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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에서 전도
행 17:10-15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행 17:10-15 / [베뢰아에 간 바울과 실라] 그날 밤으로 신도들은 서둘러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 베뢰아에 닿자 두 사람은 늘 하던 대로 그곳 회당에 가서도 설교를 하였다. 11)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는 훨씬 마음이 틔어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가르치는 말이 진실인지 알고자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12)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헬라의 상류계급 귀부인들과 남자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 전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거기까지 몰려와서 소란을 피웠다. 14) 신도들은 급히 다시 바울을 해변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그대로 그곳에 남아 있었다. 15)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아덴까지 그를 안전하게 바래다 준 뒤 속히 실라와 디모데도 뒤따라 와달라는 바울의 전갈을 가지고 베뢰아로 되돌아갔다.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선교는 그 도시의 불량배들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느끼면서도 성공리에 끝났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일행들을 다시 베뢰아로 인도하셨습니다.
베뢰아의 성공적 전도(10-12) 데살로니가에서 박해를 받은 바울과 실라가 박해를 피하여 밤중에 베뢰아로 갔습니다.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보다 자유스러운 사고와 신앙이 있었으며, 아무리 이질적인 지식, 이론, 철학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받아들이고 포용하려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들인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었으며 저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여기 ‘신사적’이란 말은 ‘좋은’이라는 말과 ‘출생’의 합성어로 ‘선한 품성’을 뜻합니다. 바울의 설교 내용은 어디로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가 전부였는데, 이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으며, 성경 그 자체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자를 얻게 되었는데 이방인 개종자들 중에는,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핍박(13-15) 바울의 회당전도는 이방선교의 효과적 전략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마다 회당예배에 참석하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셨던 방법의 계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당 전도는 전도자들에게 있어 유대인들의 표적이 되어 핍박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쉽게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약 80km나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쫓아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전도 사역을 방해 하였습니다. 마치 바울의 1차전도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살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따라와서 바울 전도를 방해하고 돌로 치던 것과 같습니다(행 14:19-20). 이런 유대인의 완악한 태도는 복음에 대한 오해와 영적 무지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엡 4:17-20). 그렇지만 이러한 박해는 오히려 복음을 신속하게 여러 지방으로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생명과 사명을 아끼는 신자들이 바울의 신변을 호위하고 아덴으로 가게 하였으며, 곧이어 실라와 디모데까지 보내기로 했습니다.
적용: 바울의 선교여행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페르시아에서 생산되는 양탄자는 전 세계가 알아주는 명품 중 하나입니다. 어떤 것은 예술적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안고 천문학적인 가격이 매겨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뽐내는 예술과 문화의 결정체에도 잘 찾아보면 반드시 흠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페르시아 양탄자에서 발견되는 흠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탄자를 제작하던 장인이 일부러 남긴 것이라고 합니다. 결점 없는 양탄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고 여기는 그들의 장인 정신이자 철학이 담긴 흠입니다. 그리고 이를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 설 교 >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인명진 목사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도시를 방문하거나, 특정한 나라를 방문 했을 때, 그 지역에서만 느껴지는 고유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그곳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은 잘 모르지만 그 도시를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금방 다가옵니다. 한 도시에 대한 첫 인상은 빌딩이나, 경제수준이나 외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 다른 평가를 하게 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 씀씀이에 따라 좋은 인상을 가지기도 하고, 나쁜 이미지를 가지기도 합니다.
한중일 세 나라의 이미지를 비교해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일본은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예의가 바른 민족입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저들 스스로도 말하기를 “우리에게는 타테마에라는 겉모습과 혼네라는 진심이 따로 있다.”했습니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세계에서 미안합니다. 스미마셍가 말을 가장 많이 하는 민족이지만 진정으로 사과할 줄을 모르는 민족이 일본입니다.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토는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국화와 칼”이라 했습니다. 겉으로는 고고한 국화이지만 속마음은 칼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주 공평한 것 같고 느긋합니다. 다른 것도 포용할 줄도 압니다. 그러나 실리 앞에서는 전 세계에서 제일 천부적인 민족입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댓놈이 번다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중국 사람의 핏줄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돈이 흐른다는 말까지 나와 겠습니까?
반면에 우리나라 한국 사람은 어떻습니까? 세 나라 중에 가장 흥분을 잘 하고 거친 민족처럼 보입니다. 일도 잘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고, 민첩합니다. 반면에 욕도 잘 하고, 술도 많이 먹고, 싸움도 잘 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속마음까지 다 주는 정이 깊은 민족입니다. 다른 이질적인 것인 것까지 하나로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민족입니다. 평가하는 제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팔이 안쪽으로 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성경에서도 어떤 특정한 지역에 대한 이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레데인”은 거짓말쟁이라는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섬나라인 그레데인은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사람 같습니다. “소돔 사람”소돔라이트 하면 동성애자라는 이미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하면 천박한 사람들, 문란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갈릴리에 대한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만 알았습니다. 이때는 그는 서슴지 않고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하면서 갈릴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습니다. 우리는 눈에 비춰지는 이미지로 그 도시 사람을 도매금으로 평가하곤 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그곳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일과 생활관습과 전통들이 남겨놓은 흔적입니다.
그런데 지역이나 민족뿐만 아니라 특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독특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다종교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습니까? 긍정적인 이미지로 본다면 종교적 열심이 대단하여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 어디서나 찬송하고 사람이 죽어도 찬송하는 사람들, 환경 앞에 좌절하지 않고 이겨나가는 진취적인 사람들, 새로운 세계와 문명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 부정적인 이미지로 본다면 자신의 종교적 가치관으로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독선적인 사람들, 말은 잘 하지만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깍쟁이, 전도라는 명목으로 무례함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 한번 싸웠다 하면 서로 화해할 줄 모르는 속이 좁은 사람.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진 한국교회 성도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면 우리 갈릴리교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습니까? 나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습니까?
지난 1주일 동안 제가 묵상했던 주제가 우리 갈릴리교회는 이 지역사회와 한국사회에서 어떤 이미지로 비춰질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앞으로 우리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할까를 동시에 생각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긍정적인 이미지는 감추어지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신뢰감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큰 과제는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는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에 응답하는 교회의 이미지를 묵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교회가 베뢰아 교회였습니다. 베뢰아 교회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유럽으로 건너가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를 거쳐 베레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세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만난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했고, 오히려 죽이려 했습니다.
그 다음날 밤에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몇 년 전까지 사용했던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이것이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비교된 베뢰아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평가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편협 되지 않고 마음이 넓게 열려서 새로운 것을 수용할 줄 아는 포용력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과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들은 같은 혈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기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편협하고 충동적이며 시기심이 많고 폭력적”이었고, 베뢰아 유대인들은 “공정하며 편협 되지 않고 마음이 탁 트인 진지한 모습”이었습니다.
항구도시인 데살로니가는 무역이 활발한 상업도시였고, 그곳의 많은 유대인들은 무역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산이 빠르고 물질적인 이해관계에 밝았습니다. 그들은 손해가 되느냐에 이익에 되느냐에 따라 선악을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약간의 해라도 미친다고 생각되면 언제나 분노하며 즉각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한두 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헬라 귀부인들까지 믿음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불량배를 돈으로 매수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오히려 바울을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라고 관가에 고발까지 했습니다. 아주 질이 좋지 못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40Km 떨어져 있는 베뢰아 사람들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마음 문이 활짝 열려져 있어서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분별력이 있었고,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같은 유대 혈통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전혀 달랐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 이었습니다. 인격적인 성숙함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경청하며 말씀을 생활에 적용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정중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신사적이고, 편견을 갖지 않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진지하고 규모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직하며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베뢰아 교회의 성도와 같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데살로니가 유대인과 같이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금방 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 양쪽 끝에서 공동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치 앞도 나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인정하여 평화를 만드는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역할입니다.
자, 그러면 베뢰아 교회는 어떤 이미지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먼저,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신사적이다 하는 말은 옷을 잘 입어 겉모양이 아름답다는 뜻도 아니고, 저들이 귀족이라서 신사적이라 말씀한 것도 아닙니다. 이 신사적이라는 말을 New Living 영어성경은 “open mind"라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열려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을 때 온 마음을 다 열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비록 번성한 항구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저들의 마음은 폐쇄적이었습니다. 바다는 열려져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습니다. 문화는 개방되었지만 세계관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으로 둘려 싸여 있는 작은 내륙 도시에 불과한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여행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의 손잡이는 바깥에 달려 있어 들어가는 사람이 문을 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방문부터 시작해서 차문까지 여러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문은 손잡이가 밖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안에 달려져 있어서 바깥에 있는 사람이 절대로 열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이 마음의 문을 억지로 열지는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말씀이 저들 위에 역사했습니다. 저들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먹는 것은 오직 자신의 입을 열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은혜 받는 것도 마음의 문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신사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판단하도록 맡기는 것이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뢰아 성도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 세계를 받아들였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신사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서로에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문을 열고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마음 문을 닫고 있으면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외롭습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신사였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신사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말씀을 집중적으로 받았습니다.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서 들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공부를 잘하는 비결도 별것 아닙니다. 얼마나 집중하는 훈련이 잘되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주위가 산만하다는 것은 공부할 때 딴 생각하고, 집중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신앙생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 잘 듣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듣더라도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이라도 놓치기 아까워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 달콤하다고 믿고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이 말씀이 내 속에 있는 불안과 염려를 이기게 만들고, 이 말씀이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나중에는 영적인 권세가 생겨 모든 환난을 능히 이기는 자가 됩니다.
영어성경은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whole attention". 모든 주의 다 기우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내 온 인격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이 내가 알지 못하는 속사람까지 정화시키고, 내 영혼을 정결하게 만듭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그 말씀이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바로 여기에서 삶과 인격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 번째로 저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하였다고 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과 현실에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말씀은 듣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들은 말씀을 내 삶에 적용시키면서 이것이 내 인생에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꾸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기 때문에 우리 앞에 발생한 일에 대해 해석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무슨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발생한 사건은 동일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사건을 해석하는 눈이 다릅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지만 판단은 눈 뒤에 있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저들의 눈 뒤에는 성경의 가치관이 항상 있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자기 지식이나, 경험으로 판단하고 해석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사건이 해석이 되질 않으면 “재수가 나빠서”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그래서 운수에 인생을 맡깁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해석하다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으면 자기 뜻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것을 묻습니다. 그래도 해석이 되질 않으면 “뜻이 있겠지” 하면서 판단을 유보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요, 이것이 성경을 내 인생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건강한 인생입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인생에 적용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성도와 교회가 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베뢰아 성도들은 너그러웠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교리로 무장되어서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식도 팔아버렸고, 인간의 도리도 던져버렸습니다. 이런 것을 교조주의라 말합니다. 한국교회가 이 교조주의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천재지변을 당한 사람들을 보고서 하나님 믿지 않아서 하나님이 심판했다고 너무도 쉽게 정죄해 버리지 않습니까? 상식을 잃어버렸고, 예의를 잃어버렸고, 인간다움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샘에서 길어올린 사랑과 정의와 인애와 긍휼의 생수를 메마른 땅에 공급하는 것인데 이것이 너그러움입니다.
저 옛날 다윗에게 이런 너그러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오랜 적대관계였던 암몬 왕이 죽었습니다. 적대관계지만 왕이 죽으면 통상적으로 조문사절단을 보내지 않습니까? 다윗은 신하를 보내어 암몬 왕을 조문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암몬 왕 하눈이 조문사절단이 자기 나라를 정탐하러 왔다고 수치를 주어서 돌려보냅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수염을 깎이고, 입고 있던 바지도 중동볼기까지 잘렸습니다. 긴바지를 다 잘라버리고 팬티처럼 입혀서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때 다윗의 너그러움이 드러납니다. 창피를 당하고, 형편없는 몰골로 왕 앞에 부끄럽게 설 신하들의 마음을 배려했습니다. 자신도 화가 나지만 어려움을 당한 신하들의 마음을 다정다감하게 헤아려 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게 했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아래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고, 너그러움으로 대하는 신사였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감추어진 신사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베뢰아 성도들이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이요, 다윗이 신사입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 보다 다윗보다 더 신사적인 사람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진 신사적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이 백리나 떨어진 베레아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원수 갚지 않았습니다. 왜 대응하지 않았습니까? 백리까지 쫓아와서 자신을 박해하는 유대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한테 비한다면 당신들은 그래도 약과요! 나도 한때는 교리에 갇혀서 사람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에 틀에 갇혀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국경선을 넘어 다메섹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극성스러움이나 지금의 저들의 극성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성질로 보아서는 한판 붙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대항하거나 응징하지 않고 그대로 아덴으로 내려갑니다. 바울은 왜 극렬한 유대인을 피해 아덴으로 내려갔을까요? 빌립보 감옥에서처럼 기적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영적인 전투를 하지 않고 신사적으로 피했을까요?
그것은 바울을 박해하는 사람이 이방인 아니라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에 갇혀서 패쇄적이어서 그렇지 저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사람들의 눈이 있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싸운다. 같은 민족기리 싸운다. 이렇게 볼 것이 아니겠어요? 대응하고 싸우다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 같으니 신사적으로 물러난 것입니다.
같이 싸워서 이긴다고 한들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교회와 성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피한 것입니다. 바울은 남들이 비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볼 줄 아는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교리에 갇혀서 인간다움의 정도를 잃어버린 독선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가슴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을 대하십시오. 양 극단에서 자기주장만 관철시키는 굳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서로 소통시키면서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손해 볼 줄 아는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사적 이미지로 평화를 만드는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베뢰아 전도
김영규 목사
바울의 베뢰아 전도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0-12)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10)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난동을 부릴 때에, 야손을 비롯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즉시 피신시켰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서남쪽으로 약60마일(약96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 당시 마게도냐를 넷으로 나눌 때에 제3지역에 속하는 곳에 베뢰아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베뢰아는 올림피안 산맥의 동쪽 자락과, 에게해에 이어지는 평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로부터 베뢰아까지 걸어간 길은, 이그나시안 도로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데살리를 거쳐서 아가야 지역으로 가는 길입니다. 베뢰아의 현재 이름은 VERRIA이며, 인구는 약 1만 8천에서 2만 명 정도이고 그 중에 유대인은 약 2천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보다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베뢰아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마디로 신사적이라고 평가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11) 물론 누가나 바울이 접한 사람들은 베뢰아 시민 전체는 아닙니다. 유대인 회당에서 만난 일부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고 헬라인도 있습니다. 누가는 이들 일부 사람들만 대하고도 베뢰아 사람들 전체의 성향을 신사적이라고 평가합니다. “ou|toi de; h\san eujgenevsteroi tw'n ejn Qessalonivkh/,”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인 만큼 전도에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12) 다수의 유대인들, 그리고 높은 신분의 귀부인들과 남자들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신사적인 태도에 대해서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신사적”이란 말은 헬라어로 “eujgenhv"”인데, “eu\”(좋은) “givnomai”(출생)이란 뜻입니다. 즉, 출신이 좋다는 뜻인데, 고상하다는 의미로도 의역되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fair-minded” (NKJV), “noble character”(NIV), “open minded”(NLT)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공정한 마음, 고상한 성품, 열린 마음의 뜻입니다. “신사적”이란 단어는 원문상에 비교급(eujgenevsteroi)으로 되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신사적이란 의미입니다. “These were more noble than those in Thessalonica,” (KJV) 감히 지역적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출신 배경에 따라 보다 더 신사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출신이란 어떤 가문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지역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집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신사적입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불량배를 동원하여 바울과 실라를 괴롭혔지만, 베뢰아에는 그런 유대인이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이나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혈통이 같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지역 사람들의 배경이 신사적이기 때문에 거기 사는 유대인들도 신사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출신에 따라서 보다 더 신사적이 된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출신을 따지자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사는 집단이 신사적이면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신사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왜 어떤 집단은 신사적이고 어떤 집단은 천박할까? 그것은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상이나 가치관, 도덕성, 생활 습관 같은 문화적 배경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사람들의 매너, 교양, 언어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보세요. 부모가 부부싸움 하면서 소새끼 말새끼 하면서 욕하면 애들이 소꿉장난 하면서 그대로 따라 합니다. 자기 남편에게 이 무슨 “인간아!” 하면서 대들고, 아내에게 “야, 너” 하면서 막말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왜 욕이 없으면 말이 안 되고, 험악한 말만 사용합니까? 학교 또래 집단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이 당연한 줄 알아요. 그만큼 어떤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처한 사회적 환경도 그렇습니다. 현재 우리의 언어, 예절, 윤리, 도덕성은 과거 우리가 자랄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천박해졌습니다. 현재 40대 이하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가 과연 얼마나 천박해 졌는지 전혀 몰라요. 왜냐하면 과거 사회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천박해졌을까요? 언어가 천박해지고, 행동이 천박해지고, 생각이 천박해진 때가 언제일까요? 저는 그 때를 칼라 텔레비전이 보급되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광고주가 프로그램을 좌우하게 된 상업방송 시대가 되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교양이 무너지고, 예절이 무너지고, 언어가 저급해졌습니다.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도덕성이 무너지고, 교실이 무너지고, 사제지간이 무너지고, 부모자식이 무너지고, 모든 인간관계가 개 등급 되었습니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세요. 어디를 보나 패턴이 똑 같습니다. 인기 프로그램이란 게 별 유익도 없는 남의 사생활 얘기 들춰보면서 희희덕거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는 우리 애들까지 그런 프로를 보면서 시간 보내는 것이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방송 매체의 속성이 뭡니까? 남의 안 좋은 면을 들춰내고 흠잡는 일입니다. 이런 속성에 물들면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안 좋은 일만 들춰내고, 비판만 하는 비뚤어진 인간상이 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현대인들은 방송의 집단 최면에 걸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세상 집단에서 빠져나와야 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4,17-18) 그렇다고 세상 밖으로 탈출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내가 속한 집단에서 구성원들의 생각을 건전하게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사상을 바꾸고, 삶을 바꾸도록 앞장서서 어떤 역할을 해야만 됩니다. 나는 내 자식들이 가진 사상, 가치관, 사용하는 언어, 매너, 생활 방식의 거의 모든 것이 나를 닮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가 아버지로 있는 가정 속에서 어떤 삶의 방식을 몸에 익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속한 정윤교회의 분위기, 예를 들면 우리 교인들의 신앙 모습, 생활 태도, 가치관, 예절, 봉사 자세와 같은 일반적인 모습이 나를 닮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는 삶을 공유하고, 삶의 태도를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이 신사적인 집단이 되도록 일정한 역할을 감당해야만 됩니다. 내가 속한 가정을 신사적인 공동체로 바꾸세요. 내가 속한 직장을 신사적인 공동체로 바꾸세요. 내가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신사적인 사람들로 바꾸세요. 그래야만 거기 속한 모든 사람들이 신사적인 사람이 됩니다. 특히 신앙생활의 모습에서 신사적인 사람들이 되도록 역할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베뢰아 사람들처럼 내가 속한 공동체에 “신사적”이라는 별명이 붙도록 만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받아들임
그러면 베뢰아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신사적입니까? 본문에 보면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합니다.
첫째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열린 마음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11)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ejdevxanto to;n lovgon meta; pavsh" proqumiva" ”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in that they received the word with all readiness of mind, ”(KJV) “they received the message with great eagerness”(NIV) 잘 준비된 마음, 혹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수용적인 자세, 일단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장 원하고 원하신 것은 경청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수 3:9)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욥 37:2)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시 81:8)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 55: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너희는 제발 내 말에 경청해다오! 내 말을 좀 들어라!
요즘 사람들, 열렸다는 말, 소통이라는 말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남의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 주로 남에게 내 말 좀 들으라고 목청을 높입니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은 들으라는 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조용히 경청합니다. 특히 요즘 사람들은 다원주의 사상을 좋아합니다. 다양한 소리를 들어라! 온갖 잡소리를 다 열린 마음으로 듣습니다. 그런데 유독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귓잔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그 쪽 방면은 처음부터 귀를 막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슥 7:11-12)
듣지 않고 내 말만 하는 시대, 경청이 없는 시대, 도대체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시대, 말하는 사람은 많고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시대, 이런 시대에 하나님 말씀에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 합니다. 베뢰아 교인들은 사람의 소리보다 하나님 말씀에 열린 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상고함
베뢰아 교인들의 신사적인 면, 두 번째는 성경 연구입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 “kaq! hJmevran ajnakrivnonte" ta;" grafa;"”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덮어놓고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감정에 휩싸여 판단력 없이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꿈을 꾸거나 무슨 귀신의 계시를 받고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황당한 경험을 믿는 믿음도 아닙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누가 말한 사설을 듣고 믿는 믿음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을 근거로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기독교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특별 계시입니다. 성경은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알아야 될 최소한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이 뻥 뚤린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가 구원 받은 사실도 물론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젊은 시절에 인생을 놓고 고민하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명쾌하고 간단하게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의도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는 어떤 곳인가? 우주의 기원은 무엇이며, 생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장차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중대한 모든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간단명료한 해답을 전해줍니다. 성경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없으면 자신도 알 수 없고, 세상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의 종말, 성경이 말씀하는 재림과 심판,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당연히 성경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베뢰아 교인들의 장점은 바로 성경을 연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연구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ejrauna'te ta;" grafav")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이 구절에서 상고한다는 말(ejrauna'te)을 여러 번역에 다양한 단어로 번역합니다. 파고들다(공동번역), 연구하다(새번역), search(KJV, NASB, RSV, NLT), diligently study(NIV) 등등. 본문 11절의 성경을 상고한다(ajnakrivnonte" ta;" grafa;")는 말은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뜻입니다. “and examined the Scriptures every day to see if what Paul said was true.”(NIV) “and searched the scriptures daily, whether those things were so.”(KJV)
베뢰아 교인들의 성경 연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매일매일 일과적으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 “kaq! hJmevran ajnakrivnonte" ta;" grafa;"” “and examined the Scriptures every day ”(NIV) “and searched the scriptures daily,”(KJV) 성경은 매일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요 음성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매일 성경 묵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제 저녁 저는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적용을 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 24장 1-10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눈에 두 종류의 무화과가 다민 광주리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는 처음 익은 듯 한 극히 좋은 무화과였고, 다른 하나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입니다. 이것은 두 종류의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한 것입니다. 좋은 무화과는 바빌론 포로로 잡혀갈 백성들이고, 나쁜 무화과는 본토나 애굽으로 피신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거부하는 백성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는 사람이 좋은 자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게 수로 주시는 모든 징계를 항상 달게 받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성경 말씀을 매일매일 묵상하면서 그 때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오늘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제 11월과 12월 매일성경이 보급됩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매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 진정성을 성경으로 검증했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11) 과연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가? 과연 성경에 있는 것을 얘기했는가? “to see if what Paul said was true.”(NIV) “whether those things were so.”(KJV) 오늘날 소문난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케이블 TV를 통해서 하루 종일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가 이어집니다. 어떤 교인들은 본 교회 목사님 설교보다 TV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가끔 처음 교회에 나오신 어른들이 제게 칭찬을 하십니다. “목사님, 오늘 연설 최고입니다!” 우스개 소리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 설교가 듣기 좋은지 아닌지를 평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전하는 설교가 과연 성경 말씀인지 아닌지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설교는 넘쳐나는 데 성경 말씀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8:11-13) 오랜 만에 만난 동창이 목사인 내게 자랑했습니다. 나도 요즘 교회에 나간다! 그래서 잘 됐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고리타분한 성경 얘기를 안 해서 좋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런 얘기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의 진정성은 성경을 말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자가 성경을 말하고 있는가? 설교자가 지금 성경대로 얘기하고 있는가? 설교를 들으면서 무슨 인간적인 위로를 받으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 음성을 그대로 듣는 훈련을 하세요. 성경대로 설교하는가? 설교를 성경으로 검증하게 된다면 최고의 영적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베뢰아 교인들의 신사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