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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어떻게 유혹을 이길까요?
성 경 : 마가복음 14:38
“새가 머리 위에서 빙빙 도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하지는 마라.”
이 말은 유혹에 대하여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 곳곳에는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시험’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미끼를 걸어 끌고 가는 것이 유혹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땅 속에 여기저기 묻힌 지뢰처럼 잘못해서 밟기라도 하면 금방 폭발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것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사단의 악한 세력이 넓고 깊게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자칫 잘못 디디면 순간적으로 유혹의 지뢰가 터지면서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유혹은 절대 위험하거나 더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매력적이며 아무런 해도 끼칠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넘어갑니다.
공부를 더 잘하고 야단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이 있는가 하면 자식을 살해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패싸움을 하고 상대방을 칼로 무자비하게 난자하는 끔찍한 사건도 자주 일어납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도 그런 것쯤을 가지고 웬 야단법석이냐고 도리어 반문한 강도도 있습니다.
모두 사단의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반은 새의 모습으로 반은 여자의 모습을 가진 ‘사이렌(Siren)'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시인 호머에 의하면 특히 에게 바다의 한 섬에 사는 사이렌은 아주 위험했습니다.
그 섬을 지나다 보면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가 너무 감미로워서 자신도 모르게 배를 그쪽으로 가게 합니다.
그런데 노래에 매혹되어 따라간 선원들의 배는 모두 파선하여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리스의 영웅인 오딧세우스는 모든 선원들의 귀를 틀어막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하여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유혹의 힘에 대하여 경고하는 교훈입니다.
유혹은 청소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 장년, 노인들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든지 못했든지 간에 유혹은 똑같이 있습니다.
나쁜 환경이나 좋은 환경이나 어디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나쁜 주변 환경을 탓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받았을 때 그들이 처한 환경은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유혹은 그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넘어뜨립니다.
유혹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도 있고 평생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선과 악의 기준이 불분명하여 유혹에 이끌리기 쉽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도 육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여지없이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아무도 유혹에서 면역되었거나 완전히 해방된 사람은 없습니다.
“Disciple Joumal"이라는 기독 잡지에서 독자를 대상으로 영적인 도전이 되는 유혹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항목이 집계되었습니다.
물질주의 → 교만 → 이기심 → 게으름 → 음욕 → 시기 → 탐욕 →거짓말 등입니다.
1. 어떤 유혹들이 있을까요?
탈무드에서는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공격무기 가운데 술이 있다고 말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술 대문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단이 이용하는 무기들의 종류가 아주 다양해졌습니다.
옛날에는 사용하지 않던 TV와 영화, 인터넷 같은 매체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끈질기게 유혹하는 사단의 무기 중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돈과 재물
돈벌이가 된다면 양심이 부패해져도 상관치 않고 덤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범죄의 소굴에 빠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돈벌이가 된다고 그들을 유흥업소를 개방합니다.
나라 경제가 악화되면 집창촌이 오히려 번창 한다고 합니다.
몸이라도 팔아서 살겠다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경건생활을 좀먹이고 신앙의 결정적인 독소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돈이 생긴다면 부도덕한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유혹>이라는 책에 ‘독수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독수리 한 마리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나무 위에 위엄 있게 앉자 있다가 갑자기 날아올라 건너편 바위 위에 앉았습니다.
물가 바위 위에 고기 한 마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다. 여기는 물도 없는데 물고기가 있네!”
독수리는 일단 의심하고 사방을 둘러보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재빨리 물고기를 나꿔 챘습니다.
다음날에도 그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물고기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위험한 짐승이나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독수리는 이번에도 힘들이지 않고 먹이를 잡았습니다.
그날 밤 숨어 있던 사냥꾼이 그 바위에 그물을 쳤습니다.
독수리는 이상한 물체가 보이자 앉지 않고 공중을 맴돌았습니다.
한참을 돌면서 주위를 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물 위에 살짝 앉아 보았습니다.
별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바위 옆에 있는 물고기를 낚았습니다.
그날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자 독수리는 그 다음날도 또 다시 그곳에 갔습니다.
밤사이에 사냥꾼이 보이지 않게 그물을 밧줄에 연결해 놓았습니다.
독수리는 그 동안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물고기를 집어서 바위에 놓고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위험이 될 것 같지 않던 밧줄이 갑자기 튕겨지면서 그물이 독수리를 덮쳤습니다.
강한 발톱으로 그물을 잡아 당겼지만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물고기에 유혹된 독수리는 힘없이 사냥꾼의 손에 걸려 들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아무 해가 없었고 일 주일 이 주일 삼 주가 지나도록 아무 해가 없자 “괜찮아! 내가 괜히 떨었어. 주일 예배 한 번 안 갔다고 해서 내가 도박 한 번 했다고 해서 망하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처음 예배를 빠지고 놀러 갈 때에는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 아냐?” 그런데 별 일없이 지나갑니다.
그러면 약간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한 번 더 해봅니다.
그래도 사고나 놀랄 일이 생기지 않자 그때부터는 이상한 자신감이 생기게 됩니다.
“괜찮은 건데, 내가 공연히 겁을 먹었구나!” 하면서 점점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2) 도박과 쾌락
요즘 미국 젊은이들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기가 막힌 대답을 합니다. “재미있잖아요!”
몇 년 동안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자는 것까지 아끼면서 돈을 모아 간신히 작은 사업체를 마련한 사람이 시간이 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도박장에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심심풀이로 가끔 가다가 몇 번 재미를 보더니 점차 그 횟수가 늘어갑니다.
그러다가 돈을 잃으면 은근히 화가 납니다. “그게 어떻게 번 돈인데…”
그래서 본전을 찾으려고 다시 도박장에 드나듭니다.
그런데 결국 얼마가지 않아서 재산을 모두 탕진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청소년들 사이에는 비디오 게임이 빠질 수 없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간단한 흥미 위주의 오락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게임이 서로 잔인하게 죽이고 때리는 것들입니다.
요즘 게임들은 컴퓨터 기술이 급속히 발달되면서 더 머리를 써야 되고 시간의 소요가 많습니다.
상대방을 죽이면 피가 튀고 머리가 잘려나가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전쟁놀이를 매일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에게도 싸움이나 전쟁이나 죽이는 것이 별로 대단치 않은 일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무서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얼마 전 샌디에고 수족관에서는 중학생 아이들이 관람자가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얕은 물에 넣은 상어와 가재미를 날카로운 막대기로 찍어서 결국 죽였다가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생각지 않습니다. 모두 사단의 고도의 술책인 것입니다.
지난 번 월드컵 축구 경기 중에 한국인들이 보인 응원열기에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런데 ‘붉은악마(Red Devil)’라는 응원단의 이름이 어쩐지 탐탁치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위협을 주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응원단 중에는 정말 사단의 복장처럼 입거나 머리에 뿔을 다는 등 사단처럼 변장하여 나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언론에서는 붉은악마의 힘으로 경기에서 이겼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단을 친숙한 대상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미국에서도 TV 만화 프로그램 가운데 'Friendly Ghost' 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귀를 귀엽게 그려서 우리 아이들이 일상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계속 즐기다 보면 마귀를 친구처럼 여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고 인상을 쓰고 근엄하게 사는 것을 잘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지만 항상 가벼운 웃음을 추구하는 삶도 잘못입니다.
쾌락을 누리는 것과 정말 기쁘게 사는 것과는 다릅니다.
쾌락은 잠깐 줄긴 후에 반드시 허탈감에 빠져서 방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도박과 스포츠가 주는 잠깐의 쾌락은 우리를 흥분시키지만 조용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진정한 기쁨은 신앙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얕은 시냇물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깊은 물은 고요해도 많은 물고기의 안전한 고향입니다.
예수님을 믿음 후에도 쾌락을 추구한다면 그런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깊고 넓은 평안과 기쁨을 아직 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슨 재미로 사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변하지 않는 진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명예
이것은 나이가 들수록 더 매력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사회의 중책을 맡았던 시절이 지나면 자신이 소외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은퇴한 후에 더욱 소외감을 느끼고 노여움이 많아집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작고 큰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려고 합니다.
각종 위원장이나 회장, 의장, 부의장, 총재 같은 거창한 단어가 쉽게 남용됩니다.
단체의 장이 되려고 뇌물로 사람들을 포섭하고 거창한 명함을 가지고 다니며 뿌립니다.
왜 선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입호부합니까?
정말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에 큰 공헌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낼까요?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런 면도 있겠지만 더 깊은 동기를 보면 명예를 얻고 이름을 내고자 하는 숨겨진 욕심이 있습니다.
정말 희생과 헌신을 다짐하여 입호부했다면 재직기간에 절대로 뇌물을 받지 말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봉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내가 잘해 봐야지 하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는 ‘높이 올라가야 호령하고 큰소리 치고 마음의 한을 풀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 이상 따라다니며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가까웠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누가 서로 더 큰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조금 더 크면 뭐합니까?
이제 예수님은 머지않아 십자가에 달리실 텐데 그들은 엉뚱한 생각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높낮이는 다르지만 정치인이나 누구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명예 때문에 사우는 것입니다.
마치 권사나 장로가 되면 상당히 높은 계급에 오른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런 직분을 거룩한 동기로 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어른이 되어서 교회의 여러 문제에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숨어 있는 것입니다.
나라에서 권력 다툼을 하는 것이나 교회에서 세력 다툼을 하는 것이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유혹들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서 대접받고 명령하는 자리를 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살겠습니다.”라는 조용한 마음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명예가 좋은 것이지만 곧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치집에 가면 상좌에 앉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애굽의 왕자’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떻습니까? 주님은 이 땅에서 명예를 구하지 않으시고 종이 되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지셔서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4) 음란
이것은 청소년부터 남녀노소 상관없이 가장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사단이 가진 최대의 무기요 미끼입니다.
음란의 문제는 창세 이후 인간 사회에서 항상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였고 사단이 가장 강력하게 사용하는 무기인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그토록 꿈구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후서에서 언급한 대로 불신앙과 불순종과 우상숭배도 이유였지만 간음사건이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불신하고 불순종하다 보니 애굽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거친 광야 길을 힘들게 통과하여 목표가 눈앞에 있는데도 음란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위대한 왕 다윗도 음란문제로 그의 인생에 심각한 오점을 남겼습니다.
결국 제일 높은 자리인 왕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을 때 순식간에 바닥으로 떠어지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유한 왕이었던 솔로몬도 말년에 이방 여자들과 성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는 바람에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온 민족과 나라에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다른 문제에서는 잘 이겼지만 음란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권력을 빙자하여 음란을 숨기는 공직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미국 카돌릭 교회에서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는데 의외로 그 뿌리가 깊었습니다.
목사니까 안심할 수 있고 장로니까 권사니까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나 직분이 음란에 대한 면역성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든지 초신자이든지 이 음란문제는 죽을 때까지 극복하기 힘든 정말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5) 거짓말
부정직한 사회에서 진정으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단이 모든 거짓의 아비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범죄도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한 사단의 거짓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염연한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달콤한 사단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죄가 열거되었습니다.
그 죄 중에 모든 거짓말과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은 인간 역사 속에서 가장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 중의 하나입니다.
거짓 서류, 거짓 성적과 이력서, 거짓된 인간관계 그리고 거짓 신앙도 우리를 좀먹는 사단의 전략 중에 하나입니다.
“거짓말재이는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자신이 말한 것을 다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진실만을 말하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이라는 죄 때문에 인류가 죄에 빠졌습니다.
6) 교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스스로 든든히 서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어느새 무너지고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교만 때문에 무너집니다.
이 세상에서 유혹받지 않는 사람이 없고 넘어지지 않을 만큼 왕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울 왕이나 웃시야 왕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자 교만해졌고 곧 급강하로 추락하였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미리 무릎을 꿇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손이 범죄 하지 않으려면 자주 두 손을 잡고 기도하라.”는 말을 잊지 마십시오.
유혹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난 절대로 유혹 같은 것에 빠지지 않아!”라는 교만한 생각이 위험한 것입니다.
유혹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마십시오.
검은 숯을 만지면서 나만 조심하면 손이 더러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착각입니다. 이미 검은 숯에 손을 댔기 때문에 나의 결심과 상관없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벌집 근처에 얼씬거리면 언젠가 벌에 쏘입니다.
한 마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쏘이고 나면 굉장히 아픕니다.
사단에게도 틈탈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약점이라는 구멍을 통해 사단은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2. 유혹을 이기려면…
1)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마가복음 14:38을 보면 “시험에 들지 않게 개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이시기 전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야고보와 요한, 베드로가 동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깨어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유혹에 빠진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이 기도하고 돌아오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다 졸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휴전선을 지키는 보초병이 자기 자리에 구멍이 나면 적이 침투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깨어 있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커다란 입으로 삼키려고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8에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옛날 로마 시대, 부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그의 남편에게 조그만 칼 하나를 주고 사자를 풀어 놓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네가 사자와 싸워서 이겨 사자를 죽이든지 네 아내가 사자에게 먹히든지 줄 중에 하나다.”
사자가 기둥 옆을 빙빙 돌면서 언제 공격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칼을 든 용사인 남편은 그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똑같은 방향으로 돌며 아내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때 정신차리십시오. 자칫 잘못하면 둘 다 죽습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사단은 순간적으로 덤벼들어 우리를 물어 뜯고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것은 뛰어난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은 우리를 무장하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구체적은 방법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군의 불화살이 꽂히지 못하도록 온몸을 단단히 무장하는 것이 전신갑주입니다.
머리에는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영원한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구원받은 신앙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예수님만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가슴에는 불의를 배척하는 의의 흉배를 붙이고 허리에는 거짓과 이단을 막아내는 든든한 진리의 띠로 힘을 삼습니다.
이드로 달려가든 발은 피곤치 않고 거친 돌작 밭에서도 발이 부르트지 않는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으십시오.
한 손에는 어떤 화살도 뚫지 못하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무엇이든지 무찌를 수 있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을 대항하여 싸울 때 아말렉은 거친 광야에 익숙했던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정착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때 모세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싸우게 하고 자신은 산에 올라가 백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사움은 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중보기도로 이긴 것이었습니다.
2) 빈집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당시의 몇몇의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이 외치는 회개의 설교를 듣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버릴 각오는 했지만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반성하고 후회하고 잘못을 뉘우쳐 빈 마음이 된 곳에, 교만이 들어가고, 사단이 들어가서 그들의 영적인 상황은 오히려 더 악해졌습니다.
마치 감옥에 다녀온 후에 더 악한 짓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적 개혁이나 인간적인 의지로 마음을 청소했지만 그 마음을 빈집으로 남겨두어 잠시 쫓겨나갔던 귀신들이 더 많이 몰려옴으로 상황이 전보다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대교라는 종교나 사회개혁이나 악행을 버리는 정도에서 그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한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도록 하지 않고 빈집으로 방치하면 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43~45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늘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깨끗이 청소된 집이라도 빈집으로 방치해 두면 어느새 거미줄이 덮이고 잡초가 나고 기둥이 썩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이 집에 살면서 집을 잘 관리하면 집이 낡지 않습니다.
자주 청소하지 않아도 사람이 사는 집과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나를 다스려주시면 정결하게 살 수 있지만 빈집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집에 주인이 없으면 도둑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셔야 유혹이 침투하지 못합니다.
직장문제를 주님께 맡겼으면 결혼문제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오.
돈 문제와 이성 문제 그리고 나쁜 습관과 행동의 문제도 주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항상 도우심을 구하며 고쳐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고 우리 영혼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작은 불씨로 장난하다가 큰 불을 낼 수도 있습니다.
코끼리가 추운 곳에서 지내기가 힘들어 작은 집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긴 코만 들여 놓습니다. “주인님, 밖은 많이 춥습니다. 나는 코가 커서 남들보다 코가 더 시려워요. 코만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주인은 집이 좁기는 해도 코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허락을 했습니다.
얼마 후, “주인님, 저는 귀도 남보다 커서 귀가 많이 시립니다. 귀 좀 넣게 해 주십시오.”
주인님은 귀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코끼리가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주인님, 미안합니다. 난 몸뚱이가 남보다 커서 몸이 많이 춥습니다. 좀 들어갈께요.”
그리고는 “너무 좁은데 주인님은 밖으로 나가시죠. 그렇지 않으면 나한테 결국 깔려 죽어요.”
처음에는 일부만 허락한 것이 나중에는 주인이 결국 쫓겨난 이야기입니다.
죄는 우리 속에 이런 식의 유혹으로 조용히 한 발짝 한 발짝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기심에서 한번 시작한 담배가 골초를 만들고, 친구다라 한 잔 두 잔 마시던 술이 술고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심심풀이로 손을 댄 도막으로 재산을 탕진하기도 하고 고토을 멈추려고 시작된 마약으로 인생이 망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단 집단의 수법이 바로 그렇습니다.
정규 회원으로 등록하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 와 보리고 합니다.
믿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 들어보라는 식입니다.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친절하고 따듯하게 접근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주 소극적으로 접근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총공세를 하게 됩니다.
그 정도가 되면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불씨 하나, 한 잔과 한 모금에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4) 자주 범하게 되는 죄를 끊으십시오.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각 사람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가 무서운 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올바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끊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담배를 끊고 6개월 만에 기념으로 한 대 다시 피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해 자주 자책을 합니다.
욕하는 습관이 있거나, 심지어 남의 것을 습관적으로 훔치는 도벽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도 가끔 그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것을 끊는다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매년 새로운 결심을 하고 여러 방법을 강구해보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신앙의 성숙이 없는 것입니다.
그 죄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씨름을 해야 합니다.
야곱처럼 천사들과 씨름 중에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것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그리고 죄를 지을 만한 환경에 아예 처음부터 접근하지 마십시오.
범죄하기 좋은 상황을 만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호기심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털이 부드럽고 귀여운 곰인형을 가지고 놀며 자랍니다.
몇 년 전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곰인형을 좋아하던 두 아이가 부모를 다라서 뉴욕 브롱스(Bronx) 동물원에 갔다가 낮은 담을 넘어 북극곰 울타리에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날 두 아이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북극곰은 애완용 동물이 아닙니다.
호주에서 애완용으로 악어 알을 가져다가 키운 사람이 악어가 크게 자란 어느 날, 그 애완용 악어에게 팔이 물려 결국 그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악어를 키웠으니 안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늘 가까이서 어울려 지내던 ‘애완용’ 같은 죄를 과감하게 끊으십시오.
그것 때문에 죽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은 장거리 경주와 같습니다.
더 빨리 달리려면 거추장스런 것들을 걸치지 않아야 합니다.
운동선수들 중에 넉타이를 매고 경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멋쟁이라도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은 경기장 밖에 있는 감독밖에 없습니다.
선수들의 유니폼은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고 땀을 잘 흡수하는 천으로 만들어서 선수가 옷 입은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마라톤 선수들의 복장은 더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이라면 거추장스러운 것, 즉 많은 죄를 벗어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5)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승리자이신 예수님께 속해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는 땅바닥을 보지 않고 앞에서 손을 벌리고 있는 엄마의 눈만 바라보고 걷습니다.
푯대가 분명하면 몇 번을 넘어져도 언젠가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환경과 주변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리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높은 곳에 달린 밧줄을 타는 곡예사는 절대로 밑을 내려다보지 않고 앞만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푯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고 범죄하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19:11에서 다윗의 고백처럼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말씀을 자주 읽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에 담아두면 범죄를 막는데 큰 힘이 됩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콜라가 가득한 병을 열면 콜라가 나오고 치약을 짜면 치약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안에 그런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한이 맺히고 억울한 것이 가득한 사람은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기쁨과 흥에 겨운 사람은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입을 열 때마다 말씀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속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때 거기서 자신의 옛 사람이 죽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고 믿으십시오.
사단이 유혹하는 음성이 들리면 마음속에서 이렇게 외치십시오.
“사단아 물러가라! 내 마음 안에는 주님이 계시며 주님만이 나의 주인이시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유혹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 자신이 대답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다시 맞서시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싸우려고 덤비지 않아도 됩니다.
불완전한 우리의 삶을 스스로 주장하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일마다 때마다 주장하시도록 하십시오.
주님은 인생의 삶을 완벽하게 인도하실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과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라가 평안해지고 강건해지자 교만하게 됩니다.
그들은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나라가 풍요롭고 강성해지자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무명일 때보다 인기 있을 때가 위험합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보다 잘 될 때가 위험합니다.
모두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왕의 자리를 빼앗긴 그들의 마지막이 비참했습니다.
돈과 명예, 교만의 유혹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다윗 왕은 겸손하였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성적인 유혹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방심한 결과로 돌이킬 수 없는 간음과 살인이라는 죄를 짓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 몇 푼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는 돈의 유혹에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오는 청년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 하늘과 땅 아래 혼자뿐이었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이 되어 일하던 그에게 유혹이 다가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더 편하고 여유있는 생활을 누리게 될 지도 모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용서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집요하게 옭아매는 성적인 유혹 앞에서 이를 악물고 도망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를 다시 높은 자리로 회복시키셨습니다.
무엇을 보고 듣는가? 이 문제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정하도록 만듭니다.
눈만 뜨면 TV가 하루 종일 무엇이라고 떠들어댑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귀에서 이어폰을 빼지 않습니다. 인터넷은 어떻습니까!
보고 듣는 것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공격합니다.
쓸데없는 것들이 틈타서 스며들지 못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주님을 생가하며 시작하고 하루 종일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한다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루를 마칠 때에는 하루 동안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누구보다도 무서운 유혹을 이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은 세 가지 유혹에서 동일하게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돌이라도 떡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니라.”(신8:3)는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사단이 성전 꼭대기로 예수님을 끌고 가서 뛰어 내리라고 유혹할 때 주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 6:16)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천하 만국을 보이며 자기에게 절하라고 유혹할 때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신6:13)는 말씀을 인요하여 사단을 완전히 쫓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말씀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 성경을 읽으라고 할까요? 누구를 위해서 그렇습니까?
죄를 이기기 위함인 것입니다.
유혹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유혹에 잘 대비하고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영적인 힘을 키우십시오.
믿음이 제대로 성장하면 강해집니다. 그리고 눈빛이 밝아지고 빛이 납니다.
분별력이 생깁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