는 건 그냥 배우에게 믿고 맡길 수 밖에 없었겠죠. 윌리암 와일러가 그냥 손 놓고 맡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충격적 폭로가 터지는 장면이 그렇게 밋밋하다니요. 마치 우산 하나 훔쳤다가 들킨 정도의 파장같았어요. 61년 당시에는 아직도 여전히 반듯한 영화들로 채워지는 할리우드 였습니다. 10년만 지난 70년대 였어도 해도 훨씬 달라졌겠죠. 즉 윌리암 와일러가 너무 리메이크에 집착해서 아직 시기상조에 불쑥 만든 작품이 되었고, 그나마도 오드리 헵번, 셜리 매클레인 이라는 배우들이 있었기에 그런 예쁜 그림이라도 나온 겁니다.
외부의 시선이 따가운 두 사람
점점 수렁속에 빠지는 두 사람
이 영화에서는 셜리 매클레인의 변신이 눈에 띄는데 원래 셜리 매클레인은 오드리 헵번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 처럼 전형적인 미인과는 아닙니다. 하지만 착한 푼수 같은 역할을 잘하고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발랄하고 생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활동한 배우중 몸매가 좋은 배우로 인식되었고, 마를레네 디트리히, 시드 차리스를 잇는 빼어난 각선미도 유명하지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꼭꼭 싸맨 옷과 일부러 살을 찌운게 느껴지더군요. 아예 작정하고 남자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선머슴같은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한겁니다. 공주 같이 예쁜 오드리 헵번 옆에서 수더분한 여인으로 내내 자리를 지킵니다. 확실히 프로 배우에요. 바로 그 다음해에 출연한 '당신에게 오늘밤을'에서 보여준 관능적이고 톡톡 튀는 연기와 비교해보면 완전 다르죠.
1936년 작품이 나름 해피엔딩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리메이크작은 원작대로 허망한 비극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마사 라는 캐릭터만 보면 36년 작품이 더 애틋합니다. 동성애의 쇼킹은 반감되었는데 삼각관계의 애절함은 더 깊었습니다. 좀 아이러니하게 두 영화가 뒤바뀐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워낙 화면이 예쁘고 깔끔하게 구성되었고, 내용 자체도 좋은 원작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그리고 오드리 헵번과 셜리 매클레인의 연기도 좋았기 때문에 고전 할리우드 영화로는 무난히 볼만한 작품입니다. 다만 36년 작품과 비교할 레벨은 확실히 아니라고 느껴져요. 예쁜 화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이든 영화계의 장인이 꼼꼼하고 세심하게 화면을 꾸민 비극 동화에요.
평점 : ★★★ (4개 만점)
ps1 : 1936년 영화의 주인공 마사 역의 미리암 홉킨스가 주책바가지 이모 역으로 시침 뚝 떼고 출연하네요. 공동주연인 멀 오베론도 출연 제의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36년 작품보다 덜 주책이고 덜 악역입니다. 말투도 훨씬 세련되었고. 그래서 훨씬 덜 밉상캐릭터 입니다.
ps2 : 36년 작품과 토씨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대사와 똑같은 화면구도의 장면이 꽤 많습니다.
ps3 : 이 원작은 우리나라에 '아이들의 놀이시간' 이라는 제목으로 2000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출처] 아이들의 시간 (The Children's Hour, 61년) 원작에 더 충실한 재 연출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