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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로 배우는 명언 108|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교과서에 한신(韓信)의 일화가 실려 있어서 ‘한신의 가랑이 지나가기(韓信出垮下)’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배운 최초의 고사성어였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고사성어’라는 낱말을 알 턱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무척 흥미 있게 생각했던 것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신은 마을 불량배들에게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 무뢰배들과 괜한 싸움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한신은 굴욕을 참으며 가랑이 사이를 지나간다. 아무것도 아닌 ‘가랑이를 지나가다’라는 말에 일화의 주인공 이름이 붙어서 ‘한신의 가랑이 지나가기’라는 성어가 되자, 의미심장한 말로 변한 것이 아닌가?
결국 ‘가랑이를 지나가다’라는 단순한 의미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의미가 되어 ‘참기 어려운 모욕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참아내야 한다’라는 교훈이 된 것이다. 말이 지닌 의미의 재미, 어른이 되어 습득한 용어로 말하자면 우의(寓意), 전의(轉義)라고 하는 것에 나는 어린애 나름의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한신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사성어란 단순한 속담이나 명언 등과 달리 역사적인 사실이라든가 구전되어 오던 인간의 행위에서 생긴 것이 특징이다. 일찍이 한자라는 문자를 발달시켜온 중국에서 고사성어는 역사, 사상, 시문 등의 고전에 풍부하게 남겨진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오고 있다.
중국의 한자를 받아들인 우리는 이른바 한자 문화권에 속한다. 따라서 중국에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고사성어는 우리도 공유하는 문화유산이다. 더욱이 문화유산인 고사성어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시대의 변화와 역사의 풍설을 맞아왔어도 그 가치만큼은 잃지 않았다.
현재는 온갖 첨단 기술이 꽃피우고 있어서 미래지향적인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고사성어는 결코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고사성어는 시공을 초월해 사건의 본질을 포착하고 진리를 말해주며 인생의 오묘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명맥이 길 뿐만 아니라 외경심마저 느끼게 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대개 고사성어에 대해서는 자구(字句)와 의미만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이 형성된 배경과 상황까지 포함해서 고사를 안다면 더욱 맛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은 여기에 있으며, 따라서 가가의 구성은 간단하면서도 극적 현장감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인생의 지침을 발견하거나, 처세의 지혜를 얻거나, 사상적 공감을 느끼거나, 정신적인 힘을 얻기 바란다. 적어도 마음의 양식을 얻게 된다면 필자로서 더없는 영광이겠다.
설화시대와 은주시대의 고사성어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기보다 어렵다_ 防民之口 甚於防水 방민지구 심어방수, 《사기》
국민의 언로(言路)를 억압하는 정치는 위험하다. 언론의 자유는 정치의 상도(常道)라는 가르침이다.
주나라 제10대 여왕(厲王)은 나라와 백성의 번영보다는 자신의 재물을 부풀리는 일에 탐닉하며, 자신에게 아부하는 자들만을 중용했다. 보다 못한 충신 한 사람이 간언을 올렸다. “이래서는 왕실의 앞날이 어둡습니다. 부귀란 혼자서 누리면 반드시 폐해를 부르는 법입니다. 원망과 노여움을 품은 자들이 많아져 대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왕이 된 자는 이익을 고루 나누어주고, 백성을 기쁘게 해야 할 것이며, 원한을 사는 일을 가장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나라의 정치가 오늘날 잘 시행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를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할 대로 교만해진 여왕은 전혀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백성은 여왕을 증오하고 비난하게 되었다. 중신 소공 호(召公虎)가 우려한 나머지 “이제 백성은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라고 간언하자 왕은 화를 내며 소공을 멀리했다. 아부하며 뒤를 따르던 측근들에게 둘러싸인 여왕은 밀고를 장려해 비방하는 자를 잡아들여서는 닥치는 대로 죽였다. 감시가 심해져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으며, 길에서 만나도 그저 눈짓만을 하며 지나칠 뿐이었다. 비방하는 사람이 없자, 여왕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소공 호에게 말했다. “어때, 비방하는 자가 없지 않은가?”
소공 호는 전보다 더욱 단호한 어조로 여왕에게 진언했다. “이는 할 말이 없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말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냇물을 막는 것보다 위험합니다. 물이 막혀서 흘러넘치면 집과 논밭으로 마구 흘러 사람들에게 위해(危害)가 미칩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언로가 막힌 백성이 결국 반기를 들고 왕궁을 습격하는 바람에 여왕은 어쩔 수 없이 망명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주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여왕은 나라로 되돌아오지도 못한 채 망명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라
백성의 입을 막는, 즉 백성의 언론을 억압해서 생기는 해는 흐르는 시냇물을 막아서 생기는 해보다도 더 위험하다. 시냇물을 막고 있으면 한 순간이야 막을 수 있겠지만 머지않아 넘쳐흘러 반드시 커다란 피해를 일으킨다. 백성의 입을 막는 해로움은 이보다 심하다. 언론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
전국시대의 고사성어
남녀가 가정을 이룸은 사람의 큰 도리다_ 男女居室 人之大倫 남녀거실 인지대륜, 《맹자》
인간사회를 형성하는 기본은 부부임을 주장하는 말이다.
맹모에게 교육받은 맹자가 어른이 되어 아내를 맞이했다. 어느 여름날, 외출을 하고 돌아온 맹자는 아무 기척 없이 아내의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내는 아무도 없음을 만끽하며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맹자는 아내의 그런 망측한 모습을 보고서 ‘내 아내가 이렇게 단정치 못한 여자였단 말인가?’라는 생각에 화가 나서 문을 확 닫아버렸다. 이때부터 맹자는 아내의 방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아내도 남편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나 돌아왔소. 들어가도 되겠소?”라는 얘기만 해주었어도 잠깐만 기다리게 하고서 매무새를 다듬고 난 후 남편을 맞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남편은 아무 얘기도 없이 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예의가 없는 쪽은 당신이잖아요!’라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며칠 후, 마침내 아내는 시어머니인 맹모에게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얘기했다. 맹모가 연유를 묻자 며느리는 이러저러한 설명을 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부부 사이에 집 안에서 까다롭게 예의를 따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이는 나를 남들과 같이 여기는 꼴이 아니고 뭐겠어요? 어머님, 저는 저 양반과 살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얘기를 듣고서 맹모는 아들을 불러놓고 꾸짖었다. “너는 누구보다도 예의를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방으로 들어갈 때는 인기척을 내어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알리는 게 예의가 아니냐.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서 남의 허물을 책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실례한 쪽은 바로 너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맹자는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화해를 구했다.
맹자는 이토록 현명한 어머니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므로, 극심한 남존여비의 사회 풍조 속에서도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를 멸시하는 의식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를 잘 보여주는 말이 《맹자》 안에 실려 있다. 바로 “남녀가 가정을 이룸은 사람의 큰 도리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큰 도리란 사회의 근본을 말한다. 전체적인 뜻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로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는 말이다. 결국 사회를 형성하는 기본단위인 부부끼리 서로 아끼고 존중하라는 말이라 하겠다.
부부 생활에는 천지의 이치가 담겨 있다
《중용》에 “군자의 도는 실마리가 부부에게서 시작되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밝게 드러난다.”라는 구절이 있다. 군자의 도는 지극히 일상적인 부부 사이에서 실마리를 찾아나가면 천지의 도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원만한 가정을 이루는 일은 그래서 그 무엇보다 힘들 수도 있지만, 그 방법은 매우 평범하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 방법을 입으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말처럼 쉽게 행동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은 데 평범함이 위대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나무를 옮겨 심으면 상금을 준다는 약속_ 移木之信 이목지신, 《사기》
약속을 확실하게 실행한다거나 일단 약속을 했다면 반드시 지킨다는 뜻이다.
전국칠웅으로 갈라졌던 천하를 통일하고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진나라의 시황제다. 후진국이었던 진나라가 위업을 달성할 만큼 강국이 된 것은 법률을 중시한 패도의 정치를 강행한 때문이었다. 그 법률만능주의 정책을 처음 쓴 사람은 시황제보다 6대 앞선 효공(孝公)이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정치란 윗자리에 선 사람이 덕을 보여주면서 백성을 잘 이끄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바꿔 말하면 왕도정치다. 그러나 왕도정치로는 빠른 효과를 보기가 어려웠다. 효공은 즉시 효력을 발휘하는 정치를 추구했다. 그러한 효공을 보필했던 이가 상앙(商鞅)이었다. 상앙은 젊은 시절 형명학(形名學)을 공부했다. 이 학문의 요지는 법률에 따라 형벌을 정하고 이를 운용해 정치를 펴야 한다는 것으로, 법가사상의 계보를 잇고 있었다.
상앙은 이 학문의 지식으로 출세를 하고자 했으나, 왕도정치를 좋게 여기던 각국의 왕들은 그를 뽑아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진나라로 가서 효공에게, “법률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보여서 만일 위반하면 벌을 주는 정치를 펴신다면, 백성은 벌을 받지 않으려고 법을 지킬 것이기 때문에 효과가 즉시 나타납니다.”라며 설득하자 효공은 바로 상앙을 기용했다.
상앙은 효공의 뜻에 따라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즉각 공포하지 않았다. 먼저 나라가 법률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점을 보여주어 백성이 믿게 한다면 실효가 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앙은 의표를 찌르는 수단을 강구했다. 도읍의 남문 옆에 3장(丈) 남짓한 큰 나무를 심고서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10금을 주겠노라.’라고 방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방을 읽었으나, “그저 나무를 옮기기만 해도 그렇게 큰돈을 준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야?”라며 의심을 했다. 당연히 나무를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이때 상앙은 다시 방을 내걸고, 이번에는 50금을 주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더더욱 믿지 않았지만, 한 사내가 큰 기대 없이 그냥 한번 해본다는 심산으로 나무를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그 자리에서 사내에게 50금을 주었다. 이 소문이 곧 사방으로 퍼져 나라에서 방을 내걸면 믿을 수 있다는 반응을 얻게 되었다. 상앙은 이때 신법을 포고하고 엄격하게 운용했다. 이것이 주효해서 진나라는 다른 여섯 나라에게 위협감을 줄 만큼 강국이 되었다.
확실한 약속 이행은 신용ㆍ신뢰의 첫걸음
약속을 확실하게 지키는 것은 만사를 순조롭게 추진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덕목이며, 사람을 신뢰하고 신용하는 데도 중요한 잣대가 된다. 부디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을 때 주위에서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진나라 시대의 고사성어
법은 세 가지뿐이다_ 法三章 법삼장, 《사기》
규제나 법률은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도록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유방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제압하고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의 하나가 법률의 완화였다. 법률만능주의의 시황제는 법률로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했기 때문에 결국 이것이 엄벌주의의 압정으로 흐르고 말았다. 백성은 혹독한 정치 아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유방은 백성을 광장에 모아놓고 선언했다.
“백성은 이제껏 진나라의 가혹한 악법에 얽매여 고통을 받아왔다.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법 아래서는 마음을 놓고 살 수가 없다. 이제 진나라를 무너뜨린 나는 이 악법을 고쳐 모든 자에게 약속하노라. 법은 오직 삼장뿐이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사형이고,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자는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다. 오직 이 삼장이 이제부터의 법률이다. 진나라의 악법은 모두 폐지하노라.” 이 말을 들은 백성은 해방감에 젖어 쾌재를 불렀다. 유방은 가난한 농민의 집에서 자라서 백성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포고로 인심을 수습했던 것이다.
너무 많은 규제는 활력을 감퇴시킨다
기업 등의 조직집단에서도 똑같다. 믿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할 의욕도 생기는 법이다. 그러므로 규제를 만들어 사원들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되도록 하지 말고, 자유롭고 활달한 사풍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롭고 대담한 발상이 나오며, 생기 넘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이런 회사는 발전하지 않을 리가 없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오다_ 捲土重來 권토중래, 《당시》
권토(捲土)는 위세 당당하게 흙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중래(重來)는 다시 온다는 뜻이다. 한번 실패한 자가 다시 힘을 가다듬어 다시 그 일에 착수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해하에서 유방군에게 포위된 항우는 실의에 빠졌고, 애희 우 미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아직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서 밤을 틈타 800의 기병과 함께 살길을 찾았다. 목적지는 고향 강동이었다. 유방군의 5,000의 기병이 뒤를 쫓고 있었다. 뒤를 계속 밟힐 때마다 후방을 지키는 자들이 용맹하게 싸우며 항우를 구했으나 병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남쪽으로 내려가 나루터가 있는 오강(烏江)에 이르렀을 때에는 겨우 20명만 남았다.
오강의 나루터를 지키던 자는 눈앞에 나타난 장부가 항우임을 알아보고 즉시 배를 준비하며 재촉하듯이 말했다. “강동에는 왕 노릇하기에 충분한 땅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나루를 건너서 재기를 도모하십시오. 저는 결코 한나라 군사는 실어 나르지 않겠습니다.” 항우에게는 나루터지기의 다정한 말이 크게 자극이 되었다. 이렇게 부끄럽게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항우는 웃음으로 나루터지기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나 보다. 8년 전 함께 이 강을 건너던 병사들 중에 지금 함께 돌아가는 자가 없구나. 어찌 나 홀로 강을 건너리오.”
그사이 적이 뒤를 쫓아왔다. 항우는 애마 추의 안장에서 내리며 말고삐를 나루터지기에게 넘겼다. “당신의 뜻은 고맙소. 이 애마를 드리겠소. 아껴주시오.” 그러고 나서 적을 향해 걸어갔다. 따르던 자들도 말에서 내려 항우를 따라 적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항우는 적진 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1,000년 후,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은 항우가 숨을 거둔 곳을 방문해 영웅을 떠올리며 <오강정(烏江亭)을 노래함>이라는 시를 읊었다. 두목은 ‘권토중래’라는 말을 시 가운데 써서 항우가 굴욕을 참고 강동에서 재기했다면, 어쩌면 천하는 그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애석해했다.
승패는 병가도 장담을 하지 못한다 / 부끄러움을 삭이고 참을 줄 알아야 남아로다
강동의 자제에는 뛰어난 인물도 많아 /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왔다면
어찌되었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을
실패와 실의에 빠졌더라도 재기의 의욕을 버리지 마라
긴 인생에는 산도 있고 계곡도 있다. 항상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만 풀리지는 않는다. 때로는 맞바람과 산바람을 맞게 된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대처하느냐다. 체념을 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중요한 것은 권토중래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전한 시대의 고사성어
앞 수레의 전복은 뒤 수레의 교훈이다_ 前車覆 後車戒 전거복 후거계, 《한서》
앞에 가던 수레가 뒤집어지면 뒤에서 가던 수레는 뒤집어지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뜻이다. 앞에 있었던 실패 사례를 보고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한나라의 5대 황제 문제(文帝)는 농업을 장려하고 조세를 경감하는 등 민생안정을 꾀해 명군으로 불렸다. 또한 정책을 수행하고 문화를 진흥시키기 위해 인재를 등용하는 일에 힘을 쏟았기에 뛰어난 인재를 배출했다. 그런 인재 가운데 한 사람이 명신으로 이름 높은 가의(賈誼)다. 가의는 일찍이 유학을 공부하고 시문에 능통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이를 알고서 문제는 그를 불러들여 측근에 두었다. 가의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젊은 나이에 국정의 쇄신을 부탁받은 가의는 정치를 행하는 일은 역사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겨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시쳇말로 ‘앞 수레의 전복은 뒤 수레의 교훈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하, 은, 주 3대는 지금이야 아득히 먼 옛날이 되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해서 잘 다스려지고, 어떻게 해서 잘못 다스려졌느냐의 이유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앞선 가르침을 배우지 못하는 자는 성인의 가르침에 등을 돌리는 자로서 그 같은 자가 오래도록 지속해나갈 도리는 없습니다. 앞 시대인 진나라가 허무하게 멸망한 것은 바로 역사의 가르침을 소홀히 했기 때문임을 우리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다시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즉 역사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앞길이 어두워질 것임은 자명합니다. 국가의 존망과 치란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말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이후 가의가 올린 방책을 채용하면서 정치를 펴나갔다. 진이 펼친 엄벌주의의 법률만능정치가 백성의 반감을 산 것을 거울삼고, 유교를 기본으로 한 덕치주의의 인정(仁政)을 펴려고 노력했다. 또한 황제 스스로 모내기를 하는 적전(籍田) 의식을 행하며 농업의 진흥을 꾀하고, 스스로 검약을 실천하고 조세를 경감했다. 다리를 자르고 코를 베는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법률을 간소화했다.
이 같은 정치를 폄으로써 문제가 명군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의의 보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의의 개혁 노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중신들이 문제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 때문에 가의는 지방으로 좌천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다시 도읍으로 올라와 문제의 한쪽 팔이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의는 서른의 나이에 병사했다.
실패의 반성은 성공으로 연결된다
공자도 ‘온고지신’이라고 하여 역사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했다. 가의가 주장한 “앞 수레의 전복은 뒤 수레의 교훈이다.”도 바로 그러하다.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법이다. 문제는 실패를 하고 난 뒤다. ‘인패위성(因敗爲成)’이라는 말이 있다. 실패를 계기로 삼아 성공을 이룬다는 뜻이다. 실패의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반성한다면, 이는 성공을 위한 귀중한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허리와 머리를 얻지 못하다_ 要領不得 요령부득, 《사기》
‘요(要)’는 몸 가운데 허리를 가리키고, 옷에서는 허리띠를 말한다. ‘령(領)’은 몸에서는 머리를 가리키고, 옷에서는 옷깃을 말한다. 허리와 머리는 대단히 중요한 부위다. 여기서 뜻이 발전해 요령은 사물의 핵심, 요점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령부득’은 주된 점이나 중요한 핵심을 정확하게 모른다는 의미로 쓰인다.
한나라의 무제를 섬긴 장건(張騫)은 실크로드의 발견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장건이 무제의 명을 받고서 서역으로 파견된 것이 실크로드 개발의 계기가 되었다.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한 것은 흉노에 대한 무제의 대책이었다. 한나라의 위신을 세우고 싶었던 무제는 흉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복종시킬 수 있는 책략을 찾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흉노의 포로가 장안으로 압송되어 왔다. 무제가 직접 문초하자 그들은 말했다.
“흉노는 월지족(月氏族)을 쓰러뜨렸고 흉노의 왕은 월지족 왕의 두개골을 잔으로 쓰고 있습니다. 월지족은 영토를 버리고 서방으로 도망가 항상 흉노에게 원한을 품고서 원수로 생각하고 있지만, 함께 흉노를 칠 나라가 없어 전혀 반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무제는 월지족과 손을 잡고 흉노를 친다는 작전을 생각해냈다. 그러나 서역 먼 곳으로 이동했다는 월지족이 어디에 있지는 아무도 몰랐다. 또 서역은 미지의 땅이고 도중에는 흉노의 영지도 있어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무제가 월지족으로 갈 사자를 모집했으나 너무 위험한 일이라서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무제는 사자 한 사람을 찾아내 서역에 보낼 수 있었다. 그가 바로 하급관리 장건이었다. 기원전 138년, 장건은 종자 100명을 데리고 장안을 출발했다. 그때부터의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사막에서 길을 잃거나 흉노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월지족을 발견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그런데 월지족의 사정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이주해온 땅은 비옥해서 작물이 잘 자랐고, 근처에는 적이 없어서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이곳 땅에 만족한 월지족은 흉노와 싸워서 원래의 땅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건은 월지의 왕을 배알하고 무제의 뜻을 전하며 함께 힘을 합쳐 흉노를 치자고 역설했으나 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을 《사기》는 “끝내 사명(使命)으로 삼은 월지의 요령을 얻지 못했다. 몇 년 더 머물다가 돌아왔다.”라고 쓰고 있다.
실력 없이 요령만 좋은 말과 행동은 곤란하다
사마천의 이 표현에서 ‘요령’이라는 말이 생겼다. 또한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뜻하는 말로 요령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따라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설명할 때 ‘요령부득’이라고 말하며, 일을 능숙하게 처리할 때는 요령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같은 ‘요령’이라고 하더라고 제 한 몸을 잘 지키자고 교묘하게 처신을 하거나, 자신을 좋게 보이게 하는 일에 급급할 때에는 나쁜 의미로 ‘요령을 피운다’고 표현한다. 이런 의미의 요령이 아니라 진정으로 실력이 뒤따르는 요령을 익히는 것이 사회생활의 ‘요령’이 아닐까?
후한 시대의 고사성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_ 天知 地知 子知 我知 천지 지지 자지 아지, 《후한서》
뇌물을 주고받는 부정행위는 이를 행하는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므로 가장 먼저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양진(楊震)의 사지(四知)’라고도 부른다.
후한 왕조는 창건한 지 100년이 지난 2세기 초부터 환관과 외척이 권력을 장악한 뒤 전횡을 일삼아 정치가 문란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결하고 강직한 정치가로서 주목을 받은 사람이 양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학자로서 이름을 세웠는데, 쉰 살 무렵에야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나중에는 재상과 같은 급의 지위인 삼공(三公)에까지 이르렀다.
양진이 동래(東萊)의 태수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의 일이다. 창읍이라는 곳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는데, 이 고장 현령을 맡고 있던 왕밀(王密)이 찾아왔다. 양진은 전에 왕밀을 어떤 관직에 추천한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왕밀은 그동안 너무 소식이 없었다며 인사를 한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품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양진 앞에 내려놓았다.
“태수 어른께 드리는 제 성의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양진은 엄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추천했던 만큼 당신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오. 뇌물을 가지고 온 것은 무슨 일이요?” 왕밀은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금을 양진에게 주려고 거듭 금을 들이밀었다. “이제 어두워져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디 안심하시고 받아주십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진은 매서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무슨 말을 하시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당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있지 않소. 그런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한단 말이오.” 왕밀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에 몸을 움츠리고 허둥지둥 물러났다.
그 후 양진은 삼공의 한 사람이 되어 기강을 바로잡고 부정을 엄단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러나 환관들이 공모해 모함하여 파직되고 말았다. 그는 힘이 없는 자신의 신세에 한탄과 함께 분노를 느끼고서 독약을 들이켰다. 양진이 매장된 묘 앞에는 어느 날 큰 새가 날아와 하늘을 쳐다보며 슬픈 듯 눈물을 흘린 뒤에 날아갔다고 한다.
수치를 모르는 데서 부패는 시작한다 \
최근 뇌물을 둘러싼 좋지 않은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되는데, 정확하게 이를 꼬집는 말이 바로 이 명언이다. 뇌물을 둘러싼 부정한 행위는 이를 행하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고 있으므로 가장 먼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바로 그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질 때 부패가 생긴다. 정계, 관계, 재계에서 이권과 관련한 일이 생길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이다.
삼국시대의 고사성어
정도에 거슬러 취하나 정도에 맞게 지킨다_ 逆取順守 역취순수, 《삼국지》 〈촉서〉
‘역(逆)’은 비상수단, ‘순(順)’은 정당한 수단을 뜻한다. 정도를 거슬러 취했으나 정도에 맞게 지킨다는 뜻이다. 즉 정도에 어긋나는 수단으로 정권을 빼앗았으나, 천하를 위해서 그 뒤로는 온당한 정치로 민생을 안정시켰다면 이를 눈감아 줄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유비가 공명의 ‘천하삼분의 계획’에 따라 촉에 나라를 세우려고 할 때 약간 꺼림칙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촉을 지배하던 같은 동족 유장(劉璋)의 뒤통수를 쳐야 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당시 유비는 바르지 못한 방법을 쓰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조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이라 유비가 가만히 있으면 조조의 영토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유장의 성격이 우유부단하여 조조의 공격을 받으면 즉시 항복을 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렇게 될 바에야 조조보다 먼저 치자고 강력히 주장한 사람은 공명과 함께 군사를 맡고 있던 방통(龐統)이었다.
방통은 망설이는 유비에게 단호하게 아뢰었다. “이곳 형주를 근거지로 해서는 북쪽의 조조와 동쪽의 손권에 대항해서 삼국이 대립하는 형세를 도저히 만들 수 없습니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저 없이 촉 땅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비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내가 지금 상대로 삼고 있는 자는 조조다. 그가 무력에 의존한다면 나는 덕과 인에 의존한다. 그가 책모를 부린다면 나는 성의로 대항한다. 항상 조조와는 다르게 행동했기에 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대가 말한 수단은 조조가 하는 짓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런 짓을 해서 나는 천하에 대한 신의를 잃고 싶지는 않네.”
방통은 주눅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란의 때에는 전란의 때에 맞는 방법이 있습니다. 융통성 없는 이론으로는 천하를 안정시킬 수 없습니다. 춘추시대의 패자도 약자를 삼키고 우매한 자를 공격했기에 패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정도를 거슬러 취하나 정도에 맞게 지킨다.’라는 말은 결코 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컨대 비상수단으로 천하를 취하지만, 그 뒤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을 위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은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도 역취순수를 통해 나라를 세웠습니다.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이를 실천하십시오. 여기서 망설여 촉 땅을 취하지 않으시면 촉 땅은 필시 조조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유비는 이 말에 용기를 얻어 214년 마침내 촉 땅을 차지하고 건국의 기반을 확립했다.
융통성 없는 태도로는 비상사태에 대처할 수 없다 :
역취순수’는 결코 쉽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긴급한 사태에는 쓸 수 있는 것이다. 살다 보면 때로 정도(正道)가 아닌 방법을 써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물론 정도를 벗어나서 대처한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진행과 마무리는 정도에 맞게 해야 한다. 교유과정(矯揉過正)이라는 말이 있다. 굽은 것을 펼 때는 반대 방향으로 굽은 만큼보다 훨씬 더 꺾어주어야 제대로 제자리를 찾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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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고사성어 잘 읽었습니다
정말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동감이가는 좋은 말씀 문장 짦아서 기억하기 좋쿠 지인들과 친구들 모임때 중후허게 써먹으면 좋으리라 생각이 드내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