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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학자의 "마틴 루터와 이슬람 혐오증"
기사승인 2024.07.29 01:33:30
노종해 rochai@hanmail.net
무슬림 학자의 "마틴 루터와 이슬람 혐오증"
Dr, Spahic Omer(국제이슬람대학,IIUM교수)/ 번역 정리:노종해
(주: 아래 글은 스파힉 모메르 박사(Dr, Spahic Omer)의 저서, Islamophobia and Islamic Moderation(출퍈;2022년)에서 "Martin Luther and Islamophobia, pp72-102의 전문을 번역 정리한 것이다. 스파힉 오메르 박사는 "말레이시아 국제 이슬람 대학"(International Islamic University Malaysia, IIUM) 교수이다. IIUM은 OIC에서 설립한 대학으로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에 위치하고 있으나, 세계이슬람 기구(OIC)에서 설립한 "국제이슬람 대학"(IIUM)이다.
스파힉 오마르 교수는 무슬림 시각에서 본 "기독교-이슬람관계"를 논하며, "루터와 이슬람 혐오증"을 다루고 있다. 국제이슬람대학 교수로 기독교의 이슬람 혐오증을 다루고 있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번역 정리하였다.(노종해)
마틴 루터(1483-1546)는 역사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는 이단자이자 분열주의자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인이자 개혁가였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의견을 나누는 반항아였다. 그 이후로 기독교 세계,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는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루터는 교회의 근본적 가르침 중 일부를 거부했지만, 특히 교황의 무오설과 면죄부(죄의 형벌에 대한 사면)에 대한 문제를 거부했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종교 개혁 운동으로 선구적이었고, 결국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하여 개신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운동과 사상의 집합으로서의 종교 개혁은 르네상스와 인본주의 성향과 동시대적이었다. 서로 역동적으로 이익을 얻었지만, 인본주의가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므로종교 개혁은 르네상스와 삶의 중심 축으로서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는 모두 17세기 후반 과 18 세기에 계몽주의가 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그들은 어떠한 권위도 진실의 척도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공유했으며 제도적 비순응으로 통합되었다.
종교 개혁은 교황이 주관하는 교회가 권위로 강요함을 경멸했으며, 오히려 성경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권위 있는 출처로 믿고 신앙과 이성의 조합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믿고 있다.
반면에 계몽주의 지지자들에게 세속적 또는 세상의 권위로 진실을 밝히고 보호하는 임무를 맡길 수 없었다. 독립적인 인간 이성만이 이를 수행할 자격이 있다. 계몽주의 시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계몽주의의 모토는 Dare to know!, "용감하게 알려고 하라!"( Sapere aude ) 또는 "자신의 이해를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이다.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는 형제이며, 하나는 종교적 길을 따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인 길을 따르고 있으며, 그들의 목표는 원칙적으로 비슷했고 전례 없는 열광이었다. 더욱이 르네상스는 종교 개혁을 뒷받침했지만 가톨릭 교회를 약화시켰고, 계몽주의는 종교 개혁을 더욱 고양시키고 강화했지만 동시에 교회(종교)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따라서 종교 개혁이 그 후 기독교 세계를 분열시켜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반란을 일으켰고, 교회가 내부 개혁과 함께 반종교 개혁(counter-Reformation)을 시작했지만 종교 개혁은 뒤지지 않았다. 교회가 반격에 성공한 몇 가지 사례를 제외하면 종교 개혁이 지배했던 대부분의 영토는 재정복되지 않았고, 종교 개혁의 사람들은 재개종되지 않았다. 종교 개혁과 그 효과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종교 개혁이 세속적 민주주의를 낳은 원인으로 여기고 있다.
루터와 "나쁜 교황들"
▲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무슬림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었다. 이는 동방 기독교 제국의 결정적인 종말을 의미했으며, 1400년대 후반과 1500년대 내내 오스만 투르크는 이슬람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
루터는 매우 종교적인 신앙의 사람이었으나 교회가 종교 문제를 다루는 방식과 사람들의 영적 갈망에 대해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 점점 더 불만을 느꼈다. 그는 날이 갈수록 기관, 인력 및 사역에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루터는 혼자가 아니었다. 점점 더 지지와 참여를 끌어들이는 새로운 추세로 성장했으며, 교회, 교황, 성직자, 사제에 대한 불평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성직자의 교육 부족과 세속주의(물질주의), 도덕적, 영적 부패, 교회 직책과 사역의 판매(성직 매매), 인척주의, 사기, 지위 남용, 탐욕과 방종에 불만을 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세속적 관심사와 (세속적인) 르네상스 문화에 몰두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은 충분히 할 수 없었다.(Richard Sullivan )
ER Chamberlin은 그의 책 "나쁜 교황들"(The Bad Popes",1969)에서 최악의 교황 8명의 삶을 기록했다. 그중 루터 시대의 교황 3명은 교황 알렉산더 6세(교황 재위: 1492-1503), 교황 레오 10세(1513-1521), 교황 클레멘트 7세(1523-1534)이었다. 이는 루터 시대가 얼마나 나쁘고 논란의 여지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확실히 가톨릭 신자나 기독교 신자가 되기에 좋은 시대는 아니었다. 교회는 모욕과 불명예의 전형이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는 부패하고 세속적이며 지나치게 야심적이었다.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르네상스 왕자"처럼 살았으며 부도덕했다. 그는 많은 애인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로마에서 단 한 명의 귀족 여성과만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나중에 모두 합법화되었다. 그는 유권자(선제후)에게 뇌물을 주어 교황이 되었다고 하며, 억제할 수 없는 탐욕과 탐심으로 인해 동료 추기경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브리태니커는 그에 대해, "교회의 영적 유산을 소홀히 한 것이 개신교 개혁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 결과 "소위 나쁜 교황들의 명단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결론 짓고 있다.
교황 레오 10세는 방탕함과 인척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는 물질 세계의 화려함에 집착하여 로마를 문화 활동과 정치 권력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수장 외에도 교황령의 세속적 통치자이기도 했다.
그는 교황의 재정을 파산 직전까지 몰아 갔으며, 혼란을 보상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포함한 교회의 부정 행위를 심화시켜 사람들을 교회, 종교,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했다. 특히 북부 지역은 교회와 로마의 끝없는 이익을 위한 돈벌이 장소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루터는 그의 혁명적 "95개 논제"의 86 번째 논제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늘날 가장 부유한 크라수스의 부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들의 돈(면죄부)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돈으로 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루터는 또한 "95개 논제"의 48 번째 논제에 대한 해설에서 교황이 돈 대신에 그의 신하들에게 기도를 원하는 것이 천 개의 성당을 짓는 것보다 낫다고 제안했으나 교황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황은 "마귀와 불경건한 사람들의 수많은 괴물들"에 포위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규탄했다. 교황은 세속 권력과 탐욕으로 오류에 빠졌고, 온 교회에 큰 해를 끼치었다.
교황의 권력과 사치에 대한 갈증은 그를 삼켜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그를 동성애자라고 비난했다. 교회는 이차적이었고 그의 변덕에 전적으로 종속되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가 개신교 개혁을 조장한 죄라면, 이 교황은 개신교 개혁을 실현하고 서방 교회를 분열시킨 죄가 있다.
루터에게 "95개 조항"에 요약된 그의 모든 신념을 포기하라고 요구한 사람도 교황 레오 10세였다. 루터는 이를 거부한 후 1521년 교황에 의해 파문당했고, 신성 로마 황제에 의해 불법자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루터의 서적은 금지되었고 그를 체포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작센 선제후인 프리드리히(현명한) 3세의 개입과 보호가 없었다면 루터는 "악명 높은 이단자"로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마지막으로, 교황 클레멘트 7세는 나쁜 교황이었지만, 그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강요받아서였다. 그의 재임 기간은 매우 격동적이었다. 그의 종교적, 정치적 곤경은 그보다 훨씬 더 타락하고 부패했던 전임자들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범죄자이요 희생자였다.
그의 잘못된 정치 행위와 잘못된 동맹으로 인해 로마는 야만적으로 약탈당했고 영국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교황 자신도 혼란에 갇혔지만 나중에 탈출했다. 그 사건들은 기독교, 교회, 유럽 전체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상징할 만큼 중요했다. 그 후 종교 개혁이 본격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루터와 교회의 내부 문제
▲ 교황의 파문 칙서(Exerge Domine)를 불태우는 마르틴 루터!(1520. 12. 10.) |
루터는 교회의 상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으며 정치보다는 영적 타락에 더 관심이 있었다. 영적 타락은 두 세계 모두에서 사람들이 멸망하는 근본 원인이며, 모든 현세적 선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에 달려 있다.
루터는 진정한 기독교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기독교인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다. 교황과 성직자들은 평범한 사람들 보다 더 나빴다. 사실, 그들은 최악이었다. 그들은 모든 악의 근원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을 조종하고 오도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신의 눈에 트루크인(무슬림)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라고 루터는 추론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루터는 "그들은 많지 않지만, 얇게 퍼져 있고 선하고 악한 군주들의 지배를 받으며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어디에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또한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투르크인들과 싸운다면 그러한 군대(십자군)에는 "다섯 명 정도의 그리스도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과 그의 주교들에 대해 루터는 그들이 복음에서 떨어져 나갔고, 거짓의 영에 이끌려 그들만의 인간적 교리를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살인을 행했다고 강조했다. 교황과 주교의 주요 업무는 황제, 왕, 왕자, 영토, 국민을 서로 대적하게 하고, 심지어 자신들도 싸우게 하여 살인과 유혈 사태를 도우게 하는 것이었다.
교황과 그 추종자들은 적들에 대항하는 호전적이고 살인자, 강도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무고한 사람, 독실한 사람, 정통적인 신앙인들을 불태우고 비난하며 파문하고 박해했다.
루터는 특히 자신을 파문한 교황 레오 10세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하였고, 기독교 세계의 기도가 교황을 대적한다고 덧붙였으며, 그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고 하였다.
루터는 "황제가 불신자와 비기독교인을 파괴하려면 교황, 주교, 성직자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고, 아마도 우리나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제국에는 끔찍한 우상 숭배가 너무 많아서 이 대의를 위해 터키인과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그럼에도 루터는 교회와 그 불경건한 엘리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루터 자신과 그의 반항심이라고 한탄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고 볼 수도 없었다. 마치 기독교 세계 전체에 다룰 다른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성직자와 사제들은 설교에서 루터와 그의 견해를 비난하고 거부하는 데 바빴다. 그는 선동적인 적이라고 공표되었는데, 그들이 하는 일과는 반대로, 그는 결코 칼을 탐내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칼을 잡으라고 촉구하지 않았으며, 평화와 순종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근본적 신조의 일부로서, 또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루터는 트루크(이슬람)가 유럽과 기독교 영토를 정복하는 것은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한 신의 형벌(punishment from God)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터키인들은 징벌이었고 신의 보복의 도구였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싸우는 것은 신과 그의 뜻에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루터는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것들 속에서 신의 채찍과 막대기를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None but a poor Christian would fail to recognize in these the lash and rod of God”)라고 썼습니다.
물론 루터가 말하고 행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진술 역시 교회에 의해 오해를 받았다. 루터는 사람들이 트루크인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우리의 불의를 그들을 통해 처벌하는 신"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유로 트루크인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고 만류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 말은 반역적인 정신을 울려 퍼뜨렸습니다. 교회와 교황 레오 10세가 겉보기에 막을 수 없는 트루크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위한 정교한 계획을 준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비난의 내용은 교회가 루터의 이전 "95개 논제"에 대한 대응으로 루터에게 돌린 41개 오류 중 34 번째 오류였다. 이 오류는 Exsurge Domine 이라는 교황칙서(칙령)에 나열되어 있다 . 이 칙서는 루터의 파문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대체로 루터와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의 신학적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으며(선행, 성례, 의식 등을 통해서가 아니다). 성경만이 종교적 교리의 권위 있는 근거이고, 가톨릭교회의 판결과 전통은 아니다. 인과 신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신자의 사제단이다. 교황의 우월성은 없다.(no papal supremacy)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도들과 초기 교부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기독교의 수호자로서의 신뢰성을 잃었다. 독신제도 없다. 수도원 생활도 없다. 성인 기도도 없다. 유물 숭배도 없다. 면죄부도 없다.( no celibacy; no monasticism; no invocation of saints; no veneration of relics; no indulgences)
간단히 말해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the Bible alone, grace alone, faith alone and Christ alone), 네 가지 신앙 방향이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로서의 트루크인들(The Turks)
▲ "무슬림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죄를 심판하는 채찍이기 때문이다."-마르틴 루터. |
루터의 유일한 관심사는 언제나 기독교와 그 추종자들의 불안한 영적 상태(disturbing spiritual state)였다. 그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걱정했는데, 그것들이 불안한 영적 상태와 관련이 있으며, 개선할 수 있는 경우에만 걱정했다. 사람들이 올바른 길을 가고 경건하고 명예로운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유럽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적 진전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런 프리즘을 통해 보아야 한다. 사실, 투르크에 대한 그의 상대적인 두려움은 사람들의 영적 침식(spiritual erosion)의 결과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두려움보다 열등했다. 신은 저지른 악에 대한 저주로 투르크를 보냈다. 그들은 그의 진노의 막대기(the rod of His wrath) , "통치자와 사람들의 죄에 대한 신성한 방문"(a divine visitation upon the sins of rulers and people)이었다.
그러므로 루터는 트루크인에 대해 말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와 그 추종자들에 대해 말했다. 그는 "저주"(curse)를 사람들의 영적 감정을 일깨우고 그들에게 진정한 위험을 깨닫게 하는 기회로 사용했다. 트루크인은 위험이 아니라 사람들 자신이었다. 트루크인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저주"는 치유될 수 있었고, 그 원인에 상응하는 치유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원인을 적절히 처리하면 결과를 없애는 것이 간단하고 고통 없는 과제가 된다.
처음에 루터는 트루크 문제에 대해 직접 말하는 것을 피했지만 그의 견해가 무능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사악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터키와의 전쟁에 관하여"(On the war against the Turks)라는 제목의 작은 책이 탄생했다.
이 책에서 루터는 트루크에 대한 방어를 지지했지만, 그의 완강한 종교적 판단에 의해 지시된 특정 조건 하에서였다. 서론에서 루터는 소책자를 쓰기 위해 최대 5년 동안 간청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터키의 위험이 실제로 다가오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협적이 되자 그는 의무를 다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강요"를 받았다.
그런데 이 책은 1528년에 쓰여졌고, 이 책이 출판된 1529년에 오스만 투르크가 오스트리아 빈을 처음으로 포위(the first siege of the city of Vienna, Austria)하고 유럽 대부분을 정복하겠다고 위협했다.
루터는 첫째로 사람들이 자신의 땅을 방어하는 일에 나서도록 격려하기 위해, 둘째로 자신에게 가해진 수많은 공격과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마치 사람들 사이의 모든 사악한 오류, 모든 반항, 그리고 세상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이 루터에게 떠넘겨지고 그의 복음의 열매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자신과 복음을 위해 이런 일들을 써야 하며, 우리를 변호해야 합니다... 저는 무고한 양심이 더 이상 이런 중상모략가들에게 속지 않고, 저나 제 교리를 의심하지 않으며, 우리가 터키인과 싸워서는 안 된다고 믿도록 속지 않도록 써야 합니다."(Therefore it is necessary for me to write of these things for my own sake and the Gospel’s sake and to enter our defence…I must write in order that innocent consciences may not any longer be deceived by these slander-mongers, and made suspicious of me or my doctrine, and may not be deceived into believing that we must not fight against the Turks.)
루터의 이슬람 혐오증(급진적인 반이슬람 논쟁) 상황
언급된 책("터키와의 전쟁에 관하여")의 일부로서 루터는 이슬람, 무슬림, 꾸란, 예언자 무함마드( pbuh, 평화가 그에게 있기를)에 대하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엉성하고 단편적이며 과장되고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완전히 잘못되었다.( However, his expositions are patchy, fractional, exaggerated, misleading and outright wrong)
그는 이슬람에 대해 충분하고 적절한 지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르크인들이 행하는 모든 방탕한 삶과 방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밝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구원과 모든 선의 다른 적들과 마찬가지로" 투르크인들에 대한 기도의 필요성을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악마 자신에 대해 기도하듯이요."
루터에게 공평하게 말하자면, 그는 자신과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아는 것이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왜 "우리의 위대한 군주나 학자들이 우리에게 투르크인의 두 계층, 즉 영적 계층과 세속적 계층의 삶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주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에게 그렇게 가까이 왔습니다."고 말했다.
루터는 또한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옳은 일을 하는 대신, 트루크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며내어 사람들을 트루크인에 대항하도록 선동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터는 솔직했고 부정직과 속임수는 결코 효과가 없다고 믿었다. "거짓말은 필요 없습니다. 진실은 너무나 위대합니다."( There is no need for lies; the truth is all too great)
루터는 자신의 빈약한 지식에 대해 자신이 꾸란의 일부(조각)만 소유하고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이슬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는 이슬람의 권위자처럼 행동했지만 조금도 그렇지 않다. 그는 후에 꾸란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으며, 꾸란의 주장의 불일치에 대해 지적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일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것은 루터가 겉보기에는 성실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것깉으나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지의 바다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 조심스럽고 더 규율적이어야 했다. 그가 한 일은 건전하지 못했고 그의 지성과 진보성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는 타당성과 진실을 희생하고 허구와 거짓말을 즐겼다. 그의 장기적인 성실성이 위태로웠다.
어쨌든, 마틴 루터 시대의 이슬람 혐오증 (Islamophobia during Martin Luther’s time )은 기독교 유럽에서 흔했습니다. 그것은 수세기 전부터 기독교 논쟁과 변증론 사이를 오가며, 이슬람과 그 부상을 묵시록과 연결하고, 이슬람, 무슬림 세계와 그 사회, 그리고 문화에 대한 부정확한 설명적 설명을 제공하는 현상이었다.
극단주의 반이슬람 논쟁의 형태로 나타난 이슬람 혐오증(Islamophobia in the form of extremist anti-Islamic polemics)은 십자군 전쟁(1095-1291) 동안 정점을 찍었고 그 이후로는 결코 가라앉지 않았다.주인공이자 선지자였던 많은 종교적, 지적, 정치적 인물들이 이슬람 혐오증을 대표하며 이런 인물들이 두드러다.십자군 전쟁의 창시자이자 최대의 악당인 교황 우르바노 2세(1099년 사망), "사라센(무슬림)의 이단"(heresy of Saracens (Muslims))에 대한 많은 작품의 저자인 존경받는 피터( Peter the Venerable, 1156년 사망), 여러 아랍어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한 로버트 오브 케톤( Robert of Ketton, 1187년 사망), 여기에는 많은 비평가들이 부정확하고 왜곡되었으며 신뢰할 수 없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여겼지만 18세기까지 유럽 독자와 쿠란과 이슬람을 반박하는 사람들에게 "표준 버전"으로 남아 있다 . 이슬람에 반대하는 저술로 가장 영향력이 크고 잘 알려진 작품이 '사라센(무슬림)의 법에 반하여'(Against the laws of the Saracens (Muslims))인 선교사이자 기독교 옹호자인 리콜도 다 몬테 디 크로체(Riccoldo da Monte di Croce , 1320년 사망), 서사시로서 가장 뛰어난 '신곡'(Divine Comedy)을 쓴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 1321년 사망) 등이 있다.
루터가 만연한 문화와 전통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그를 압도했고, 그를 이슬람 혐오적인 전임자와 동시대 사람들 대부분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희생자이자 가해자였다. 하지만 그가 원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자신이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더 신중할 수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날 "이슬람혐오증"이라는 용어는 수백 년 된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표현일 뿐이다.(the term “Islamophobia” today is merely a new expression for a centuries-old paradigm)
이슬람 혐오주의자로서의 루터
루터의 이슬람 혐오적 경향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이슬람에 대한 그의 지식은 문제가 많고 이슬람 혐오적인 중세 자료에서 유래했다.(His knowledge about Islam was derived from the problematic and Islamophobic medieval sources)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썼다. "저는 얼마 동안 무슬림의 종교와 관습에 대해 배우고 싶어했지만, 니콜라스 드 쿠사의 알코란에 대한 반박 과 알코란에 대한 비판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 저는 꾸란 자체를 읽으려고 헛수고했습니다."(Refutation of the Alcoran and the Critique of the Alcoran by Nicholas of Cusa. I have tried in vain to read the Qur’an itself.)
루터는 "투르크와의 전쟁에 관하여" (On the war against the Turks) 를 쓴 지 약 2년 후인 1530년에 이를 밝혔다. 이 계시는 "투르크인의 종교와 관습에 관하여"(On the religion and customs of the Turks)라는 소책자 서문의 일부로 나왔다. 이 소책자 또는 팜플렛은 무슬림에게 점령된 후 콘스탄티노플의 익명의 기독교 작가가 작성한 것이다.
"트루와의 전쟁에 관하여"에서 그가 "나는 (단지) 모하메드의 코란의 일부만 가지고 있다"(I have (merely) some pieces of Mohammed’s Koran)고 고백한 것을 떠올려보자. 즉, 이슬람에 대한 루터의 지식은 이슬람에 대해 쓰고 비판하는 중요한 2년 동안 전혀 향상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 이슬람에 대한 논쟁가이자 종교 개혁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지혜"와 위상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향상되지 않았다. 적절한 출처가 부족한 것도 부분적으로 원인이다.
12년 후인 1542년에야 루터는 라틴어로 번역된 꾸란 전문(a full copy of the Qur’an in Latin translation)을 받았다. 이 번역본은 로버트 오브 케톤(Robert of Ketton)의 소유였는데, 그는 이슬람 혐오증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앞서 언급되고 있다. 루터는 꾸란 출판을 위한 지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이 작업은 1543년에 스위스 개혁가, 기독교 선교사, 변증가이자 이슬람 혐오증이 있던 테오도르 비블리안더( Theodore Bibliander, 1564년 사망)에 의해 완수되었다. 라틴어로 꾸란의 첫 번째 인쇄판(first printed edition of the Qur’an in Latin)을 위해 루터는 유명한 서문을 썼다.
그의 관점에서 루터는 종교와 문화를 혼합하고 있다. 유럽 민족주의의 씨앗(The seeds of European nationalism)은 그의 담론에서 거의 느낄 수 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기독교적, 개혁적 선호도의 렌즈를 통해서만 관찰하고 있다. 그는 이슬람과 무슬림을 다른 이름과 표현으로 부르며, 자신의 성향과 의도를 증명한다. 그는 "사라센", "트루 신앙", '무함마드교', "무함마드의 종교", "무함마드의 종파", "무함마드교도"(Saracens, Turkish faith, Muhammadanism, religion of Muhammad, Muhammad’s sect and Muhammadans)라는 단어를 가장 널리 사용한다. 그에게 트루크인은 무슬림이었고 이슬람은 "트루크식 삶의 방식"과 "트루크 종교"(Turkish religion)였다. 유럽 전체가 오스만 투르크(the Ottoman Turks) 와 그들의 잠재적 정복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모든 것이 트루의 종교적, 문화적, 국가적 정체성에 반하여 평가되었습니다.
그의 책 "튀르크와의 전쟁에 관하여"( On the war against the Turks, 1528)에 근거하여 루터는 무슬림이 악마의 하수인(servants of the devil)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불의하고 억압적인 극단주의자이자 편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칼만으로 땅과 사람들을 정복하고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무력으로 사람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모든 선의 적이었다("누가 이 두 가지, 즉 무력과 간계로 그리스도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무력으로 설교를 막고 말씀을 억압합니다. 간계로 그들은 매일 사람들의 눈앞에 사악하고 위험한 본보기를 보여주고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they conquered and ruined land and people with the sword alone; they converted people to Islam by force; they were enemies of salvation and all good (“How can one injure Christ more than with these two things; namely, force and wiles? With force, they prevent preaching and suppress the Word; with wiles, they daily put wicked and dangerous examples before men’s eyes and draw men to them”))
이슬람의 신앙과 관행은 타락하고 부도덕했습니다. 꾸란은 "교황의 교령"과 같은 설교나 교리의 책이었고 더럽고 부끄러운 책이었습니다. 꾸란에는 칼을 미화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무함마드는 세상을 자신의 신앙으로 이끌라는 명령을 받았고 세상이 기꺼이 하지 않으면 칼로 강요하거나 처벌해야 했습니다.(Islamic beliefs and practices were dissolute and immoral; the Qur’an was a book of sermons or doctrines like “pope’s decretals” and was a foul and shameful book; there was much glorification of the sword in the Qur’an; Muhammad was commanded to bring the world to his faith and if the world is not willing he was to compel it or punish it with the sword)
무함마드는 주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파괴한 자였습니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혐오스러운 것, 모든 오류, 모든 악마가 한데 쌓여 있습니다. 이슬람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교도의 신앙을 모아 만든 표절 종교입니다. 무슬림은 파괴와 유혈을 조장하는 살인자이자 강도에 불과합니다. 무슬림은 악마이고 기독교의 기도는 그들을 대적했습니다. 무슬림은 지옥으로 향합니다. 꾸란은 거짓말의 모음집입니다.(Muhammad was a destroyer of Lord Christ and His kingdom; in Islam, all abominations, all errors, and all devils are piled up in one heap; Islam is a plagiarized religion patched together out of the faith of Jews, Christians and heathen; Muslims are nothing but murderers and highway robbers who exalt destruction and bloodshed. Muslims are devils and the prayers of Christendom were against them; Muslims are hell-bound; the Qur’an is a compilation of lies)
무함마드는 적그리스도의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무슬림은 무함마드라는 이름의 묵시록의 짐승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무함마드의 법은 비이성적이고 그의 꾸란은 짐승 같고 돼지 같습니다. 무함마드는 간통했습니다. 꾸란은 낙원을 음탕하게 묘사합니다.( Muhammad was the false prophet of Antichrist; Muslims are followers of the beast of Apocalypse, which was Muhammad; the law of Muhammad is irrational and his Qur’an beastly and swinish; Muhammad was adulterous; the Qur’an lustfully describes paradise, etc.)
루터가 이슬람의 여성과 결혼에 대해 말할 때, 종교적 중심 주제 중 하나인 이 주제에서 그는 자신과 그의 모든 세대가 얼마나 무지하고, 잘못 인도되었고, 순진하고, 이슬람 혐오적이었는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더욱이 여기서 그는 이슬람 혐오 피해자라는 사실보다 이슬람 혐오 가해자라는 사실이 더 큽니다. 그의 진술은 우스꽝스럽고 당혹스러운 수준에 가깝습니다.(When Luther speaks about women and marriage in Islam, as one of the three religious central thrusts, it is there that he displays most unequivocally how ignorant, misguided, naïve and Islamophobic he and his entire age were. It is here furthermore that his being an Islamophobic culprit supersedes his being an Islamophobic victim. His statements border on the ridiculous and embarrassing.)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 번째 요점은 모하메드의 코란은 결혼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아내를 취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터키인들 사이에서는 한 남자가 열 명이나 스무 명의 아내를 두고, 원하는 때에 아내를 버리거나 팔아버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여성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싸게 취급되고 멸시받습니다. 그들은 가축처럼 사고 팔립니다. 이 법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 몇 명 있을지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법이고 누구든 원한다면 따를 수 있습니다. 이런 생활 방식은 결혼이 아니며 결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누구도 아내를 취하거나 아내를 두는 것이 영원히 그녀와 함께 있을 의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터키인들의 결혼은 군인들이 창녀들과 함께 사는 순결한 삶과 매우 유사합니다. 터키인들은 군인이기 때문에 군인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시인들은 화성과 금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He said: “The third point is that Mohammed’s Koran thinks nothing of marriage, but permits everyone to take wives as he will. Therefore, it is customary among the Turks for one man to have ten or twenty wives and to desert or sell any of them that he will, when he will, so that in Turkey women are held immeasurably cheap and are despised; they are bought and sold like cattle. Although there may be some few who do not take advantage of this law, nevertheless this is the law and anyone can follow if he will. Such a way of living is not marriage and cannot be marriage, because none of them takes a wife or has a wife with the intention of staying with her forever… Thus the marriage of the Turks closely resembles the chaste life that the soldiers live with their harlots; for the Turks are soldiers and must act like soldiers; Mars and Venus, say the poets, must be together.”)
루터는 이슬람과 무슬림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프레젠테이션을 자신의 의견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서 마무리했다. "그들의 코란에 따르면 거짓말, 살인, 결혼 무시라는 세 가지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을 때, 정부와 터키의 모든 생활 방식에 무슨 이점이 있을까요?"( What good can there be in the government and the whole Turkish way of life, when according to their Koran these three things rule among them; namely, lying, murder, and disregard of marriage?)
루터는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이와 비슷하게 의아해 다. "세상이 터키인보다 더 잔인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나움을 신과 종교의 이름으로 장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과 종교는 끊임없는 살인, 강도, 약탈 및 기타 끔찍한 폭행이 아닌가?"( Has the world ever seen anything more cruel than the Turks? And they adorn all their fierceness with the name of God and religion. Notwithstanding, what is their life and religion but incessant murder, robbery, rapine and other horrible outrages?)
오늘날의 이슬람 혐오증
루터는 "터키와의 전쟁에 관하여"라는 책의 서두에서 지금까지 꾸란의 "일부"만 읽었다고 밝혔는데, 이는 주요 이슬람 교리에 대한 "설명"의 마지막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그는 "나는 터키의 꾸란에서 그것들을 확신합니다. 그 외에 들은 것은 내놓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특히 자신의 초기 지식(이해)이 쿠란의 자신의 "조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어했다. 그는 2차 자료에 크게 의존할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는 분명히 일부 자료에 대한 접근을 즐겼지만, 부정확하고 노골적인 오류 때문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후 상황은 출처와 더 나은 선택권의 고집스러운 부족으로 인해 다소 바뀌었고, 아마도 루터 자신 내부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루터가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해 어떻게 광범위하고 결함 있는 추론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가 자신의 일부 명백히 과장된 진술에 대해 약간의 우려조차 품지 않았는지 궁금해진다. 그 당시 그가 얼마나 아는 것이 없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는 나중에 이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후에도 잠재적인 과장, 잘못된 정보 및 악의적인 캠페인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지 않았을까? 그는 기독교 세계의 정치 및 종교 당국이 "트루크인"의 영적 및 세속적 영역에 대해 사람들을 고의로 어둠 속에 두었고, 고의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못마땅해하지 않았을까?
더욱이 루터는 교황령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과 그들의 정치적 동맹자들의 상상할 수 없는 사악함이 이슬람과 기독교,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의 모든 주요 오해의 원인이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을까?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루터는 그 사람들이 하는 말과 하는 일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직접 경험했ㄱ으며 실제로 무엇보다도 가장 높은 수준의 종교적 음모가 존재했다.
대체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즉, 루터는 본질적으로 이슬람 혐오적인 전임자나 동시대 사람들보다 더 이슬람 혐오적이지 않았다. 차이점은 규모와 목표가 아니라 뉘앙스와 방법에 있다. 이슬람 혐오가 그 시대의 질서였고 유럽적 정신 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트루크인뿐만 아니라 역사상 이슬람의 횃불을 든 다른 사람들이 물론 불행한 예외도 있지만, 싸웠던 이유를 설명한다. 전쟁의 주요 목적은 인류에 대한 신의 최종 계시인 이슬람과 세상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 사이에 서 있던, 그렇지 않으면 제거할 수 없는 부당하고 억압적인 장애물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이었다.
즉, 무슬림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적절한 빛으로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 적절하게 책임을 질 것이다. 정복을 위한 정복은 이슬람 문명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에 만연한 악과 억압의 범위를 고려할 때 필수적이고 수단이었다. 기독교 세계의 상황은 축소판이었다.
꾸란은 "그리고 말하라. '진실은 주님으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믿고자 하는 자는 믿으라. 믿고자 하는 자는 믿지 말라.'"라고 선포한다(Al-Kahf , 29장)
사실 루터는 이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 세계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더 큰 의제의 일환으로 이슬람에 대해 무지하게 지냈다고 거듭 인정한다. 그는 죽기 약 4년 전에야 꾸란 전체 사본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생각 대부분이 이미 공식화되고 전파된 후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얻은 꾸란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되었고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그것이 더 많은 해를 입혔는지, 이익을 입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진정한 학문의 기준에 따라 루터가 말한 방식은 이슬람 연구에서 우수한 박사 학위를 필요로 했다.
같은 꾸란의 출판된 버전에 대한 서문에서 루터는 몇 가지 흥미로운 진술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위의 회의론을 뒷받침할 뿐이다. 그는 무함마드의 사악한 믿음을 방금 반박하기 시작했으며, 앞으로도 더 자세히 반박할 것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무함마드의 글을 자세히 연구하는 것도 유용합니다. 그러므 저는 꾸란의 전체 텍스트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I have wanted to get a look at a complete text of the Qur’an.)
루터는 방어와 공격을 위해 이슬람, 무슬림, 무함마드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총체적인 프로젝트를 시작다. "이제 무함마드에 대비합시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지식 밖에 있는 문제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학식이 있는 사람이 적의 글을 읽어서 더욱 날카롭게 반박하고, 조각조각 내고, 뒤집는 것이 가치가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면 루터가 해당 꾸란의 출판을 지원하고 이에 대한 포괄적인 서문을 쓰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 유일한 이유였다.
그러나 루터가 위의 텍스트를 쓰고 몇 가지 심오한 약속을 한 해인 1542년 이후에 쓴 새롭고 주목할 만한 글은 거의 없다. 티모시 F. 룰(Timothy F. Lull)이 편집한 "마틴 루터의 기본 신학 저술"(Martin Luther’s Basic Theological Writings)이라는 책에는 루터의 저술 31편이 소개되어 있는데, 모두 1542년 이전에 쓰여졌다. 원래 1522년과 1523년에 각각 쓰여진 "신약성서 서문"과 "구약성서 서문"만이 1546년과 1545년에 각각 개정되었다. 이 책은 루터의 짧은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을 포함하고 그의 신학적 관심사의 범위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다.
브라이스 원드리(Bryce Wandrey)의 루터 작품에 대한 철저한 연대기적 목록에는 1542년 이후에 제작된 작품이 8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도 이슬람, 무슬림 또는 무함마드와 직접 관련이 없다. 1540년대 중반에 유럽에 대한 트루크의 위협이 다소 완화된 것이 같은 기간 동안 이슬람 혐오증이 다소 약화되어 루터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죽기 3주 전에 한 설교에서 이슬람에 대한 자신의 전반적인 입장을 다시 설명하고 옹호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이는 루터가 이슬람과 그 문명에 대해 전혀 정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확실히 부족한 지식이 얼마나 많이, 또는 얼마나 적게 확장되었는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그의 이슬람 혐오적 변형과 관련하여 답보다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더욱이 1542년 루터가 리콜도 다 몬테 디 크로체(Riccoldo da Monte di Croce)의 "사라센(무슬림)의 법에 반하여"(Against the laws of the Saracens (Muslims))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책은 가장 이슬람 혐오적인 논쟁적인 중세 참고 자료 중 하나였다. 이 책은 이슬람(무슬림 종파)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가치하며, 본질이 없는지를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이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
이 종파(이슬람)의 선동자는 계속해서 모하메드라고 말했다. 그는 사기꾼, 거짓말쟁이, 악마, 이단자, 성적 욕망에 기울어지고 사기적 수법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마귀가 여기저기에 뿌린 과거의 모든 흙을 그는 모하메드에게 그대로 뿌렸습니다."(was Mohammed: a deceiver, a liar, a devil, a heretic, and a man inclined to sexual desire and given to deceitful devices. “All the dirt of times gone by which the devil has scattered in other places here and there, he also spewed out in its entirety onto Mohammed.)
1542년에 루터의 거점인 독일 독자를 위해 이런 책을 번역한 것은 루터가 이슬람 혐오적 통찰력을 바꾸거나 완화하지 않았다는 추가 증거이다. 사실, 그 통찰력은 익었으나 그와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종류의 진정한 깨달음과 지혜를 얻는 것과 관련하여 선택권이 제한되었다. "사라센(무슬림)의 법에 반하여"(Against the laws of the Saracens (Muslims))가 루터의 극소수의 "이슬람" 출처 중 하나였다는 것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다른 "주요" 출처도 더 나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것들은 이슬람 혐오적이었고 신뢰할 수 없었다.
루터의 주요 적은 교황주의자와 무슬림들(papists and Muslims)
루터의 주요 적은 두 명이었다. 가톨릭 교회(교황주의자)와 트루크인(무슬림 또는 무슬림)이었다. 그는 교황을 "적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Antichrist)이고, 교리와 영으로 의로움을 소멸시키며, 트루크인을 "적그리스도의 육신"(the flesh of Antichrist)으로, 몸과 칼로 모든 선한 것을 파괴다.
때때로 "우상 숭배하는 유대인들"(유대인에 대한 그의 견해는 반유대주의적이었다)과 "재세례파와 세르베투스(the Anabaptists and Servetus)의 다양한 괴물들"과 같은 다른 사소한 적대자들이 혼합물에 추가된다. 그는 같은 숨결에 플라톤과 무함마드의 부적절함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신의 본성에 대해 무지하다고 비난했다. "플라톤이나 무함마드는 신이 합당하지 못한 자들을 듣고 받아들이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가 그들을 어떻게, 왜 받아들이는지도 몰랐습니다."(Neither Plato nor Mohammed knew whether God heard and received the unworthy; nor how, nor why, he received them)
루터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찬송가 중 하나인 "주님, 당신의 말씀에 우리를 굳건히 지켜 주소서"(Lord, keep us steadfast in your Word)에서 "기만이나 칼로 당신의 아들로부터 왕국을 빼앗으려는 자들을 제지하소서"(Curb those who by deceit or sword; Would wrest the kingdom from your Son)라고 간구했다.
"기만"(deceit)이라는 단어는 교회를 의미하고 "칼"(sword) 은 터키인(무슬림)을 의미한다. 이 찬송가는 1542년에 출판되었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교회의 두 대적, 교황과 터키인을 상대로 부르는 어린이 찬송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기만이나 칼로 사람을 제압하라"라는 구절은 원래 "살인적인 교황과 터키인을 제지하라"로 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현재의 방식으로 변경되었다(마크 버크홀츠, Mark Birkholz ).
그러나 전반적으로 루터의 가장 큰 진정한 대적은 교회였다. 그의 집착은 교회와 사람들의 영적 쇠퇴에 맞서는 것이었다. 교회 설립은 후자를 일으켰고 지탱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하지 않는 대중을 무자비하게 질식시키고 있었다.
터키인에 관해서는, 그들은 부인할 수 없는 군사적 위협이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종교, 사회, 문화와 관련된 문제들과 같은 다른 문제들은 그들이 유럽의 기독교 세계의 심장과 가장 좋은 부분을 정복하는 데 성공해야만 뒤따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루터에게 터키인들은 잠재적이고 상대적인 위험이었습니다. 교회의 위험은 절대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완전한 존재와 복지를 포함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루터를 기회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는 더 작고 태동하는 문제를 이용해 주요하고 억제되지 않은 문제를 극복하기로 했다. 신체적 안녕을 위협하는 문제를 영적 안녕을 위협하는 다른 문제와 맞붙이면 단 하나의 결과만 낳을 수 있다. 마틴 루터와 그의 변화의 복음이 승리하는 것이다. 나중에 몸과 영혼의 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상관없다.
루터는 또한 국가적 감정을 종교적 이익에 복종시키는 것이 두 가지 모두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터키인과 이슬람에 대한 사람들의 극심한 두려움을 이용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곤경의 실제 원인을 알리는 훌륭한 기회였습니다.
이러한 원인은 내부적으로 지속되었고 모든 비난은 교회와 성직자의 문에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터키인의 재앙은 초대되었거나, 말하자면 끌려갔습니다. "터키인은 유럽에 있어서 바빌로니아인이 이스라엘에 있어서 그랬던 것과 같았습니다. 즉, 신에 대한 두려움과 기도를 훈련하고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진짜 범인은 터키인이 아니라 '가톨릭교도와 거짓 기독교인'이었습니다."(Sarah Henrich & James L. Boyce)
이런 식으로 루터는 또한 종교와 사람이 우선이라는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포퓰리스트였다. 그는 교회와의 신학, 지적 싸움과 영적 타락의 변덕에 너무 몰두하여 처음에는 트루크인들이 초래한 위험과 기회를 다소 간과했다.
그래서 그의 초기 견해는 순전히 종교적이었고 그의 순수한 목가적 틀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군사 및 안보 측면에서 긴박한 현실에 직면하여 그는 "세속적"이고 세속적인 문제에 끌려드는 것을 꺼렸다. 그는 그러한 토론이 실제 문제에서 초점을 돌릴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특정 인물"이 5년 동안 터키와의 싸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쓰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라고 간청한 후에야 루터는 양보했다. 그는 난제의 모든 측면을 꼼꼼히 따져보고, 우려 사항을 우선시하고, 두 가지 악 중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절차에 정기적으로 의지했을 것이다. 따라서 "트루와의 전쟁에 관하여"(On the war against the Turks)라는 책은 주제의 배경과 그것과의 관련성을 정직하게 설명하는 서문이 필요했다.
따라서 일부 연구자들은 루터가 "이슬람 신앙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슬람에 대한 그의 주장은 단지 우연의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목사로서 트루크인에 관심이 있었고 신학자로서는 부차적으로, 학자이자 논쟁가로서 관심이 있었다."( Adam S. Francisco )
이슬람 혐오자 겸 개혁가로서의 루터
▲ 술탄 쉴레이만 1세(1494 – 1566)는 1520년부터 1566년 사망할 때까지 오스만 제국을 통치했다.(사진출처:WHA United Archives). |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실제로 루터는 트루크인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할 만큼 종교적이었고 트루크인과 그들의 이슬람에 대한 진실에 대해 무지했다. 그는 트루인이 "전쟁을 시작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땅을 공격할 권리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방어전을 지지했으며, 그러한 전쟁은 종교적 권위가 아닌 유능한 세속적 권위에 의해 주도되어야 하며 "큰 명예, 영광, 부의 획득, 땅의 증가, 분노와 복수심의 충만함 및 이와 유사한 다른 것"(the winning of great honor, glory, and wealth, the increasing of lands, or wrath and revenge fullness and other things of the kind)을 위해 수행될 수 없다는 조건을 규정했다.
그는 십자군에 반대했지만 어떤 종류의 종교 전쟁에도 반대했다. "교회는 칼로 싸우거나 싸워서는 안 됩니다. 육과 피 외에도 다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공중의 사악한 악마입니다. 따라서 다른 무기와 칼과 다른 전쟁이 있으므로 할 일이 충분하고 황제나 군주들의 전쟁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들이 신에게 불순종하면 행운이 없을 것입니다."( for the Church ought not strive or fight with the sword; it has other enemies than flesh and blood, their name is the wicked devils in the air; therefore it has other weapons and swords and other wars, so that it has enough to do, and cannot mix in the wars of the emperor or princes, for the Scriptures say that there shall be no good fortune where men are disobedient to God)
루터는 이겼든 졌든 트루크인들이 여전히 신의 뜻의 도구라는 사실에 굴복했다. 그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만 대면하고 패배해야 했다. 그들을 세상적인 적에 불과한 존재로 여기고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은 동시에 비기독교적이고 불경건했다. 그들을 통해 신과의 관계, 그리고 자아와의 관계가 바로잡혀야 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방식을 바꾸고 참된 그리스도인처럼 살아야 했다.
사람들이 무기력함을 떨쳐내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는 기회를 활용하지 않는다면, 승패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회개, 하나님의 말씀, 고행, 기도, 금식,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통해 영적 승리를 필요로 했다. 그것들이 없다면 다른 모든 전투는 패배할 운명이었다. 루터는 "진실로 이 싸움은 회개로 시작되어야 하며,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개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싸울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트루크의 승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재앙이겠지만, 은빛 안감이 있을 수 있다고 마지못해 추론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에서 밀과 금속, 광석을 분리하는 정화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트루가 통제권을 잡으면 일반인의 자유는 합리적으로 유지되었을 것이고, 부패한 교회와 세속 당국의 권력은 상당히 약화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더욱 경계하고 진정한 기독교 진리를 더욱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터키와의 전쟁 가능성을 마술사의 모자로 사용하여 사람들을 배신하고 오도했다. 그 마술사의 모자를 벗기고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다. 따라서 루터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압력을 받은 후에야 공개적으로 전쟁을 지지했다.
루터는 기독교를 개혁하고 사람들을 더 나은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사명의 이익을 위해 트루크인과 싸울 가능성을 활용했다. 임박한 전쟁의 결과에 관계없이, 순수하고 유능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모든 적과 맞설 위치에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인위적인 맥락과 제한에 얽매이지 않았고 그들이 사는 것은 그것들을 초월했다. 인위적인 것은 필요 없었다. "진실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이다."(the truth is all too great)
이슬람 혐오주의자 겸 논쟁가이자 변증가로서의 루터
루터 역시 전면적인 선교 사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인과 터키인(무슬림)을 모두 표적으로 삼았다. 후자에 관해서는, 그는 트루크인들 아래에서 그러한 의무를 수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준비시키고 있었다. 트루크인들이 승리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그는 또한 이미 트루크의 지배를 받았던 기독교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트루크 땅에 대한 선교 공세도 의제에 있었던 듯하다. 트루크 땅에 있는 기독교 포로들 역시 같은 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독교 포로들을 통해 어둠에서 트루인들을 불러내실 것입니다. 그들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저는 우리의 복음이 이처럼 큰 빛으로 빛나서 심판의 날 전에 그 혐오스러운 예언자 무함마드(abominable prophet Muhammad)를 공격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빨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이슬람의 가르침과 문명을 불쾌하게 공격하는 논쟁가이자, 기독교의 가르침과 문명을 왜곡된 배경에 맞서 열렬히 옹호하는 변증가로 등장했다. 그는 목사와 설교자들이 악의적이고 취약한 이슬람에 대한 변증적이고 논쟁적인 반응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침과 함께 자료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는 실제로 태도와 행동 패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이슬람이 알려질수록 그 오류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고 믿었고,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이슬람을 더 쉽게 거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교회와 엘리트의 사기적 관행과는 달리 투명성, 정직성, "지식", 토론 및 방해받지 않는 상호 작용을 지지했다.
이슬람에 어떤 악이 있든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에 어떤 선이 있든 그것은 상대적이고 교활하다. 반면에 기독교는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나은 것을 제공한다. 좋은 기독교인은 요새이며 무적이다.(A good Christian is a fortress and is undefeatable)
루터는 이슬람이 아름답고 효과적이며 강력한 의식, 선행, 거짓 기적의 쇼 아래에 숨겨진 저속하고 터무니없는 것들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슬란은 거짓된 반짝임과 기만적인 화려함에 관한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그보다 더 숭고하다. 기독교는 진실의 본질과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것의 핵심이자 동시에 최고의 방어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사,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는 우리의 삶을 위해 부활하셨으며, 그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무함마드뿐만 아니라 지옥의 문까지도 파괴하는 천둥입니다. 무함마드는 이 모든 것을 부인합니다."( the articles about Christ, namely, that Christ is the son of God, that he died for our sins, that he was raised for our life, that justified by faith in him our sins are forgiven and we are saved, etc. These are the thunder that destroys not only Muhammad but even the gates of hell. For Muhammad denies all that)
루터는 교회와 그 공동체가 트루크인과 이슬람에 대해 비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역효과를 내는 방법을 채택한 것에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의 복종적을 두려워하여 떠나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거짓에서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악의로 이끌기 위해 꾸란에서 가장 추악하고 기괴한 모든 것을 발췌하는 얕은 기법을 거부했으며, 그러한 것들을 기독교의 가치와 가르침과 대조한 다음 후자만을 근거로 반박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교회와 성직자 등 너무 적은 신뢰나 권위를 얻었고, 마치 트루크인에 대한 증오나 반박할 힘이 부족해서 그들의 작업을 가치없게 만든 것과 같았습니다."
분명히 루터는 널리 퍼진 방법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다 . 결국, 그는 그 방법의 대부분을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반대했던 것은 "지식"의 부족과 조작, 수동성, 기회 독점, 공격의 부족이었다. 그는 그 방법들의 일차원성에 반대했으며, 그 방법들의 비효과성과 절망에 반대했다.
루터는 "이념적 안전이 우선"이라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영원히 이념적 "안전 지대"에 갇혀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의무가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이끄는 사람들의 자아와 트루크인(무슬림)이 최우선이었다.
오히려 그 방법은 두려움과 희망, 방어와 공격, 사자의 심장과 신중함을 지닌 공격, 토론과 조언, 이론과 실천, 종교적 열정과 관용의 조합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범을 통해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방법은 상당히 개선되거나 완전히 대체될 것이라고 제안되었다. 루터는 기독교를 개혁할 뿐만 아니라 이슬람을 기독교화(개혁)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Luther, it seems, was determined not just to reform Christianity, but also Christianise(reform) Islam as well)
여기서도 교회의 영적, 도덕적, 지적 파산이 표적이었다. 트루크인과 이슬람을 다루는 접근 방식은 종교 기관의 근본적인 실패를 드러냈다.
루터는 가감없이 말하고 있다: "이제 나는 왜 트루크 종교가 교황파에 의해 그렇게 감추어졌는지, 왜 그들에 대해 천박한 것들만 이야기하는지 이해합니다. 그들이 사실인 것을 감지하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종교에 대해 논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모든 장식과 함께 교황청 전체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신앙을 방어하고 동시에 무함마드의 신앙을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찬성하고 가장 애쓰는 것들을 반박해야 하고,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이 가장 찬성하고 가장 애쓰는 것들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로 출판된 최초의 꾸란 서문에서 루터는 이슬람에 대한 논쟁과 변증 철학의 핵심을 요약했다. "저는 다른 독실하고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수록 무함마드의 오류와 이름이 반박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어리석음, 아니 광기가 그들의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면 더 쉽게 발견되듯이, 무함마드의 책이 공개되고 모든 부분을 철저히 조사하면 모든 독실한 사람들이 악마의 광기와 간계를 더 쉽게 이해하고 더 쉽게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슬람과 무함마드에 대한 결집의 함성 일부로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따라서 학자들이 적의 글을 읽어서 그것을 더욱 날카롭게 반박하고, 그들을 조각내고, 뒤집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어떤 사람들을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거나, 확실히 우리 국민을 더욱 강력한 주장으로 강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첫 번째 꾸란은 주로 논쟁과 변증의 과제를 위해 인쇄되어 더 많은 청중에게 제공되었다. 루터는 "목사들이 이 신뢰할 수 있는 증인 즉, 꾸란을 갖고 사람들에게 무함마드의 혐오스러운 것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의견입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어서 "사람들이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해 더 적대적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기독교 신앙은 강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수한 복음에 대한 그들의 증언에서 '사자심장'(lionhearts)이 될 것이고 꾸란에 전파된 '악마의 혐오스러운 거짓말'에 맞서는 투쟁(the struggle ‘against the abominable lies of the Devil’ propagated in the Qur’an)에서 더 결의를 다질 것입니다."(Adam S. Francisco)라고 예언했다.
루터의 방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진실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오류를 폭로하고 파괴하세요."(Expose and destroy error first before arguing for the truth) 아담 S. 프란시스코 "루터, 루터교, 그리고 이슬람의 도전"(Luther, Lutheranism, and the Challenge of Islam)에서 보고한 대로, "처음에는 우리 신앙의 고귀한 조항을 주장하고 옹호함으로써 그들(무슬림)을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과 태도를 채택해야 합니다. 그들의 꾸란을 부지런히 받아들이고, 그들의 법이 거짓이고 입증되지 않았음을 증명하세요." 이것이 성취되면,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종교의 진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아담 S. 프란시스코).
결론
마지막으로 루터의 다소 절제된 개방성과 정직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독특하고 치명적인 이슬람 혐오 스타일(a unique and lethal style of Islamophobia)을 만들어냈는데, 결국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 스타일은 그의 개혁적이고 단호한 전망을 반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슬람과 무슬림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증오, 두려움, 편견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
루터는 광범위한 지식, 객관성, 정직성, 진실을 요구하는 듯했지만, 자신은 무지(진정한 이슬람과 그 문명에 대한 무지), 편견, 조작, 진실의 부족에 갇혀 있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면에서 피해자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고의적인 가해자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의 방식은 선교와 선교 활동에 더 중점을 두었다. 더 역동적이고, 더 다양하며, 더 행동 중심적이었다. 그는 미래의 표준을 세운 사람이었다.(standard setter for the future)
기독교(유럽)의 이슬람 논쟁은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을 운명이었다. 이슬람 혐오증은 전례 없는 방식과 정도로 체계화되고 제도화되었다. 즉, 불멸화되었다. 정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유산을 기반으로 했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슬람 혐오증이 완고한 편견, 비이성성, 절제 부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진실과 정직성은 이슬람 혐오증의 주요 대조로 남았다. 이슬람 혐오증은 쉽게 진화했지만 현대 권력의 회랑에 침투하여 유럽(서구)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도 "민주주의" 시스템의 강단을 차지하고 지배있다. 이슬람 혐오증이 거의 유행이 되었다.
현대 이슬람 혐오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루터의 이슬람 혐오증은 그 어느 때보다 바람직하고 적용 가능하다. 그 자유로운 정신은 우리 주변에 살아 있고 활기차게 퍼져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세계적인 반종교적(불가지론적, 세속적, 물질주의적, 자유주의적), 특히 반이슬람적 감정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예를 들어, 정진오 목사(일리노이주 벨빌 시온 루터교 한인교회)는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도전은 루터 시대의 도전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이슬람의 대대적인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이슬람 종교의 사명에 극도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Christianity feels threatened by the great expansion of Islam, and is extremely concerned with the mission of the Muslim religion) 기독교는 이러한 급속한 이슬람 확장에 어떻게 대응할까? 그의 대답은 루터의 지속적인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Islam is not a religion but rather a philosophy)이라고 강조하고 "이슬람 신앙의 거짓된 가르침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to know exactly the false teachings of the Islamic faith)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인디애나주 포트 웨인에 있는 콘코디아 신학대학의 아담 S. 프란시스코는 "루터, 루터교, 그리고 이슬람의 도전"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종교적 이념으로서의 이슬람이 부상하고 있으며 인터넷에서 널리 퍼지고 무슬림 옹호자, 활동가, 학자들에 의해 전파됨에 따라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슬람의 신학적, 정치적, 인구학적 도전에 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 새로운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것을 과소평가하거나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슬람은 서구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며, 이어서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은 루터의 방식, 즉 "첫째, 이슬람의 오류를 폭로하고, 둘째, 기독교의 진실성을 엄격하게 옹호하는 것"(one, exposing the errors of Islam and, two, rigorously defending the veracity of Christianity)이라고 설명한다.
Adam S. Francisco에 따르면, 더 나아가 오늘날 서구에는 수많은 무슬림이 "우리 가운데" 있으며, 많은 무슬림이 "중동의 전제주의와 폭력"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는 무슬림을 두 그룹으로 나눈다. 혁명적이고 사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즉, 테러리스트)과 일반적으로 좋은 이웃, 동료, 친구인 나머지 사람들이다.(some who have revolutionary and evil designs (i.e., terrorists), and the rest who are generally nice neighbours, colleagues and friends)
전자에 관해서 그는 "루터 시대에 폭력적이고 반항적인 농민을 다루어야 했던 것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으며, 반대로 후자는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의 말씀을 절실히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온유함, 동정심, 지혜로 전도(전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이 모든 무슬림에게 전파되리라는 루터의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 Spahic Omer: Islamophobia and Islamic Moderation, pp72-102ff |
▲ Spahic Omer: Islamophobia and Islamic Moderation , KL: Dar al Wahi Publication, 2022. |
노종해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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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급... 후원이 없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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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을 부탁드립니다..굶어 죽을 처지입니다
카페지기는 살기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만원 이라도 도와주시면 카페지기는 큰힘을 얻습니다
건강문제로 박스나 고물도 줍지 못합니다
앿값이 없는데 먹을것을 사야합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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