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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10명의 위인들
1.김두한 - 항일기, 대한민국의 정치인
■ 호 - 의송(義松)
■ 시대 - 항일기, 대한민국
■ 생년월일 : 1918년 서울 출생, 1972년 11월 고혈압으로 사망
■ 약력
- 광복 후 조선 건국청년회 창립위원 겸 별동대장, 반탁투쟁위원회 동원부장 겸 경비부장을 지냄
- 미군정 때 포고령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정부수립 후 석방
- 1954년 3대 민의원으로 정계 진출, 1965년 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
- 1966년 국회 오물투척 사건으로 의원직 사퇴
■ 활동분야 - 정치인
1918∼1972. 제3대 및 제6대 국회의원. 독립운동가 좌진의 아들이다. 서울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아나 다름없는 부랑아생활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의 아들임을 긍지로 삼아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도 행동하였다. 광복 이후 이승만·김구·신익희 등이 주도하는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대열의 최선봉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반공투쟁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아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었다. 사형집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대한민국정부수립을 맞아 그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노동운동을 계속하였다.
1954년 종로을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5년에도 제6대국회의원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정치사에도 행적을 남기었다.
용산구의 보궐선거로 제6대국회에 등단하자마자 한독당내란음모사건과 관련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야당은 물론 공화당까지 석방결의안에 106표의 찬성표를 던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사카린밀수사건을 논란중일 때 국무위원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의정사상 전대미문의 오점을 남기고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는 기이한 행적을 남기었다.
결국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정치생활은 막을 내렸다. 정계은퇴 후 고혈압으로 1972년 11월 죽었다. 묘지는 서울 수유리에 있다.
2.김소월-시인
출생 : 1902년 8월 6일
사망 : 1934년 12월 24일
출생지 : 평북 구성
학력 : 오산 학교 - 배제 고보 - 도쿄 상과 대학
1. 시인의 삶
시인. 본관은 공주. 본명은 정식.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성도, 어머니는 장경숙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사립인 남산학교를 거쳐 오산학교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 교장으로 서춘·이돈화· 김억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2. 작품활동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에 시 〈낭인의 봄〉, 〈야(夜)의 우적〉, 〈오과의 읍〉, 〈그리워〉, 〈춘강〉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 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제비〉, 〈강촌〉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삭주구성〉, 〈가는 길〉, 〈산 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의 〈왕십리〉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 〈꽃촉불 켜는 밤〉(1925), 〈무신〉(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 〈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에 〈물마름〉(1925)을, 《문명》에 〈지연〉(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3. 작품경향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 〈첫치마〉, 〈금잔디〉, 〈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후일〉, 〈꽃촉불 켜는 밤〉, 〈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 〈건강한 잠〉(1934), 〈상쾌
>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 〈팔벼개 노래〉(1927), 〈돈타령〉(1934), 〈삼수갑산)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3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1939), 하동호·백순재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3.안익태-한국의 작곡가·지휘자.애국가 작곡
안익태 [安益泰, 1906.12.5 ~ 1965.9.16]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평양
주요수상 : 문화포상(1957), 문화훈장 대통령장(1965)
주요작품 : 《강천성악》 《한국환상곡》 《애국선열추도곡》
안익태 경력
1937 - 애국가 작곡
1939 - 부다페스트국립음악학교서 연구. 그후 스페인국적 획득. 마드리드마욜카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57 - 귀국
1961 - 1963 국제음악제 집행. 영국로열필하모니·로마교향악단 등 2백여 교향악단을 지휘, 세계적 명성을 떨침.
1961 - 1963 국립묘지에 안장
안익태(1905년~1965년)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애국가'를 먼저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우리 겨레가 부르는 우리 나라의 노래(국가)를 그가 작곡했기 때문이다. 제7차 교육 과정에 따라 새로 사용되고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 '도덕'(3-2)의 4단원 '나라 사랑의 길'에 안익태 선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일생을 살펴본다.
안익태는 1906년 평양에서 여관 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던 그는 6 세 때 동네 예배당에서 흘러 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려 식구들 몰래 교회에 나가 노래를 따라 불렀다.
7 세 때 처음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6 개월간 연습한 후 찬송가를 연주할 수 있게 됐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예회 때마다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하며 마음껏 재능을 뽐냈다.
그 무렵, 평양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신식 학교가 많았다. 안익태가 들어간 숭실중학교도 그랬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거의 모두 선교사였다. 소년 안익태는 교장 마오리 선교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또 방학 때는 서울까지 가서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를 배웠다.
3ㆍ1 운동에도 앞장 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안익태는 마오리 교장의 도움을 받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 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고 연주 활동을 펼쳤다.
1934년에는 헝가리로 건너가 당시 이름난 작곡가였던 도야니로부터 작곡을 공부하며, 민족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았다. 또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처음 들은 것은 3ㆍ1 운동 때였다. 애국가 가사에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을 붙여 노래하는 것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감동은 뒷날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했다.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2년 미국에 있을 때 떠오른 악상을 그로부터 4 년 뒤에 완성한 것이다. 이 애국가는 안익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 안팎에서 널리 불려졌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 나라의 상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리 나라가 광복을 맞은 1945년부터 안익태는 에스파냐 국적을 얻어, 마드리드 마욜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온 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1957년 고국에 돌아와 자신이 작곡한 '한국 환상곡'ㆍ'강천성악' 등을 지휘했으며, 1961년에는 국제 음악제를 개최했다.
1965년 9월 17일 에스파냐 바로셀로나 병원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에스파냐의 마욜카에는 음악가 안익태를 길이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안익태의 거리'라는 이름을 붙인 길이 있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을 기리려는 국민들의 바람에 따라, 그의 유해는 1977년 고국으로 모셔 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안익태의 어린 시절 이야기*****
안익태가 7 세 되던 해, 큰형이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사다 줬다.
"형, 이 악기의 이름이 뭐예요?"
"바이올린이라고 하지."
큰형은 바이올린을 왼손으로 들고 왼쪽 턱 아래에 닿도록 어깨 위에 얹은 다음, 말총으로 만든 활을 오른손에 들고 네 줄을 켜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가락이 흘러 나왔다. 어린 안익태는 넋을 잃은 채 듣고 있었다.
연주를 끝낸 형은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어디 너도 한 번 켜 봐."
"정말이에요?"
안익태는 상기된 얼굴로 바이올린을 받아 들었다.
조금 전에 본 대로 큰형의 흉내를 내며 조심스레 활로 줄을 문질렀다.
소리가 나는 게 정말 신기했다. 이 때 바이올린을 만지게 된 것이 안익태의 음악가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주요 작품*****
강천성악, 작곡
애국선열추도곡, 작곡
코리아 판타지, 작곡
애! 강상의 의기논개, 작곡
논개, 첼로곡
백합화, 첼로곡
수상경력 문화훈장대통령장 추서, 문화포장
저서 나의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일어)
*****안익태의 애국가 작곡 배경*****
작사자 미상의 우리나라 국가인 애국가의 가사는 윤치호.안창호.민영환 등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 것도 공인되지 않았고, 곡은 1936년에 만들어져 1948년 8윌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가로 불리게 되었다.
정부에 의하여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되거나 채택된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작곡자가 <애국가>의 가사를 처음 접한 것은 1919년 3.1운동 때였고, 그 뒤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Auld lang syne>, 즉 <이별의 노래>의 곡조에 붙여 불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한국사람인 자기가 직접 작곡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36년에 곡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선수단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불렀는데, 우리나라의 <애국가>가 불린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다.
곡은 가장조(또는 사장조), 4분의 4박자로 되어 있으며, 속도는 느리고 장중한 분위기의 악상을 가지고 있다. 모두 16마디로 되어 있으며, 4절의 가사로 된 유절형식과 a-b-c-d의 구조로 된 가요 두도막 형식으로 되어 있다.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것이 특징인 <애국가>는 사용 용도에 따라 세가지로 구분된다. 피아노 반주로 된 것이 원곡이고, 아무런 반주 없이 부르는 것과 악기만으로 연주되는 것이 있다. 반주가 있는경우에는 4마디의 전주가 있고, 악기만으로 연주되는 경우에는 전주가 없다. 작곡자는 이 <애국가>를 주제로 하여 1936년 자신의 대표작인 교향곡 <한국환상곡>을 작곡하였다
4.오세창-한말의 서예가. 언론인ㆍ독립운동가
오세창(吳世昌ㆍ1864~1953년)
한말의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본관 : 해주
호 : 위창
본명 : 중명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주요저서 : 《근역서화징》《근역인수》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박문국 주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한성순보》 기자를 겸하다가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농상공부 참의·우정국 통신원국장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청받아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귀국 후 1902년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 그곳에서 양한묵·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오세창 선생은 3ㆍ1 운동 때 민족 대표 33 인의 한 사람이었고, 일제 시대에 새로운 예술 창작과 민족의 미술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다양하면서도 뜻 깊은 활동을 펼쳤던 그의 삶을 살펴본다.
오세창의 가문은 8대에 걸쳐 역관(통역을 맡아 보는 관리)을 낸 뛰어난 중인 집안이다. 그의 아버지 오경석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중국어 역관으로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일찍이 읽어 낸 개화 선각자이자, 금석학자(옛날의 비석이나 그릇 또는 쇠붙이 등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하는 학자)ㆍ서화가ㆍ글씨와 그림에 능한 사람)로 유명했다.
1864년 서울 이동(을지로 2가)에서 태어난 오세창은 이런 아버지의 뜻과 재능을 그대로 물러 받아, 나라를 되찾는 데 앞장 서고 한편으로 우리 고유의 미술을 지키는 남다른 일을 해 왔다.
오경석은 아들의 역과(역관을 뽑는 과거) 응시를 위해 유홍기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그는 한의학자이면서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오세창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오세창은 1879년 역과에 합격, 이듬해부터 사역원(조선 때 통역과 번역을 맡아 보던 관청)에 발령 받아 나갔다. 1886년 박문국(신문 잡지의 편찬과 인쇄를 맡은 관아)으로 옮겨 '한성주보'의 기자로 활동했다.
1897년 토쿄외국어학교 조선어과 교사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899년 귀국했다.
그 뒤 개화 운동에 앞장 섰던 오세창은 1902년 개화당 역모 사건에 휘말려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들었고, 독립운동에 새로 눈떴다.
일본에서 4 년 동안 머문 뒤 1906년 오세창은 손병희 등과 고국에 돌아왔다.그 해 손병희가 창간한 일간 신문 '만세보'의 사장이 되어, 나라 빚 갚기 운동(국채보상운동) 등을 벌였다.
또 1909년 대한협회의 신문인 '대한민보'가 창간되자, 사장에 취임하여 1910년 한일합방으로 폐간 때까지 이 신문을 통해 일제의 잘못을 꾸짖고 널리 알렸다.
1919년엔 민족 대표 33 인의 한 사람으로 3ㆍ1 운동에 앞장 섰다.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8개월 동안 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그 뒤 8ㆍ15 광복까지 오세창은 서예와 전각, 서화 연구에 몰두하며 보냈다.
그의 서화에 대한 관심은 이미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됐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부 2등(1등 없음)을 수상했다. 이에 앞서 1921년 '서화협회보'에 '서가열전'ㆍ'화가열전' 등을 연재하면서 서화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가 정리해 엮어 낸 것으로는 고려 말부터 대한제국까지 이름난 사람들의 편지 등을 모은 '근역서휘', 고려 말부터 우리 나라 옛 그림을 모은 '근연화휘', 모두 1136 명의 글씨를 모은 '근묵' , 조선 시대 명인들의 인영(찍어 놓은 도장의 흔적)을 모은 '근역인수', 우리 나라 역대 서화가에 관한 문헌 사료를 모은 '근역서화징' 등이 있다.('근역'은 '무궁화가 많은 곳'이란 뜻으로 '우리 나라'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오늘날 한국 글씨와 그림의 역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오세창은 또 10대 후반부터 전각(나무나 돌ㆍ쇠붙이ㆍ옥 따위에 글자를 새김, 또는 그 글자)을 배운 이래로 자신을 '조충(새김벌레)'이라 불렀을 정도로 전각에 몰두했다.
광복 후 오세창은 3ㆍ1 운동 민족 대표의 상징적 인물로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6ㆍ25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했고, 그 곳에 머물다가 1953년 89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우장춘-농학자,'씨 없는수박'을 재배한 분
우장춘(1898~1959, 한국)
농학자
세계에 널리 알려진 육종학자이며 , 우리 나라에게는 “씨 없는수박”을 재배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장춘은 1898년 4월 8일 일본에서 태어낫다 . 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구한말 왕실의 무관으로 개화당의 지사였다. 갑신정변에 가담 (민비파 제거에 주동) 했다가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도쿄에서 일본인 처녀와 결혼하여 장춘을 낳았다. 장춘이 4살 되던해에 민비 시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협의로 수구당이 보낸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었다. 남편을 잃은 부인 사이카는 그뒤 유복자인 홍춘을 낳았으나 생활이 점점 더 가난해져서 장춘이여섯살 때 고아원에 맡겼고, 거기서 1년 동안있었다 .
일본 토쿄의 기시보사 고아원에 다니던 우장춘은 같은 고아원생 중 힘센 소년에게 “너는 조선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지? 조선은 이제 우리 속국이 되었단 말이야. 나라도 없는 자식이 까불어?” 하며 얻어 맞았던 것이다. 이 일을 어머니가 알고는 우장춘에게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아라 저 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어 난단다. 낙심말고 저 민들레처럼 어려운 일을 이기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한다.” 고 한 어머님의 말씀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좌우명이 되었다.
이젠 고아원에서 나와 소학교에 입학하여 학교에 가는날이었다. 이 때 어머니는 “장춘아, 너는 조선의 위대한 혁명가의 아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여라. 부디 훌륭하게 자라서 아버님의 남긴 뜻을 받들어 조국 조선을 위해 큰 일을 해야한다.” 고 일러 주었다 .
그후 헤진 옷을 입고 다니는 우장춘에게 조선인의 아들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놀림을 받을 때 장춘은 더욱 분발 노력하여 6년간 줄곧 우등을 하고 전교 수석을 차지하여 일본인들의 기를 꺾어 놓았다 .
우장춘이 그 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4월 8일에는 히로시마 현립 구례중학교에 13살 나이로 들어갔다. 중학교에서도 내내 수석을 하였고, 특히 수학에서는 천재로 알려졌다 .
그런데 대학에 진학할 일이 학비 때문에 늘 걱정이었다. 마침 담임의 안내로 조선 총독부의 관비 장학금 신청을 하여 도쿄 제국대학공과에 입학 원서를 냈으나 조선인의 망명 정객의 자녀란 이유로 총독부에서는 지급이 허락났기 때문에 1916년 4월에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
그는 자취 생활을 하였고 때로는 굶기도 하면서도 대학시절 내내 수석을 지켜왔다 .
어머니는 시골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온갖 방법으로 꼭꼭 생활비를 보내주었지만 거의 모두 책을 사보는데 썼다 . 갖은 고초와 역경을 이기면서 1919년 7월 12일에 대학 4년을 마쳤다. 그해 8월에 그는 일본 농림성의 농사 시험장의 한 직원으로 들어갔다 .
나팔꽃의 유전 연구에 그의 노력과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아 당시 테라오박사는 소장으로서 장춘을 기사로 승진시켰다 . 그 무렵 초등학교 교사인 스나가고하루라는 일본인 처녀와 1921년, 그의 나이만 23살에 결혼식을 갖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6.윤석중-아동 문학가,어린이날 노래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석중 선생은 1924년 잡지 ‘신소년’에 동요 ‘봄’으로 등단, 1933년에는 국내 첫 동시집인 ‘잃어버린 댕기’를 펴냈다. 선생은 소파 방정환의 뒤를 이어 잡지 ‘어린이’를 이끌었으며 소파상·장한어머니상·새싹문학상 등을 제정했다.
그는 평생을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에 바쳐 ‘어린이날 노래’ ‘졸업식 노래’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기찻길 옆 오막살이’ ‘새나라의 어린이’ 등 널리 사랑받는 동요를 남겼다. 지은 책으로는 ‘윤석중 동요집’, 동화집 ‘열 손가락 이야기’ ‘멍청이 명철이’ ‘열두 대문’과 전집 ‘새싹의 벗 윤석중 전집’(30권) 등이 있다.
윤 선생은 1937년 소년조선일보의 창간을 맡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1959∼1969년 소년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일하는 등 소년조선일보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막사이사이상(1978년), 대한민국문학상(1982년), 대한민국예술원상(1989년), 인촌상(1992년) 등을 수상했다. 한국 동시 문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주요 연보
1911 5월 25일 서울 출생
1924 동요 <봄>이 <신소년>에, 동요<오뚜기>가 <어린이>지에 입선되어 문단에 데뷔
1930 양정고보 졸업
1944 일본 죠오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 졸업
1945 조선일보 편집고문겸 소년 조선일보 고문 새싹회 회장, 한국문임협회 아동 분과 위원장 역임
1960 3·1문화상 에술부문 본상과 문화훈장 포상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저서명 부서명 총서명 출판사 출판년
시집 <윤석중 동요집> 신구서림 1932
시집 <잃어버린 댕기> 계수나무회 1933
시집 <윤석중 동요선> 박문서관 1939
시집 <어깨동무> 1940
시집 <초생달> 박문출판사 1946
시집 <굴렁쇠> 수선사 1950
시집 <아침까치> 산아방 1956
시집 <노래동산> 학문사 1956
시집 <엄마손> 학급문고간행회 1960
시집 <윤석중 시집> 학급문고 간행회 1960
시집 <사자와 쥐> 학급문고 간행회 1965
동화집 <바람과 연> 배영사 1966
동화집 <작은 일군> 교학사 1967
동화집 <열 손가락 이야기> 새싹회출판부 1977
시집 <날아라 새들아> 창작과비평사 1983
7.강소천-한국의 아동문학가
강소천(姜小泉)(1915~1963)
본명 : 용률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함남 고원
주요저서 : 《부친과의 대화》(1958), 《높은 별》(1962) 등
강소천 연보
1915년 9월 16일 함남 고원군 수동면 미둔리에서 강석우씨와 허석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아동명 : 강용률(姜龍律)
1930년 고원 공립 보통 학교 졸업
아동잡지 아동 생활에 '버드나무 열매'를 발표, 문단에 등장
1936년 아동잡지 소년 창간호에 '닭' 발표
1937년 함흥 영생 고등 보통 학교 졸업
1939년 동아일보에 '돌멩이', '토끼 삼형제' 발표
매일 신문에 '마늘 먹기' 발표
1940년 아이 생활에 장편 동화 '희성이와 두 아들' 발표
1941년 첫 동요 시집 '호박꽃 초롱'을 출판
1945년 고원 중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1년간)
1946년 청진 여자 중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2년간)
1948년 청진 제일 고급 중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1년간)
1951년 흥남에서 남하, 거제도에 도착, 대전을 거쳐 부산에 내려가
문교부(현재의 교육부)편수국에서 교과서 만드는 일을 도움
1952년 월간 잡지 '어린이 다이제스트' 주간으로 근무(1년간)
첫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 출판
1953년 동화집 '꽃신'과 '진달래와 철쭉'을 출판. 한국 아동문학가협회 아동문학 분과위원장이 됨
1955년 한국아동문학연구회 창립. 동화집 '꿈을 찍는 사진관' 출판
월간 잡지 '새 벗'의 주간으로 근무(5년간)
1956년 새 벗에 소설 '해바라기 피는 마을' 발표. 동화집 '종 소리' 출판
1957년 대한민국「어린이헌장」기초하여 5월5일 제정/공포, 동화집 '무지개' 출판
1958년 동화집 '인형의 꿈' 출판
1959년 이화여대 및 연세대학 강사
국정교과서 국어과 심위 위원이 됨
1960년 동화집 '대답없는 메아리' 출판. 12월부터 서울일일신문에 소설 '봄이 너를 부른다' 연재
아동문학연구회 회장으로 선출됨
1961년 문교부 우량아동도서 선정위원이 됨
'어린이 세계 문학 독본' 여섯권을 엮어냄
1962년 한국문학가협회 이사가 됨
'한국아동문학전집 / 강소천편'을펴냄
1963년 동화집 '어머니의 초상화', '그리운 메아리' 출판
5월 6일 서울대부속병원에서 작고(5월 10일 경기도 양주군 교문리 묘지에 안장됨)
5월 20일 '5월 문예상'을 부인이 대신 받음
1964년 비석이 세워짐.
1965년 소천 아동 문학상 제정
1981년 '강소천 문학 전집' 15권 출판됨
1985년 국민훈장 대통령 금관 문화 훈장을 부인 최수정 여사가 대신 받음
1987년 10월 17일 강소천 문학비 제막(서울 어린이대공원 정문쪽)
강소천은 1915년 9월 16일(양력)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면 미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석우, 어머니는 허석운이었으며 소천은 이들의 둘째아들이었다.
소천이 태어난 미둔리는 대대로 강씨들만 모여 사는 두메 산골로 일명 뫼뚜니라고 불렀다. 뫼뚜니는 눈이 많고 바람 소리가 높은 곳으로 봄이 더디게 찾아오는 고장이었다. 소천은 뫼뚜니에서 30대까지 시를 쓰며 살았다.
소천의 어릴 때 이름은 용률이었다. 동시를 쓰면서 소천은 작은 샘이란 뜻으로 소천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소천의 할아버지인 강봉규는 관북의 성웅이라고 불리던 전계은 목사의 전도로 일찍부터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앙이 독실했던 강봉규는 친구와 함께 고향인 미둔리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므로 소천은 모태신앙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라났다. 소천은 어릴 때 부터 말썽꾸러기였다. 불장난을 하다 집을 태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또한 책을 좋아하여 별명이 책벌레이기도 했다. 소천의 어머니는 소천이 너무 책을 읽어 건강을 해칠까봐 책을 보지 말라며 매를 들기도 했다. 물론 소천이 매에 굴복했을 리 없다.
소천의 할아버지는 소천이 11세에 되던 해에 미둔리에서 고원읍으로 이사를 했다. 미둔리에는 학교가 없었으므로 손자들을 교육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천은 초등학교 3학년인 13살 때 평생 친구였던 전택부를 만나게 된다. 전택부는 소천의 첫 인상을 이렇게 쓰고 있다. 첫인상은 무엇인가에 쫓기는 아이처럼 불안해 하고, 주제가 몹시 째째하고 초라해 보였다. 새까만 얼굴에 눈은 더 까매서 나들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골뜨기 티를 벗지 못 했다.
소천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 들어 가면서부터 의젓한 아동문학가로 변신한다. 고보 1학년이 던 16세에 아동잡지인 아동생활에 버드나무 열매라는 동시 를 발표하고 문단에 얼굴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고원읍에 서 잠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전택부를 다시 만난다. 이때 전택부는 고보 2학년이었다.
소천은 상급생인 전택부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전택부 때문에 일제에 대한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된다. 전택부가 일본인 교사의 조선 학생 차별 대우에 항의, 동맹휴학을 결의했는데 곧 주모자로 색출당하여 퇴학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소천은 동시와 동요만을 써 왔었으나 이때 동화도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막연한 생각은 나중에 구체적인 동화가 되어 나타난다. 그는 첫화 돌멩이의 후일담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오랫동안 동요와 동시를 써 왔었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화에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빼앗은 이야기며 그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이렇게 소천의 가슴을 분노에 떨게 했던 전택부 퇴학 사건은 그러나 2년 뒤 전택부가 학교에 다시 복교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소천은 4학년 동급생으로서 전택부를 다시 만났다. 전택부 퇴학 사건은 복교로 마무리되었으나 일제에 대한 소천의 분노는 더욱더 깊어만 갔다. 일제는 무자비한 한글 탄압을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쓰는 소천에게 한글 탄압이란 그야말로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학과 시간에 조선어 독본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기는 했다. 그러나 그 독본은 조선 사람으로서의 얼을 심고 가꾸기 위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식민지 교육을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 속에 담긴 문장이 오죽했겠는가? 당연히 소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일제는 그나마 조선어 독본 시간마저도 없애버렸다. 소천의 실망과 울분, 좌절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소천은 꿈과 교육은 동화에서 그 비중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때 이 땅의 어린이들은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의 땅에 살고 있었다. 어린이들에게 더 급한 것은 독서가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린이들의 심성도 날로 황폐하여져 갔다. 소천은 동료들에게 이럴 때일수록 아름다움을 안겨 주는 동화가 필요하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 주어야 한다. 하고 강조했다. 어린이 사랑은 소천이 동화를 쓰는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소천은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어린이 헌장을 만들게 된다. 1957년, 사람들이 전부 폐허를 복구하며 먹고 사는데 급급하여 어린이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였다. 어린이 헌장은 강소천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이고 다듬어 만들었으나 당시 아동문학가협회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어린이 헌장은 다음과 같다.
1. 어린이는 인간으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져야 한다.
2. 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3.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4.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의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5. 어린이는 위험한 때에 맨 먼저 구출해야 한다.
6.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7.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 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 주어야 한다. 불량아는 교화하여야 하고 고아와 부랑아는 구호하여야 한다.
8.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여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9. 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문화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위의 어린이 헌장은 1957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발표되었다. 방정환이 어린이 사랑 운동을 맨 처음 시작하였다면 소천의 어린이 헌장 발표는 어린이 사랑 운동의 결실이었다. 그때까지 어린이를 사랑하자. 어린이를 위하자라고 여러 사람들이 외치고 있기는 했으나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린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어린이 헌장은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린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인가? 그 방법을 제시하였다고 하겠다. 어린이 헌장 발표 한 해 전인 1956년에 소천은 다섯번째 동화집 종소리를 출판했다. 1957년에는 여섯번째 동화집 무지개를, 1958년에는 일곱번째 동화집 인형의 꿈을 각각 출판했다. 소천은 매우 열심히 글을 썼다. 그리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글을 썼다. 어쩌면 소천은 자신의 생명이 짧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1959년에 소천은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기독교학과와 국문학과, 그리고 대학원의 도서관학과의 강의를 맡았다. 그 뒤 연세 대학교에서도 기독교학과와 국문학과 강의를 맡았다. 이때 아동문학 강좌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의 강의 과목에 넣게 했다. 영생고보 때부터의 친구이며 대학교수이였던 박창해는 이때 소천에게 교수가 될 것을 권해 보았다. 그러나 소천은 거절했다. 내가 할 일은 대학생을 가르치는 일보다 어린이에게 끊임없이 좋은 동화와 동시를 주는 일이다. 이것이 그의 거절 이유였다.
1959년 10월 소천은 문교부 교수요목제정 심의위원이 되고 국정교과서 편찬위원이 되어 교과서 만드는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1960년에 소천은 여덟번째 동화집 대답없는 메아리를 출판하였다. 같은 해에 소천은 아동문학연구회의 회장이 되었다. 이때 소천은 아동문학가들은 어린이 교육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천은 또한 아동문학독본을 출판하였는데 이렇게 문학독본을 만든 것은 어린이들에게 맞는 문장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1961년 소천은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수술 경과가 좋아 건강한 몸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이때 의사는 너무 무리하게 일을 하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소천은 동화를 쓰는 일과 아동문학을 연구하는 일로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학교도서관을 설립토록 권유하고 학교에서 어린이 신문이 발간될 수 있도록 항상 이야기하였다. 1963년에는 아홉번째 동화집 어머니의 초상화를 냈고 같은 해 그리운 메아리도 출판했다. 이와 같은 무리한 활동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이번에는 간암이었다. 이때 소천의 나이는 48세였다. 소천은 끝내 간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교문리에 안장되었다. 그가 떠난지 약 보름 뒤인 5월 20일에 그에게 문예상 본상이 수여되었다.
1965년부터 김동리, 박목월, 윤석중, 조석기, 조연현, 전택부, 최태호 등의 문학가들이 그의 부인 최수정과 함께 소천 아동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이 상은 후배 아동문학가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1985년 10월 19일 문화의 날에 국민훈장 대통령 금관 문화훈장이 소천에게 수여되었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 같이
너도 나도 씩씩하게 어서 자라서
새 나라의 기둥되자. 우리 어린이
해님 보고 방긋 웃는 꽃송이같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송이같이
너도 나도 곱게곱게 어서 피어서
새 나라의 꽃이 되자. 우리 어린이
바다 찾아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조잘조잘 노래하는 시냇물처럼
너도 나도 서로서로 힘을 모아서
새 나라의 힘이 되자. 우리 어린이
위의 어린이의 노래는 그야말로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강소천의 시에 나운영이 곡을 붙인 것이다. 강소천은 흔히 아동문학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아동문학계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는 평생 동시와 동요, 동화를 쓰면서 살았다.
외길 인생이었다.그만큼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위의 어린이 노래 외에 강소천은 많은 동시와 동요, 동화 작품을 남겼다.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수많은 노래 중 곱고 아름다운 가사가 붙은 노래라면 거의 강소천의 동요나 동시가 가사로 되어 있다. 우리의 어린이들은 강소천이 어린이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쓴 동시들을 노래하며 꿈과 희망과 사랑을 키워온 것이다.
강소천은 또한 많은 동화를 남겼다.
소천은 자신의 동화를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고 하였다. 또한 어린이들을 바르게 키우려고 하였다. 소천은 아동문학을 하려는 '이들에게 동시란 무엇인가?' '동화란 무엇인가?' 를 가르쳐 주고 있다.
아울러 왜 아동문학을 해야 하며, 아동문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강소천. 그의 삶 자체는 아동문학 그 자체였다.
그는 이땅에 아동문학이 굳건히 자리잡게 한 위대한 아동문학가였다.
8.강재구-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 부하 대원들을 살리고...
강재구(姜在求)(1937~1965)
군인.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60년에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된 뒤 대위까지 진급하였다. 1965년에 한국군 1개 사단의 월남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 부대 제1연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월남으로 떠나기 전, 홍천 부근에서 수류탄 던지기 훈련을 하던 부하 사병 한 명이 수류탄을 잘못 던져 참관하고 있던 중대원들 앞에 떨어지자, 자기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수많은 중대원의 목숨을 구하였다. 그의 숭고한 군인 정신을 기려 육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 강재구공원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2리에 있는 공원.
1965년 10월 4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훈련을 하던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 부하 대원들을 살리고 죽은 강재구 소령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대경목재 김경황 씨가 3만 3057㎡여의 땅을 제공하여 1973년 기념비를 세우고 공원으로 만들었으며 1987년 기념비 옆에 기념관을 세우고 125점의 유품을 전시하였다.
입장료는 없고 연중무휴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매년 10월 4일이면 유족과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이 찾아와 추모제를 지낸다.
주변에 소매곡 강변유원지, 홍천온천, 굴지리 강변유원지, 성동저수지 등이 있다. 찾아가려면 홍천읍에서 성동행 시내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를 타고 홍천읍을 지나 홍천 시외버스터미널 사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하이트맥주 홍천공장 진입로를 지나쳐 북방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재구대대를 지나면 공원 주차장이 나온다.
고상돈-산악인,세계에서는 8번째로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고상돈(高相敦)(1948~1979)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며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청주에 있는 전매청 연초제조창에 근무하면서 청주대학교 경영학과 2년을 수료하였다. 1970년 3월 대학산악연맹 회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한국일보사와 대한산악연맹이 공동으로 후원한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 대원 19명)의 제주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77년 9월 15일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하였다.
1977년 구성된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2차 공격조로서 셰르파(Sherpa) 펨바 노르부와 함께 9월 15일 낮 12시 50분(한국시간 오후 4시 30분)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정상을 출발한 지 7시간 20분간의 사투 끝에 정복하였다. 등정을 마치고 무전을 통해 "여기는 정상, 더이상 오를 데가 없다"고 했던 당시의 말이 유명하다.
당시에는 원정대의 장비상황이 열악하여 1차 공격조이던 박상렬 부대장이 28개의 산소통을 다 쓰면서도 정상 앞 100m 지점에서 실패하여 그의 등정이 힘든 상황이었으나 에베레스트산 기슭에서 프랑스 원정대가 버리고 간 신품 산소통 12개를 그가 주운 것이 정상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행운이었다. 그는 정상에 1시간 가량 머물면서 1976년 설악산 동계훈련을 받다가 눈사태를 만나 숨진 최수남·송준송·전재운의 사진을 만년설에 묻었다.
1971년 네팔정부에 에베레스트 입산 허가신청을 내면서 시작된 에베레스트 원정은 무려 6년에 걸쳐 도전한 끝에 그에 의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한국은 국가별로는 세계에서 8번째, 등반팀으로는 14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국가가 되었다. 또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몬순(계절풍) 기간인 9월중 등반과 21일간의 고속 캐러밴 등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대한산악연맹 충청북도지부 이사로 있으면서 1979년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알래스카산맥의 매킨리산(McKinley;해발 6,194m) 원정대에 참가하여 1979년 5월 29일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이일교와 함께 5월 29일 하산하다가 자일 사고로 추락하여 사망하였고, 이때 박훈규는 중상을 입었다. 이로써 그는 영원한 산사나이로 한국 산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1977년에 청년대상, 체육훈장 청룡상을 받았다. 제주도의 한라산 해발 1,100m 고지에 묘소가 있으며 고(故) 고상돈대원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해마다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2002년 6월 에베레스산에서 청소활동을 벌이던 단체에 의해 고상돈 원정대의 깃발이 발견되었는데, 깃발에는 '77 K.E.E(77: 등반연도, K.E.E: Korea Everest Expedition)'라고 씌어 있었다.
신문기사내용
[20세기 금주의 소사] 고상돈 에베레스트 정복
1977년 9월15일 낮 12시50분. 29세이던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고상돈 대원은 히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해발 8848m)에서 무전을 쳤다. "여기는 정상, 더 오를 데가 없다. 본부 나오시오." 오전 5시30분 제5 캠프를 출발한 지 7시간20분 만의 일이었다.
고 대원의 정상정복은 1차 공격조였던 박상렬 대원이 악천후와 산소 부족으로 정상 앞 100m 지점에서 실패한 후라 등반대의 감격은 더욱 컸다. 눈사태의 위기를 수차례 넘기고, 빙판 위에서 무아지경으로 앞만 보고 나아가던 고 대원은, 뒤따르던 셰르퍼 펨바 노르부가 "거기가 정상이다"고 소리치자 그제서야 발길을 멈추고 정상을 확인했다.
고 대원의 에베레스트 정복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국가별로는 세계에서 8번째였고 등반 팀으론 14번째였다. 고상돈씨는 79년 6월, 알래스카의 매킨리봉을 등정하고 하산하는 길에 빙벽에서 추락해 사망, '영원한 산 사나이'로 남았다.
(김왕근기자 : wkkim@chosun.com )
1953년 힐라리 첫 등정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의 네팔말은 「사가르마타」이다.네팔에 가면 에베레스트란 지명보다 사가라마타란 지명이 현지인들에게 더 친숙하다. 에베레스트란 이름이 붙게 된 데는 인도의 슬픈 식민 역사가 있다. 영국이 인도에서 식민정책을 펴나가던 1892년 육군 측지부대가 지도를 만드느라 멀리 떨어진 변경 하늘높이 솟은 히말라야 봉우리에 차례로 부호를 붙여놓고 삼각측량을 해나 갔다. 마침내 가장 높은 봉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영국은 그 최고봉에 「사가르마타」 혹은 「초모랑마」라는 네팔이나 티베트의 현지 이름을 무시하고 인도 측량국 초대장관을 지낸 육군대령 조지 에베레스트 이름을 따 「마운트 에베레스트」라고 붙였다.최고봉이 알려지자 전인미답의 히말라야에는 탐험의 물결이 밀려와 1920년대 들어서면서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의 원정이 시작됐다.드디어 1953년 5월29일 오전 11시반. 영국 등반대 에드먼드 힐라리와 셰르파(Sherpa) 히말라야 산맥에서 사는 티베트족계의 고산족. 등산에 숙달되어 있어 등산의 안내인 인부로 일하고 있다.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예컨대 설붕이 일어날 듯한 장소 시간을 직감적으로 알 정도다.)
텐진 노르게이가 세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그리고 24년 뒤 1977년9월15일 낮 12시50분.『더 이상 오를 곳이 없습니다』고상돈씨와 셰르파 팸바노르부는 마지막 캠프를 떠난 지 7시간 20분 동안의 사투끝에 에베레스트봉에 올라 이렇게 소리쳤다.공포와 신비의 에베레스트가 한국인의 품에 안긴 순간이었다.
9.노천명- 여류 시인,‘사슴의 시인’으로 애칭되는 시인
노천명(盧天命)(1913~1957)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황해도 장연
주요저서 : 《산호림》(1938) 《별을 쳐다보며》(1953) 《창변》등
여류 시인.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이화 여자 전문 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생 시절부터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에 <시원>이란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여성적인 예리한 감각과 애틋한 정서가 넘치는 시를 썼는데, 1938년에 펴낸 첫 시집 <산호림>에는 <사슴>, <자화상>등 49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극예술 연구회의 신극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시작에 힘써 시집 <창변>, <별을 쳐다보며>를 펴내었다. <산딸기>, <나의 생활 백서> 등의 수필집도 있다.
☞ 노천명 시인 연보
1912년 9월 2일, 황해도 장연군 박택면 비석리의 소지주 이며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노계일과 어머니 김홍기사이에서 차녀로 출생.
1917년, 본명이 노기선이었으나 6세에 홍역을 앓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자
하늘이 주신 천명이라 하여 이름을 天命으로 개명함.
1918년, 아버지 노계일 별세.
1919년, 서울 체부동 이모집에 머물며 진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
1923년, 진명보통학교 때 언니가 변호사 최두환과 결혼하며 학자금과 생계비를 부담함.
1926년 4월, 진명보통학교 졸업 전 5학년 때 검정시험에 합격,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우수한 성적으로
"국어사전"이란 별명이 붙었고, 이때에 엘리트의식이 싹튼 것으로 봄.
1927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생 신분으로 [동광]誌 입선.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어머니 김홍기 여사 57세로 별세,
시집 [창변]에 실린 <작별>은 어머니를 추모한 시로 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며
변영로, 김상용, 정지용으로부터 가르침을받음.
1931년, 수필<3·5의 달 아래서>, 시<고성허서>, 단편소설<일편단심>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지 [이화(1928년창간)]3호에 발표.
1932년, 이화여전학생으로 교지[이화]와 [신동아]誌에 <밤의찬미(신동아1932.6>>,
<단상(신동아1932.7)>, <포구의 밤(신동아1932.10)> 등을 발표.
이화여전시절의 대표작<옥수수>가 있음.
1934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 8회 졸업.
# 졸업즉시 [조선중앙일보]기자로 입사 4년간 근무.
1935년, [詩苑]동인으로 [詩苑]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 기성문단에 진출.
# [詩文學]에도 관여하며 이화여전 동창 박봉자 살고 있는
오빠 시인 박용철(1904-1938)집에 드나들어 많은 문인들과 교류함.
1937년, [조선중앙일보]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이두구, 연길 등지를 주유함.
# [중외일보]여성지 기자.
1938 [조선일보]출판부 [여성]誌 편집위원.
1938년 1월 1일, 49편을 수록한 첫 시집 [산호림]을 자비로 출판.
#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운동에 참여
안톤 체홉의 <앵화원>연극에서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딸 아냐로 분장 열연함.
1941년, [조선일보]출판부 [여성]지 편집위원직을 사직함.
1942년,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
# [조선문인협회]를 [조선문인보국회]로 강화하는데 적극 나섬으로서 친일행위를 하게되는오점을 남기게 됨.
1943년, [매일신보]문화부에 입사 조경희와 더불어 "가정란" 담당기자로 2년간 근무.
[서울신문]편집국 문화부 기자.
1945년 2월 25일, 29편을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을
[매일신보]출판부에서 간행. 초판본인 이 시집에는
친일적인 시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이 실려있음.
# 해방 후 [서울신문]편집국 문화부 기자로 근무.
1946년∼1947년, [부녀신문사]편집국 차장.
# [부녀신문]편집국 차장 근무를 마지막으로 기자생활에 종지부를 찍음.
# 일본으로 유학을 목적으로 밀항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1년 후 귀국.
1949년 3월 10일, [동지사]에서 [현대시인전집]을 발행한 가운데
제2권이 [노천명집]으로 간행됨.
# 안국동에서 누하동 225-1호로 이사하고 양녀 인자를 입양함.
1950년, 6.25 전쟁 중 피난을 못한 채 [문학가동맹]에 가담케 되어
9.28 수복 후 부역죄로 20년 실형언도를 받고,
1950년 10월-1951년 4월까지 6개월간의 옥중 생활을 함.
# 노천명은 1.4후퇴 후 대통령 비서실의 김광섭에게 삼일절에 출소토록 하여 달라는 편지를 냄. 김광섭은 이건혁, 이헌구와 협의한 후 3인 명의의 진정서를 써서 당시 삼군총참모장에게 노천명의 편지와 함께 동봉해 제출함으로 출감케 됨.
1951년 4월 24일, 부산형무소에서 출감.
# 부산 중앙성당에서 "베로니카"(예수가 악당에게 맞아 쓸어져 흘리는 피를 닦아준 성녀의 이름)라는 영세명을 받음.
# 부산의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국원 촉탁 발령을 받고 합숙소에서 기식.
# 친구의 도움으로 판자집을 짓고 살면서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도피적인 생활에 젖음.
1953년 3월 30일, 61편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희망출판사에서 간행됨.
1954년 7월 7일,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 백서>가 대조사에서 간행됨.
1955년, 서라벌대학 등에 강사로 나가는 한편 이화여대출판부 일도 함.
1956년 5월 30일, [이화70년사]를 집필 출간.
# [이화70년사] 집필로 인한 과로에 의해 지병인 재생불능성뇌빈혈증세가 극도로 악화됨.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길거리에 쓰러져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 가료 약간 호전됨.
6월 16일, 새벽 1시 30분 46세의 일기로 누하동 자택에서 별세.
6월 18일, 문인장으로 서울 중곡동 카톨릭 묘지에 안장.
1958년 6월 15일, 유고들을 뫃아 42편을 수록한 네 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를 한림사에서 간행.
1960년 10월 3일, 3주기를 기념하여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이 발행인으로 하여 노천명의 全 詩篇을 등재한 <노천명전집>을 천명사에서 간행.
● 묘 소 : 1970년 서울 중곡동 카톨릭 묘지에서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1리 소재
카톨릭 묘역으로 이장, 입구에서 3Km 이상을 들어간 산 끝자락 중턱에 위치하며 흰 화강암 석재로 다듬어 놓았고 묘지 앞 중앙에 시비가 세워 짐, (노천명의 묘와 나란히 한 오른 쪽은 언니 노기용의 묘임).
● 詩 碑 :
* 1957. 8. 20. "고 시인 노천명 문인장위원회"가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1리 카톨릭 묘역에 <고별>8, 9연을 서예인 김충현의 글씨로 높이 60cm, 넓이 98cm의 화강석에 새겨 묘비를 겸하여 세움.
* 부산 어린이대공원(일명 "성지곡수원지")내의 10리 거리에 떨어져 있는 "시가 있는 숲" 삼림욕장 입구 왼편의 "체력단련의 숲"에 위치한곳에 <사슴>을 새긴 시비가 있음.
● 저 서
시집 :
<珊瑚林>, 1938년.
<窓邊>, 1945년.
<별을 쳐다보며>, 1953년.
<사슴의 노래(유시집)>, 1958. 6. 한림사.
<노천명전집>, 1960. 천명사.
<노천명시집>, 1972. 서문당.
<노천명전집·1 (사슴)>, 1997. 7. 31. 솔출판사.
수필집 :
<산딸기>, 1948. 10.
<나의 生活白書>, 1954. 7.
<사슴과의 고독의 대화>, 1973. 4. 서문당.
<노천명전집·2 (나비)>, 1997. 7. 31. 솔출판사.
기타 :
<여성서간문독본>, 1955. 12. 박문출판사.
<이화70년사>, 1956. 5. 이화여대출판부.
10.현제명(玄濟明)(1902~1960)
음악가. 호는 현석이며, 대구에서 태어났다. 숭실 전문 학교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며 합창단에서 테너로 활약하였다. 졸업 후 시카고 음악 학교에 유학했다가 귀국한 뒤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54년에 고려 교향악단을 창설하여 예술원 종신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유네스코 한국 대표로도 활약하였다. 그 밖에 서울 대학교 음악 대학 초대 학장, 한국 음악가 협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작품으로 오페라 <왕자 호동>, 가곡으로 <고향 생각>, <그 집 앞>, <희망의 나라> 등의 곡이 있다.
이범석-일제강점기 떄 활동한 독립운동가·정치가
이범석(李範奭)(1900~1972)
활동분야 :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 서울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9)
주요저서 : 《우등불》
독립 운동가, 정치가. 호는 철기이며, 서울 태생이다. 중학교 때인 1915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에 윈난 육군 강무 학교 기병과를 졸업했다. 그 해 만주로 가서 김좌진 장군이 총지휘하는 북로 군정서의 독립군에 가담하였으며, 이듬해 청산리 싸움에서는 2,0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일본군 2개 사단의 5만 병력과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1933년에 중국 뤄양 군관 학교 한인 장교 대장, 1941년에는 한국 광복군 참모장 등을 지내면서 조국 독립에 힘쓰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46년에 '조선 민족 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고,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국무 총리,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 (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저서에 <우둥불>이 있다.
기전사가(祈戰死歌) / 철기 이 범 석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민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외적 놈들을
삼천리 강산에서 열혈히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백두산 찬 바람은 불어 거칠고
압록강 얼음 위에 은월이 밝아
고국에서 전해 오는 피비린 냄새
분하고 원통하다 우리 동족들
물어 보자 동포들아 내 죄뿐이냐
네 죄도 있으려니 같이 나가자
정의의 손과 칼을 손에다 들고
동족을 구하려면 목숨 바쳐라
겁 많고 창자 썩은 어리석은 놈
자유를 찾겠다는 표적만으로
죽기는 싫어 해도 행복만 위해
우리가 죽거든 뒤나 이어라
한배님 저희들은 이후에라도
천만대 자손들의 행복을 위해
맹세코 이 한목숨 바치겠으니
성결한 전사를 하게 하소서
(1920년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세상에 받겠다는 기도는 많아도 주겠다는 기도는 드물다. 더욱이 주겠다는 기도도 개인적 반대급부를 마음에 둔 소원이 대부분이다. 하물며 대의명분을 위해 기꺼이 죽게 해 달라는 기도가 범인들에게서 쉽게 우러나올 수 있을까. 세상사(世上事) 모든 것이 살자고 하는 짓으로 이해한다면 `싸우다 죽게 해 달라는 기도의 노래 [기전사가]'는 정녕 두렵고 무서운 염이다.
이 노래는 일제에 대한 분노와 독립군의 분기로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의 사슬 속에서 피어린 삶을 사는 동포들의 속박을 원통해 하고 있다. 또한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공감대를 통해 맺어진 투철한 동지의식의 고무가 피를 끓게 한다. 특히 4연의, 조국이라는 대아적 가치를 외면하고 소아적(小我的) 가치 속에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타협주의자·기회주의자·이기주의자들, 즉 매국노적 삶을 사는 무리들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 매섭다. 그리고 한배님께 죽음을 소망한다.
후손들의 아름다운 행복 외엔 죽음의 조건이 없다. 비장미를 넘어서 성스럽고 순결하기까지 하다. 마치 홍암대종사의 순명삼조의 한 구절을 보는 듯하다.
한편 우리는 이 노래가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지은 노래란 점에서 낭만을 넘어 숙연함이 앞선다. 더욱이 이 노래를 읊은 철기 이범석 장군이, 청산리전투 당시, 스물 한 살이라는 나이로 북로군정서의 연성대장(학생교도대장)이 되어 직접 사선을 넘었던 장본인이요 대종교의 원로라는 점에서도 한 인간의 종교적 유언장을 보는 듯한 결연함을 엿볼 수 있다.
청산리전투는 우리 민족으로 보면 독립운동사의 찬연한 금자탑이다. 반면에 일제로 본다면 일본역사에 있어 기억하기 싫은 굴욕적인 패배로 기록된다. 천 여명의 비정규 한국독립군이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일본 정규군을 박살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전투에서 많게는 2,300여명에서 적게는 900여명의 일본군 사상자가 나왔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이범석 장군이 결연한 의지로 기도하는 대상이 우리 민족 성정에 녹아 흐르는 삼신일체 하느님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먼저 그가 속해 있던 북로군정서를 보더라도, 1911년 만주에서 최초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의 후신이라는 점이다. 대종교 중광의 뜻을 계승하여 출발한 중광단은 대종교인들로 조직된 까닭에 신앙심(信仰心)과 애국심이 일치투합된 단체였다. 그 단체의 후신인 북로군정서도 자연히 그러한 정신적 토대를 계승하게 되는데, 당시 대종교 동도본사가 북로군정서의 본부로 쓰였다는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던 백포 서 일 종사는 수전병행의 삶으로 일관한 인물로, 단체 구성원들에게 끼친 정신적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그러므로 돈독한 대종교인이었던 철기 이범석 장군도 생전에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군들이 대종교 신앙으로 굳게 뭉쳐 있었기 때문에 분열이나 의기소침이 없었다. 그리고 10월 3일 개천절이 되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빠짐없이 하늘에 제천을 올려 한배님(하느님)께 조국광복과 민족번영을 기원했다."고.
이렇게 볼 때 기전사가는 이러한 수전병행 군교일치 정신으로 노래된 것이다. 그리고 북로군정서의 이러한 정신 위에서 구현된 역사가 청산리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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