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
||||||||
“맑은 날이면 철원평야와 서울 남산타워까지 보인다.” 장마 개인 직후의 맑은 날, 복원공사 현장에서 만난 김근수 소장은 그렇게 말했다. 토지공사 사외보 '땅이야기'의 <한국의 성> 취재차 포천 반월산성에 오른 7월 8일은 바로 그랬다. 그러나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봐도 아득하기만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철원평야이며 어디가 서울 남산인지 모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 그렇게 자주 성곽을 올랐으면서도 그 ‘모르고 있음’이 지배하여 종종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현장책임자를 만난 김에 속으로 ‘잘 되었다’ 하고서는 궁금하던 것을 내쳐 물어봤다. - 복원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떻게 하면 원형을 제대로 살려내는가 하는 것." - 석성의 경우 복원 후 원석이 차지하는 비율은? "구간마다 다르다. 70~80%에 이르는 경우도 있고, 50% 미만인 경우도 있다." - 산성의 경우 무너지면 원석을 되찾아오는 게 힘들 텐데? "그렇다. 직선거리로 100m 넘게 굴러 내려간 것들도 많다. 그것을 되찾아오는 것은 전부 인력작업이다. 그런데 그게 만만찮은 비용이 든다. 생각해보라. 누가 그 돌을 짊어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오는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 복원공사 전 구간을 모두 맡아 하였는가? "아니다. 동벽과 동북벽 구간을 하고 있다."
- 발굴과정도 잘 알아야 할 텐데? "당연하다. 반월산성 발굴과정 당시에 발굴팀과 함께하다시피 하기도 했다." - 복원공사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해 달라. "저기 동치성(東雉城) 바로 옆의 성축이 배가 살짝 부른 게 보이지 않은가? 그게 복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복원과정에서 자세히 보니 지대석 원형이 살짝 배가 부르게 돌아간 것을 확인하였다. 그것을 살린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사 부실로 오해할 수도 있다." 남북 문터와 치성, 장대를 갖춘 산성
또한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에는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한편 <견성지(堅城誌)>의 기록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적어놓았다. “고성(古城)이 관아 뒤의 반월산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37척이다. 언제 처음 축성하였는지 알 수 없다. 가운데 세 개의 큰 우물이 있다. 사방으로 갈라져 있으며 가파른데, 천여 명을 충분히 수용할 정도이다. 광해군 무오년에 판관 이성구(判官 李聖求)가 옛 터를 개축하였을 때 구리 숟가락과 쇠솥이 발굴되었다. 숟가락은 자루가 길고 굽으며, 솥은 형체가 좁고 길었는데, 몇 천 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빛깔이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폐해졌으나 개수하지 못하였다. 감호 양만길(鑑湖 楊萬吉)의 집이 산성 북쪽에 있다. 시(詩)에 이르기를, ‘산 앞의 무너진 성가퀴는 옛 청성 터, 뿔피리는 늘 저녁 경치 개이기를 재촉하고, 파루를 알리는 두어 피리소리 산 그림자 속에서 들리며, 들 구름 다 걷히자 저녁놀 밝아지네’라 하였다. 이 시로써 보건대 성 가운데는 옛날에 장영(將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유물 출토 포천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포천향교 뒷산에 있는 산성으로 가자고 하니, 10분 만에 산꼭대기에다 냉큼 내려준다. 복원공사를 위해 도로를 닦아 놓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손쉽게 산성에 오르기도 드문 일이어서 외려 아쉬움이 남을 정도였다. 다만 산성을 오르는 가파른 길 풍경이 꽤 괜찮다. 산길이 시작되는 군내면사무소 앞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는 것도 재미있는 산행이 될 것 같다. 산성의 남쪽 복원공사 현장사무실 앞을 지나 동벽에서 시작하여 북벽과 서벽을 거쳐 남벽으로 돌아보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북벽 쪽에는 내외 협축으로 축성한 구간도 보인다. 경사면이 얕아 부득이하게 성축을 높여야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성벽 윗면은 병력의 이동과 배치에 유리하도록 회곽도(廻郭道)를 조성했다. 복원한 동벽의 회곽도를 따라 가다보면 아직 복원되지 않아 끊어진 구간이 있고, 다시 북쪽으로 경사지게 오르면 이중으로 축성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수축 과정에서 성을 넓히기 위하여 안쪽의 성벽에 덧대어 현재의 외벽으로 넓혀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의 안쪽 성벽은 어느 쪽으로 축성되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이러한 특징을 살리기 위하여 복원한 성벽도 내벽과 외벽을 그대로 노출시켜 두었다. 북벽을 정점으로 성곽은 내리막을 형성한다. 산세를 따라 굽어나간 성벽은 장대가 있는 서남쪽에서 둥글게 돌아나간 다음 치성을 형성한 후 남문에 이른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가 있다고 했는데, 현지 성곽을 살펴보면 남문지와 비교해볼 때 북문지는 거리상 북문보다는 서문에 더 가까워 보였다. 또한 동쪽 성벽 쪽에 문지(門址)로 보이는 터가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성석은 비례와 균형이 잘 맞게 다듬어져 있어 아름답다. 1:1.6의 황금비율에 가까운 성돌들을 정교하게 쌓아 성곽에서 장중한 느낌을 받는다. 한편 성지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 명의 명문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마홀군이 바로 포천이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고 하였다. 마홀(馬忽)은 포천의 고구려 때 지명으로 ‘물이 많은 고장’이라는 뜻이며 ‘높은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남문에서 동쪽 성벽에 이르는 구간은 미복원 상태이다. 지금 상태로 그대로 둘 예정이라고 한다. 산성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0분 정도. 성을 한 바퀴 더 돌아본 다음, 택시로 올라갔던 길을 천천히 걸어서 내려온다.
의문 한 가지. 성석(城石)을 방형으로 정교하게 깎아 쌓은 것은 개축 당시의 결과물로 보이는데, “광해군 10년(1618)에 판관 이성구(判官 李聖求)가 고쳐 쌓았다”는 기록으로 추측해 본다면, 지금 남아있는 성돌의 상당수는 이 당시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공들여 고쳐 쌓고서 불과 몇 년 후인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또 한 가지 의문. 삼국시기의 축성 흔적이 남아있는 부분은 어디일까? 혼재되어 있지는 않은가? 만일 삼국시기 축성기법을 볼 수 있는 곳이 남아 있는데도 그 흔적을 잘 살려내지 못한다면, 현재의 성은 기록으로만 삼국시대의 성일 뿐, 현존물은 고스란히 개축 당시의 것으로만 남게 되지 않을까.
|
첫댓글 어허 포천에 이런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