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회고록 36] “딱 하나 사실대로 말 안했다” 검찰조사 그날, 박근혜의 고백
어떤 사람들은 미르재단 등이 최서원 원장을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는데, 솔직히 쓴웃음이 나올 정도다.
나는 일생 옷이든 집이든 모두 내 돈으로 지불했고, 최 원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실이 없다.
그런데 내가 왜 그녀를 위해 재단을 만든다는 말인가?
그녀와 나의 관계를 실제로 봐 온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나는 그녀와 오랜 기간 교류하면서 그녀가 문화와 체육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많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간혹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빛내면서 의견을 내곤 했는데,
그중에는 상당히 참신하다고 여길 만한 것들도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평소 생각인지 아니면 주변의 문화계 인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는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당시 나는 최 원장이 문화에 식견이 있다고 생각했고,
2015년 문화융성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구상할 때도 최 원장의 이야기들이 내게 일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내가 민간 차원에서 문화스포츠 재단을 추진한다는 이야기를 최 원장에게 했을 때 최 원장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아는 나로서는 그것이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이것을 이용해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선의로 나를 도우려는 줄만 알았다.
재단이 설립된 뒤에도 최 원장이 간혹 재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재단 홍보 담당자와 아는 사이라서 우연히 전해 들은 것처럼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이때 조금 더 그녀에 대한 정보가 있었더라면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가 된다.
재단 이사진 최순실에게 추천받아…한스러운 큰 실수
2018년 5월 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 속행공판에 출석한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씨.
중앙포토
이때 내가 그녀의 의견을 듣기만 하는 수준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로 한스러운 큰 실수를 한 것이 있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이사진을 구성할 때 최 원장으로부터 이사진을 추천받은 것은 사실이다.
미르재단은 기업에서 출연해 만들어 민간이 주도하는 재단이긴 해도 정부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지원하는 재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나 이념으로 논란이 있는 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문화계에 좌편향적인 인사들이 카르텔을 형성해 부당하게 이권을 행사하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는 보고를
여러 군데서 받고 있던 나는 이념이나 정치와 무관한 인사들로 이사진을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인사들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최 원장이 나와 이야기하던 도중에 이런 말을 했다.
그녀는
“재단 이사들을 모두 전경련에서 추천받아서 선임하면,
기업에서는 정치나 이념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자칫 한쪽으로 편향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 같다”면서
“제가 알고 있는 문화·체육계 인사들로부터 추천을 받아볼 테니 참고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실제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만큼 나는 “주변에서 좋은 분을 추천받으면 명단을 보내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정호성 비서관을 통해 최씨가 보내온 인사들의 명단을 받았다.
처음 최 원장에게 이사진 추천 명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들을 그대로 쓰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당연히 다른 경로를 통해 크로스 체크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결과 각 분야에서 상당히 명망도 있고 이력도 흠잡을 데 없는 괜찮은 인사들이라는 점이 확인됐다.
예를 들어 정동춘 K스포츠재단 이사장의 경우 언론에서는 ‘최서원의 마사지사’라고 희화화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서울대 체육교육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건국대 한국건강영양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등
전문성을 인정받은 인사였다.
만약에 정말 경력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자리까지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명단을 안종범 수석에게 넘기면서 전경련에도 일러주라고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재단이사 추천이나 재단 운영 자체를 전경련이 주도하도록 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가슴을 친다.
내가 왜 최 원장에게 추천 을 받았을 때 이런 문제를 그리 가볍게 지나쳤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다.
당시 큰 의미 없이 했던 이 행동이 나중에 내가 최씨와 공모했다는 검찰 측의 유력한 근거가 됐다.
나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였다.
검찰 조사 때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은 딱 하나는…
2017년 3월 21일 오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탄핵 뒤 첫 검찰 조사를 받았다.
중앙포토
사실 나는 추천 명단을 안 수석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을 검찰 조사 때는 부인했었다.
당시 검찰이 나의 진술은 하나도 믿어주지 않고 나를 뇌물죄의 주범처럼 단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명단 전달 사실을 인정하면,
앞뒤 맥락은 다 자르고 진술을 언론에 흘려 뇌물죄를 기정사실로 몰고 갈 거라고 판단했다.
나중에 법정에서 차분하게 전후 관계를 설명하면서 검찰에서 부인한 내용을 바로잡을 생각이었다.
내가 검찰 조사 때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은 건 이 대목이 유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 원장은 오랫동안 나를 도왔던 사람이기에 경계의 끈이 다소 느슨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녀가 내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나와의 관계를 이용해 이득을 취한 적이 있었다면 그렇게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검찰 조사를 통해 최 원장이 K스포츠재단의 사무총장 면접까지 보고 다녔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최 원장이 김종 문체부 2차관 같은 이들을 만나고 다니고 여러 사안에 개입해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중에 최 원장이 검찰 조사에서 ‘대통령이 재단 일을 좀 봐 달라고 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가 막혔다.
앞서 말했지만, 2016년 10월 중순 최 원장이 독일에 비덱스포츠라는 회사를 세워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그녀가 비덱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취지로 내게 말했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전율이 인다.
검찰 조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나는 ‘그토록 오래 봐왔던 최서원이라는 사람의 진짜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너무 사람을 믿었던 건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황당하고 참담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내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도왔다? 검찰 무리한 억측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3월 10일 오전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의 입주기업 부스를 기업 관계자들과 함께 둘러봤다.
중앙포토
검찰은 나를 뇌물죄로 기소하면서 내가 최 원장 일가와 특수관계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2014년 9월 15일 대구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에서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났을 때 얘기다.
그 자리에서 내가 삼성이 대한승마협회를 맡아 정유라를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필요했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을 도와주는
이른바 ‘묵시적 청탁’이 이뤄졌다는 것이 검찰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검찰이 나를 뇌물죄로 기소하기 위해 만든 무리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이날 만남은 창조경제혁신센터 때문이었다.
이 부회장은 센터 설립에 많은 애를 썼는데,
센터가 제 역할을 하려면 앞으로도 삼성 같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연계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그간의 고마움을 전하면서 향후 협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잠깐 만났던 자리였던 것이다.
이날 이 부회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나는 삼성이 승마협회를 맡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승마 선수들을 도와 달라는 이야기를 꺼낸 것은 사실이다.
정치를 하면서 때로는 비공식적인 경로로 들은 이야기도 대화에 반영할 때가 있는데 이때가 그런 경우였다.
최 원장은 나를 만나러 올 때면 승마를 하는 딸 정유라씨의 이야기를 간혹 하곤 했는데,
대한승마협회와 관련된 화제를 올릴 때도 있었다.
그 무렵 대한승마협회 내부가 분열돼 운영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최 원장은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지원이 잘 안된다며 염려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마침 나는 다른 루트를 통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삼성이 대한승마협회를 맡아 지원하면 이런 난맥상이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특히 삼성이 과거 대한승마협회를 지원했던 적이 있다고 하니 올림픽을 앞두고 맡아준다면
한국 승마계를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자는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이 최 원장의 부탁을 받고 최 원장 딸인 정유라씨를 지원하기 위해
우회적으로 삼성에 승마협회를 맡아 달라고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억지다.
나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정유라씨를 언급하면서 도와 달라고 한 적은 맹세코 없다.
나는 정유라씨가 승마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도 몰랐고, 단지 어릴 때 본 기억만 있었다.
최 원장이 내게 딸의 이름을 정유라로 개명했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이 나기 직전까지 나는 정유라씨의 이름을 예전 이름인 정유연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최 원장의 딸을 위해 삼성에 그런 부탁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부회장 역시 훗날 재판에서 내가 정유라씨를 도와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7년 3월 22일 14시간의 검찰 조사, 7시간20여 분의 조서 열람을 마치고 다음 날 오전 귀가했다.
중앙포토
그래서 최 원장이 나 몰래 독일에 비덱스포츠라는 승마 관련 회사를 설립한 뒤
삼성으로부터 77억97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을 검찰 조사에서 알게 됐을 때 느낀 배신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최 원장은 2016년 가을 독일에 갈 때도 그곳에 가 있는 딸(정유라)이 아파서 엄마로서 간호하고 돌봐주러 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검찰 조사에서 정유라씨가 삼성에서 말을 받고 승마대회를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프다는 딸이 어떻게 말을 탔다는 거지?
이야기가 어디서 잘못 전해진 것은 아닌가?
삼성이 78억원을 왜 지원한 것이지?’ 같은 의문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나 국정원에서도 최 원장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지 않아 언론에서 제기된 의혹이
잘못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또 검찰은 이 부회장이 정유라씨를 지원하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수백억원을 출연하는 대가로 얻은 것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성사라고 한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 부회장으로부터 그런 부탁을 받은 적도 없고 내가 관여한 것도 없다.
당시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이긴 했다.
그리고 언론 등에서도 국민연금 측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합병에 대해 국민연금공단에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다.
공단을 관할하는 것은 보건복지부인데, 문형표 당시 복지부 장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문 전 장관은 특검조사에서 합병과 관련해
“대통령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없다. 대통령이 시키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인정하냐”는 취지로 항변했다고 한다.
내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당시 삼성 임직원들이 수박을 들고
소액주주 집을 방문하며 합병 승인에 찬성해 달라고 호소했다는 기사 정도다.
그러나 결국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는데 나는 지금도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
특히 합병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과 관련해
2023년 6월 1심 판결에서 정부가 69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검찰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쪽으로 몰고 가서 결국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은 내가 기업 총수들과 만났을 당시 기업의 애로사항과 기업이 출연한 어떤 것을 결부시켜 대가성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재임기간 중 어느 시점에 어느 기업 관계자를 만나도 기업이라는 곳에는 늘 애로사항이 있기 마련이다.
또 기업이 사회공헌이나 자선을 베풀었을 때 내 국정기조 중 어느 하나와는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의 논리라면 역대 대통령 중 어느 누구도 대가성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유라 2등 하자 내가 감사 지시? 사실 아냐
최서원(오른쪽)씨와 딸 정유라씨.
중앙포토
정유라씨와 승마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2013년 4월 경북 상주에서 열린 승마대회에서 정씨가 2등을 해서 내가 승마협회에 대한 감사를 지시했고,
이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노태강 체육국장과 진재수 체육정책과장이 대기발령을 받고 교체됐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는 당시 정씨가 2등을 한 것은커녕 상주에서 승마대회가 열린 것도 몰랐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정씨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도와줄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일각에서는 내가 2013년 7월 국무회의에서 ‘체육계 비리’ 척결 지시를 내린 것을 이 대회와 연결 짓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당시 한 태권도 대회에서 선수 아버지가 판정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 때문에
내린 지시였다.
이를 계기로 체육계 비리에 대한 대책 마련을 지시했는데 이후 보고가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민정수석실에 관련 지시를 했다.
조응천 당시 공직기강비서관이 이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조 비서관은
‘노 국장과 진 과장이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서 방치돼 있다.
이들에 대한 교체가 바람직하다’고 보고서를 올렸다.
또 국무총리실 암행감찰관이 감사를 벌인 결과 노 국장은 유명 바둑기사의 사인이 새겨진 고가의 바둑판을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내게 ‘노태강 교체’ 이의 제기했다는 유진룡…실소했다
2017년 1월 23일 서울 강남구 특검사무실에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받기 위해 출석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포토
그래서 나는 8월 유진룡 문체부 장관이 대면 보고를 하러 왔을 때 그에 대해 인사 조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유 장관은 이후 검찰에서 8월 보고 당시 나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과장·국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장관이니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인사 지시를 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따를 것이기 때문에 장관인 저에게 맡겨 달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실소했다. 당시 내 지시를 받은 유 장관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나갔기 때문이다.
다만 진재수 과장이 2013년 7월 승마협회 내부 갈등과 비리를 조사한 뒤 청와대에
‘승마협회 내에 박원오 전무를 놓고 친박원오·반박원오 파벌이 있고 둘 다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노태강 국장을 통해 제출했는데
“청와대에 보고서가 제출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박원오의 항의전화를 받았다”고 재판에서 진술한 것에 대해선
나도 정확한 경위를 잘 모른다.
박원오 전무는 최서원 원장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민간인인 그에게 공문서 내용이 빠져나갔다면 분명히 큰 문제였다.
나 모르게 청와대 비서관들이 벌인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이런 개입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분명히 문책했을 것이다.
내가 이후에도 노태강 국장을 표적으로 삼아 집요하게 보복 인사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2016년 한·불 수교 130주년 행사가 있었는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 프랑스 박물관 측과 함께 프랑스 장식미술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프랑스 측은 자국의 명품 제품 몇 점을 전시에 포함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을 전시하는 건 곤란하다고 거절해 협상이 오가다가
결국 전시회가 무산되는 일이 있었다.
보고를 받고 나는 ‘전통이 발전해서 현대로 연결되는 것인데, 왜 그렇게 경직된 해석을 했을까’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고
외교 문제로도 비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담당자에게 책임을 물으라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실무 담당자가 노태강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장이었다.
일부러 그를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를 산하기관 임직원으로 보내도록 한 것이었고, 그는 스포츠안전재단 사무총장으로 가게 됐다.
나중에 김종덕 문체부 장관은 재판에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노 국장을 국민체육진흥공단 본부장으로 보내려고 보고했더니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말하기를
“누가 그렇게 좋은 자리로 보내라고 했느냐며 대통령이 언짢아하셨다”는 것이다.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
나중에 김상률 수석도 재판에서
“대통령께서 그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따라서 저도 김종덕 장관에게 그런 전달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지적했지만,
마치 내가 일부러 노태강 국장을 찍어서 감정적으로 보복 인사를 한 것처럼 부풀려져 세상에 알려졌다.
재판 과정에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을 다룬 재판 때였다.
증인으로 출석한 김종덕 장관은 2015년 1월 내가 “잘못된 영화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을 한다”며
문체부 차원에서 건전한 콘텐트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구조적 문제를 언급했을 뿐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
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재판 내내 속이 답답했다.
장관이나 수석들이 대통령과 면담 후에 내용을 적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대통령의 발언인지,
아니면 이야기를 들으며 떠오른 자기 생각을 적은 것인지 모호해질 때가 있다.
블랙리스트 논란도 그런 차원이라고 본다.
시간이 지나면 사실 관계가 밝혀지리라 생각한다.