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순천만
20200223[전라닷컴] 영상에세이 순천만
“자연이 주인이다. 인간은 방문객일 뿐이다.”
# 생명들의 다툼
무릇 생명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다.
먹이를 위해, 번식을 위해, 터전을 위해 다툰다.
그러나 이 생존 싸움은 무질서하지 않다.
공정하고 정연한 질서가 있다.
먹이사슬의 우위에 있건, 열등한 위치에 있건,
모두들 이 질서를 받아들인다.
이 싸움이 더불어살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다툼을 통한 더불음, 우리 삶의 모순이자, 신비다.
# 펼쳐지는 갯벌
순천만-. 물매 고운 수로를 따라
갈대밭이 드넓게 펼쳐지고 그 종착에
비옥한 갯벌이 누워 있다.
지구촌에 몇 남지 않은 청정구역이다.
생태계의 마지막 텃밭. 세계에서 다섯 안에 드는 연안습지.
국제습지협약기구 람사르의 특별 관리 지역이다.
이 낙원의 비밀은 뜻밖에 간단하다.
바다로 흘러드는 육지의 하천을 잘 관리한 것.
순천의 젖줄인 동천과 이사천은 마구잡이 개발에서 비켜나
맑은 수질을 간직할 수 있었다.
맑은 물은 싱싱한 갈대밭을 가꾸고
갈대밭은 비옥한 갯벌을 일구었다.
# 농게
갯벌에는 생각보다 많은 종족들이 산다.
서로 끊임없이 먹고 먹히면서
전체의 생존 균형을 잘 맞추며 살아간다.
뻘밭에 갯풀이 있고, 갯벌레가 그 갯풀을 취하고,
작은 갯짐승이 갯벌레를 취하고,
큰 갯짐승이 작은 갯짐승을 취하고,
새가 갯짐승을 취하고, 인간이 새를 취한다.
때로 이 위계가 흔들려
변이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제 자리로 돌아간다.
갯벌도 온갖 생명들이 업에 따라
과보를 받으며 어울려 살아가는 화엄의 세계다.
짝짓기철을 맞아 암컷 차지에 바쁘던
농게가 밀물이 들어
신변이 위험해지자 재빨리 문을 닫고 집으로 숨는다.
# 딱따구리
고목에 둥지를 마련한 청딱따구리 한 쌍.
생명이 생명을 잇는 존재의 환희에 눈을 뜬다.
내일을 위해 자신을 잊는 어머니 자연의 본성.
어느 날 지어미가 해침을 받는다. 환희는 늘 슬픔을 동반한다.
인고의 정성 끝에 확인하는 2세들의 힘찬 날개짓,
생명 이음의 대업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 인동초, 말똥게, 철새
인동초가 곱게 핀 봄날.
갯벌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갈대잎으로 봄 입맛을 살리는 말똥게.
집게를 이용해 갈대잎을 섬세하게 찢은 다음
톡 잘라서 천천히 식사를 즐긴다.
가는 철새가 있고, 오는 철새가 있다.
번식지로 떠날 채비가 된 겨울새들은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막 도착한 여름새들은
휴식을 취하며 포식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솔섬 앞 왜가리떼며, 천연기념물인 검은머리물떼새,
다리도요, 나그네새라고 불리는 뒷부리장다리물떼새...
순천만에는 사철 내내 쉬지 않고
몇 백 종의 새가 찾아든다.
# 칠게의 교미
지혜로운 자는 자연에서 배운다. 무릇 생명은 하나라는 걸 깨친다.
보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무릇 생명은 하나이며 추한 것과 고운 것이 다르지 않으며
뻘밭과 꽃밭이 다 같은 정토이며
갯짐승과 뭍사람이 둘이 아님을 새긴다.
하등이라 얕보는 동물들은 차라리 진솔하다.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으며
주어진 본능에 충실하다.
탐욕과 악의로 생명계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
벌거벗은 그대로 보여주는 갯짐승들의
짝짓기는 추하지 않고 되레 숭고하다.
갯짐승들은 나눔의 지혜도 앞서 있다.
짱뚱어와 게는 공생관계다.
짱뚱어는 새끼를 낳을 때
게의 굴을 빌려 쓴다. 더부살이다.
농게가 파놓은 30센티미터 가량의 굴
한 쪽에 짱뚱어의 산란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짱뚱어는 안전하게 알을 까고, 대신 농게와 먹이를 나눈다.
# 갯지렁이
어디에서나처럼, 갯벌도 기층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떠받든다.
저서생물들의 땀과 희생으로 갯벌이 생산성을 유지한다.
길이 1미터가 넘는 흰이빨참갯지렁이,
짝짓기 중인 대추귀고동, 햇볕을 싫어해 비온 뒤에만 활동하는 말똥이.
말똥같이 생겨 말똥이라 불리는 이 녀석은
아직 공식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다.
순천만에는 이름이 없는 식구가 많다.
그만큼 생물 다양성이 높다.
벼논 가 뻘밭에 살던 칠게가
먹이가 줄어들자, 새 터를 찾아 이동을 한다.
칠게가 농게의 서식지를 지나려 하자
농게가 텃세를 부리며 방해한다.
생존다툼에서는 늘 사랑이 강한 쪽이 이기게 되어 있다.
# 칠게잡이 어부
먹이사슬의 맨 위에 있는 생물은 인간이다.
순천만 갯벌도 예외가 아니다.
팔순의 이 할아버지는
60년 동안 널을 타고 칠게잡이를 해온다.
새와 물고기들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먹이를 취하지만 인간들은 욕심을 부려
순천만의 자원을 닥치는 대로 거두어 들인다.
짱뚱어가 새끼가 있는 굴 앞에서
심호흡을 해 폐부 가득 공기를 머금는다.
새끼에게 맑은 산소를 공급해 주고
대신 뻘을 입 안 가득 머금고 나와 밖에 버린다.
가족부양에 여념이 없는 짱뚱어를
노리고 있는 또 한 사람의 포식자.
낚시꾼은 미끼도 쓰지 않고
홀치기 기술로 목표물을 낚아챈다.
지나치게 빼앗는 이는 결국 자신의 터전을 잃는다.
오래전부터 되풀이 되는 이 어리석음,
오늘날 생태의 위기로 귀결되고 있다.
강자가 등 뒤에서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포식하기에 여념이 없는 약자, 생존의 부조리다.
# 갈대, 달, 쪽배
순천만의 진객은 단연 철새다.
뻘밭의 기름진 갯짐승들이
하천의 싱싱한 물고기들이
달디단 갈대의 잎과 열매가 철새들을 부른다.
생명은 시련 속에서 강해진다.
대자연은 역경계를 선물처럼 베푼다.
번식을 하기 좋은 툰드라 지대는
겨울이 닥치면 굶주림의 시련을 준다.
새들은 새끼들을 데리고 따뜻한 남쪽으로 대이동을 한다.
그러면서 인욕을 배우고 지혜를 배우고
생명의 존엄을 배우고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함을 배운다.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이들을
순천만은 풍요롭고 포근한 품으로 안아 들인다.
큰고니는 갈대밭에 둥지를 틀고
갯풀이며 갯지렁이 물고기 등을 먹고 산다.
특히 고랭이풀이라고 뻘밭의 갯풀을 좋아하는데
떼로 달려들어 포식하고 남은 자리가 폐허 같다.
백로는 좀 더 맑은 물에서 물고기를 주로 잡는다.
순천만 솔섬 앞에 백로들이 진을 폈다.
아무리 백로라지만 그 놈 또한 집식성이라
뻘밭에서 지렁이도 찾고 풀도 먹는다.
좀처럼 보기 힘든 노랑부리저어새가 사냥을 한다.
주걱같이 생긴 주둥이가 별나다.
천연기념물에다 멸종위기종 1급, 국제적으로 보호를 받는다.
순천만에는 이런 귀빈이 많다.
# 갈대, 흑두루미 비상
깊어가는 가을. 멀리서 보는 흑두루미의 비상은
우아하고 산뜻하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먼 여행으로 고단한 그들의 땀 냄새가 끈하다.
생명에의 끝없는 갈구, 참음과 용기가 경외스럽다.
습지에서 자라는 갯풀은 새들의 고영양식이다.
갈대밭에는 갈대만 있는 게 아니라
칠면초, 해홍나물, 나문재, 갯능쟁이, 갯개미취, 갯질경이...
온갖 풀들이 뒤엉켜 자라고 있다.
그 아늑한 풀숲이 새들의 둥지가 된다.
큰 비가 온 뒤라 갯벌에 들어가지 못한
흑두루미떼는 간척지 논바닥에서 날개를 쉰다.
이삭의 벼알을 줍고 풀씨와 풀뿌리를 찾아
장거리 비행 뒤의 허기를 달랜다.
고난의 여정을 거쳐 따뜻한 나라에 안착한 새들은
거대한 생명무리에 합세한 기쁨과 감사를
현란한 군무로써 표현한다. 환희로운 회향이다.
이 생명의 대축제 앞에서
누가 혼자만의 행복을 고집할 수 있으랴.
모두 함께 어우러져 뒹구는 공생의 대동마당에서
누가 혼자만의 탐욕에 젖어있을 수 있으랴.
내남 없이 함께 손잡고 돌아가는
이 생명 순환의 원무를 누가 혼자만의 아만으로 끊어낼 수 있으랴.
# 고추잠자리
순천만에 찾아든 새들은 이제 철새가 아니다.
철따라 잠깐 들렀다가 떠나가는 나그네새가 아니다.
이미 반쯤은 텃새가 되었다. 겨울새들은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5-6개월을 순천만에 머문다. 생애의 절반을 보내는 셈이다.
순천만은 새들의 인생여정에서 간이역이 아니라
시발역이며 종착역이다. 객지가 아니라, 제2의 고향이며
쉼터가 아니라 둥지요, 보금자리다.
귀한 종이건, 흔한 종이건
이곳 순천만에서는 온갖 종족들이
한 데 어우러져 생명세상을 구가한다.
흑두루미의 고결한 학춤, 민물도요의 정연한 군무,
청둥오리떼의 화목한 가족애, 저어새의 화려한 독무,
수만마리 가창오리떼의 아득한 비상...
이 모두가 다만 낱낱의 겸손하고 성실한
생명에의 복무일 뿐, 아무런 욕심이나 작위가 없다.
그저 모두가 자연의 운행에 순응하며 무심한 날개짓을 하고 있다.
# 눈발, 눈쌓인 갈대
낙원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뒤늦은 참회와 각고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
남을 해치고 스스로를 해치고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죽음의 길을 버리고
희망의 미래에 눈을 떠 나와 우리가 살고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가는 생명의 길을 선택했다.
이제 순천만은 한국의 자랑이 아니라, 지구촌의 희망이다.
모든 생명들이 더불어 행복을 구가하는
청정한 공화의 나라, 시방세계의 정토다.
그 현장에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신명나는 갈대축제를 열고, 세계정원박람회를 마련해
다음 세대들에게 생명공부를 시킨다.
작은 생명도 모두 소중하다는 걸 일깨운다.
# 낮은 구름, 비
봄이 와 새들은 다들 떠나갔다.
가족과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홀로 남아 헤매는 흑두루미 한 마리.
람사르 회의에서 이런 경구를 낸 적이 있다.
“자연이 주인이다. 인간은 방문객일 뿐이다.”
# 순천만이 다시 펼쳐지고
순천만이 기지개를 켠다.
또 한 바퀴 생명의 순환을 준비한다.
우리 인간도 겸허하게 그 생명 무리의 일원으로 동참해야 한다.
글 한송주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