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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양심 추적(1) (창42:18-23절)
미국에는 연방 양심 기금이라는 기구가 있습니다. 이 기구는 1800년도에 설립되었는데 설립의 목적은 혹시 국민들이 부지중에 세금을 탈세한 것이 마음에 걸려 괴로울 때 그 액수만큼 스스로 기금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공무원으로 재직 시에 국가의 물건이 탐이 나서 가만히 가지고 나왔을 때 나중에 그 일이 양심에 가책이 되면 그에 해당되는 돈을 국가에 납부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아무도 모르지마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보상하는 제도인데 지금도 의외로 엄청나게 많은 기금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는 그의 명작 햄릿에서 말하기를 ‘나에게는 양심이 하나 있는데 그 양심에서 돋아난 혀는 수천 개가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자신의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어디서나 그 양심을 나타내야 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중에 하나입니다.
헬라어에 양심이라는 말 ‘쉬네이 데시스’는 자신이 잘못하였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죄책감이나 고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롬2:14-16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바울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있는 도덕적인 분별력으로서의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양심은 이스라엘이 받은 율법과 동일한 것으로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고 깨끗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며 그리스도의 교훈의 빛 아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전10:23-24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양심이 연약한 자나 양심이 한 쪽으로 치우친 자에 대하여 충고를 하였으며 또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이 연약한 신자들을 위하여 스스로의 자유를 자재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딤전4: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바울은 악한 양심도, 변질된 양심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거짓된 가르침에 의해 부패한 양심을 가진 자들로 복음을 거절하며 하나님께 대하여 완고한 자들로 악한 양심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결국 사람은 그 마음에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의 선물과 용서하심을 통하여 양심의 깨끗함과 완전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양심의 종류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양심을 크게 나누면 바른 양심과 그릇된 양심으로 나눕니다.
1) 첫째 바른 양심은 어떤 것일까요.
a. 빛된 양심입니다.
*잠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곳을 살피느니라.
b. 선한 양심입니다.
*딤전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오는 사랑이거늘.
c. 깨끗해진 양심입니다.
*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 둘째, 그릇된 양심은 어떤 것일까요.
a. 죽은 양심입니다.
*렘6: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b. 더러운 양심입니다.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야곱과 그의 자식들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잃어버림으로써 가나안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인격의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바닥까지 추락한 이스라엘의 가족들에게 일곱 가지 양심의 추적이라는 특별한 은혜의 섭리로 저들의 잃어버린 양심을 회복시키고 선민으로서의 가치관과 신앙과 사랑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야곱의 일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양심 추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양심 추적은 기근입니다.
*창42:1-2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사람은 대개 배부를 때보다 배고플 때 더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7년 대기근이 단지 애굽 땅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주변 국가 전역에 미쳐 마침내 가나안 땅에 거주했던 야곱의 집안에도 심한 타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7년 대풍년과 7년 대기근이 결국 야곱 가문을 애굽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였음을 보여줍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애굽으로 이주시켜 연단한 후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겠다고 언약한 바가 있습니다.
*창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은 왜 아브람의 후손들을 애굽으로 옮기려 하셨을까요.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살면 가나안의 풍습에 쉽게 동화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화친하고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창20:15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창23:11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창26: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창34:9-10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을 가증히 여겼습니다.
*창46: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애굽 사람들은 자칭 자기들을 문명한 민족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증히 여기는 히브리 사람들이 애굽에 동화되기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선민 보호 차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를 애굽으로 보내시고 섭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이해가 잘 안되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37장에는 요셉의 꿈과 애굽으로 팔려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38장에서는 갑자기 유다의 집안 이야기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서 섭리하시는 동안 야곱의 집안은 가나안의 풍습에 동화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는 야곱 집의 대표격인 인물입니다. 그러한 그가 가나안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장가를 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창38:1-2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언약 계보의 순수성을 무시하고 이방 여인과 통혼한 유다 가정의 재난이 잘 나타난 본문에서 유다가 비록 며느리를 창녀로 착각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유다의 거침없는 매춘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야곱 가문의 세속화를 방치할 수 없어 하나님은 기근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나 애굽에는 양식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조금 있는 것이 아니라 각국 백성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양식을 사 온다는 것입니다. ‘애굽에는 양식이 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선민이 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는 기근으로 죽어 가는데 애굽에는 양식이 있다. 이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야곱이 듣고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은 서로 바라보고만 있는 아들들에게 명합니다. “가서 양식을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당시의 기근 상태가 생사를 언급할 만큼 심각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생명이 촌각을 다투는 일에는 주변의 상황을 저울질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셉을 애굽에 팔았기 때문에 배가 아무리 고파도 그 곳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목매어 죽은 집에 가서 끈 이야기를 하지 마라.’ 는 말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애굽이라는 말만 들어도 신경이 쓰이고 속이 불편해집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들의 속셈은 모르기 때문에 애굽에 속히 내려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재촉합니다. 아버지도, 아들들도 아직은 왜 기근이 왔는지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양식을 사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2. 두 번째 양심 추적은 거친 말입니다.
*창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와서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앞에 절함으로써 마침내 요셉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셉과 그 형들의 만남은 약 20년이 흐른 후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형들이 지난날의 악한 행동을 뉘우쳤는지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의 두 번째의 양심 추적으로써 아주 거친 말로 상대에게 정탐이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저들을 심히 당혹하게 만들고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애굽 역시 기근으로 인해 국방이 허술한지를 살펴보려고 왔느냐는 뜻입니다. 당시 애굽인들은 나그네들에게 매우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간첩으로, 특무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상대에게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완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때 형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창42: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확실한 자’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님’ 은 거짓이 없는 사람, 혹은 솔직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정직한 자들, 진실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형들의 주장은 어떤 못난 아버지가 열 아들을 외국에 정탐으로 한꺼번에 보내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자신들의 정직과 진실을 내세워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때 요셉은 그들의 인격과 양심을 재확인하려고 억지를 부려가면서 거친 말로 몰아세웁니다.
*창42: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형제들은 애굽의 총리에게 그들의 가정 이야기를 낱낱이 고함으로 자신들은 정탐꾼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의 아들임을 나타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처음으로 죄를 조금씩 시인하기 시작합니다.
*창42: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여기서 ‘없어졌다’ 는 말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혹시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거칠다고 느껴질 때, 혹은 그 말씀이 꼭 나에게 주는 말씀으로 들리면서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때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양심 추적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때 요셉이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형제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들의 누이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세겜 일족을 학살한 살인자들이었고,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불효를 서슴없이 저질렀으며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으며, 어린 동생 요셉이 아비의 사랑을 받는다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죽이기를 모의한 사람들입니다.
*창37:18-20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동생의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지고 앉아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그들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동생이 구덩이 속에서 울며 애걸하며 마음이 그렇게 괴로워하는데도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좋은 말로 해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대개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1) 악한 양심을 가진 자는 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시26:9-10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2) 남의 재앙을 원합니다.
*잠21:10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노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는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3) 악인은 그 마음이 잔인합니다.
*잠12:10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이런 사람에게는 거친 말로 몰아세우는 것이 최선입니다.
3. 세 번째의 양심 추적은 고독입니다.
*창42:16-17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이니라 하고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고독이라는 형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거친 말로 죄를 정하였지만 그것으로 형들의 양심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저들을 감옥에 가두어 고독이라는 아픔을 주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만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서 식구들의 주림을 구하고 돌아올 때에 막내 아우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 베냐민을 향한 요셉의 애틋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악한 형들이 혹시나 자신과 같이 동생을 해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이러한 요구는 형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오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불같은 호령은 그의 형들에게 공포심과 위압감을 주었으며 캄캄한 감옥에 갇힌 저들에게 과거의 죄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데 결정적인 효과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 찰스 칼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닉슨 대통령 재직 시에 대통령 특별 보좌관으로 에어포스 원을 타고 유럽을 누비면서 권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화무는 십일 홍이라는 말과 같이 그의 권력은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장벽에 부딪치고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기약도 없는 감옥에서 그는 조용히 성경을 읽었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참회의 눈물이 솟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책 “사랑하는 하나님” 'Loveing God'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육군 중위 시절에 프에르토리코에서 군사훈련을 하였을 때 민간인에게는 어떤 피해도 주지 말라는 상부의 엄격한 훈령에도 불구하고 어느 무더운 여름날 목이 너무 말라 죽을 지경인데 마침 어떤 할아버지가 시원한 음료수를 마차에 가득 싣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상사를 시켜 작전지역을 통과했다는 죄목으로 그 음료수를 강제로 압수하여 병사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죄가 되는 줄을 몰랐으나 나중에 감옥에 갇히고 나서 지난날 자기가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할 때에 이 모든 죄가 다 생각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그 할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자기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철저히 회개하고 출옥 후에는 모든 감옥을 찾아다니며 ‘나도 죄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라며 전도자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옥! 죄인을 잡아 가두는 감옥에 들어간 형들의 심정은 비로소 자신들의 지난날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자신이 애굽에서 옥살이를 한 3년이란 횟수와 좋은 대비를 이루는 삼 일 만에 형들을 감옥에서 이끌어냅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형들을 옥살이 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지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서 다 옥에 가두고 한 사람만 보내겠다던 요셉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가나안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그 결정을 번복하고 한 사람만 옥에 가두고 아홉 형들을 석방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라는 부담은 여전히 안겨주었습니다. 거듭되는 심적인 시련 속에서 마침내 형들은 20년 전에 동생 요셉을 판 행위에 대하여 뉘우치기 시작합니다.
*창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자신들이 현재 당하는 고통을 인과응보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때 르우벤이 나서서 과거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오늘의 고통이 그 때의 죄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창42: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르우벤은 노아 홍수 사건 후에 주신 율법에서 피의 대가를 알았습니다.
*창9:5-6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요셉을 사지로 몰아넣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전입니까.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의 양심 추적이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사람들끼리 서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자복과 통회가 있어야 합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진정한 통회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변화는 일어났으나 영적인 변화는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세상에서 가장 품위 있는 평화의 소리는 침착한 양심의 소리이다.’ 라고 세익스피어는 말합니다. 침착한 양심의 소리가 죄인의 심령 깊은 곳에서 울려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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