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역적 간신 김자점 누구?
광해군, 인조, 효종에 이르는 3대 동안 온갖 역적질과 권력을 위해서 모든일을 했던 김자점... 그는 과연 누구 였기에 이렇게 후대에서 희대의 역적으로 평가 받고 있는 것일까?
|김자점의 출생
김자점의 조상을 보면 피는 못속인다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 김자점은 1588년 선조 때 태어났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였다. 그의 조상을 더욱 위로 쭉 올라가보면 정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 시키자는 거사 계획을 세운 성삼문 성흔 등을 배신하고 장인 정창손을 통해 거사를 누설해 사육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김질이 있다. 즉 김자점은 김질의 5대손으로 조상이 배신한 덕에 그 가문이 이때까지 살아남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비 김함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김억령은 당시 깨끗하기로 유명한 관직 생활을 했고 후에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동문관계인 이귀는 김자점과 사돈 관계로 잘 알려져 있다. 김자점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과거를 거치지 않고 그의 할아버지 덕택에 음서(조상의 자제는 시험 없이 관직생활을 할 수 있는 제도)를 통하여 관직에 오른다.
|김자점의 관직생활(인조반정 전)
조상덕으로 관직에 오른 그는 광해군 때 병조좌랑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다가 당시 대북세력에게 밀려 조정에서 쫒겨난다. 아마 이때부터 광해군 세력을 미워 했으리라... 여튼 김자점은 이후 최명실, 심기원과 함께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하였고 자신과 사돈이었던 이귀 역시 끌어들였다.
이후 1622년 김류, 신경진 등을 끌어들여 세력을 규합한 그는 마침내 1623년 능양군을 추대하며 인조 반정을 일으킨다.
|김자점의 관직생활(인조반정 후)
반정을 성공시킨 그에게 있어 이제는 출세가도만이 남았다. 그는 반정 후 서인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앞장섰으며 관직은 날로 높아져 갔다. 일각에서는 조정실세들에 뇌물을 바친 의견도 있기도 하다. 여튼 그는 머리도 좋아서 이귀의 딸과 자신의 동생을 혼인시켜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자신의 동생이 일찍 죽고 이귀의 딸이 궁중의 무수리로 들어가 김상궁의 눈에 들자 이를 이용해 당시 조정의 실세였던 김상궁에게도 연줄을 대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1624년 인조2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던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와 김자점은 황급히 충남 공주로 환도를 해야만 했는데 이때 반정 이후 궁의 감옥에 가두어 두었던 대북인물 40여명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죽여야 한다고 인조에게 주장하였다. 그결과 40명이 넘는 북인들이 처형당하기도 했다. 여튼 이괄의 난 진압 이후 인조와 함께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김자점의 권력은 더 강해졌다.
그러다 1625년 동궁 세자빈으로 윤의립의 딸이 간택되자 김자점은 이괄의 난에 가담한 윤인발의 누이라는 이유로 반대에 전면으로 나섰으나 그의 세지는 권력과 빈 간택에까지 참여하는 것을 기분 나쁘게 여긴 인조에 의해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내 조정에 복귀한다.
김자점
|두번의 호란과 역적질
반정을 성공시킨 그에게 있어 이제는 출세가도만이 남았다. 그는 반정 후 서인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앞장섰으며 1627년 인조 정권의 멍청한 외교로 인해 청나라가 침공한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인데 이때 다시 병권의 적임자로 김자점이 등장한다. 그는 이때 강화도까지 왕실을 지켰다는 공로를 인정 받아 1628년 숭정대부로 승진하였고 1633년에는 조선군 도원수에 임명된다.
이후 조선의 평안도를 막아야할 책임자가 되었는데 1636년 청나라의 재침공인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당시 조선의 명장 임경업 장군이 막고 있던 백마산성에서 조선군을 후퇴하도록 명령해 청나라의 남하를 허용했고 임진강만은 지켜야 한다는 임경업 장군의 말을 무시하고 이곳마저 열어줘 한양 함락에 공을 세우는 역적질을 한다. 이에 마침내 인조가 청군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자 이후 패전의 책임을 물어 충남 서산에 유배되었다가 인조의 특명으로 다시 사면 되어 1639년 관직에 복귀 된다.
|조정에서의 역적질
1640년 다시 벼슬에 복귀한 김자점은 강화부 유수로 임명 받고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이 당시 인조에게 사랑 받던 귀인 소용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와 결혼을 하면서 다시 권력의 중심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김류와 결탁하여 병조판서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데 당시 서인이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공서와 신진세력으로 산림학자들이 중심이 된 청서로 갈라지자 당연히 공서의 입장에서 청서를 탄압하였고 공서 역시 갈라지자 반대파를 잔인하게 탄핵한다.
또한 같은 공신이었던 심기원등을 역모죄로 탄핵하고 청나라에 자주 방문하며 사신이나 역관의
인맥을 통해 청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이때 청나라에 반대하는 충신이자
명장 임경업 장군이 청나라 포로에서 풀려 국내로 돌아올 것으로 보이자 모함으로 몰아붙여 처단하는데도 앞장선다.
|소현세자의 제거와 효종의 즉위
손자의 결혼으로 소용조씨와 사돈이었던 김자점은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소용조씨와 갈등하자 1645년 숙원조씨와 결탁하여 인조의 미움을 받던 소현세자를 제거하는데 앞장선다. 인조의 수라상에 고의로 독약을 넣은 뒤 그 혐의를 강빈에게 몰아붙여 인조에게 고변하였고 강빈은 이로 인해 사사당했으며 왕손 석철은 제주도로 귀양보내졌다. 즉 조선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던 왕자 소현세자가 한명의 간신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였고 조선은 바뀌지 못한것이다.
이후 청나라 북벌을 외치던 세력 등과 첨예한 갈등을 벌이며 권력싸움을 벌이던 그는 송시열, 송준길, 윤휴 등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낸다. 이후 1649년 마침내 인조가 죽고 그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즉위하자 김자점에 대한 상소는 연일 올라오게 되었는데 효종 역시 북벌정책을 중심으로 한 왕이었기에 김자점은 이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다가 영의정에서 탄핵 파직 당하고 홍천으로 유배 당한다.
여기서 또 한번의 역적질을 생각해 낸 김자점은 유배지인 홍천에서 청나라 역관 심복 이형장에게 조선 북벌 계획을 청에 밀고하도록 하고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은 송시열을 청나라에 알리도록 한다. 이에 청나라는 대군을 조선 국경에 배치하고 효종에게 그 진위를 물었는데 당시 조정대신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 등이 외교에 앞장서며 청나라의 의심을 풀게 된다. 여튼 이일을 계기로 김자점은 다시 광양 땅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김자점의 최후
1651년 소용조씨의 딸이자 그의 손자 김세룡의 비인 효명옹주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한 일에 앞장서면서 그녀가 옷소매 속에다 뼈가루를 담아 인평대군의 집에 뿌리고 저주의 물건을 궁궐 주변에 묻었다는 자백이 나왔는데 여기에 김자점의 아들 김익이 군사를 일으켜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김자점과 김익 모두 사형 당한다.
이때 김자점은 아들 김식과 손자 였던 김세룡과 함께 국문을 당한후 연좌제에 의해 처벌 되어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는데 사지가 잘리고 마지막에 목이 잘리는 잔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지며 김자점의 일가는 완전히 몰락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끝으로 이때 황해도에 정착한 후손 중에서 김자점의 10촌인 김대충이란 사람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사람의 후손에서 영원한 민족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이 탄생하게 된다고 하니 역사는 참으로 신비하면서도 놀랍다..
(희대의 김자점과 영웅 김구가 같은 핏줄이였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거의 남남에 불과 하니 의미 부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출처] 본 게시물은 yoosi0211.tistory.com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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