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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26. 영리한 놈 인줄 알았더니 먹통이로군
[운문선사가 한 때 법을 보이셨다.
"주객(主客) 양쪽을 다 잊었으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하신 반산스님의 말씀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
여기서 반산스님에 대해서는 먼저번 시간에 보설해 드렸으니 넘어가고 오늘의 주제인 “주객(主客) 양쪽을 다 잊었으니”라고 하신 말의 깊은 현지를 한 번 논해 보겠습니다.
주객(主客)이란 주인과 손님이라는 상대성을 나타낸 말입니다.
선에서 말하는 체와 용(體用)의 도리, 나와 경계,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위와 아래, 크고 작음, 맑다와 흐리다. 깨끗하다 더럽다, 깊다와 앝다, 좋다와 싫다, 등 모든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은 다 차별상과 분별심(分別心) 속에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상대성원리이며 인연의 법칙이며, 연기적 현상이며, 흑백의 논리에 말이나 글이나 마음을 씀은 전부다 이분법적으로 구성됩니다. 이것이 마음에서 본다면 체상용(體相用)으로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체는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라고하는 그 근본을 말합니다.
근본을 어디에 두너냐에 따라 그 사람의 견처(見處)와 안목(眼目)이 달라집니다. 이것을 양변(兩邊)이라고 하지요.
체와 용이 본래부터 다른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주로 선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라는 말을 씀니다. 양변이 서로 막고 서로 비추이니 막힘과 비추임이 동시이다라는 말입니다. 어둠과 밝음은 항상 함께 합니다.
밝음이 더 많은가 어둠인 그림자가 있음으로 형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혀 어둠밖에 없다면 그어떻한 것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 밝음만 있다면 빛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똑 같은 원리는 밝음과 어둠의 두가지가 함께 할때에만 형상이 드러남을 비추어 볼 수가 있는 것이듯이 이 둘은 항상 함께 하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하듯이 둘이면서 하나이니 일진법계(一眞法界)이고 둘이면 편견(偏見)이며 한 쪽으로 집착하는 독단적 단멸론에 빠진 것이요 이슬람교같은 종교가 재중을 노예화하고 종교의 율법이 바로 헌법이요 법이 되는 최약의 악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어지는
“양쪽을 다 잊었으니”라는 것은 이 양변이 서로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라는 양변을 취하면 바로 집착한 것인 것이며 상대성은 차별적이고 분별적으로 이루어진 양변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양변을 회통하여 양변이 하나가 된다면 이것이 진정한 중도정견(中道正見)인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며, 벽장선사의 10가지로 벗어나라 하였듯이 말은 상대성이지만 이것이 인과 연은 서로가 돌고 돌아가는 연기적 현상으로 본다면 결국은 절대평등의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이며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주객인 양쪽을 다 잊으니라고 하는 것은 이 양변을 다 벗어나 서로 법성원융하여 하나가 될 때가 바로 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그럼 마음이 열렸다는 선지삭들은 이 주객을 어떻게 볼까요
주객에 대하여 논해 본다면
깨달음 이후 주객(主客)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소개해 드리면 깨달음 이후의 공부는 주객(主客)이 사라지고 하나로 계합하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이원성이라는 경계를 허물게 되는 것이지요.
실재적인 이원성이 아닌, 각자가 '나'라는 아상을 통해 만든 경계이기에 갈고 닦는 수행을 통해 허무는 것이 아닙니다.
근원에서는 나뉜 바가 없기에 분별망상의 착각에서 벗어나면 본래 생겨난 바도 없고, 사라진 바도 없는 것입니다.
상이 허망하여 진실이 아닌 줄 안다면, 여래를 보리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습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것을 '공'이라 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연기에 눈 뜨게 됩니다.
선에서는 마음을 본다고 하여 견성이라고 합니다. 공부인으로써는 참 대단한 성과이나, 연기를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깨달음'과 '깨달은 나'가 따로 있습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경계를 오고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자리로 천천히 돌아옵니다. 나중에는 묶이거나 말거나 빠르게 이 자리로 돌아옵니다. 관념 속 과거와 미래를 오가던 습이 점차 줄어들고, 눈 앞에 머뭅니다.
결국 오가던 다리마저 끊어집니다. 이것이 부동지(不動地)입니다.
이후의 공부를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손에는 깨달음(방편)을 쥐고 있기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견해 또한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진실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더 공부를 추구하는 이가 있고, 반대로 더 이상의 공부는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이도 있습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춥니다.
뗏목을 붙잡은 채 바깥을 바라보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상대가 나와 견해가 같으면 쉽게 믿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공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믿어온 '생각'을 깨는 공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만든 '상'에 스스로 묶이게 됩니다. 오랫동안 '나'라는 망상 속에서 살아온 습관은, 깨달음 이후에도 여전히 '법'을 제 방식대로 묶으려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상(法相)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둔갑합니다.
주객이 여전히 나뉘어 있다 보니, 상대가 이법을 말하는지, 불이법(不二法)을 드러내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합니다.
'나'라는 망상의 입장에서 법을 해석하지 말고, 법에서 바라보세요. 갈고 닦을 것은 없습니다.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되, 함이 없이 하라.”
생각은 이 말을 머리로 이해하려 합니다. 인과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그 낙처를 확인해야 합니다.
말은 임시로 세워진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방편(方便)이라 부릅니다. 세운 말은 허물어지고,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공중에 흩어집니다. 붙잡으면 상(相)이 되고, 낙처(落處, 돌아갈 곳)를 알게 되면 그것이 약(藥)이 됩니다.
“머물 견해가 없습니다. 법에는 그런 사견이 없습니다.”
침묵으로 법을 세우면, 듣는 이는 침묵이 법을 드러내는 줄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통해, 말로 닿을 수 없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객이 사라지면 더 이상 법을 구하거나 깨달음과 공부를 따로 찾거나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안팎이 한바탕이면, 나뉠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로 진리를 찾을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을 그럴듯하게 흉내를 내거나,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더라도, 이것을 볼 안목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쉽게 ‘상(相)’을 따라가게 됩니다. 견해를 진실이라고 쥐지 마십시오.
“법상을 쥐고 있는 이. 뗏목인 줄 알고 버린 이.”
이 공부의 성패는 연기(계합)에 있습니다. 안팎이라는 경계가 사라지면 스스로 불이법에 녹아들기에 상대가 이법을 말하고 깨달음을 흉내내는지, 정확히 낙처를 가리키는지 애쓰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신통이 있어서 일까요..? 아니요 법에는 나뉨이 없다고 했습니다.
'깨달은 사람'과 '깨달음'이라는 주객이 따로 있기에 그렇습니다. 한손에 법이라는 이름의 방편을 쥐고 있으니, 나뉘어 보이는 것입니다. 쥐고 있어야 자재(自在)한 게 아닙니다.
쥘 것이 없어야 비로소 자재(自在)한 것입니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듯이 깨달고 나면 삶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쓰고 싶으면 쓰고, 내려놓고 싶으면 내려놓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다음 문맥은 무엇입니까?
[주객(主客) 양쪽을 다 잊었으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하신 반산스님의 말씀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
“주객(主客) 양쪽을 다 잊었으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우리 불보살님들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상대성인 분별과 차별이 사라진 절대평등의 세계는 오직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인 제법이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돌~~!!!!!!!!!
모든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본다면 지금 여기에 빛의 화현으로 드러난 형상은 있는 그대로 색입니다.
색과 공의 차이는 형상으로 드러남이 인식하면 있는 것이요, 드러나지 않으면 다 공인 것입니다.
그럼 공과 색이 다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상으로 드러나서 마음에 인식이 되면 색이고 인식이 되지 않으면 공이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듯이 모든 것은 미진의 모일과 흩어짐일 뿐 다 같은 미진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체와 용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전자로 본다면 푸르서와 마이느서 전자가 둘로 나누어 있듯이 있다 없다는 사실 인식(認識)은 식이라는 것에 빛이 고경(古鏡) 형상이 드러나느냐 들어 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지금의 과학이 발달한 시점에서는 세포 분자 원자 양자학까지에서 본다면 세포는 보일지은정 분자나 원자나 양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럼 드러나서 인식이 되면 색이라고 하고 드러나지 않음은 공이라고 한다면 이 둘은 전자의 밀집도가 다른다고 밖에는 생각할수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질량이라고 하지만 분자나 세포가 밀집되어 있으면 형상으로 드러나고 형상이 없는 분자나 원자나 양자는 그럼 없는 곳이 있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질량의 차이이니 무든 형상이나 공이나 다 전자나 원자에서 본다면 이것이 체상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알파, 베타, 감마라는 전자로 형성되어있지요 그러나 단지 우리의 인식작용으로는 감득되지 않지만 온 우주는 이 전자파로 더욱 더 깊이 보면은 양자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현미경으로 모든 세포를 100억배로 키워서 보니 그 어떻한 실체가 없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느냐 이것 또한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인스타인은 양자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니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마음에서 말하는 성품에서 본다면 세가지로 되어 있듯이
체에 해당하는 원성실성(圓成實性) 용에 해당하는 의타기성(依他起性) 상에 해당하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불안은 영산당시에는 전기도 없었고 원자력고 없었고 양자학도 없었는데 이를 어찌 알았는지 소름끼치도록 이 삼라만상을 다 파악할 수 있었는지 부사의한 일이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1세기에 왔어 과학이 많이 발달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공사상은 해결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 양자학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혜안이 과학적으로 해결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은 우리들의 뇌에서 일어나는 뇌파에 대하여는 아직 손도 못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천대천 세계가 어떻게 하여 저 진공 속에 떠 있는가 진공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아직도 하느님에게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영가나 영혼이나 영이나 늜이라는 미래에 대한 그 무엇도 아직 밝혀 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생오백생이나 미래의 정법시대 말세세상에 대하여는 손도 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의 십여의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니 불교의 전체적으로 해석해 보면 오직 유식(唯識)이며 일체존제는 다 심법계(心法界)임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반산스님의 말을 인용하고 나서는 운문선사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동해(東海) 바다에 몸을 숨기고 수미산 꼭대기에서 말을 달린다."]라고 하십니다.
금방 바로 이 몸둥이가 나라는 측면에서 들어면 말도 아니고 글도 안되는 허망한 망상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눈을 감고 심법계에서 한 번 상상(想像)으로 한 번 해 보십시오 얼마든지 그렇게 상을 만들어 낼수 있습니다.
상이란 마음의 체가 작용하면 그 어떻한 형상도 공화(空華)같이 그려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인 것입니다.
없으면 만들만 되고 필요하면 찰라순간에도 달에도 가고 우주에도 갔다 올 수 있습니다. 시간도 필요치 않고 거리도 관계없습니다.
모든 것은 찰라간에 다 만들수도 뿌울수도 모을수도 흩을 수도 있는 것이 마음이 작용인 것입니다. 신통묘유라고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지만 실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며 십부사의라고 하지만 여러분들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무엇이든 다 걸림입니다. 이 몸을 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내가라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좌상을 내려 놓고 마음도 오직 심경(心鏡)인 마음의 거울이란 마니주같은 것으로 그냥 지금 여기서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보십시오 그러면 거울에 비친 형상은 사실 그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형상은 공상(空想) 망상(妄想) 허상(虛想) 괴상(怪想) 등을 마음되로 짓고 허물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뇌망상(煩惱妄想)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사실 신통을 나투이는 마음이 작용인 것입니다.
돌~~~!!!!!!!!!!!!!!
또 상상으로 현실적으로도 되느냐 이제 과학의 발달로
"동해(東海) 바다에 몸을 숨기고 수미산 꼭대기에서 말을 달린다."를 잠수함을 타고 동해 바다에 내 몸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미산 꼭대기에서 말을 달린다는 것을 핼기를 타고 수미산이라는 히말리아 전상에도 바로 올아갈 수 있고 수미산이 아니라 어떻한 산도 요즘은 산 정상을 닦아 놓고 자동차로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 다름니까?
여러분들은 이 몸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은산철벽이고 험지로 보이지만 마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은 일초직입으로 부처도 되고 성인도 되고 대통령도 무엇이던 다 할려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상과학이 현실이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마음이라는 심법계에서는 서방정토 극락세계도 찰라간에 아미타 부처님이 만들 듯이 여러분도 찰라간에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안이고 께달음이고 심광이고 부처이고 진리이며 심법계인 것입니다. 돌~!!!!!!!!
[그리고는 주장자로 선상을 한 번 치자 대중들이 눈을 멀뚱거리니 이에 주장자를 집어 들고 대중(大衆)을 쫓아버리며 말씀하셨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수행이란 마음을 밝히는 것이지 몸을 밝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불교경전도 다 마음 이야기 인 것임을 바로 깨달으면 바로 무든 명색도 다 될 수 있고 허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장자로 선상을 한 번 치자라는 것은 운문선사의 마음의 작용과 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대 옆에 있든 대중들이 행위만을 보고 놀라서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경계에 끌려가 개신세가 아니 겠습니다.
그래서 주장자로 몽땅 두들겨 패면서 쫓아 내 버렸든 것입니다 이렇게 말후구를 날립니다.
["영리한 놈 인줄 알았더니 먹통이로군."]이라고 하는 것은 육안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즉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흙덩이를 쫖아가고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공격하듯이 명색에 빠져있는 사람은 수행자도 아니요 개와 같은 사람이라고 꾸짓고 계신 것입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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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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