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박>조 박근홍, 김대상, 김진영, 유진주, 김경민
먼저, 우리가 논하는 모순은 논리적 개념의 모순이 아니라 실존적, 실재적 모순을 의미합니다. 논리적 모순이란 동일한 대상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할 수 없다는 모순율[~(p∧~p)]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논리적 모순 즉, 모순율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어떠한 한 대상또는 존재를 언어적, 논리적 틀 속으로 형식화하는 데 의문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논리와 언어의 구조 속에 포함시킨 순간부터 그 대상은 정태적 존재가 됩니다. 그것 자체로서 무엇이 무엇이기 위한 '본질'이 존재하게 됩니다. 편의상 모순과 논리적 모순과 구분하기 위해서 모순을 실존적 모순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실존적 모순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은 불변하는 존재는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모순에서 대상의 본질은 본디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규정하고 정립되기에 대상 또는 존재는 정태적이 아니라 동태적 존재로 간주됩니다. 만약 대상의 본질이 주어지는 정태적 존재라면 실존적 의미에서의 모순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대상의 본질은 규정되고 정립되는 동태적 존재라면 실존적 모순은 성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참 역설적이게도 실존적 모순은 논리적 모순에 대립하는 모순입니다. 하지만 실존하는 현존재는 정태적 존재가 아니라 동태적 존재입니다. 식당주인 A는 그 식당에서는 주인이라는 존재이나 서점에서는 주인이 아닌 손님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A를 주인인가 손님인지로 결정해서 정태적 존재로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사실 존재의 본질이 주어지는 것인가 규정되는가는 문제, 존재란 정태적인가 동태적인가는 문제는 우리가 논하고자하는 바가 아닙니다. 또한 논의를 이어가던 도중에 모두의 의견이 후자의 경우를 암묵적으로 인정, 동의하였기에 우리는 후자의 실존적 모순을 인정하는 쪽을 기본 전제로 삼고 논의를 이어갈까합니다.
그 다음으로 실존적 모순은 2가지의 모순으로 분류됩니다. 바로 양면성의 모순과 대립성의 모순입니다. 양면성의 모순은 한 대상 또는 존재가 서로 양립 불가능한 속성을 가지는 모순을 의미합니다. ‘오르막길이 동시에 내리막길이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역설에서 우리는 한 대상의 양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A라는 장소로 간다.’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A라는 장소로 오고 있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대립성의 모순은 한 대상에 대해서 양립 불가능한 속성을 지니는 대립자인 대상이 존재하는 모순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전쟁과 평화, 손님과 주인, 개인과 집단, 권리와 의무, 주류와 비주류 등 대립성의 모순의 예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양면성과 대립성의 모순이 공존하는 경우 역시 존재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생명과 죽음은 서로 모순되는 대립자이며 삶이라는 포괄적인 차원에서 양면성으로써 내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대상의 본질은 규정되고 정립되며, 동태적 존재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고 넘어갔습니다. 아직 한 관문을 넘었을 뿐이니 안심하긴 이릅니다. 이제 다음 관문을 넘을 차례입니다. 먼저, 모순이 상대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순의 예는 정신과 물질, 존재와 비존재, 자유와 평등, 권리와 의무, 노동자와 자본가 등 현실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다소 관념적, 추상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순이 성립한다고 해서 모순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모순이 계속 지속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관념적, 추상적 개념에서만 모순의 개념이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에서는 플러스와 마이너스, 과학에서는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 밤과 낮, 남자와 여자 등 실재적, 물질적 개념에서도 대립성의 모순은 성립합니다.
위의 상대성과 관념의 문제를 더욱더 확장하면 ‘과연 모든 존재에게 모순을 반드시 성립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는 모순의 보편성과 필연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사물 등을 비롯한 존재는 그와 모순되는 대립자를 가지거나 양면성을 내포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신발, 핸드폰, 물고기, 나무 등의 대립자나 양면성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령 우리가 모든 존재를 서로 짝을 지어주면서 대립자와 존재의 양면성을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우리가 동태적 존재를 인정했듯이 상대성으로 인해서 모든 대상의 대립자와 양면성은 다시 변화하게 됩니다. 모순을 인정하기 위해서 가져온 동태적 존재가 오히려 모순의 성립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만일 대상의 본질이 본디 존재하는 정태적 존재라면 그 존재 자체에 주목해서 그 대상을 이해하면 됩니다. 하지만 대상의 본질이 규정되고 정립되는 동태적 존재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동태적 존재를 이해하려는데 그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그 존재만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 대상의 본질과 존재는 변해가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과 함께 같이 변해가는 그 주위에 눈을 돌려야합니다. 동태적 대상 또는 존재의 본질은 그 내부에 본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와의 상호작용, 커뮤니케이션 등을 통해서 규정되고 정립되어갑니다. 이와 같은 주위의 요소인 대립자는 서로가 모순되는 대상의 존재근거가 되어줍니다. 이게 바로 대상의 본질을 규정하고 정립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노동자가 없다면 자본가도 있을 수 없으며 밤이 오지 않는다면 낮이 오지 않습니다. 또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명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생명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생명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그와 모순되는 대립자가 성립하거나 그 자체에 양면성을 내면을 내포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든 존재의 모순되는 대립자의 짝을 지워주거나 존재의 양면성을 찾아 보편성과 필연성을 발견하자는 주장도 아닙니다. 다만 이미 대립자가 성립하거나 양면성을 내포하는 경우 우리는 모순을 통해서 그 존재의 보다 고차원적인 이해와 접근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모순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는 이유이자 그 당위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순의 개념을 이용한 방법론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모순의 양면성을 활용한 새옹지마의 방법론이 있습니다.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에서 그 이름을 따왔습니다. 모든 존재, 사물의 양면성을 엄밀히 검토하자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매년 아프리카로 수 천벌의 의류 기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부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얻고 목숨을 구하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도 들려오고는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류 기부의 결과로 아프리카의 의류 산업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공짜 옷을 얻을 수 있는데 굳이 돈을 주고 옷을 살 사람을 없을 테니까요. 다른 예로는 산불을 들 수 있습니다. 흔히들 산불이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재해로 여길 수도 있지만, 산불 이론이라고 해서 산불로 인해서 오히려 생태계의 균형이 맞추어진다는 이론이 존재하며 호주에서는 산불이 났을 경우 작은 산불의 경우에는 방치하며 인위적으로 산불을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 존재, 행위의 양면성을 철저히 검토해서 참된 이해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음으로 모순의 대립성을 활용한 종합적 이해의 방법론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로 모순되는 대립자는 서로의 존재 근거가 되며 본질을 규정하고 정립합니다. 동태적 존재관에서는 존재를 유기적인 대상으로 간주하고 주위와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교류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모순되는 대립자는 총 4가지 종류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집니다. 먼저, 한 대립자가 다른 대립자를 ‘수용’하는 경우, 다음으로 대립자와 다른 대립자가 서로 동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순되는 대립자가 서로 유사한 방향으로 결합되면서 수렴되기도 합니다. 자유와 평등을 예로 들자면 자유가 강조되면 평등이 파괴되며 평등이 강조되면 자유가 억압됩니다. 이렇듯 자유와 평등은 서로 모순되는 대립자의 측면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에서 경제적 자유를 인정하는 자본주의와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대립자가 서로 결합되고 수렴되어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대립자가 다른 대립자와 반동적으로 변화하는 경우, 마지막으로 대립자가 서로를 거부하는 경우처럼 상호작용을 하면서 서로의 그 정체성을 오히려 굳건하게 만드는 경우 역시 있습니다. 이처럼 대립자의 관점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떤 개념, 존재 등의 과거의 연원을 파악하고 현재의 통찰과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는 통합적, 고차원적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만물은 본질이 규정되고 정립되어가는 동태적 존재이며, 실존적 모순의 개념을 통해서 이러한 세계, 존재의 참된 이해가 가능합니다. 즉,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모순을 인정해야하며 그 당위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순.hwp
20분 40초까지 식빵이론 나옵니다 재량껏 끊어주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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