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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창세기 13:1-18 “ 다시 가나안으로 ”
세상의 수많은 책들은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활약과 사람의 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통하여 사람의 힘과 능력을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에 감동을 받습니다. 뭉클한 휴머니즘에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약함과 실수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였다는 것보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제쳐두고 사람의 일을 자꾸만 보게 되면 세상의 여러 책들을 보고서 감동을 받는 것처럼 성경의 인물에게서 감동을 받고 훌륭한 아브라함을 본받자 요셉을 본받자 다윗을 본받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겁이 많고 믿음이 없는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지 어떻게 요셉을 요셉되게 하시는지를 봄으로서 하나님의 힘을 느끼는 것이 성경을 보는 눈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사람의 영웅적인 행위를 보고서 기가 죽는다든지 아니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믿음의 사람도 하나님의 솜씨로 그렇게 된 것을 알 때에 참으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되는가? 이런 생각이 되시지요? 나는 하나뿐인 아들 못바친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에베소서 2:19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이 권속이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동일하게 하나님이 권속이 된 것입니다.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란 믿음의 조상들과 동일한 신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의 완성을 본 자로서 구약의 마지막 사람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말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 39-40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 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이 열거되고 결론부분입니다. 그들은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은 못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희생제사는 앞으로의 약속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장들도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대제사장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실체를 받은 우리로 하여금 구약의 그 성도들도 온전함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처럼 못 만들어 내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나보고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이미 부르셨기에 그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이미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신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죄인인가를 알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일하심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간섭하시며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고, 하란에서 부친을 장사지내고, 드디어 가나안땅까지 왔습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시기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12장 7절에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람은 애굽으로 기근을 면하기 위하여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애굽에서 일어난 일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살려고 애굽에 내려간 곳에서 오늘 말씀을 보니 다시 가나안으로 온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내 사래의 일을 겪고 나서 이곳은 살 곳이 못된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자 그러고서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12:20절에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누가 보내는 것입니까? 바로가 보내는 것입니다. 제발 좀 나가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전에 사래를 사오기 위하여 지불한 지참금은 돌려받아야 하는데 얼마나 혼이 났으면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올 때에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다시 오게 된 것은 바로가 가게 하였지만 바로는 하나님의 재앙을 받고서 아브람이 겁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을 밀어낸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로를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이 아브람을 다시 가나안으로 가게 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기근을 피하려고 갔기에 얼마동안 거기에 머물렀는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 애굽에서 4대를 나그네로 살다가 출애굽하리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매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는데 역시 하나님의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나가게 합니다. 금은 패물을 요구하는 대로 주면서 애굽을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내보내지 않으면 자기들이 다 죽게 되었으니 이스라엘을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늘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특정의 장소뿐만 아니라 지위와 신분일 수도 있고, 다른 여러 가지의 세상의 것들을 취하기 위하여 가고자 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택하신 백성들을 가서는 안되는 곳에서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냥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빼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계속하여 일어나는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제가 청년때에 성경공부 내용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출애굽의 경험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여러 가지의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출애굽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평생을 두고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자꾸만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가 애굽을 그리워하는지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불평과 불만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불평과 불만이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불만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인도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길이 안좋다고, 물이 없다고, 만나가 질린다고, 정력이 떨어진다고, 월급을 적게 받아 온다고, 다른 사람은 집안이 좋아서 도움도 받는데 어찌 집안도 하나 변변치 못하고 오히려 도와주어야 하는 형편이냐고. 이뿐 이겠습니까? 교회안에서도 누구는 이래서 싫고 누구는 이래서 보기 싫고 이러한 불평과 불만이 튀어나오는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야 저녀석은 피곤하다 내 버려두라 그러시겠습니까? 아니면 끌고 가시겠습니까? 끌고 가시는데 다시 제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가나안으로 아브람을 인도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다시 붙들고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가 우리의 어려운 부분입니다. 왜 이 부분을 그대로 두시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 부분이 아직 훈련이 덜된 것입니다. 다시 제자리입니다. 언제까지? 깨닫고 항복할 때까지입니다. 우리는 몇 번하다가 안되면 포기 하지요. 하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으로 하여금 큰 민족이 되게 하고 그 이름을 창대히 하고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대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몇 십년이 결려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살 것 아닙니까?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아브람이 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살려고 내려갔다가 다시 원위치한 곳이 13:4절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군에 가면 훈련을 시킬 때 조교의 마음에 안들면 원위치 시킵니다. 그래서 조교의 마음에 들 때까지 원위치가 반복됩니다. 그래서 지겨운 말이 무엇을 하다가 ‘원위치’ ‘위치로’ 하는 말입니다. 훈련생이 볼 때는 그만큼 하면 된 것 같은데 조교의 눈에는 안차는 것입니다. ‘위치로’ 라는 말한마디에 지금까지 하던 훈련을 원위치하여 다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나아지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처음의 장소로 되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치로’ 한 것이지요.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처음 단을 쌓은 곳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땅으로 오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훈련이 된 것입니다. 자기가 살려고 애굽으로 갔다가 애굽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자기를 살리려고 아내를 팔아먹은 사람이 한걸음 나아집니다. 그것은 조카 롯과의 분쟁에서 아브람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또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위치로’ ‘원위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자기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모습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모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25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당장에 천사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 에서 의로운 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까지 하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로 말하기도 합니다만 성화라는 말에는 자기가 수양을 하고 도를 닦는다는 느낌이 들어 있기에 좀 다르게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미 밑그림이 완성되어 있는 것을 더욱 세밀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보겠습니다.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왕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결국 자기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희생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애굽에서 올라오면서 재산이 많아집니다. 애굽의 왕에게서 마누라 팔아서 부자된 것입니다. 이것이 분쟁의 씨앗이 됩니다. 부자된다고 좋아할 이유가 우리는 없습니다. 재산이 늘어나자 아브람의 종과 조카 롯의 종이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왜 우리 영역에 너의 양떼가 풀을 뜯느냐 그러는 다툼이겠지요? 이것을 본 아브람이 무어라고 합니까? 8절에서 9절입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우선권을 조카에게 줍니다. 기득권이 당연히 아브람에게 있지요. 삼촌이요 롯을 거두어 준 아버지 같은 분인데 그런데 아브람이 우선권을 롯에게 먼저 줍니다. 기근으로 애굽에 살려고 갈 때와 다른 모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애굽의 경험으로 조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양보하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나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조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자기 포기, 자기 희생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아브람의 마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솜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벌써 예수를 믿은 지 몇 년이 지났습니까? 훈련을 아브람보다 더 많이 받았는데도 왜 아직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말이 안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 잘 믿으면 부자된다는 말 때문에 내가 양보하고 희생하고 손해 보면 부자가 안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안될 것 같아서 악착같이 움켜지고서 부자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그렇게 하셨습니까? 여러분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일본의 유명한 크리스챤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씨가 별세하였습니다. 빙점이라는 책 외에도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분의 책도 볼만 합니다. 그런데 이분의 말 중에서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평가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소유를 축적하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나누어 주었는가에 달린 것이다. 아브람이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을 때 롯은 비옥한 지역을 선택하였습니다. 10-12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곳으로 롯이 옮겨갑니다. 너무나 비옥하고 좋은 땅이지만 이곳이 나중에 유황불이 떨어지는 곳이 됩니다. 아브람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기는 황무지에 그대로 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람에게 다시 약속을 확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14-18절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오면서 훈련된 내용을 오늘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부요나 좋은 환경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택한 자녀가 세상을 붙드는 것을 하나님이 원위치 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주의 약속과 그 약속을 오늘도 빈틈없이 이루어 내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과 관심이 가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