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란 무슨 상태,무슨 뜻일까?
무소유란 말은 한자를 활용하고
붙여 읽어서 그렇지 하나의 뜻이 아니다.
무 소유와 무소 유로 읽을 수 있다.
무 소유는 갖음이 없다.
무소 유는 있음이 없다.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있지 않아와 갖지 않아(無所,有& 無 ,所有 )로
나뉘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감각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쓴다.
재물을 많이 갖고자 한다.
명예를 높이 지니고자 한다.
권력을 크게 얻고자 한다.
목숨을 걸기도 한다.
수행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신과 자신의 삶이 우주 자연의 이치에 걸맞게 자연스러운 삶이고자 하는 희구가 넘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다가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런 윤리적 삶이 자신의 것을 갖지 않은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뜻을 살펴보면 그저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있음(存在)이 없다는 것(無所,有).
존재가 없는 곳이다.
가짐(所有)이 없다는 것(無,所有).
존재가 없음(無所 有=無有)을 알아야만
가질 자도,가질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한 마디로 있지 않으면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싯다르타가 알랄라 깔라마에게 배웠다는
무소유처정(定)을 해서 얻은
무소유처천(天)이 그렇다.
무소유처라 옮긴
아낀짜냐-따나(Ākiñcañña- āyatana)는
아무것도 없는,아무것도 없게 느끼는 경지다.
가진 것이 없는 경지가 아니다.
가진 것이 없는 경지라면
아빠릭가하야따나(apariggaha- āyatana) 또는 아빠릭가히따야따나(apariggahita- āyatana)
라고 했을 것이다.
모두가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아니,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
수행자,성직자도 잘 가리지 못한다.
불교의 재,출 가리지 않고 수행자다.
이웃종교에서는 성직자와 성도를 가린다.
부처님께서는
기적을 바라거나 요행을 바라는 것은
참됨을 추구하는 수행자의 길이 아니라 했다.
연못에 빠진 돌을 '떠올라라, 떠올라라' 외치거나 기도한다고 해서 떠오를 리 없다.
팔을 걷어부치고 물을 퍼내야만 건질 수 있다 했다.
21세기의 과학시대임에도
엉뚱한 꽃의 실상 여부를 두고 다투는 것도
뿌리에는 소유(所有)의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21세기 신자유주의의 떠께가 덕지덕지인데
멋모르고 무소유를 읊다가 어설픈 모습을
보이게 되기도 한다.
이것 또한 지나갈 거품현상이다.
내 주장이, 내 권력이, 내 재물이, 내 명예가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바로
소유의식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이다.
뿌리는 어리석음(無明)에 닿아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나의 부분이요,
전체라는 것을 알게됨으로써
더 가지려는 마음이 사라진다.
있는 동안 사용하다가 돌려주는 것이
물질이요, 명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을 섭취한다.
삼의일발 정신으로 최소한의 음식만을 먹고자 하는 이에게 분명 행복이 있다.
하지만 매우 어렵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는 이보다 많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자세히 살펴보면 안타깝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모른 것이 아니다.
어느 두 사람이 모른 것이 아니다.
둘이나 모른 것이다.
우리가 다 모르고 있었다.
꾸중하고 야단하는 사람도
보듬어 주고 위로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알지도 못한 채 덮어놓고 그런다.
뭇삶(衆生)이라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