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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신자, 비둘기 신자 (창8:1-14절)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은 어떤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혼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라고 합니다. 천지 사방을 둘러보아도 이 세상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고 하는 불안감이 가장 큰 공포심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40일 동안의 집중적인 폭우와 해일, 범람의 악천후가 땅에 임하자 사방이 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주는 이미 150일 동안 물 위를 떠다녔고 물은 계속하여 불어나 모든 높은 산이 다 덮이고 온 땅에 물이 덮었습니다. 노아는 언제까지 더 떠다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라고는 온 세상에 자기 가족들 뿐입니다. 삶의 공간은 방주에 한정되었고 미래는 완전히 불투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실로 극복하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노아 역시 인간이었기 때문에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보편적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극복했습니다. 노아가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그의 최대의 무기는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였습니다. 그의 신실한 믿음에 대해 하나님도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속에 있는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시어 땅 위에 바람을 불게 하시므로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하나님이 권념하셨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것은 평소에 잊고 계시다가 갑자기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속 깊이 새기고 계신 것을 말합니다. 홍수가 계속될 때도, 온 땅이 심판의 물로 멸절되어 가고 있는 때에도 하나님은 방주 안의 생명들을 늘 잊지 않고 돌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자신을 신뢰하는 자를 기억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던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합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하나님은 믿는 자를 기억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자기 백성을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노아가 겪고 있는 내면의 인간적 갈등도 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을 감하게 하시기 위해 바람을 보내셨습니다. 날씨가 아무리 건조해도 바람이 없으면 빨래가 잘 마르지 않습니다. 바람에 의해 물이 증발하고 물이 바다로 쓸려 내려가게 하여 드디어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을 닫으시고 홍수라는 환난의 근원을 제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내리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고 약속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노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창8:3-5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일 후에 줄어들고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물이 물러갔다는 것은 “물이 본래 대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밀물 때 밀려온 물이 썰물이 되면 도로 밀려 나가듯이 물이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홍수가 시작된 지 150일 째에 최고 수위에 달했던 물이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물이 감하였고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비록 아라랏 산에 머물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하루가 다르게 물이 감소하여 홍수가 발생한 지 224일이 되던 날 즉 10월 1일에 다른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홍수 심판이 끝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수가 시작된 지 7개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로부터 사십일이 더 지나고 나서 노아는 방주의 창문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다림에 대한 놀라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노아의 기다림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침착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고 해서 그는 즉시로 창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산들이 보일 때까지 기다리고, 또 40일을 더 기다린 후에 창문을 연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심판 후에 있을 새로운 세계가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노아의 기다림은 안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땅 위에 창일했던 물이 자신의 장막을 드리우기에 적합한 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심판 후의 새로운 세계를 살아갈 노아는 이제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성도의 모형입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림의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계획하고 실행함으로 준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곧 그 일은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하여 지면에 물이 감한 정도와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세계를 살피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준비하시고 사람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실 때 사람들은 그것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 위를 떠다니던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고 하는 것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우연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장래는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아라랏 산은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 상류에 위치한 곳으로 지금의 터키 지방에 있는 높은 산입니다. 이곳은 홍수 후 노아의 후손들이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육지의 물이 어느 정도 줄었는지의 여부를 알고자 하여 노아는 창문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는 책임을 진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미리 파견한 것과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하여 두 정탐꾼을 보낸 것과 같습니다. 방주 속에 있는 생명들을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한 새 땅으로 이끌기 위한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어 신중하게 사정을 파악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이제 심판의 때는 지나고 회복의 때가 도래하여 방주 속의 생명들에게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외부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두 메신저(Messengers)를 방주 밖으로 보내는데 이 메신저에 대해 은혜를 받겠습니다. 여기 메신저로 선택된 까마귀와 비둘기는 오늘날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1. 까마귀 같은 신자.
*창8:6-7 사십 일이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물이 땅에서 감한 사실을 알고도 노아는 사십일을 더 지체하였습니다. 이것은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신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땅이 회복되는 시간도 충분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땅은 건조해지기 시작되었으므로 그 상항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까마귀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냅니다. 노아가 까마귀를 선택한 것은 까마귀는 강한 체질을 가졌고 또 예언의 새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날아 왕래하였더라”--직역하면 “앞으로 나아갔다가 되돌아왔다” 는 뜻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으로 되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 방주 주변을 배회하면서 앉을 곳을 찾아 날아다녔다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썩은 음식물을 먹는 새입니다. 또 성경에는 부정한 새로 취급되었습니다. (레11:13-19, 신14:12-이하)
*잠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그동안 방주 안에서 배불리 먹지 못했던 까마귀는 밖으로 날아 나오자 동물의 썩은 시체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땅에 물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자신의 굶주린 배를 채우기에 몹시 바빴습니다. 그는 땅의 건조한 상태를 알아보고 돌아오라는 주인의 사명은 아예 망각한 채 자기를 위하여 양식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실컷 배불리 먹고 난 후에 까마귀는 다시 방주 쪽으로 날아왔으나 굳이 방주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주 바깥에, 지붕 위에, 난간에 앉아 쉬다가 배가 고프면 또 날아가 실컷 먹고 잠잘 때는 방주로 돌아와 지붕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번 반복하면서 땅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이 모두 홍수로 심판을 받을 때 이 까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심판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을 맞아 제일 먼저 바깥으로 내어 보냄을 받았을 때 까마귀의 선택은 구원받은 생명체로서의 삶이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한 옛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저 자신의 배를 위하여 구원과 방주를 헌신짝 버리듯 한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노아는 바깥세상의 상태를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지상 교회인 생명의 방주에도 이러한 까마귀 신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입고 은총의 방주 안에서 보호와 양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 나아가 자기 육신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먹고 마시며 모으고 저축하며 살다가 쉬고 싶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칠 때, 교회를 왕래하는 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육신의 유익은 있으나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도움이나 기쁨이나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이런 교인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 교회를 교양 내지 수양의 단체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좋은 말을 듣고 마음을 수양하고 교양을 쌓으려는 생각에서 교회를 다닙니다.
② 신앙생활을 종교 행위로 착각합니다. 자신들의 문제나 자녀의 문제, 사업, 건강 등의 복을 빌고 그것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교회에 출석합니다.
③ 교회를 자신의 입신, 처세, 이익 추구의 한 방편으로 착각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임으로 이것을 자원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삶에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와 세상 사이를 부지런히 왕래합니다. 구속의 은총에 감격한 예배가 목적이 아니라, 구령 선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육신을 위한 수단으로 부지런히 왕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두 번 다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구약시대의 에서처럼 망령된 행실로 육신의 삶을 살다가 멸망의 자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히6:1-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까마귀가 방주로 날아왔으나 방주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 머물다 떠나가는 것처럼 이런 신자들도 교회는 나오지마는 실상은 교회 바깥을 맴도는 까마귀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이 왔다가는 그냥 되돌아가는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2. 비둘기 같은 신자
이에 노아는 두 번째로 곡물을 먹으며 골짜기나 평야 지대에 거하고 마르고 깨끗한 땅에만 앉는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비둘기는 연약하나 귀소성이 강한 새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아름다움(아1:15), 온유함(눅3:22), 순결(마10:16), 헌신(눅2:24), 평화(마3:16)를 상징합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세 번씩 비둘기 작전을 감행합니다. 처음 비둘기를 내보냈을 때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땅에 물이 줄어들었다 할지라도 아직은 덜 마른 상태로서 진흙투성이라는 것과 골짜기와 평야 지대가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두 번째로 7일을 더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근거하여 간절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비둘기는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감람나무는 주로 저지대의 수표면에서 자랍니다. 그러므로 비둘기 입에서 감람나무 잎이 물려 있다는 것은 사실은 땅에 물이 거의 다 빠졌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홍수 심판이 다 끝난 것을 의미하는 평화의 메시지로서 곧 새 생명과, 새 시대와, 땅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로 인하여 노아는 육지에 물이 많이 감하고 벌써 새로운 잎사귀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노아는 또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았습니다. 그때 그 비둘기는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귀소 본능이 강한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비둘기가 마른 땅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정착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땅에서 물이 완전히 물러갔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비둘기 같은 신자가 있습니다. 방주 밖으로 내보내졌으나 부패하고 더럽혀진 세상에서 평안과 휴식을 얻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는 비둘기 신자가 있습니다. 처음에 비둘기가 내보냄을 받았을 때에 온 지면에 물이 있음으로 비둘기는 접촉할 곳을 찾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발바닥만이라도 착지시킬 수 있는 마땅한 휴식처를 발견하지 못했다.” 라는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우리가 발붙일 조그마한 장소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둘기가 온종일 어느 한 곳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날아다니다가 지쳐서 방주로 돌아오자 노아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였을 때 노아의 손바닥은 비둘기에게 포근한 안식처이자 기쁨의 휴식처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지친 성도들이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갈 때 저 천국에서 손을 내밀어 우리를 맞이해 주시는 주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비둘기가 내보냄을 받았을 때에 비둘기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돌아왔습니다. 새 잎사귀란 나무에서 방금 찢어낸 잎을 물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를 상징합니다.
① 구원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온 천지의 모든 생명과 생물이 홍수 심판을 받아 멸망했는데 노아와 그의 가족이 살아남았다고 하는 구원의 소식이었습니다. 감람나무 새 잎사귀는 심판이 끝난 것을 상징합니다. 홍수가 범람한 지 375일 만에 땅이 마르고 나무가 새잎을 내었다는 것은 노아의 가족은 망하지 않고 푸른 새 잎사귀처럼 살아있다고 하는 생명의 소식이었습니다. 이제 사망의 물은 물러가고 다시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고 계속되는 생존의 소식을 알려준 것입니다.
② 번영과 소망의 예조였습니다.
이제 노아의 가족은 새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노아의 가족으로부터 인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그 후손으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거룩한 이스라엘의 선민 운동과 메시야 운동의 소망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③ 감사와 찬송과 예배의 예조였습니다.
새 역사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비둘기가 내보냄을 받았을 때 비둘기가 다시는 노아에게 돌아오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비둘기는 방주에서 자신이 해야 할 임무가 끝난 것을 알고 이제는 더 이상 방주에 머무를 필요가 없으므로 자신의 새 보금자리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방주의 문이 열렸을 때 구령의 사명을 가지고 선교지로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불게 하시어 땅에 있는 물을 말리실 때에 복음을 들고 생명의 역사를 위해 떠나야 합니다. 비둘기가 깨끗한 땅을 찾아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새끼를 낳으며 키우고 양육하는 것처럼 성도 역시 새 일터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끝난 곳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의 방주 운동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을 예표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사망의 물결 속에서 교회라고 하는 방주를 통하여 복음 운동, 곧 구령 운동을 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까마귀처럼 힘도 있고 능력도 있지마는 자기만을 위하여 세상과 교회를 분주히 왕래하며 썩은 음식물을 먹고 자기의 배부름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보리떡을 먹은 백성들이 다시 주님을 찾아다녔을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요6: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약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비록 연약하지만, 비둘기처럼 감람나무 새잎을 입에 물고 방주로 되돌아오는 생산적이요 창조적인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양육 받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 세상으로 나아갈 때 세상의 물결이 가득 차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할 때에는 세상에 빠지지 말고 속히 교회로 돌아와야 합니다. 또 세상에 보냄을 받았을 때,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생겼을 때는 언제나 구령을 성취해야 합니다. 새 신자를 인도해 오고, 새 감사 조건을 가져오고, 새 기쁨의 소식, 새 소망과 구원의 소식, 새 축복의 소식을 입에 물고 주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강한 체질의 까마귀가 하지 못한 일을 연약하고 온유한 비둘기가 완수한 것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내용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와 같이 미련하고 연약한 자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고 비둘기같이 사명을 전적으로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비둘기 같은 신자의 입에는 항상 새 생명의 소식과 번영과 소망의 징조와 감사와 찬송의 예배가 있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종류의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위하여 까마귀와 비둘기는 둘 다 쓰임을 받았지마는 까마귀는 자기를 위하여 주인의 사명을 잊어버렸으나 비둘기는 주인에게 충성하여 소임을 완수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까마귀 신자가 아니라 비둘기 신자가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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